◆ 재송동 산 1-1번지 선소주변의 이산표석은 어떻게 설치했는지 가늠해 보는 기회다. 남서향 해발 393.6m 이다.
재송동에서 만난 최초 표석.재송2동 약수터는 재송동 산69번지이다. 정상향한 돌계단을 따라 300m를 오르면 습지에도달한다.
그곳에서 왼쪽의 서북방향100m 쯤 걸어가면 사진의 암석을 만난다. 그기서 아랫쪽으로 50m를 걸어내려가면 된다.
좌수영에서의 선재용 소나무는 얼마나 필요했을까? 최대한 소나무 보호지를 확대하기 위해서 해발 400m까지를 경계지로.......
11.26일 아침부터 재송동 산1-1번지 일원 298,711㎡를 동서남북으로 조사했다. 해발400m이상에는 표석이 설치되지 않았었다.
이곳 필지 이력은 대정6년(1917년)3.10 사정에 의거 임야지번이 처음 탄생했으며 소유자도 국(國)으로 하였다.창덕궁으로 소유권이 이전된것은 대정13년(1924년)이며, 소화2년(1927년)에 이왕직장관 명의로 명칭변경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루어 짐작컨데 이땅의 토지 대부분은 1912년 일제의 토지조사령에 의해 지번이 확정 등기된다. 그러므로 당시 토지조사의 경계표시처럼 변산일대의 목제봉표 위치에 누군가가 이산표석의 항표를 설치하여 소유권을 주장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보여진다.
설치시기는 사정절차등을 고려해 볼 때 1912년 이전이며, 구체적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바라본 1910년 이전으로 짐작이 간다.
첫댓글
창덕궁으로의 임야 소유권이전이 이루어진 것은 1919년 3.1운동의 저항의 결실로 보아지며,
일본천황 사망으로 조선의 창덕궁 소유를 일본황실 내부조직인 이왕직장관으로 명칭 갱정한
재산보존의 절차도 눈에 띈다. 대한제국이 이산표석 세웠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멸망하는 대한제국이 임야보호 특히 한양근처도 아닌 변방 장산일대에 신경 쓸 겨를이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