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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의 조상은 셈의 4대 손인 욕단이다 창10:25-30, 11:9
우리는 이 땅에서 태어나면서 한국인이었고 한국말을 쓰고 공통된 문화생활을 하기 때문에 한민족이라는 말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다. 그렇지만 요즘 세계는 마치 하나의 지구촌같은 시대에 단일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북한같은 폐쇄국가가 아니라면 단일민족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얼마 전 카타르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우승을 하면서 막을 내렸는데 프랑스 축구선수들을 보면 흑인이 5명이었으니 이런 선수들이 프랑스가 카타르월드컵에서 우승하는 원동력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요소를 둘 이상 뒤섞는다는 하이브리드는 축구에만 적용되는 덕목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자동차는 하이브리드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다. 내연 기관(석유)과 전기모터(배터리)를 적절하게 혼용한 결과 연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우리나라는 오천년동안 단일민족이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 하였다. 물론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우리나라도 백만이 넘는 다른 인종들이 어울려 살고 있다. 특히 농촌총각들은 대부분 국제결혼을 하면서 다문화가정이 30만을 넘어서고 그 구성원은 100만명에 이르렀다. 우리만 다민족 국가가 아니고 미국은 대표적인 다민족 국가이기에 미국은 세계를 이끌어 가는 선도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조상을 더듬어 올라가다보면 아 우리조상은 단군이라고 한다. 노아의 홍수이후 인류는 노아의 세 아들 야벳과 함과 셈의 자손들임에는 분명한데 우리 민족의 조상은 누구일까?
사도행전에서 보면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셨다고 하였으며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라고 하여 모든 족속은 한 혈통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일관된 지식이다. 그렇다면 사학적인 지식으로 볼 때, 과연 한국인의 기원은 성경을 통해 어디서 출발하였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인본주의적 사학자들은 인류가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다는 병행발생설을 주장하지만 여러 고고학적 증거를 놓고 볼 때 인류는 성경말씀처럼 그 도시의 이름을 바벨이라 하였으니 이는 주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라.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11:9)라는 말씀을 통해 노아의 세 아들들에서 시작하여 흩어졌다는 성경이야기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말씀이다.
창세기 10장에 노아의 세째 아들 셈의 후예가 소개되어 있다. 셈의 4대손 에벨이 낳은 장자 벨렉은 유대인의 조상이며, 차자 욕단은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니 한국인의 조상이 아닐까 한다.
(창10: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 이름은 욕단이며
셈-아르박삿-살라-에벨--벨렉과욕단--르우-스룩-나홀-데라-아브라함,
선택받은 백성은 벨렉의 후손에서 아브라함이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단의 후손은 어디로 갔을까? 성경은 그들이 동방의 산악 지대를 넘어 아시아로 갔다고 말한다. “그들의 거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창10:30). 여기에서 ‘산’이란 히브리어로 ‘하르’라고 하는데, 그 뜻은 ‘산맥’, 혹은 ‘산지’를 가리킨다. 즉 욕단은 동쪽 산악 지대를 넘어서 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아시아로 이동했던 것이다.
욕단의 가계는 에벨의 혈통으로 셈족의 종가이었으므로 그들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 확고한 하나님을 아는 족속이었다. 따라서 욕단 족속은 셈족의 정통성을 승계한 백성답게 ‘하나님과 함께 고개를 넘어 간다’, 즉 ‘알이랑(With God)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찬송하면서 ‘스발’을 향해 동방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러면 ‘스발’의 위치는 어디일까?
‘스발’을 히브리어로 음역하면 ‘새팔’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홍수로 인해 지워졌기 때문에 ‘새팔’은 당시에 존재하는 장소 이름이 될 수 없다. 욕단이 동쪽으루 이동하기까지 동양에는 아직 누구도 살지 않았다. 따라서 창세기 10장 30절에 언급된 ‘스발(새팔)’은 현실적인 지명이 아닌 ‘예시적’인 지명이다. 그러므로 ‘스발(새팔)’의 원형에 해당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야 한다. 예시적 지명 ‘새팔’은 일단 아시아 동쪽의 어느 곳으로 추적한다면 욕단은 동방의 산악지대(파미르고원→천산산맥→알타이산맥)를 넘어 동쪽으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알타이산맥을 넘어 동쪽으로 좀 더 이동하면 시베리아 벌판이 펼쳐진다. 시베리아는 고조선의 창건 무대인 만주 대륙이 연장된 땅으로 우리 한민족의 역사적 고향이다. 알이랑 고개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 동쪽으로 멀리 이동한 욕단 족속은 만주 및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동방의 새 땅을 ‘새발’이라고 하였다. ‘새발’은 ‘새 땅’ ‘새 벌판’이라는 뜻이다. ‘새팔’과 ‘새발’은 발음이 아주 유사한 한 계통의 소리이이므로 ‘안팎’은 ‘안밖’이듯이 자주 혼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동이족의 후예인 인디언은 ‘아버지’를 ‘아파치’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우리 알이랑 민족인 한국인의 성경상 직계 조상은 셈의 4대손 ‘욕단’이다. 따라서 한국인은 셈 계열 내에서 에벨의 혈통이므로 욕단의 후손도 하나님께서 나중에 쓰시려고 “감추어 두신 선민”이 바로 알이랑민족인 우리 한국인이다. 우리 겨레가 하나님이 감추어 두신 ‘또 하나의 선민’이라는 교훈은 어디까지나 성경에 근거한 객관적 사실이다. 아시아 서쪽 땅 끝에 거주하는 유대인은 셈족의 ‘좌측 가지’인 벨렉의 후손이며 아시아 동쪽 땅 끝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셈족의 현저한 ‘우측 가지’인 욕단의 후손이다.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겉사람’과 눈에 보이지 않는 ‘속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선민도 겉으로 드러난 선민(벨렉 계열 유대인)과 속으로 감추인 선민(욕단 계열 한국인)이 있다. 창세기 10장 21절에 의하면 벨렉 계열과 욕단 계열은 셈족의 현저한 두 가지(branch)로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족속인 ‘에벨의 혈통’이다. 한국인의 특이한 점은 습성과 풍습이 유대인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한국여성과 유대인 모두 물동이를 머리에 이는 것, 외출시 얼굴을 가린다. 양 민족 모두 돌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고, 부모를 "에미","에비"라고 부르고 장례식에 베옷을 입고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한다. 한국인은 유대인과 같이 근면하고, 흰옷을 즐겨 입으며, 종교성이 강하고, 장사 수완이 좋다. 그래서 예전에 유대인이 미국 흑인 지역에서 하던 수퍼마켓과 세탁소, 의류사업, 가발 등을 그대로 이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한국인이 유대인과 비슷한 핏줄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국인은 홍수 심판 이후 살아 남은 노아의 자손인 셈, 함, 야벳의 세 아들 중 한국인은 셈의 셋째 아들인 아르박삿- 살라 - 에벨 - 욕단의 후손들이 한국민족이라고 짐작이 간다.
1. 노아의 자손들로부터 출발한 민족들
인류전파는 노아의 홍수 이후 BC 2357년경에 노아의 자손들 즉 함-구스-니므롯으로 이어지는데 니므룻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자 하나님이 사람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해 서로 알아 들을 수 없게 한 뒤 그들을 세상에 흩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우리 한민족도 바벨탑을 쌓았던 장소로부터 아라랏산을 지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천산산맥을 넘어 다시 동쪽으로 이동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창10:30에는 그들이 거하는 곳은 네가 동쪽의 산 스발로 갈 때에 만나는 메사에서부터 시작되었더라는 말씀을 보면 욕단의 자손들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우리민족으로 자리잡았다는 확증을 더해 주고 있다. 그래서 현지 지도를 펴 놓고 우리 조상들이 어떤 경로를 따라 이동해 왔을까 하는 것을 추리하고자 창조과학회를 결성한 기독교인 학자들이 그 가설을 검증작업에 들어갔었다. 학술조사단과 촬영팀이 국민일보 후원으로 54일간에 걸쳐 그 경로를 모두 답사하고 해당 지역의 대학을 방문하여 학자들과 만나 증거를 수집했으며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 확인했던 것이다. 조사단은 그 모든 경로에서 민족 이동과 관련된 고리들을 찾아냈다. 그 첫째는 유물의 고리였다. 셈족 토기의 특징인 밑이 둥근 항아리인 환저형 토기에서부터 고대인들이 사용하던 생활용구, 그리고 우리 말과 같은 SOV형 교착어 사용 지역이 그 경로에 모두 분포되어 있었고 놀랍게도 그 모든 지역에 대홍수와 방주, 그리고 홍수 때의 정보 전달자인 까마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창세기와 연결되는 설화들이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사단의 일원이었던 중국의 이벤허 박사가 조사결과를 중국 북경 대학에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았으므로 북경대학도 한 민족의 이동설을 인정한 것이다.
아담의 탄생은 BC 4114년이고, 대홍수는 BC 2458년에 일어났으며, 바벨탑 사건은 BC 2357년에 일어났으며 고조선의 건국이 BC 2333년이므로 바벨탑 사건이 일어난지 불과 24년만에 만주에 도착한 것이 어려울 것 같지만, 셈족이 유목민이었고 조사단이 볼가강 하류의 아조프 박물관에서 바퀴 달린 집을 발견함으로써 이동속도가 빨랐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었다. 강화도 마니산에는 단군 왕검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천제단이 있는데, 천제단의 방향이 서쪽으로 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서쪽을 향해 하나님께 경배했다는 것도 우리 조상들이 서쪽으로부터 이동해 왔음을 증거한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조사에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지능지수가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불과 반세기만에 전쟁의 잿더미를 벗어나 경제 기적을 이루어 G20 국가 대열에 들어섰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한국인은 홍수 심판 이후 노아에게는 셈, 함,야벳의 세 아들이 있었고 셈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을 낳았는데 셈-아르박삿-살라-에벨-에벨은 벨렉과 욕단을 낳았고 창10:30절을 보면 욕단의 자녀들이 동쪽의 산 스발로 갈 때에 만나는 메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바벨탑 사건 이후 동방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가장 확실한 것은 창11장에는 에벨은 벨렉과 욕단을 낳았는데 벨렉은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므로 유대인의 조상이 되었고 욕단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우리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 욕단의 후손들이 우리나라 최초 고조선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조선은 신정국가로 하늘에 있는 유일신에게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던 하나님을 믿는 국가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고대사를 기록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가 불교나 유교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왜곡해 진실을 가려 버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1) 우리 민족은 셈족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세상에 악이 관영하자 하나님은 BC 2458년에 물로 온 지구를 심판하셨을 때 방주에 탄 노아의 가족 8명만이 대홍수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다. 40일동안 주야로 비가 내려 150일 동안 온 땅이 물에 잠겼고, 물이 빠진 후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물렀다(창8:4). 물이 마른 후 노아는 아라랏산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고, 하나님은 노아 가족이 다산하고 번성하도록 축복하셨다. 노아의 아들 셈의 자손들은 산 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주로 아라랏 산 중턱에 살았고 일부는 산에서 내려와 우르 지방으로 내려왔는데 인류 최초로 문명을 건설한 수메르족이라 불리운다. 우리말에서 남자를 뜻하는 '사내' 또는 '사나이'는 '산(아라랏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수메르라는 말이 '셈'에서 나온 것으로 학자들 사이에 인정되고 있으며 수메르어와 우리 나라 말 사이에는 유사점도 있는데 우리말의 '길'이 수메르어로 'gir'이고, 우리말과 같이 님(nim)이란 존칭을 붙이며, 하늘을 'an-ur'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abba', 자신의 아버지를 'abi'라고 부른다. 또 한국어와 수메르어는 모두 교착어로 주격, 소유격, 목적격을 나타내는 조사가 있고, 문장 구조도 주어-목적어-동사 순입니다.
함의 자손은 메소포타미아의 평원에 정착했는데 노아로부터 저주 받은 함의 장자인 '구스'의 가문에서 태어난 '니므롯'은 바벨탑 문명을 건설한 인물이다. 함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은 이집트 지역으로 가서 피라미드를 건설하고 수많은 우상신을 섬기는 신비주의 종교를 만들었다. 함의 넷째 아들인 가나안은(창10:6) 시돈과 두로 지역에 페니키아를 건설하고 무역을 번성시켰으며, 수많은 우상 신을 만들어 내었다. 이로써 함의 자손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바빌론, 이집트, 페니키아 문명을 건설하였다. 바로 이 곳에서 신비주의 종교, 물질 만능주의가 태동되어 이스라엘과 인류를 타락시켰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장사에 도움이 되는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보급하기 위해 아스다롯이란 여신을 만들었는데 이 가나안의 여신이 수메르 지역에 있는 셈의 자손들에게도 스며들면서 수메르 사람들은 주변국의 영향을 받아 점차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하기 시작했다.
2. 우리민족은 최초에 어떤 신을 믿었을까?
위에서 보듯이 우리 민족은 고조선부터 유일신인 하나님을 믿던 경건한 민족이었다. 천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을 천군이라 했는데 천군이 후에 단군으로 불리워졌다.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는 고려 말에 승려인 일연 김견명이 저술한 삼국유사와 고려시대의 장군 김부식이 저술한 삼국사기가 있다. 우리 역사에 단군이 처음 등장하는 자료는 삼국유사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불교의 윤회설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민족의 조상이 곰이었다는 근거 없는 설화를 끼워 넣으면서 역사를 왜곡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삼국유사의 고조선 편에서는 환웅(하나님의 아들)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주었는데 곰이 21일동안 견뎌 여자가 되어 환웅과 혼인해 단군 왕검이란 아들을 낳았다는 설화를 만들어 넣은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의 단은 박달나무 단(檀)이 아니라 제터 단(壇)이다. 즉 단군(壇君)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라는 직책명이다. 그 첫번째 단군의 이름이 바로 왕검이었다. 그러므로 혹시 왕검상을 만든다면 또 몰라도 단군상을 만든다면 이는 어이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후일에 이승휴라는 사람이 제왕운기를 쓰면서 그 단군을 민족정신의 구심점으로 삼기 위해 박달나무 단자를 썼는데, 그 뒤로 단군이 박달나무에 내린 신으로 바뀐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17대 왕인 인종 때에 김부식이 신라중심으로 중화사상에 젖어 쓴 역사서로 내용이 중국과 신라의 역사적 사실이 과장된 부분이 많다. 삼국사기는 불교와 유교적 관점에서 저술해 고조선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단군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으나 김부식과 일연이 우리 민족의 참된 역사를 왜곡하였다고 해도 중국에 있는 우리 민족에 관한 역사까지 변질시킬 수는 없었다.
(1) 천신을 믿는 종교
중국의 고대사는 분명히 우리 민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후한서에서 동예전은 "시월이 되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말씀을 읽으며 밤에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 이를 무천이라 한다."
삼국지에서 고구려는: "시월에는 하늘에 드리는 제사를 동맹이라 했다." 진한은: "성마다 한 사람을 세워 천신께 제사를 주관하게 했는데 이를 천군이라고 했고, 그 제잔을 수두라고 한다."
중국의 고대사 뿐만 아니라 1675년(숙종 2년)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규원사화에도 단군이 신단수(神檀樹) 아래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이자 임금임을 밝히고 있다.
일제가 고조선의 역사를 말살하고 왜곡했지만 '규원사화'를 비롯한 古書와 중국의 역사책에서 밝혀진 바로는 엄연히 단군조선이 있었고, 檀君이란 말은 ‘박달(壇) 나라의 임금(君)’이란 뜻이다.
고조선 시대에는 한문이 없었는데 어떻게 단군이란 이름이 생겨났는가는 규원사화에 잘 나와 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박달임검지역야(朴達壬儉之譯也)'라 해서, '단군이란 박달나라 임금을 번역한 것'으로 되어있다. 박달이라는 말은 옛부터 배달로도 불렀고, 나라 우두머리는 임검이라 했다. 규원사화 단군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신씨이강어단목지하 이환검신인(神氏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이라 해서 그 뜻을 살펴보면, '신씨천황께서 이미 박달나무 밑에 하강했고, 환검신인이 다시 단목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단(檀)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은 것이며, 단군이란 박달나라의 임검이다'라는 내용이다. 단군이후 약 2천년 지나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불교가 들어올 때를 전후해서 한문이 들어왔다. 그 때 사가들이 역사를 한문으로 서술하다 보니까, '박달 임검'을 박달단(檀) 임금군(君)자로 쓰기 시작해서 그 때부터 단군으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한문이 들어오기 전에는 단군이라는 용어는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단군, 단군임검 또는 단군왕검은 고유명사가 아니고 박달 나라의 임검이라는 뜻을 가진 보통명사이다.
(2) 천신께 드리는 기도문
규원사화에 보면, 제3세 가륵임검 때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단군이 이미 하늘에 제사 지내고, 교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고, 도를 이뤄 행하게 한지 몇해 동안의 백성들이 모두 감화되어 악은 없어지고 천하는 잘 다스려지게 되었다."
이는 창세기에서 노아가 홍수 심판 후에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8:20 노아가 주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가운데서 취하여 제단에 번제헌물을 드렸더니.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교시하는 내용은 성경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져도 새지 아니한다.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 바탕이 통하여 맡은 일을 온전케 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분명한 사실은 중국 고대사와 규원사화를 통해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하나님을 믿는 민족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외국에서 들어온 불교나 유교를 전통종교로 생각하고,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인식하는 오해를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외래 종교인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귀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은 유일신을 믿었던 민족이었다.
3. 해상왕국 가야의 비밀
중국 한나라 때 광무제의 박해를 피해 동이족이었던 수로라는 사람은 AD 42년 동료들과 함께 한반도 김해에 상륙해 변한 족장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을 세우고 김수로 왕이 되었습니다.(김유신의 12대 조부)
김수로 왕은 가락(가야)국에서 제철산업을 크게 일으켜 해상을 통해 해상왕국을 세웠다. 또 수로가 가락에 도착한지 6년 후인 AD 48년에는 인도 지역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왕옥이 신하 두 내외와 20명의 선원을 데리고 배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허왕옥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파사(페르샤)의 석탑을 가지고 온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허왕옥은 가야에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자신이 온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 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로 가라 하시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상제(上帝)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허왕옥이 가야에 도착한 AD 46년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 선교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도마를 비롯하여 시몬, 다대오 등 사도들이 활동하던 선교 중심지였다.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침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이며, 왕과 왕비도 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다른 곳에서는 도마가 허왕옥을 데리고 한국에 와서 6년간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미 2000년전 예수님의 12제자 중 하나인 도마가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도 연구의 대상이다. 허황후가 인도에서 가지고 왔다는 파사의 돌은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릉에 보존되어 있다. 허왕옥의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을 가야 사람들은 '주님의 포구'라는 뜻에서 주포(主浦)라 불렀다. 삼국유사를 쓴 김견명이 말한 파사의 석탑은 실은 가공한 돌이 아니라 평범한 자연석 6개를 쌓아 놓은 것일 뿐입니다. 허왕옥이 자신의 배에 돌 여섯 개를 싣고 온 이유는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갈릴리의 배 만드는 기술자였던 사도 도마의 충고를 받아 들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해에 있는 수로왕릉의 남릉 정문에는 석탑 모양의 그릇들 가운데에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갈릴리의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와 같은 형태이다. 허왕옥과 결혼한 수로왕은 국호를 가락국에서 '가야'로 바꾸었는데 '가야'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한다. 물고기는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 사이에 사용된 암호였다. 헬라아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말의 이니셜이 물고기 즉 "익투스(ichthus)"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종교문양 익투스(ixtus, Ichthus)는 초기 기독교도들의 비밀스런 상징으로 사용된 것이 물고기 모양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겐 많은 박해로 공공연한 모임을 가질 수 없었으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또한 쉽게 밝힐 수 없던 때 그리스도인들끼리 통하는 암호가 바로 물고기 모양(익투스)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물고기를 자기들을 대신하는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물고기'라는 단어의 고대그리스어는
" I X O U S " (Ι χ θ Υ Σ ) 로 쓰여지고, "익투스"로 발음되며
각각의 자는 고대 그리스어로 IXθUΣ
I : Iesus (예수스 : 예수)
X : Christus (크리스투스 : 그리스도)
θ : Theos (떼오스 : 하나님)
U : Huios (휘오스 : 아들)
Σ : Sojomete (소조메테 : 구원자)
"물고기"라는 단어와 문양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라는 거대한 신앙고백이 숨겨져 있다.
알고보면 무려 2000년 전에 이 땅에 사도 도마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가야의 김수로 왕은 예수님을 믿었던 최초의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 5대 왕인 파사(婆娑) 이사금이 수로왕을 매우 존경하여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초청해 자문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사금이 자신의 왕호를 굳이 페르시아를 의미하는 파사로 바꾼 이유는 아마도 허왕옥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일 것이다.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석재 십자가와 영남 대학교 박물관 지하실에 보관된 양을 품고 있는 석상 등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 신라의 화랑도도 메시야를 상징하는 꽃인 무궁화를 머리에 꽂고 다니고, 특이한 사상과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를 믿는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4. 사도 도마
인도의 공주 허왕옥을 가야에 데리고 온 도마는 갈릴리의 한 가난한 어부의 가정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도마는 시리아어로 '쌍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헬라에서는 그를 디디무스(Didymus)라고도 불렀다. 그는 주님의 부활을 의심한 인물로 말하여지지만 오히려 경험적인 것에 집착하는 매우 이성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서 주님께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을 때 도마는 주님께 말하기를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주님은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고 대답하셨다. 이런 문답은 도마가 회의적인 인물이어서 물은 것이라기보다 그가 명확한 것을 좋아 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나 부활한 주님의 손과 발과 창자국을 본 후에는 즉시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주님의 신성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에서 나온 것으로서 제자들 중 최초로 예수님이 하나님 되심을 고백한 것이었다.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도마의 선교에 대하여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주로 인도에서의 행적인데 도마는 유대인으로서 처음에는 인도선교를 요청하는 주님의 부름을 거부하였는데 주님께서 아반(Abban)이라는 인도의 한 상인에게 종으로 팔려서 인도에 오도록 하였다. 도마의 전도로 말라바(Malabar) 해안선을 따라 기독교인들이 증가했고 그 지역에 일곱 개의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도마는 72년경 마드라스 근처의 빅 힐(Big Hill)이란 곳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여 밀라포르(Mylapore)라는 곳에 뭍혔다. 인도의 교회들 중에는 도마 교회가 지금도 있다. 인도 특히 케랄라(Kerala)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성 도마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말한다.
5. 공자에 대한 오해
사람들은 명절 때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제사를 공자의 유교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공자가 부모에게 효도하라고는 했지만 죽은 부모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한 적은 없다. 마치 불교에서 석가가 자신에게 불상을 만들고 절하라고 한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석가를 신으로 모시고 절하듯 유교의 많은 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만든 것이다.
고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요(堯)와 순(舜) 임금입니다.
공자(孔子)의 서경(書經)에 의하면 요, 순 임금은 상제(上帝)에게 제사를 드렸으므로 하나님을 믿던 임금이었다. 순임금 때부터 중국인들은 여름에는 북쪽 끝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남쪽 끝에서 국경제사를 상제에게 드렸다. 요,순 시대부터 상제에게 제사를 드렸던 제사문이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아직도 남아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지극히 오래 전 태초에 공허하고 흑암의 큰 혼돈이 있었사옵니다. 다섯 행성은 아직 운행되지 않았었고, 태양도 달도 빛을 발하지 않았었습니다. 거룩하신 신 상제(上帝)께서 이곳에 모든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주께서 모든 만물을 만드셨사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지으셨사옵니다. 당신의 능력으로 모든 만물이 지음을 받았사옵니다."
위 내용을 창세기 1장의 내용과 비교하면 매우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창1:1-5)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25-27)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또 다른 국경 제사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모든 생물들이 당신의 뜻으로 말미암았나이다. 상제(上帝)시여, 인간도 만물도 모두가 당신의 사랑으로 이 낙원에 살게 되었나이다. 모든 생명체가 당신의 선하심으로 지음 받았사오니, 그 축복은 당신으로 말미암음이옵니다. 오 주시여, 당신만이 이 모든 만물의 참 어버이가 되시옵니다."
세상의 어떤 종교도 기독교 이외에 위와 같은 기도문은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인이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노아의 후손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은 얼굴은 동양인이지만 언어나 생활(입식), 식생활(고기, 기름) 등에서 서양인과 가깝습니다. 옛 중국인들의 시신을 발굴해 보면 금발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인은 노아의 첫째 아들인 야벳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한족은 시간이 지나면서 셈족인 동이족이나 몽고족과 피가 섞이면서 지금과 같은 동양인 모습을 하게 되었다. 중국 사람들 역시 진시황이 진나라를 세었던 BC 200년까지 무려 2000년 동안 유일신인 하나님을 섬겼다. 상제(上帝)의 중국식 발음은 '샹따이'인데, 유대인의 하나님 칭호 중 하나인 '엘 샤따이'와 유사합니다. 현재 중국어로 된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상제라고 부르고 있으며, 중국인들이 쓰는 문자인 한자 역시 창세기 1장에서 11장을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본다.
노(魯)나라 사람인 공자(孔子, BC 552~BC479)는 유교의 창시자로 은(殷)왕족의 혈통을 이어 받았으며,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났습니다.
당시 사회는 철기 사용으로 인한 농업혁명으로 인해 풍요로웠지만 물질주의로 도덕이 땅에 떨어졌고,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기 위한 제후들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으로, 공자는 최고의 덕을 인이라고 보고,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공자의 관심은 인간이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道)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습니다. "神에 관해 이야기 해 주십시오" "사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찌 神에 대해 논하겠느냐?"
이 대화를 통해 공자의 관심이 신이나 죽음에 있지 않고 사람과 삶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스스로 자만하지 않고 자신이 인간에 관한 문제를 알기에도 벅차다는 것을 인정한 셈입니다. 결국 공자가 인간의 삶에 대해 얻은 해답이 인(仁)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교는 죽음에 관한 종교라기 보다는 삶에 관한 윤리와 사상과 철학이라고 보는 편이 옳다.
(1) 공자가 태어나기 전의 시대적 배경
중국 대륙의 역사는 우리 민족인 동이족과 중국 민족인 하화족의 경쟁과 협력 관계로 이루어졌다. 중화사상을 가지고 있는 하화족을 중국인들은 화하(華夏)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본래 황하의 상류 지역에 살았다. 동이족에 속하는 소호(少昊)족은 산동의 곡부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 수가 하화보다 많았으나 하화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동이족의 정신적 중심은 산동의 태산이었고, 태산 정상에 있는 천제단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화의 첫 임금은 요(堯)였는데, 그는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만한 인재를 찾지 못하고 동이족의 순(舜)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다.
그러나 순은 다시 하화에서 우(禹)라는 인물을 찾아 자리를 넘겨주었고, 우는 동방 장군들의 협력을 얻어 황하의 치수에 성공하였으며, 하화는 임분에서 화산(華山) 지역으로 진출했다. 우는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주었고, 14대에 이르러 걸(桀)이라는 폭군이 나타나, 동이족의 탕(湯)이 걸을 제거하고 은(殷) 나라를 세웠다. 은 나라는 '정인'이라는 기도 집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국사를 결정하는 신정국가였다. 은 나라의 30대 주(紂) 왕은 우상을 섬기고 무도하므로, 하화의 발(發)이 은 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 나라를 세워 무왕이 되었다. 주의 무왕은 신정국가였던 은 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명분을 찾기 위해 신앙의 자유를 선언하였는데 조상 귀신을 모시는 '종묘'와 농사의 신을 섬기는 '사직'을 모든 지방 관청에 만들게 하고 왕궁에도 세웠다. 하나님을 버리고 귀신을 섬기던 주 나라가 멸망하고, 천하가 어지러울 때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 사상의 기본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자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었습니다. 공자는 요, 순과 하, 은, 주에 이르는 역사 상서(尙書)를 기록해 바른 역사를 확립하려 했으나 어지러운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바빌론과의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장사꾼 여불위의 아들 진(秦) 시황제(始皇帝) 였다. 그는 동이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태산에 제사를 드리러 갔다가, 동이족 창해역사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시황제는 동이족의 포섭을 단념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3년 후인BC 215년에 2700km에 달하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을 쌓은 주된 이유는 산동의 동이족을 박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BC 212년부터 동이족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공자의 사상을 박해했는데, 공자의 책을 모두 수거해 불태웠고, 공자의 제자460명을 땅에 묻어 죽였다.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책을 불태움, 坑儒:공자의 제자들을 땅 속에 묻음) 사건을 통해 공자의 원래 사상은 잊혀지게 되었다. 논어는 공자가 직접 저술한 저작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종교적 논리에 맞게 편찬한 책입니다. 따라서 공자가 가졌던 정확한 사상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시황제의 아들 호해를 제거하고 진을 멸망시킨 사람은 하화족인 한(漢)의 유방(劉邦)이었다. 그는 동이족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공자의 학문을 복원하겠다고 선언하고, 공자의 책들을 복원하게 하였으나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주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삽입하여서 신을 공경했던 공자가 귀신을 섬기던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용학자들 가운데 양심선언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논어의 술이(述而) 편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실을 말했다.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 怪力亂神): 공자는 괴이한 일과 난잡한 귀신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즉, 공자가 조상귀신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제사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하늘과 땅에 드리는 모든 제사 의식들을 통해 사람이 상제(上帝)를 섬기느니라." 결국 모든 제사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고 공자는 말한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사람들은 명절 때마다 명백한 우상 숭배인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고, 그것이 유교나에서온 우리의 전통인 것처럼 이해하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사망에서 구원하는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6. 불교의 전래
석가모니가 인도 가비라 성에서 고다마 싯달타(BC560-480)가 성주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 인도는 힌두교와 연합한 계급제도가 더욱 분화되어 그 폐해가 막심했다. 본래 고다마 싯달타의 사상은 계급제도와 결탁한 힌두교의 신들을 축출하기 위해 제기한 무신론적 구원론이었다. 그것을 종교로 육성하여 포교를 시작한 것은 마우리아국의 아소카 왕(BC 272-232)이었다. 그 때까지도 고다마 싯달타의 가르침인 비폭력, 불살생의 원칙이 지켜졌는데 대륙에 들어오면서 점차로 살생유택을 내세우는 호국 불교로 변모하게 되었다. 동이족과의 협력을 포기했던 후한 광무제의 아들 명제는 유학을 대체할 통치 이념을 모색하다가 AD67년에 호국 불교를 들여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후한에 들어온 그 불교가 고구려에 들어온 것은 소수림왕 2년 즉 AD372년이었다. 아무리 교통이 불편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불교의 전래가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데 300년도 넘게 걸렸던 것일까? 그것은 고구려에서 불교를 막아낸 강력한 종교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샤머니즘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무당이나 점쟁이의 세력이 불교를 300년 동안이나 못들어 오게 했다는 것은 억지 논리다. 나는 고구려가 이미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는 말타고 활을 쏘는 전투적인 혈통을 지닌 나라였으나 이상하게도 고구려 초기에 전쟁을 잘 했던 왕들은 모두 대신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고구려 제5대 모본왕은 군대를 이끌고 한나라의 요동태수의 항복을 받아냈던 영웅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는 그가 성품이 포악하여 측근에게 시해 당했다고 기록해 놓았다. 제6대 태조대왕의 아우 수성도 요동 땅을 수복한 맹장이었다. 왕이 죽고 수성이 즉위했는데, 그도 역시 신하에게 살해 당했다. 삼국사기는 역시 그가 포악했기 때문이라고 썼다. 이후로 고구려의 영토는 위축되기 시작하고 국력은 약해지기 시작한다. 왜 전투적인 고구려에서 전쟁 잘하는 영웅이 대접을 받지 못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기독교 정신을 그들이 고지식하게 따랐던 때문은 아니었을까? 날로 연약해지던 고구려는 16대 고국원왕 때에 큰 수모를 당한다. 동족인 선비족의 모용황이 쳐들어와 환도성을 불태우고 왕의 모친과 왕비를 잡아갔으며, 왕은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는 치욕을 당했던 것이다. 고국원왕은 초토화된 고구려를 다시 일으켜보려고 호국불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 백제의 근초고왕이 쳐들어와 고국원왕을 죽이고 물러간 것이다. 살해당한 부친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은 즉위 이듬해에 더이상 대신들이 이의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을 이용해 호국 불교를 도입하고 불승 아도에게 절을 건축하도록 승인했다. 그 후 384년에 백제를 방문한 호승 마라난타를 불승으로 보지 않는다. 마라난타라는 이름은 아람어로 우리 주께서 오신다라는 뜻의 마라나타와 유사하다. 호(胡)는 서역에서 왔다는 말이고, 당시 기독교의 선교사도 승(僧)이라는 말로 불렀다. 어쨌든 불교는 고구려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신라 포교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488년에는 불승이 왕궁에 잠입하여 소지왕의 왕비와 통정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신라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고구려가 받아들이고 다시 155년이나 지난 뒤인 527년 법흥왕 때였다. 이 때 불교 도입을 주도한 세력이 병부령 이사부와 어릴 때 고구려에 들어가 혜량이라는 중으로부터 수계를 받고 돌아온 무장 거칠부 등 군부세력이었다. 그들은 대신들을 위협하여 호국 불교를 들여오고 다시 5년 후인 532년 기독교의 종주국이었던 금관가야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종주국을 친 명분을 세우기 위해 거칠부는 신라 국사를 편찬하면서 가야의 수로왕을 난폭한 자로 만들고 가야가 신라를 여러 번 공격한 것으로 개작하여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 후에 신라까지 불교를 도입하고 가야를 멸망시키자 백제의 성왕은 마침내 백제에도 불교를 들여오기로 결심했다. 541년에 성왕은 양나라로부터 불경과 불상을 도입했다. 이 땅에 불교가 들어온 것이 1700년 밖에 안되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토속종교인양 주인 행세를 하고 그보다 2000년전에 들어온 기독교는 찬밥신세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4~500년 전에 동양의 공자와 서양의 플라톤과 인도의 석가가 인생에 대해 의문을 제시했고, 예수님이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한국인을 상징하는 성경말씀
오늘날 한국교회는 구한말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옴으로 기독교가 선교 130년 정도에 기독교인이 800만 정도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의 대형교회는 거의 우리나라에 있을 정도이다. 기독교가 전 세계에 전파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이 유독 그 전파되는 힘이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그 배경이 무엇인가? 고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이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성경에는 한국을 지칭한 것이 직접적으로는 없지만 동쪽이나 동방을 표현한 말씀들이 우리나라를 상징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사24:16) 땅의 맨 끝 지역에서부터 나오는 노래가 우리에게 들렸으니 곧 의로우신 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노래라.
(사41:2) 누가 동쪽으로부터 의로운 사람을 일으키고 그를 불러 자기 발 앞에 이르게 하였으며,
(사41: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데려오고 땅의 우두머리(돌모퉁이)들로부터 너를 불러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내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였으며 너를 버리지 아니하였노라, 하였노라
(사46:11) 내가 동쪽에서 굶주린 새를 부르되 곧 먼 나라에서 나의 계획을 집행할 사람을 부르리라. 참으로 내가 그것을 말하였은즉 또한 그것을 이룰 것이요. 내가 그것을 작정하였은즉 또한 그것을 행하리라.
(사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한 민족을 네가 부를 것이요, 주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인하여 너를 알지 못하던 민족들이 네게로 달려오리니 그분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10:19-20) 19 모세는 말하기를 내가 백성이 아닌 자들을 시켜 너희의 질투를 일으키며 어리석은 민족을 시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나게 하리라.
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이르기를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들이 나를 발견하였나니 내게 묻지 아니하던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노라.
(1) 기독사관으로 본 한민족의 정체성
우리 민족은 5천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졌다고 자랑하지만 35년간 일본치하에서 오욕의 세월을 보냈고 해방 후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더 큰 수치와 모멸을 겪으면서도 우리에게는 당장 하루를 사는 생계가 더 급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경제 개발로 성장이 급상승 하자 우리의 생활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굶기를 밥먹듯 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주차 문제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재야에서도 민족사학자 단채 신채호의 맥을 이어 잃어버린 역사 찾기를 위한 연구가 시작됐다. 또 대학에서도 신진 사학자들이 일제시대에 형성된 고대사를 재검토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와 함께 규원사화와 환단고기 등 민간사서들도 출판되어 넓게 읽혀졌던 것이다. 이런 뿌리찾기를 위해 정부가 설립한 정신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민족사관 연구에 힘쓰고 있다. 이 땅에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벨탑 이후로 전세계에 흩어진 모든 민족들이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다양한 문화로 살기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도 ‘우리 것 찾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대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라 균형잡힌 기독사관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인식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2000년 전의 땅을 찾아 들어가서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고조선 때부터 섬겨온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를 외래 종교로 단정하고 이 땅에 들어온지 1700년도 안되는 불교를 전통 종교라고 내세우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민족과 중국 민족은 무려 20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민족이었는데, 왜곡된 역사로 인해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불교나 유교가 전통종교인 줄 알고 살아왔다. 우리 민족이 노아의 장자인 셈의 후손으로서 원래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었고 때문에 구한말에 기독교가 들어오자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민족이 된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인 마지막 때 역사는 계7:2 또 내가 보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으로부터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치며 이런 말씀은 마지막 때는 해 돋는 동방에서 일어나 온전한 진리의 빛을 전 세계에 비추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큰 부흥의 역사를 일구어 내는 것이 한국교회의 사명이라 하겠습니다. 애국가에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것만 잊지 않아도 우리민족은 특별한 천손민족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하나님께 사명감당해 달라고 기도하는 한국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우리민족의 기원을 다시한번 생각해 본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