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와 간도(間島)
연변조선족자치주 / 백두산정계비 위치 / 동간도와 서간도 / 백두산정계비 내용
조선(朝鮮)은 세종 19년인 1437년, 백두산과 주변 지역에 6진(六鎭)을 개척하며 국경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우리나라(朝鮮)와 중국(淸)의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712년 조선과 청은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두산에서 회담을 가졌다고 한다.
그해 5월, ‘서쪽 국경은 압록강으로 삼고, 동쪽 국경은 토문강으로 삼는다(西爲鴨綠東爲土門)’는 내용의 국경비석(國境碑石)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이고 숙종 38년이었다. 이 비석은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내려와서 두 물(水)이 ‘사람 인(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분수령 위 벌판에 청나라의 오라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 등과 조선 관원들이 현지답사 후 세웠다고 한다.
그 비(碑)에는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를 머리에 크게 쓰고, 그 아래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변경을 답사해 이곳에 와서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鴨綠)이 되고 동쪽은 토문(土門)이 되므로 분수령 위에 돌에 새겨 기록한다.
강희 51년 5월 15일(烏喇摠管穆克登 奉旨査邊 至此審視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勒石爲記 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라는 사실을 기록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청과 조선의 국경은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고 동쪽은 토문강(土門江)이다.’라는 말이다.
<康熙: 淸나라 康熙帝의 年號, 康熙51년-1712년>
그런데 훗날 문제가 된 것은 정계비에 있는 토문강(土門江)을 둘러싸고 해석이 엇갈린 것이다.
청과 조선에서는 압록강에는 이의가 없었지만, 청에서 토문강(土門江)이 두만강(豆滿江)이라고 주장하며 나섰는데 지도를 자세히 보면 두만강(豆滿江)과 별도로 토문강(土門江)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조선의 주장은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정계비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며, 정계비 근처의 두 물줄기 중 한줄기가 토문강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토문(土門)이라는 이름은 만주 용어로 지금의 쑹화강(松花江)의 지류를 가리키는 강 이름이었다.
부연(敷衍)하면, 압록강은 백두산 아래에서 샘으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고 두만강(豆滿江)은 백두산에서 한참 떨어져 샘이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 동해안으로 빠지는 강인 것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직접 폭포를 이루어 떨어지는 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천지폭포(天池瀑布) 혹은 비룡폭포(飛龍瀑布)라고 불렀는데 중국에서는 장백폭포(長白瀑布)라고 부른다.
이 폭포의 물줄기는 북쪽으로 흘러 쑹화강(松花江)이 되는데 그 한 지류(支流)가 토문강(土門江)이며 그 남동쪽이 동간도(東間島)가 되니, 토문강(土門江)을 국경으로 보면 동간도는 분명히 조선영토가 되는 것이 맞다.
동간도(東間島)는 섬 도(島)로 표기되지만 섬은 아니고 현재 중국 동북지역 지린성(吉林省) 연변조선족자치주(沿邊朝鮮族自治州)를 지칭하는데 중국 최대의 조선족 거주 지역으로 조선말부터 함경도 주민들이 건너가 땅을 개간하며 거주한 곳이다. 압록강 건너편은 서간도(西間島)라 부른다.
더 기막힌 사실은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우리나라를 강점한 일제(日帝)는 당연히 간도는 조선영토라고 주장하다가 1909년 남만(南滿)철도의 안봉선(安奉線) 개축 문제로 청나라와 흥정해 남만주(南滿洲)의 철도부설권을 얻는 대가(代價)로 동간도(東間島) 지방을 청나라 영토로 인정하였다고 하는데 일제(日帝)의 간계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안봉선(安奉線)>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설치된 단둥(丹東)과 봉천(奉天:瀋陽)을 잇는 철도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에 없어지고 말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