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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 지금이 여성 상위시대라고? 여성혐오는 사회를 비추는 예술 속에서도 등장한다.
본론 1. 영화가 여성을 무시하는 방법
1) 서론 : 영화 속에서 여성은 소외되고 있다.
2) <캡틴 마블> 영화 평론
3) 영화 속 여성 인물의 소외, 성적대상화, 여성 소비자의 소외
4) 영화 속 여성 소외가 일어나게 된 이유
5) 결론 : 비판과 나아가야 할 방향
본론 2. 소설이 여성을 사용하는 방법
1) 서론 : 소설 속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혐오
2) 신경숙 <외딴 방> 소설 평론
3) 소설 속에서 여성혐오가 드러나는 소설
4) 소설 속 여성혐오가 일어나게 된 이유
5) 결론: 비판과 나아가야 할 방향
본론 3. 시가 여성을 괴롭히는 방법
1) 서론 : 시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적대상화와 여성 소외
2) <허난설헌> 시 평론
3) 시 속에서 성적대상화가 드러나는 시
4) 시 속에서 성적대상화가 일어나게 된 이유
5) 결론 : 비판과 나아가야 할 방향
결론 : 영화, 소설, 시에서 이루어지는 여성혐오와 개선방향
<예술이 대중을 세뇌하는 방법>
정치평론연습 김학노 교수님
정치외교학과 21711256 김혜지
- 지금이 여성 상위시대라고? 여성혐오는 사회를 비추는 예술 속에서도 등장한다. -
모든 인간은 어떠한 사회적 환경에서도 인간으로의 가치는 똑같고 평등한 존재라는 것은 민주주의사상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사회는 과연 평등한 민주주의를 이루었을까? 나는 우리가 아직 민주주의를 이루지 못했다 생각한다. 2016년 OECD에서 발표한 성별 임금 격차를 보면 한국은 남녀임금격차가 36.7%로 34개의 나라 가운데 압도적인 1등이었다. 이렇게 아릿한 수치는 2002년부터 시작하여 17년째 압도적인 1위를 지키고 있기에 이를 보며 우리 노동시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으며 이러한 사회 깊숙이 내재되어있는 여성의 불평등은 문학 속에서도 드러난다. 예술과 여성혐오를 연결하는 최근의 논의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예술에는 기준이 없으며 여성혐오라 각인하는 것은 예술의 범위를 제한하는 폭력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단순히 우리의 취미생활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진로선택, 감성, 정체성, 관계, 정신적 건강과 결혼상태에 영향을 준다는 연구결과가 있었기에 적어도 더 이상 예술에 어떠한 보이지 않는 여성혐오가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기에 영화, 소설, 시에서 여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연구해보았다.
Ⅰ. 영화가 여성을 무시하는 방법
- 영화, 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을 무시하다. -
민주주의에서 다양성이 늘 중요하다 주장하지만 실제 영화산업에도 여성을 배제하며 다양성이 결핍된 예술에 우리는 침묵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2003년 ‘실미도’가 처음으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 거의 매년 ‘천만 영화’가 탄생하고 있지만 그 중 여성 캐릭터를 주체로 내세워 여성중심의 서사를 진행하는 영화는 단 하나도 없었다. 남성소비자를 중심으로 영화가 만들어져 여성 소비자는 배제당하고 있으며 상업영화를 제작하고 투자하며 배급 할 수 있는 요직을 여전히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영화가 나올 리 만무하다. 이러한 영화계의 성차별은 여성임금차별, 성적대상화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 속 여성소외에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 분위기가 이렇게 다양성이 결여된 남성중심의 영화에서 여성을 주체적으로 내세운 영화는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2019년 3월에 개봉한 영화 중 마블스튜디오에서 나온 <캡틴마블>은 개봉하기 이전부터 많은 논란이 있었다. 주인공 배우 브리 라슨이 인터뷰에서 <캡틴 마블>은 위대한 페미니즘 영화라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 말대로 영화는 MCU 최초의 여성 솔로 히어로 무비였으며 한 여성이 온 우주와 맞서 싸우면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담겨있었다. ‘캐럴 댄버스’라는 주인공이 자아를 찾는 동안 그 누구의 명령도 아닌 자신의 의지와 신념에 따라 행동함으로 강인한 여성 영웅이 되었고, 주인공을 억압하던 스승에게 “내가 왜 너에게 나를 증명해야 하지?”라고 되묻는 장면은 남성들의 잣대에 맞추기를 강요당했던 것을 당당히 거부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페미니즘 영화로 낙인이 찍힌 이 영화는 젠더논쟁과 동시에 불매운동까지 일어났다. 심지어 북미에서는 아예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에 개봉하기로 했고 마블 극장 개봉작 중 처음으로 여성 감독이 참여하고 여성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시나리오를 작성했기에 일부 관객들의 심기를 건들이게 된 것이다. 이에 개봉 전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포털사이트 영화 코너에 이 영화의 평점은 1점으로 도배되었고 주인공의 외모 비하까지 일어났다. 생각해보면 정당한 이유없이 불매운동을 한 이 사건을 보고도 영화와 사회에 여성혐오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들은 80-90%가 남성이며 한국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실미도, 변호인, 명량, 베테랑, 태극기 휘날리며 등의 천만영화(천만관객을 돌파한 영화)에서 여성은 조력자나 목격자의 역할을 맡는다. 나아가 VIP와 같은 느와르 영화에서 여성의 캐릭터는 단순한 희생자로 범죄자의 잔혹함을 강조하는 역할만을 수행한다. 이전의 주체적인 여성 히어로를 드러낸 작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체적인 여성캐릭터를 내보이면서 사실은 영화를 소비하는 남성에게 맞춘 영화가 너무나도 많았다. 블랙 위도우는 엄청난 운동신경을 도태로 전투능력이 매우 뛰어난 주체적인 여성 히어로임에도 불구하고 딱 붙어 몸매를 부각시키는 의상과 함께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목 부분이 파인 의상을 입고 세상을 구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팅커벨 또한 몸을 가려주지도 않고, 보온성도 없으며 불편하기 짝이 없는 초미니 원피스를 입고 완벽한 몸매를 뽐내며 날아다닌다. 이는 나만이 느낀 불편함이 아니었다. 지난 5년 동안 영화에 등장한 55%의 여성이 누드이거나 제대로 된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영화를 시청하는 주 소비층이 남성에게만 집중되어 여성소비자가 배제된 것이다.
이러한 여성혐오적인 영화는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영화계에서는 여성을 내세우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고 원래 그렇게 존재해왔다. 성차별은 그렇게 일상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기존의 시스템에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주장이다. 선진국이라 자부하는 미국의 영화를 분석해보면 영화의 95%가 남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세상에는 영화 학교를 졸업하는 여성이 남성과 거의 동일한 수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저예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 아주 적은 비용의 단편영화라 하더라도 18%의 여성이 감독을 맡고 영화의 규모가 커질수록 여성의 비율은 점차 떨어져 1백만~5백만 달러 예산의 독립 영화는 12%, 스튜디오에서 만드는 영화의 경우 오직 5%의 여성만이 감독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여성감독이 나오지 않는 것은 이들의 능력 차이일까? 분명 좋은 성적을 받고 졸업한 여학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소수의 여성들만이 감독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능력의 문제보다는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산업에 투자하고 이를 배급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서 여성이 배제되어있기에 영화를 제작하려는 그 순간부터 영화가 상영되는 순간까지 여성이 무시당하는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지에서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여성을 다루는 영화는 그렇지 않은 영화에 비해 1달러 당 23센트의 수익을 더 낸다고 한다. 지난 5년 동안 만들어진 1,700개 영화의 평균 투자 대비 수익률을 살펴본 결과 감독, 프로듀서, 작가, 주연배우 각각의 모든 카테고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 투자 대비 수익률이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마운트와 폭스사는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제작할 영화 47개 중 단 하나도 여자가 감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영화 제작 계획을 발표했다. 이러한 영화계에서 많은 여성배우들이 성차별적인 대우에 저항하고 있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는 엄청난 흥행을 불러일으켰고 영화에서 앞서 성적대상화가 된 블랙위도우 역의 스칼렛 요한슨은 2012년 Extra TV 인터뷰에서 “(꽉 끼는 영화 의상 속에도) 속옷을 입을 수 있나요?” 라는 질문에 “대체 언제부터 사람들이 인터뷰에서 속옷 이야기를 했냐”며 화를 내기도 했다. 뿌리 깊었던 영화계 성차별에 여성 배우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2014년 1월 미국 배우 조합 시상식에서 몸을 훑는 카메라 워킹에 케이트 블란쳇은 “남자한테도 그래요?”라며 화를 냈고 아케데미 시상식에서 패트리샤 아퀘트는 “바로 지금이 남녀 동일 임금을 받아야 할 때입니다.”라며 수상소감을 말하기도 했다. 여성 배우들의 목소리는 가시적인 변화로 나타나고 있다. 작년 프랑스에서 열린 칸 영화제에서 여성 영화인 82명이 레드카펫을 함께 행진하며 “여성으로서 우리 모두는 특수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오늘 우리는 결단력과 진보를 위한 헌신적인 상징으로 여기에 함께 서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산업의 여성들과 연대해 이 곳에 서있습니다.”라며 한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움직임 덕분에 여성배우에게 하이힐만 허용할 정도로 보수적인 칸 영화제도 올해엔 심사위원 9명 중 5명을 여성으로 선임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관객이자 대중인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영화는 감독의 개성과 의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소비자들은 영화를 선택적으로 소비함으로 자신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의식적으로 영화를 소비해야 한다. 성차별적인 영화에 대한 의식 있는 비판과 더불어 선택적 소비가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시장경제에 따라 영화 배급사부터 시작하여 여성 영화인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이며 그동안 무시당했던 여성 소비자를 위한, 영화가 등장하지 않을까.
Ⅱ. 소설이 여성을 사용하는 방법
-소설, 주체적인 여성을 없애고 여성을 객체화 하다. -
앞서 언급한 남녀임금차별을 토대로 사회를 바라보면 우리의 노동시장이 얼마나 암담한지를 알 수 있으며 우리가 여성의 노동에 왜 주목해야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에서는 여성의 노동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또한, 성적대상화(성적 객체화 sexual objectification)는 타인을 성적 객체로 여기는 행위 혹은 그렇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행위다.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는 개개인의 인격이 배제되고 '여성이라는 속성', 혹은 '여성의 신체적 특성'의 타자화 혹은 사물화(objectify)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와 맞닿아있다. 소설 속에서 여성을 어떻게 다루는지와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성적대상화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60-70년대 산업화 시기 여공들은 단순히 경제성장을 이룬 산업화의 역군으로 미화됨으로 망각되어 왔다. 실제 한국의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 과정에서 시골의 농가출신 젊은 여성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해 전체 노동시장에서 대규모 노동력을 공급했지만, 여성노동자에 대한 연구는 희박하며 대중의 집단무의식을 드러내는 영화, 드라마에서도 여공의 존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러한 문학 분위기에서 신경숙 작가는 <외딴 방>을 통해 여공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까지 가족의 생계를 돌보던 ‘누이’로 여겨지는 것을 넘어서 열악하고 부조리한 노동조건과 성차별에 맞서 노동자인 자신들의 인권을 쟁취하려 행동하는 주체로 살려냈다. 외딴 방이라는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외면했던 여공의 삶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이 책에서 희재언니는 그저 임신과 낙태로 이어지는 불운한 개인사가 아닌 70년대 말 여성들이 주도한 민주노조와 권위적 국가, 가부장적인 사측으로 와해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러한 열악한 여성노동은 아직까지 역사가 이어져오고 있다. 2017년 연초부터 발생한 보건복지부 공무원의 과로사 소식은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었다. 세 아이를 낳으며 일터 복귀에 성공한 기혼여성의 허망한 죽음은 일과 가정 모두를 잘 해야 한다는 슈퍼우먼 워킹맘을 강요해온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최근 발생한 여성 관련 이슈의 상당수는 이처럼 여성노동과 관련되어있다. 노동 분야의 문제들도 여성에게 더 심각한 경우가 많다. 이는 저임금과 비정규직도 여성의 일자리에 집중되어있기 때문이다. 사회에 잔재하는 가부장적인 문화는 여성 노동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권력관계를 근간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노동현장의 하층부에 놓인 여성 노동권과 인권은 아직도 열악하다.
이렇게 여성들의 소외된 삶을 진솔하면서도 주체적으로 써낸 외딴방과 달리 소설 속에서는 자연스레 여성혐오적인 표현이 많이 사용되었다. 문학을 소비하는 주체를 ‘이성애자 남성 지식인’으로 설정하여 문학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있는 우리 문학의 치명적인 오류이다. 이러한 주류만을 위한 문학의 예로 최근 엄청난 이슈가 되었던 ‘언더 더 씨’ 소설을 살펴보자. ‘언더 더 씨’는 고등학교 2학년 세월호 여성 희생자인 ‘나’가 바다 밑을 유랑하는 여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내 젖가슴처럼 단단하고 탱탱한 과육에 앞니를 박아 넣으면 입속으로 흘러들던 새큼하고 달콤한 즙액’ 이라는 자두를 묘사하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러한 구절 외에도 곳곳에서 종아리, 가슴 등 여성의 신체에 대한 불필요한 묘사가 잦다. 이는 명백하게 그저 남성의 시각으로 여성의 신체를 사물화한 것이다. 학생이 자신의 가슴을 젖가슴이라 표현하지도 않을뿐더러 여성이 과일의 싱싱함을 자신의 신체에 빗대어 표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일어났던 참사를, 실제로 희생당했던 학생을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여러 독자들은 소설미디어를 통해 고인을 능욕했다는 비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그는 “내게 졸지에 ‘개저씨 작가’란 딱지를 붙이며 젖가슴이란 단어 자체에 왜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페미니스트 카페는 집단의 폭력으로 한 작가의 입을 막으려 든다며 표현의 자유를 옥죄며 우리 사회의 일각의 반지성주의가 끔찍하다고 그 소설가는 이야기하기도 했다. 강경하던 그는 이후 비판이 계속되자 젠더 감수성 부족의 소치이며 성 평등 의식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성찰하겠다고 사과문을 올리기도 했다. 지식인을 표방하는 작가가 자신의 글의 무게를 생각해야 한다.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옛 기억을 살려 노동조합과 관련한 일을 노동자인 여성을 주체화하여 전개한 <외딴 방>. 물체에 여성의 신체를 빗대어 묘사하며 여성을 사물화한 <언더 더 씨>. 이 두 소설은 여성인물이라는 존재를 정반대로 대한다. 이 두 소설의 차이를 그저 여성작가와 남성작가의 차이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사회적인 인식의 문제와 함께 보아야 한다. 애초에 근대부터 남성 중심의 문단은 여성을 ‘여류’작가, ‘여류’시인과 같이 예외적인 존재로 주변화 했다. 또한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이광수의 <무정>을 비롯해 오늘날의 <언더 더 씨>는 여성혐오를 여성에 대한 증오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을 ‘어떤 존재로 좋아하는 가’에 잠재된 폭력의 문제가 있다. 이런 여성에 대한 인식 때문에 이후에도 소설에서는 여성을 대개 ‘성녀’ 혹은 ‘창녀’로 다룬다. 이렇게 여성을 양분하는 이유는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보다 객체로서 대상화하는 것이 당연하게 이어왔던 전통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언더 더 씨>같은 여성혐오적인 소설을 검열해서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무조건적으로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젠더감수성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고양하고 여성의 노동에 관한 이야기나 여성혐오에 대항하는 주체적인 여성이 등장하는 소설이 등장하여 문학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하며 더욱 더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내용의 소설이 등장해야한다. 다양한 문학을 접하며 독자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예술을 비평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사람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은 문학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1996년에 출간된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이갈리아의 딸들을 다시 주목하는 것을 시작으로 82년생 김지영, 여자는 왜 완벽하려고 애쓸까 등의 책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여성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요즘에는 수많은 페미니즘 책이 등장하게 되었고 문학은 다양화되고 있다. 페미니즘 문학을 접하며 의식의 변화 덕분에 이전에는 그저 지나쳤을 수도 있었던 <언더 더 씨>와 같은 소설에서 성적대상화를 찾아 낼 수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문제의식이 계속될 때, 예술이 대중을 세뇌하는 것이 아닌 개개인의 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예술을 재단하게 될 것이다.
Ⅲ. 시가 여성을 괴롭히는 방법
- 여성의 소외를 알리기도 한 시, 여성을 자연에 빗대어 표현하다. -
여성혐오는 소설을 넘어 시에서도 사회적 불평등과 여성소외, 자연물에 여성의 신체를 빗댄 성적대상화로 등장한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을 간행할 정도로 글을 쓰는 것에 있어 천재적인 재주를 가진 허난설헌은 불행했던 한 여류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한을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파악했다. 또한 그 부당함을 노래함으로 모순된 현실에 글로 맞선 저항시인이다. 예술을 통해 대중이 여성을 어떻게 소외하였는지를 찾아 볼 것이며 반대로 예술이 대중에게 여성을 어떻게 인식시키는지와 시가 여성을 사용하는 방법을 성적 대상화를 통해 알아볼 것이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 시인이라 불리는 허난설헌은 세 가지의 한을 토로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천지(小天地·조선)에서 여성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 이다. 허난설헌은 이 불행이 남성에 종속되어 살아야 하는 데서 나왔다는 사회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렇기에 기방에 빠진 남편을 시로 질타하기도 하고 이를 넘어 ‘한정’(恨情)에서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 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노래한 것에서 남성에 종속됨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넘어 지배층의 부유함과 피지배층의 빈곤함을 비판하며 다수의 피지배층을 억압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를 노래하기도 하였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 높은 다락에선 풍악 소리 울렸지만/ 가난한 이웃들은 헐벗고 굶주려 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 이는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을 인간이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못하고 그 산물이 독립된 외부적 힘을 이루어서 그 힘에 인간이 지배당할 때 소외가 된다고 주장했던 마르크스의 소외론과도 닮아있다. ‘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라는 허난설헌의 시구는 노동의 대가에 대한 인식의 소산이다. ‘이웃의 남들이야 어찌 이를 알리요’라는 구절은 가난 때문에 사회에서 소외되는 여성의 아픔을 절절히 노래함으로 그 자신이 가난한 여인에게 깊게 동감하지 않았으면 나올 수 없는 시구이다. 이렇게 허난설헌은 한 여성의 시각을 넘어 사회 전체의 모순에 칼을 들이대는 저항시인이 되었다. 색주가의 남성을 조롱하고, 대륙을 달리는 기상을 지닌 그를 17세기의 유명한 진보적인 실학자 박지원은 “일반적으로 규중 여인이 시를 읊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일이 아니다”라고 평했다.
이렇게 여성소외와 사회적 불평등에 저항한 허난설헌의 시와 달리 이외수 시인의 경우 트위터에 올린<단풍>이라는 시는 성적대상화와 여성혐오적 발언으로 많은 논란이 되었다.
얼마나 참담한가. 이 시는 단풍의 아름다움을 비유하며 여성에 대한 멸칭을 사용하였기에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외수는 비판하는 사람들의 계정을 차단하는 것으로 응수를 두었다. 앞서 소설에서 여성을 하나의 주체적 인물로 보지 않고 객체로 사물화한 것과 비슷하게 시 또한 여성 개개인의 인격을 무시한 채 성적대상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허난설헌은 여성의 소외와 불평등 그리고 근본적인 사회문제에 대해 고민한 저항시인이다. 반면에 이외수는 자연물에 여성을 빗댄 것에 그치지 않고 ‘화냥기’라는 혐오표현을 사용하였다. 물론, 이외수 시인의 모든 시가 비난을 받아야하며 그는 앞으로 시를 못 쓰게 막아야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중문화는 대중들의 의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대중에게 의식을 불어넣기에 한국문학의 여성대상화가 몇몇 작가의 일탈로 치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제도와 미학의 관점에서 접근해보아야 한다. 여성주의 관점이 표현의 자유나 상상력을 억압할 수 있다는 지적은 오히려 억측이며 글로써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닌지 예술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예술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의 경우에는 글을 읽을 때 이 글을 통해 누군가의 삶이 혐오당하지 않을지, 이 글을 통해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살펴볼 의무가 있으며 비판적인 읽기를 할 필요성이 있다. 실제로 문단 성폭력 사태로 여성주의 관점으로 문학을 보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때 작가 스스로 ‘검열’하거나 편집자가 수정을 요청하기도 하며 ‘윤리적 글쓰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서효인 시인은 최근 펴낸 ‘여수’라는 시집 뒷면에 실은 시인의 말을 통하여 “수년간 발표한 시를 모으니 그때는 몰랐던 그때는 몰랐던 여성혐오가 지금은 보여 빼거나 고친 시가 몇 있다. 온갖 곳에 염결성과 예민함을 드러내면서 하필 방종했던 부분이다.”라며 스스로 폭력적 장면이나 처연한 분위기를 살리는 장면에서 여성을 폭력의 제물로, 배경적 소재로 써 왔던 게 한국문학 특유의 버릇이었다며 반성했다.
허난설헌에 대해 고등학교에서는 불운의 시인으로 가르친다. 그럴만하다 그녀는 김성립과 결혼하였으나 그는 기생집에 다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는 그녀를 구박하였으며 그녀의 아버지가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이 뿐만 아니라 임신 중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고 어머니 또한 객사하며 오빠와 동생마저 귀양을 간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로 달래었다고만 가르친다. 하지만 우리는 그녀의 글이 지금의 사회에 어떤 시사점을 주는지를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전반의 문제점을 시를 통해 꼬집은 그녀를 파악해 현재 사회에서 여성의 소외를 없앨 방안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초등학교, 중학교와 같은 의무교육에서는 시에서 등장하는 자연물에 여성의 신체를 비유하는 것은 성적대상화라는 것을 가르쳐 교육을 통해 비판의식을 키워야 한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시스템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 차별받고 문제의식을 가진 혐오의 대상자들이 움직이고 그들이 사람들에게 문제를 알릴 때 혁명은 일어난다. 앞서 보았듯 영화와 소설, 시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소외당하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고, 개개인의 인격이 말살당하는 성적대상화가 존재했다.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택적으로 소비하며 교육을 통해 바뀌려고 노력할 때 예술이 대중을 세뇌하는 것에서 대중이 예술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또한,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는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보며 대중이 평등한 예술을 만들고 평등한 예술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점차 평등으로 나아갈 것이다.
<참고문헌>
『천만 관객의 영화 천만 표의 정치』 (정병기. 2016)
TED강연 나오미 맥두걸 존스 '할리우드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강연 (2018)
『허난설헌의 난설헌집-여성세계의 불평 불만을 시로 표현해』(백도기.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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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문학, 영화, 시 속에서 여성은 "이성애자 남성 지식인"의 시각으로 '성녀' 혹은 '창녀'로 표현된다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외딴 방은 저도 정말 좋아했던 소설입니다. 저는 '희재언니'를 중심으로 하여 읽었습니다. 이 글을보니 여성 노동자를 주체로한 노동조합을 조금 놓치고 읽었던 것 같네요요ㅠㅠㅠ
해결방안으로 '문제의식'과 '선택적소비' 깊게 동의합니당.^ㅡ^
다양한 예술작품을 접해왔지만 여성의 관점으로 본 적은 크게 없는 것 같네요. 다음에는 저도 더 여성의 입장에서 어떤 상황을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익숙한 소재로 심오한 글 굿!
거침없이 얘기해주시는 대목들 정말 좋습니다. 혜지님이 가지고 있는 여성에 대한 생각 덕분에 저의 사고에 많은 변화를 줄 것 같습니다.
혜지씨, 대단히^^ 훌륭한 글이에요. 시나 소설, 영화 등의 예술 방면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초점도 좋고,...
참고문헌을 밝혀서 다행인데, 군데군데 각주 등으로 출처를 밝히는 작업이 필요할 듯해요. 보통은 (우리 수업의 평론 작성에서는) 각주 달 필요가 없는데, 이 글에는 조금 전문적인 얘기들이 나와서요~~
네!! 첨부파일에 각주를 달아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