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한국이 미국을 바라보는 어떤 초상화
어디를 가도 ‘미나리’가 천국이다. 봄이 제철인 나물 ‘미나리’는 물론, 한국에서는 지난 3월에 개봉한 영화 「미나리」도 많은 관객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작년부터 계속 이어지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인민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미나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발견하는 서사와 배우 한예리와 윤여정의 호연 등을 통해 점차 많은 사람에 영화 매력이 퍼지는 상황이다. 또한 수상 여부로만 영화의 가치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미나리」는 영화가 처음 공개되었던 미국의 독립영화제 ‘선댄스영화제’를 비롯해 무수한 영화제나 시상식을 거침없이 휩쓸며 평론가들의 찬사도 받고 있다. 이미 영국을 대표하는 영화 시상식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배우 윤여정이 상을 받았고, 곧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미나리」는 최소 1개 부문 이상에서 상을 탈 것으로 예상된다. (배우 윤여정은 4월 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나리」'의 순자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 편집자 주)
대체 무엇이 「미나리」를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도록 만든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대로 「미나리」가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끝내 희망을 발견하려 노력하는 ‘가족 드라마’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시에 점차 미국 영화에서 비중이 늘고 있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민 서사를 다루는 작품인 점도 서구 사회에서 주목받은 이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나리」가 일반적인 관객은 물론 비평가도 사로잡은 가장 큰 이유는 「미나리」가 일반적인 ‘이민 서사’를 넘어,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1980년대 당시는 물론 영화가 공개된 2020년대에도 통용되는 ‘미국’에 대한 동경과 불안감이 겹쳐 있는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미나리」에서 드러나는 이민의 과정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소위 ‘코리안 뉴웨이브’라 칭해지며 주목받았던 배창호 연출의 「깊고 푸른 밤」을 비롯해, 마틴 스코세이지의 유명한 작품인 「갱스 오브 뉴욕」을 비롯하여 한동안 미국 헐리우드 상업 영화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아일랜드계 미국인를 주인공으로 삼은 갱스터 무비 등도 어떤 의미에선 이민의 고단함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예나 제나 자신이 본래 태어나서 살던 고향을 떠나, 다른 지방도 아니고 생판 다른 나라에서 살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부류의 작품은 이전부터 한가득 존재했다.
「미나리」가 다양한 결과 지층으로 ‘이민’과 ‘정착’의 과정, 그 속에서 이주민이 정착지로 택한 곳에 대해 지니는 복합적인 감정과 다시 거꾸로 정착지가 이주민을 대하는 환경과 자세를 복합적으로 비추며 섬세하게 이 모습들을 그리고 있다. 이미 관객들은 영화가 처음 시작할 때부터 주인공 가족들에게는 어딘가 심상치 않은 지점이 있음을 알게 된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모니카’(한예리)와 ‘제이콥’(스티븐 연) 가족은 새롭게 살게 될 집에 도착하자마자 균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제이콥은 모니카와 깊은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이사할 장소를 정한 곳은 물론, 새집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드넓은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곳이지만, 집은 컨테이너 가건물로 지어진 곳이며 설상가상으로 집에는 계단도 없다. 누가 봐도 제대로 된 집은 아니고, 잠시 머물다 떠날 목적으로 만든 용도의 집이지만 제이콥은 이곳이 자신들의 새로운 정착지가 될 것이라 호언장담을 하기에 바쁘다. 모니카는 이런 제이콥의 모습이 무척이나 마땅치 않다.
작중 정황상 이들은 미국에서는 꽤 오랜 시간 살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코리아타운’으로 유명한 LA에서 살았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은 왜 갑작스럽게 지금도 한국계는 물론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쉽게 보기 어려운 아칸소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이사한 것일까. 영화는 그 이유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지만, 가끔 드러나는 제이콥의 대사를 통해 어느 정도는 추측할 수 있도록 만든다. 제이콥은 자신이 ‘한국 사람’인 것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지만, 정작 그는 미국에서 만난 ‘한국계’에 강한 불신과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족이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기는 원해도,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에게는 뭔가 큰 배신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제이콥이 바라는 ‘아메리칸 드림’은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이 없으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꿈이다. 동시에 제이콥은 같은 한국계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불안한 감정을 지니고 있다. 작중에서 그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한국계 이민자들이 종사했던 직종인 ‘병아리 감별사’의 베테랑이지만, 그는 그 일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임금이 박봉인 것은 물론, 내심 그는 이 일이 자신의 권위나 가치를 하락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오히려 그는 자라면 암탉이 되어 달걀을 낳을 수 있는 암컷 병아리만을 살리고, 수컷 병아리들은 가차 없이 소각로로 보내는 모습에서 좀처럼 행사하지 못했던 ‘가부장의 권위’를 고민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제이콥은 하루빨리 병아리 감별사 일에서 벗어나, 아칸소의 푸른 잔디에서 고추나 배추 같은 한국 농작물을 심어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잔뜩 팔아 성공하고 싶어 한다.
제이콥이 한국계이지만 가족을 제외한 다른 한국계는 멀리하고 싶어 하지만 다시 그들을 상대로 한몫을 단단히 챙기고 싶어 하는 모습, 가족을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가부장적 권위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는 자세, 그리고 1980년대에도 절대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선망했던 ‘농장주’에 대한 꿈은 미국을 대하는 한국인의 어떤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제이콥의 독선적인 행보가 못마땅한 모니카 역시 마찬가지이다. 매사에 즉흥적이고 결코 쉽게 이룰 수 없는 꿈에 집착하는 제이콥과 달리 모니카는 겉으로 보기에는 이성적이고 차분해 보인다. 그러나 그 역시 미국의 생활이 불안한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칸소에 와서 남편 제이콥과 병아리 감별사 일을 시작하며 우연하게 만난 한국계 이민자에게 ‘한인 교회’를 묻는 것은 물론 부부의 아들 ‘데이빗’(앨런 김)에게는 딸 ‘앤’(노엘 조) 이상으로 끔찍하게 아낀다. 모니카는 그저 겉으로만 불안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교회’라는 일종의 플랫폼을 통하여 같은 ‘인종적 동질감’을 지닌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어하고 다시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결핍을 대리 만족하고 싶어 한다.
그 과정에서 정작 이민자 2세대인 ‘데이빗’은 부모님과 점차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선천적인 심장병을 지니고 태어난 데이빗은 지병으로 인해 더더욱 부모님들의 관심이 있지만, ‘한국인 남성’의 정체성을 강요하는 제이콥은 물론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지만,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계속 ‘자신에게 좋다는 이유’로 여러 가지를 강권 받는 모니카도 모두 제이콥에게는 낯설고 어색하다. 부모님은 모두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 문화에 익숙한 데이빗은 정작 부모님들이 어려워하거나 표면적으로만 대하는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낸다. 아칸소에 한인 교회가 없어 모니카가 꿩 대신 닭으로 찾아간 현지 교회에서 모니카가 다른 백인 여성과 좀처럼 소통하지 못하는 가운데, 데이빗은 스스럼없이 백인 아이와 친하게 지내고 심지어는 곧바로 서로의 집에 놀러 갈 약속까지 잡는 모습은 데이빗의 정체성이 이미 부모님과 다른 방향으로 분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렇게 같은 가정 내에서도 균열이 반복되는 가운데 새롭게 이사한 모니카를 응원하기 위해 한국에서 방문한 모니카의 엄마이자, 제이콥에게는 장모님인 ‘순자’(윤여정)의 등장이 큰 파문을 만든다. 순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한국인 할머니’의 모습이다. 대충 간단한 영어 단어 몇 가지는 쓸 수 있지만, 순자는 언어는 물론 행동도 ‘과거 한국의 정서’에 단단히 묶여 있다. 모니카에게는 오래간만에 보내는 가족의 존재가 너무나도 반갑고 순자가 한국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한국 음식의 존재에 감격해 눈물을 흘리지만, 데이빗은 순자가 자신의 할머니라는 사실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화나 각종 매체에서 봐왔던 ‘미국인 할머니’의 모습과는 생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다지 친절하지도 않고, 쿠키나 케이크를 잘 굽지도 못하며, 오히려 자신의 치부를 장난스레 놀리는 모습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미나리」의 가족 구성원들은 표면적으로는 ‘가족’으로 묶여있지만, 구성원 각자의 입장에 따라 서로를 점차 멀리하고 있다. 영화의 중반부부터 모습을 등장하는 순자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고 제이콥이나 모니카가 주변의 다른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 역시 아니다. 모니카는 앞서 언급했듯 ‘한국계 미국인’이 아닌 다른 미국인들을 무척이나 불편해하고, 제이콥은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환멸을 지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다른 미국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역시 아니다. 넓고 푸르지만, 주변에 다른 이웃 하나 발견하기 어려운 새로운 고향 아칸소의 풍경처럼, 이들은 서로 다른 성공의 꿈을 꾸지만 이미 이들은 해체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그저 이미 ‘가족’으로 묶여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다시 가족을 벗어나는 순간 더욱 괴로운 상황을 원하지 않기에 이들은 남아있는 것이다.
「미나리」는 이러한 관계의 충돌을 연속적으로 그리며 한국에서 미국을 바라봤던 시선을 점차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작품은 그저 ‘아메리칸 드림’이 허상이라는 점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머물러 있지 않다. 대신 그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백일몽이 어떠한 맥락에서 태어나는지, 같은 백일몽이라도 왜 그 허상을 쉽게 놓고 싶지 않아하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작중의 제이콥은 물론, 역사 속에서 이민을 택한 한국인들 역시 쉽게 미국을 단일한 존재로 말했지만 「미나리」 속의 주인공들은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다른 등장인물이나 존재들은 미국이 절대 단일하지 않으며,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더 계층적이며 분절되어 있음을 말한다. 그 계층의 공간에서 자신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하층 계급에 놓인 한국인 이민자들은 언젠가는 자신이 계급을 상승할 수 있다는 꿈을 꾸지만, 그 꿈은 다시 역설적으로 자신이 어떤 위치와 환경에 놓여 있는지를 의도적으로 망각할 수 있기에 꿀 수 있는 꿈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미나리」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나 이민 이후의 고군분투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동시에 무조건적인 절망으로 일관하지도 않는다. 어찌 되었든 새로운 터전에서 정착하게 되었다면, 다시 어떻게 삶의 맥락을 만들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마치 제이콥도, 모니카도 저마다 자기가 바라는 성공만을 말할 뿐 쉽게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는 상황에서 데이빗만이 같은 마을, 하층 계급의 백인 아이와 친구를 맺는 모습에서 드러나듯 성공이라는 허울의 목표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주변을 다시 돌아보기를 말하는 것이다. 마치 습해서 푹푹 발이 꺼지는 뻘밭이지만, 그러한 공간에서 무럭무럭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말이다.
성상민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상근활동가, 문화평론가
<편집자 주> 이 글은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소중한 기고 글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