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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제1회 수상작
나의 디지탈 하늘
김지향
디지탈 버튼을 쥐고 나는 손이 붙어 있는지
더듬어 본다
너무 가벼워 먼지로 날아간 줄만 알고 있는 나는
나에게 육체가 있느냐고
물어본다
육체가 가벼울 때
길 끝이 트이고 모래먼지를 털며
길 끝의 나무가 홰를 칠 때
나무의 날개 사이로 보인다
하늘이, 살이 붓지도 않고 양옆으로
열림이 환히 보인다
그때 하늘이 먹은
새들이 꽃씨를 물고 팔랑팔랑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나뭇잎이 열매를 매달고 동글동글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바람이 물결무늬 치마폭을 펄럭이며 나오고
그때 하늘이 먹은
햇살이 치마끈을 풀어 땅에 수정기둥을 세우며 나온다
날아 나온 몸 바뀐 존재들은 가벼운 육체로
땅의 안 바뀐 존재들과 하나의 허리띠에 묶여
하나가 된다
나의 디지탈 하늘은 이제 배가 푹 꺼져
땅에 내려와 누웠다
우주가 일직선으로 길게 깔려버리는.
김지향 1957년 세계일보에 시 별을 발표하면서 활동. 시집으로 『병실』, 『빛과 어둠 사이』, 『사랑 그 낡지않은 이름에게』, 『내일에게 주는 안부』, 『사랑 만들기』, 『리모콘과 풍경』등 다수가 있다. 시선집으로 『살아서 노래하는 강물』, 『바람이 돌아온다』가 있다. 산문집 『내가 떠나보낸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등 5권, 시론집 『한국여성시인론』등이 있다. 대한민국문학상, 시문학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 제1회 박인환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수상.
제2회 수상작
밧줄
이수명
어느 날 그 건물 아래로 밧줄이 드리워지고 사람들이 하나씩 건물을 빠져나갔다. 밧줄은 아주 오래 매달려 있었다. 가느다란 외줄이 부르르 떨고 있는 것을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그 후 그 건물이 완전히 철거되었을 때 밧줄은 사라졌다. 더 이상 밧줄을 타고 내려갔던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 그 밧줄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날마다 보았다. 움직이지도 않고 딱정벌레처럼 등을 웅크린 채 그는 허공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이 건물, 저 건물에 그 밧줄을 번갈아 걸었다. 밧줄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짧아졌다.
어느 날 새로 불 켜진 창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근작시
페이크삭스
양말을 사러 시내로 간다. 분명한 것은 시내에서는 양말을 구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건 내가 한 말이다. 시내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옷을 팔고 어떤 사람은 신발을 판다. 양말 사지 말고 시내에서 놀자 이건 네가 한 말이다. 여기 양말 가게가 있었는데 없어졌네 이것도 네가 한 말이다. 아니에요 이쪽에 매대로 오세요 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정말로 매대에 양말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길고 짧은 양말들을 사람들이 들어 올린다. 요새 발목양말이 잘나가요 누군가 말하고 분명한 것은 발목이 없는 양말이 발목양말입니다 이건 네가 한 말이다. 이런 페이크삭스도 유행이에요 걸으면 벗겨지지 않나요 절대 벗겨지지 않아요 어떤 건 내가 한 말이다. 검은색과 흰색의 발목 양말을 산다. 검은 봉지를 들고 걸어간다. 계단을 올라갈 때는 약간 비틀거렸는데 낮과 밤이 바뀐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해가 가장 긴 날이다. 긴 머리를 빗는 모델의 포스터가 빌딩 벽에 붙어 있다. 시내에서 놀자 지금 어떤 양말을 신고 있니 시내 구경을 하는데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다.
『현대시』 2018년 8월
이수명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등이 있다. 시론집 『횡단』, 비평집 『공습의 시대』, 『표면의 시학』, 번역서 『낭만주의』, 『라캉』, 『데리다』, 『조이스』 등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현대시 작품상, 노작문학상, 이상시문학상 수상.
제3회 수상작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박찬일
사람들아 미안하다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푸른 트럭에서 나는 그대들 전부를 잊기로 한다 나도 잊기로 한다
푸른 트럭에서, 나는,
오이 당근을 파느라 감자 고구마를 파느라 양파를 파느라 시금치 마늘을 파느라
푸른 트럭에서 나는 수박 참외를 파느라 토마토 사과 귤을 파느라 배를 파느라 계란을 파느라 정신이 없다.
이면수 꽁치를 파느라 조기를 파느라 고등어를 파느라 푸른 트럭에서
푸른 트럭을 파느라 푸른 트럭만 남기고 파느라
싱싱한 야채 있습니다 싱싱한 과일 있습니다 싱싱한 계란 있습니다 싱싱한 생선 있습니다 녹음기에 녹음하느라
녹음기를 켜놓느라 싱싱한 야채 있습니다 싱싱한 과일 있습니다 싱싱한 계란 있습니다 싱싱한 생선 있습니다 정신이 없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정신이 없다
푸른 트럭에서 나는 그대들 전부를 잊었다 나도 잊었다 푸른 트럭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푸른 트럭을 몰고 사라지려고 한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푸른 트럭에 있다
정신이 없다 나는 포도주를 마신다 푸른 트럭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야채를 팔아 과일을 팔아 계란을 팔아 생선을 팔아 포도주를 마신다 포도주만 마신다 정신이 없다
사람들아 미안하다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푸른 트럭에서 팔러 다닌다 푸른 트럭을 팔러 다닌다 푸른 트럭만 빼고 팔러 다닌다 푸른 트럭에서 마신다 붉은 포도주를 마신다 그와 함께 붉은 포도주를 마신다 미안하다 사람들아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근작시
회복기의 노래 2
남편을 설득하지 못한 클라라는 자신의 목에
총알을 박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예기치 않게 술을 매우 마시고 교통사고로
죽게 된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 11층에서 뛴 ∇∇∇, 인생일랑
그런 것이다. 죽음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아버지 가시고 시름시름 시들어 가신 어머니,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날까지 살아라, 혹시 그날 이전에
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해
죽을 용기를 내어 죽으라.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죽음 아닌 것이 없거나 이성적 죽음이거나
꼼짝없이 당하거나
죽음이란 인생이거나.
『시와세계』 2017 여름호
박찬일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나비를 보는 고통』,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모자나무』, 『하느님과 함께 고릴라와 함께 삼손과 데릴라와 함께 나타샤와 함께』, 『인류』, 『「북극점」 수정본』, 『중앙SUNDAY-서울 1』, 『아버지 형이상학』 등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유심작품상, 이상시문학상 등 수상. 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
제4회 수상작
담배 연기
김상미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미하일 바흐찐은 자신의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웠다.
그 담배 연기를 오늘날 내가 마시고 있다.
헤어지자 말하는 남자의 등 뒤로 담배는 만병의 시작이다 쓰인 커다란 플래카드가 펄럭이는 평원이 보인다. 헤어지기엔 평원이 너무 넓다. 큰 키의 나무라도 몇 그루 있었으면… 그러나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울 수 있는 남자라면 이별의 독초에도 금방 익숙해지겠지.
그 담배 연기를 받아 마시며 천천히 평원의 입구로 들어선다.
푸드덕 몇 마리 비둘기들이 적막을 깨며 담배 연기처럼 흩어진다. 가지 마, 남자의 심중이 마지막 총알처럼 날아와 뒤통수에 박힌다.
그러나 이별은 섬광이 아니다. 섬광이 빠져나간 껍질이다. 그 껍질 때문에 우리는 세계는 어디나 다 똑같음을 배우게 된다. 참으로 끊기 힘든 담배, 그를 위해 자신이 쓴 책을 기꺼이 찢은 남자. 그 위에 찍히는 립스틱 자국.
아무래도 이곳은 이별의 장소가 못 된다. 이별은 철근을 깔고 시멘트를 바른 곳에서 이뤄져야 한다. 평원은 너무 넓고, 내리쬐는 햇살은 눈부시게 따뜻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평원을 가로지르는 내게 더 이상 눈물 따윈 흘리기 싫다며 평원의 푸른 눈들이 일제히 소리친다. 참으로 이별은 사람으로서 차마 못할 짓이다. 자신이 쓴 책으로 담배를 말아 피우며 그 남자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나 이곳만 통과하면 나는 그와 헤어진다. 꿈같은 현실에 꿈같은 이별이 살해당하는 장소에서 벗어나 또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며
내면으로, 내면으로 내려앉는 그늘진 공기처럼 무소부재의 함정 속으로, 폐허 속으로,
근작시
엄마의 통장
엄마의 통장을 어떻게 하나?
내 통장 상자에 아직도 들어 있는 엄마의 통장
이제는 쓸 수 없으니 버려야 하는데
객지에 사는 딸이 매달 부쳐주는 용돈을
딸이 보내는 반가운 편지인 듯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가
돌아가시면서 건네주시던 그 통장
그 통장의 돈을 형제들과 똑같이 나누면서 펑펑 울었던
아, 우리 엄마의 통장
그 내리사랑을 어떻게 하나?
이제는 훨훨 태워 자유롭게 보내드려야 하는데
아끼고 또 아껴서 자식에게 되돌려줄 기쁨에
불어나는 통장의 액수만큼 몇 배로 검소하셨을 우리 엄마
그 착한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일거리가 없는 달엔 한 끼만 먹고도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엄마의 용돈
그 용돈 보내는 재미로 힘내며 힘차게 살았는데
이제는 그런 재미 사라진 지도 어느덧 십여 년
은행에 가기 위해 통장을 꺼내는데
그 아래에서 삐죽 고개 내밀며 활짝 웃는 엄마의 통장
나도 모르게 엄마, 은행 다녀올게!
꾸벅 인사하는 나
아직도 엄마의 손길, 엄마 냄새 가득한
착하디착한 그 통장을 어떻게 버리나?
창밖엔 엄마가 그리도 좋아하던 수국이 한창인데
나는 그 수국조차 엄마가 남긴 그리운 유품 같아
눈시울이 자꾸만 붉어지고 붉어지는데
『문파』 2017년 가을호
김상미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가 있다. 산문집으로는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 『오늘은 바람이 좋아, 살아야겠다』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
제5회 수상작
빌딩 숲 공원묘지
정재학
곤충들이 내 머리로 몰려든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이 숲, 땅에서는 개미집 냄새가 질척이고 낙엽들은 휜 가지를 붙들고 있었다 귀로 들어온 딱정벌레 하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나는 귀를 막고 걷는다 몇 마리의 벌레가 떨어졌다 나는 죽은 벌레처럼 말라 흙이 되고 싶었다 이곳에서도 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길은 분명 흐르고 있다
길을 막고 있는 묘비들을 뚫고 얼굴 없이 심장만 두 개인 사람들의 행렬을 뚫고 이 곳에서 나는 뒷모습으로 걸었다
정재학 1996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모음들이 쏟아진다』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수상.
제6회 수상작
습득拾得
송준영
1호선 지하철 분실물신고센터에 있는 건
하얀 차돌 두어 개와 나를 따라온
청태 사이로 비치는 오대산 맨가슴 그리고
가부좌 틀고 있는 청량선원이네 그곳엔
내가 주워온 금빛 옷을 걸친 늙은 부처 아니
법당 왼쪽에 단정히 앉아 있던
이마 말간 문수동자가 있네 아니 이날
툇마루에 졸고 있는 하늘 한 자락과
푸른 솔잎 입에 문 물총새 한 마리 그리고
솔바람이 있네 아니 지하철 분실물신고센터
알림판엔 깔깔 웃음 웃던 습득물이 붙어
있네 동굴 속으로 고함지르며 사라진
습득이 붙어있네 습득*이 보이네
* 拾得은 당나라 때 사람. 국청사 풍간선사가 주워 키웠다. 한산과 늘 같이 한암 깊은
굴에서 지냈고 절에서 허드레일하여 밥을 얻었고 미친 짓 하면서도 선도리에 맞았고
시를 잘했다. 태주자사가 한암으로 찾아가 옷과 약을 주니 ‘도적놈아 도적놈아 물러가
라’하며 웃으면서 한암 속으로 사라졌다.
근작시
눈은 내리고 다시 눈은 내릴 것이고 아득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작년 또 작년을 넘어 눈이 내린다
오늘도 아닌 오늘 오늘의 눈이 내린다 눈 위에 내가 눈 아래 내가 있다 나는 나 아닌 눈사람 눈을 머리에 이고 다가오는 사람들, 다가오고 지나고 열심히 아스팔트 위 에서 눈사람이 걸어가네 나 없는 내가 걸어가고 작년 넘어 눈이 내리고 다음다음의 눈이 올 것이고 주먹코를 풀면서 주먹코 밑 입술 위 카이젤 수염 눈사람이 걸어가네
눈으로 다리를 베어낸 빨간 우체통이 눈을 감고 눈에 다리를 묻고 서 있네 눈이 다리를 감추고 바람이 눈 사이로 망토를 펼치면 어린아이를 감추고 날아가네 바람다리 눈이 된 바람이 그렇게 오고 그렇게 가네 없는 내가 보이는 내가 보여지지 않는 내가 있고
그 곳곳마다 바로 이 찰나의 눈이 눈을 보네
송준영 1995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눈 속에 핀 하늘 보았니』, 『습득』, 『조실』, 『물 흐르고 꽃피고』가 있다. 논저 『선의 시각으로 읽는 반야심경』, 『표현방법론으로 본 선시연구』, 선문염송 강의 『현대 언어로 읽는 선시의 세계』, 『禪, 빈거울의 언어』, 대담집 『禪, 초기불교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너머』가 있다. 선시론 『禪, 언어로 읽다』, 『禪, 발가숭이 어록』, 『현대시의 이론과 창작실기』등이 있다. 편저로는 『이승훈의 문학탐색』, 설악선사의 『빈거울 절간과 세간 사이에 놓기』가 있다. 제3회 불교문학상, 제6회 박인환문학상, 제17회 현대불교문학상, 제16회 유심학술상 수상.
제7회 수상작
위독
김왕노
위독은 거대한 짐승입니다
위독한 사이 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울부짖는 얼굴이 되기도 합니다 숨겼던 진실을 각혈하듯 게워내기도 합니다 위독한 자는 심연에 가라앉은 고래가 되어 잠들지 않는 뇌로 우주를 명상하기도 합니다 위독하다는 소식이 짐승 한 마리로 먼 길을 밤새워 왔을 때 나는 날 간 같은 영혼을 던져주려 했습니다 살 몇 근 거뜬히 베어주려 했습니다
일생에 몇 번 위독이란 짐승이 되었을 때
스스로의 살점을 녹여 뼈마디까지 드러나게 한답니다
무엇을 지탱하기 위해 살가죽을 밀며 드러나는 뼈마디들인지
죄마저 끝까지 버티게 해주는 뼈마디의 의도가 어디에 숨어있는지
결국 죽음 속으로 무너져가면서 왜 쉬 삭아 내리지 않고
마지막 까치 관속의 어둠을 견디는 뼈인지
후략의 말 뒤에 무엇을 덧보태고 싶은지 스스로 묻기도 한답니다
멀리서 그대 위독이란 짐승이 되어 누워있습니다
그대에게 철철 쏟아져 내리는 마지막 말들이 자귀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미루나무 뿌리를 적셨는지 창밖의 계절은 독 오른 듯 푸르다는데
그대 이제 이승의 살점 다 빠지고 뼈만 앙상해진 위독이란 짐승
사랑이고 그리움이고 다 말라가 피골이 상접한 짐승
그러나 지금은 본성이 살아나 밤하늘을 향해 우우 울부짖는
지상의 마지막 순결한 한 마리 짐승
나마저 화답해 우우 우는 밤이 산맥을 넘어 강을 건너
저렇게 성큼성큼 옵니다
근작시
거목
어릴 때 기어 올라가서 새처럼 숨어 놀았던 나무
세월이 널뛰기하던 동란 때는 무고한 사람 세워두고
죽창으로 찌르고 총질까지 한 피비린내를 맡았던 나무
죽음을 둘러싼 울음이 원한이 극에 달할 때
그것이 거름기 인양 더욱 푸르렀다는 나무
임종 직전 환자의 피 섞인 오줌똥을 다 받아낸
용기같이 더럽던 시절을 다 보고
다 받아내었으니 영험해 심한 바람이 불 때나
험한 세월이 올라치면 밤새우며 운다는 울음나무
저 나무의 가지로 자라는 실연해 목을 맨 사람 이야기
저 나무 가지로 자라는 깊은 밤에 나무 아래서
아무도 모르게 외간 남자 만나다가 들켜
새색시 소박맞고 떠나간 이야기
저 나무 가지로 자라는 세상 온갖 이야기
인두겁을 쓰고는 도저히 저지르지 말아야 할 이야기
저 나무는 세상 이야기에 뿌리내려 날마다 자랐다.
때로는 깊이 뿌리내려 푸름을 우듬지까지
끝없이 길어 올려 촘촘히 짠 그늘을 세상에 내민다.
사람보다 더 나은 나무, 내가 비틀거릴 때
내가 기대도록 둥치를 슬며시 내밀던 나무
고목이라기보다 가슴에 우뚝 서 중심이 돼주는 거목
거목이 사라진 세상에 세상을 맡기고 싶은 나무
김왕노 199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황금을 만드는 임금과 새를 만드는 시인』, 『슬픔도 진화한다』, 『말달리자 아버지』, 『사랑, 그 백년에 대하여』, 『중독-박인환문학상 수상집』, 『사진속의 바다-해양문학상 수상집』, 『그리운 파란만장』, 『아직도 그리움을 하십니까.』, 『게릴라 (2016년 디카시집)』, 『이별 그 후의 날들 (2017년 디카시집)』이 있다. 한국해양문학대상, 박인환 문학상, 지리산 문학상, 디카시 작품상, 수원문학대상, 한성기 문학상 등 수상.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금 등 5 회 수혜.
제8회 수상작
어느 날 가리 노래방을 지날 때
-일종의 詩 라는 것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김민정
‘앙서점’이나 ‘님짜장’*처럼 글자 하나 툭 떨어진 의외의 간판으로 마음 쿵 하는 경우라야 참 흔하다지만 그래도 발견하는 재미 꽤 쏠쏠하여 길 가다 우뚝 여기 어딘가 둘러볼 때가 있지
대낮이라 더 깜깜한 거기 그 가리, 가리 노래방 아래 나는 서 있었고 그건 배호나 고복수를 불러 재낄 때의 아버지처럼 비장을 건드리는 것이어서 나는 씁쓸과 쓸쓸 사이에서 창이나 슬쩍 열어둔 참이었는데
그때 들리는가, 모래바람이 인다고 했지 모래알갱이도 잘근잘근 씹힌다고 예사 사막인가 신발 벗으니 모랫발도 탈탈 털린다고 누군가는 말하였고 어떤 분은 말씀하셨는데 그게 무슨 멍게 여드름 짜는 소리래요, 닭살이나 긁는 나는 뱀살이나 비비는 나는 모레도 아니고 모래라니까 매일 아침 이 거리를 조깅하는 아가씨의 발목에 찬 모래주머니라도 찢어볼 요량으로 칼이 좋을까 모종삽이 좋을까 펜을 고르는 재미로다 詩라 하였는데
그건 아니라 하고 그건 틀렸다 하고 초 없이도 굳은 심지를 토하는 그분께선 부르면 답이요 받아 적으면 詩라 하였는데 초인이신가 만주벌판에서 말 타고 오신 선구자신가 농담인데 장난도 인생인데 왜 버럭 성은 내고 그러실까 이런 데서 화내시면 얼어 죽는다는 노래나 아실랑가 내 썰렁함의 전언은 바라건대 유머 일번지의 최양락처럼 안 괜찮아도 괜찮아유, 하는 것일진대 목도리는 왜 겹겹으로 싸고 그러실까 가리 하면 오리도 있지 않을라나 내 썰렁함의 두 번째 전언은 바라건대 일밤의 김정렬처럼 숭구리당당으로 힘없으면 다리 풀면 될 것일진대 이빨은 왜 앙다물고 그러실까
불쑥 ‘용’이라는 붉은 글자나 달아볼까 이고 나오시는 주인아저씨는‘가리’와 ‘용가리’ 사이에서 아슬아슬 시소를 타는 우리들의 詩를 알까나 모를까나 어쨌거나 우리들의 詩는 오늘도 우리들의 오버로만 돌고 돌아 빙고!
* 앙서점은 유강희 시인, 님짜장은 이규리 시인의 시 제목에서 빌음.
김민정 199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가 있다. 산문집 『각설하고』가 있다. 박인환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수상.
제9회 수상작
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
문현미
사람 사는 냄새가 맡고 싶으면 밀양군 북면 가산리로 오세요 그곳엔 60년 해묵은 이발소, 낡은 희망발전소가 하나 있지요
투박한 바리깡, 케케묵은 의자들, 연탄난로에서 보글보글 세월을 끓이는 찌그러진 알루미늄 주전자, 바닥에는 갓 떨어져 나온 보풀 온기들, 복덕방 김씨 영감, 중국집 배달부 이씨, 여기저기서 몰고 온 때 묻은 풍문들이 잘려나가는 머리카락보다 더 수북이 쌓입니다 와 달라는 연락을 받으면 ‘금일 휴점’ 팻말을 붙여 놓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이발사, 이발소를 찾았다가 팻말을 보면 어디로 갔는지 세상 이치를 어림짐작하는 동네 사람들,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친구의 오랜 쑥대머리를 깎아주고 감겨 줍니다 빗질을 쓱쓱 하니까 친구가 이발사보다 훨씬 더 젊어 보이지요 이발사의 입가에 반달 미소가 걸리면 “머리 다 깎았다. 괜찮나?” “쪼매 못났다” 숫돌에 무딘 가윗날을 쓱싹쓱싹 갈고 있는데 엿장수 최씨가 들어오며 엿가위 소리 툭 던집니다 “오늘 돈 마이 벌었나?” “그냥 밥 묵꼬 살면 된다 아이가. 하루에 세끼 더 묵꼬 사나?”
사람 냄새가 누룩처럼 부풀어 올라 동네가 구수구수 사랑으로 익어 가지요 잘려나간 머리카락만큼 온정이 더 쑥쑥 자라나는 가산리 희망발전 이발소
근작시
어떤 수치
-서대문형무소
형무소 마당 위로 노란 햇살이 대규모로 쏟아진다
눈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
붉은 피 한 방울 섞여 있지 않다
저 찬란한 방조 앞에서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하나
끝내 은폐된 감옥이 될 것 같던 별들이
높은 십자가의 기적처럼 땅의 신전으로 돌아오고
수치를 모르는 발들의 당당한 걸음 앞에서
수인번호를 달고 있는 듯
어둠을 밝히는 별빛이 가슴을 관통하는 시간
도깨비바늘처럼 달라붙는 먹먹한 우울
빛 한 톨 스며들 수 없는 먹방의 느낌 같은 것
수치의 온도에 대하여 뜨겁게
수치의 부피에 대하여 냉정하게
손에 못 박히는 수치, 발에 끈적거리는 수치,
몸을 빙빙 싸고도는 수치, 엉뚱스런 수치, 어리석은 수치...
산산이 쪼개지는 감정의 결이 풍경을 모두 차지한다
천 길 물속보다 더 깊은 옥사의 길은
주검이 버려지는 한쪽 모퉁이
증인처럼 서 있는 미류나무가 있는 곳으로 통한다
『시와정신』봄호
문현미 1998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기다림은 얼굴이 없다』, 『칼 또는 꽃』, 『수직으로 내리는 비는 둥글다』, 『가산리 희망발전소로 오세요』, 『아버지의 만물상 트럭』, 『그날이 멀지 않다』, 『깊고 푸른 섬』이 있다. 번역서로 안톤 슈낙의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사랑만들기』, 『릴케문학선집 1권-4권』등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한국크리스천문학상, 시와시학작품상, 한국기독시문학상, 종려나무문학상, 한국문학인상 수상. 현재 백석대학교 도서관장, 山史현대시100년관장, 보리생명미술관장, 백석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봉직하고 있다.
제10회 수상작
어느 악사의 0번째 기타줄
함기석
흉부가 기타로 변한 여자가 어둠 속에서
늙은 몸을 조율하고 있다
심장을 지나는
여섯 개의 팽팽한 핏줄들
눈을 감고 첫 번째 줄을 끊는다
금세 깨질 것만 같은 울림통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핏물이 저음으로 흐른다
기억은 동맥으로
망각은 정맥을 타고
심장 아래
시간의 텅 빈 자궁 속으로 흐른다
여자는 어둠을 안으로 삼키고
두 번째 줄을 끊는다
음의 물결 사이로
죽은 아이의 얼굴, 말들의 울음이 떠돌고
구름이 흘러나온다
내장이 훤히 비치는 구름
마지막 줄을 끊자
아이가 잠든 숲, 숯보다 어두운 숲의 지붕으로
연못이 떠오르고
여자의 몸이 묘비처럼
밤의 낮은음자리표 쪽으로 기운다
시간이 타 버린 얼굴엔
검은 반점들이 추상 문자로 남아 있고
핏물은 점점
소리 없는 음이 되어
생의 늑골 밑으로 어둡게 번져 간다
신음 속에서 0번 줄을 퉁긴다
울림통 가장 밑바닥 샘에서 통을 깨는 음
침묵이 흘러나온다
아이가 기르던 은빛 물고기들이 나와
공중의 연못으로 헤엄쳐 가고
시계들이 날개를 활짝 펴고 0시의 바깥 세계로 날아간다
하늘엔 주름진 바위, 누가
악사의 혼을 저 어둡고 축축한 천공에 옮겨 놓았을까
기타에 붙은 두 손이
흰 새가 되어
숲의 적막 속으로 무한히 날아간다
근작시
정물 연인
네 눈이 네 얼굴에 박혀 있으므로
그것은 폭약이므로
향나무는 타오르는 폭포고
해바라기는 지구에 불시착한 회전체 우주선이다
그것은 테이블 A 모빌 B
밤새 파도는 불타오르고
물과 절벽의 밀회 속에서 물거품은 태어나고
내 눈이 내 얼굴에 박혀 있으므로
그것은 욕조이므로
섬들은 흰 집이 되어 날개를 편다 먼 우주를 향해
백사장에 누워 잠든 알몸 외계인
처녀 a 총각 b
그것은 난파한 배, 생환이 불가능한 그물
『포엠포엠』 2018년 여름호
함기석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오렌지 기하학』, 『뽈랑 공원』이 있다.
제11회 수상작
도둑키스
황병승
카페 문을 열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들어섰다탁탁 발을 구르며
마치 남자의 등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에스프레소
진하고 빠르게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손가락이 메뉴판 위를 스치듯 지나갔을 뿐
마치 말이 필요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말굽에 짓밟히듯이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불타는 입술이 여자의 입술을 짓눌렀고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포켓 속의 움켜쥔 두 손에서 쿵쾅거리는 두 개의 심장을 느꼈다
서른 살의 가슴이뿌리째 흔들렸나 보다
창밖에는 때아닌 굵은 눈발이 흩날리고몰려든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이창가에 서서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치 혀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진하고 빠르게
채찍에 휘감기듯이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움켜쥔 두 개의 심장이 붉게 달아오른 두 볼에서 마구 뛰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고어느새 창밖의 눈발은 그쳤으며매부리코 흰 콧수염의 남자들도 모두 사라진 뒤였다
마치 남자의 급작스런 퇴장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듯이
붉은 조끼의 놀란 여자는 매부리코 흰 콧수염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포켓 속에서 간신히 담뱃갑을 꺼내들었다
라이터......라이터......라이터......
황병승 2003년 『파라21』로 등단. 시집으로 『여장남자 시코쿠』, 『트랙과 들판의 별』, 『육체쇼와 전집』등이 있다. 2010년 제11회 박인환문학상, 2013년 제13회 미당문학상 수상.
제12회 수상작
복도
이준규
복도는 복도다, 복도는 걸어갈 수 있고, 복도는 서서 끝을 볼 수 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복도는 말이 없고, 겨울밤의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복도에는 달빛이 흐르지 않고, 가로등 빛이 흐르지 않고 복도의 불빛이 흐른다, 그것들은 흐르는 것들이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복도의 끝을 본다, 문을 열면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면,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조금 미쳐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감동이 있는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복도에는 창이 있고,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밖에는 세상이 있고, 세상의 밖에는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의 밖에는 황당함이 있고, 황당함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말고는, 내가 너에게 이 시를 줄 것 같으냐, 나는 조금 미쳐 있고, 조금 미쳐서 겨울밤의 이 누추한 시를 쓰고 있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이준규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으로 『흑백』,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삼척』등이 있다. 12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루 동인.
제13회 수상작
경청하는 개
김언
식물은 경청하고 있다. 말하는 방식으로.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또 말하는 방식으로.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감정으로.
청각은 과격하다. 귀는 예민하고 더 예민해졌다. 이파리처럼 길고 넓은 귀는 헌 이파리를 죽여가면서 새 이파리를 내보낸다. 줄기 하나가 단단해지고 있다. 신경은 더 가늘어지고 있다. 끝이 안 보이는 방식으로
성장을 미루고 있다. 성장을 동반하는 방식으로. 우울을 동반하는 방식으로 웃고 떠들고 욕하고 짐짓 반성하는 방식으로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근다. 나는 경청하고 있다. 쫓겨나는 방식으로.
문밖에서 벌벌 떨며 창밖에서 한없이 기다리는 방식으로 나뭇가지는 들어온다. 일부는 이미 들어왔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불이 켜지는 방식으로
나는 두 시간째 기다리고 있다. 나무는 십 년째 서 있다. 나의 판단이 맞다면 저 안에서 소리는 이미 시작하고 있다. 방 안에서 창 안에서도 새로 돋는 이파리 안에서도.
경청하는 귀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창밖으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다. 들어오라는 손짓 같기도 하고 나가라는 발짓 같기도 한
그것의 일부는 이미 들어와 있다. 들어와서 사사건건 짖는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근작시
파리의 기억
나는 파리에 한 번 가본 적이 있고 갈 때마다 에펠탑에 올라간다. 파리는 단 한 번 나를 감동시켰고 매번 그 인상을 바꾼다. 한 번은 강렬했다. 한 번은 기묘했고 한 번은 그저 그랬다. 또 한 번은 식상하다 못해 지겨웠고 마지막에 갔을 때는 두 번 다시 못 올 데라는 생각을 파리에서 했다. 파리는 그만큼 얼굴이 많다. 감춘 얼굴도 많고 드러내는 얼굴도 많으며 그때마다 표정이 바뀌는 도시에서 나는 단 하룻밤을 보내고 왔다. 이틀째 되는 날 다른 도시로 넘어가기 전에 내가 언제 다시 이 도시에 올까 상념에 잠기는 시간을 작년에도 가졌고 재작년에도 가졌던 것 같다. 대체 너는 파리가 몇 번째니? 누가 묻는다면 한 번으로 족하지 않을까? 두 번이면 충분하고 세 번이면 이미 많지. 그러고 보면 헤아리기도 귀찮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파리에 와 있다. 매번 적지 않은 사람들이 파리를 떠나고 있다. 저들은 몇 번째일까? 이 도시에서 이 도시를 떠나며 이 도시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날은 앞으로도 많을 테지만 단 한 번 파리를 방문한 사람으로서 파리의 기억을 남긴다. 갈 때마다 달라지는 이 도시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문이 끝나고 있다. 그때가 작년이고 올해는 언제일까? 지겨우면 또 갈지도 모른다. 그 파리를 찾으러.
수록지면 21세기문학 2018년 여름호
김언 1998년 『시와사상』으로 등단. 시집 『숨쉬는 무덤』, 『거인』, 『소설을 쓰자』, 『모두가 움직인다』, 『한 문장』, 『너의 알다가도 모를 마음』이 있다. 미당문학상, 박인환문학상 등 수상.
제14회 수상작
전망 좋은 창가의 식사
박장호
적막한 원시를 해체하고, 당신과 나는 창가에 앉아 아침을 먹습니다. 까만 겨울밤을 보낸 우리의 창밖엔 나도, 나의 당신도 없습니다. 공존하는 우리의 부재가 당신과 나의 창을 반투명으로 만듭니다. 창밖의 사람들은 산들바람을 맞으며 햇볕 좋은 곳으로 봄 소풍을 갑니다. 우리가 피웠던 침대 위의 흰 꽃이 떠오릅니다. 송곳니와 부리를 발라낸 한 송이 눈꽃. 꽃의 향기는 나침반의 붉은 바늘처럼 나를 따라옵니다. 눈에 띄면 녹아버리는 침묵의 문명. 나는 식탁의 북쪽에서 당신은 식탁의 남쪽에서 질기고 오랜 식사를 합니다. 우리는 마치 낙오한 극지의 동물들 같습니다. 우리의 배경에 희끗희끗 눈발이 비치고 하얀 평원이 펼쳐집니다. 나는 얼음 수염을 달고 당신은 얼음 눈썹을 달고, 멸종 직전의 북극곰처럼 남극에서 길 잃은 북극 제비갈매기처럼, 우리는 서로의 눈 속에 녹아 흐르는 만년설을 봅니다. 물속에서 연어들이 솟구칩니다. 붉은 연어 알이 말할 수 없는 사연으로 쏟아집니다. 날카로운 수저로 뜨는 결별 의식, 이 사연을 다 삼키면 우리는 각자의 방향으로 밀봉된 편지가 되어 무리를 찾아 나서겠지요. 창밖의 사람들은 푸른 잔디 위에서 웃음꽃을 피우고 식사를 멈춘 우리의 식탁 위에 하얀 살갗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박장호 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 『나는 맛있다』, 『포유류의 사랑』, 산문집으로『샌드백 치고 안녕』이 있다.
제15회 수상작
미시감
오은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사람이 울며불며 매달린다
여기 있습니다
사람이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없던 법이 생기던 순간,
몸이 무너졌다
마음이 무너졌다
폭삭
억장이 무너졌다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처음처럼 한결같이 서툴렀다
사람이 사람을 에워싼다
둘러싸는 사람과 둘러싸이는 사람이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어색해한다
사람인데 사람인 게 어색하다
여기서 울던 사람이
길에 매달려 가까스로 걷는다
집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집에 가는 길에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안녕
어떤 말들은 안녕하지 않아도 할 수 있다
속이 상한 것은
겉은 멀쩡하기 위한 거지
겨우내 겨우 내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봄은 꽝꽝 얼어붙어 있었다
푹푹 꺼지는 땅 위에 사람이 서 있다
여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이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여기 있을 겁니다
근작시
세 번 말하는 사람
o는 꼭 세 번씩 말했다 그의 입에서 같은 말이 속사포처럼 작게 세 번 흘러나올 때 사람들은 크게 한 번 놀랐다 같은 말을 연속해서 듣는 것은 고역이었다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라니!
혀가 짧아서, 속사포의 성능이 좋지 않아서, 단어의 시작과 끝이 토마토나 아시아처럼 같은 음절이어서 어떤 말은 세 번 말해야 상대가 겨우 알아들었다 불발이 된 단어는 늘 부끄러웠다
김치볶음밥에 어떤 재료를 추가하고 싶으신가요?
피망, 피망, 피망
말할 때 너무 열을 올려서 그런지 세 번째 피망은 피멍처럼 들리기도 했다 놀란 종업원이 조건반사처럼 고개를 세 번 끄덕였다 덕분에 피망볶음밥에 가까운 김치볶음밥이 나왔다
한 번만 말하면 의심스러웠다 뜻이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상대가 말을 제대로 듣긴 했는지 간파할 수 없었다 파열음이나 마찰음이 섞여 있기라도 하면, 한 번 만에 의사를 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두 번을 말하면 상대가 의심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꼭 두 번을 말한다고 했다 사기꾼들은 보통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두 번 말하지 투자하세요, 투자하세요 수익이 납니다, 수익이 납니다
과감하게 투자하실 건가요?
수염, 수염, 수염
수익이 나는 걸 기다리느니 수염이 나는 게 빠르겠다고 답하려다 실패했다 웃음이 났는데 참다 보니 눈물이 났다 속사포의 방아쇠는 총알의 일부만 견인할 때가 많았다
세 번씩 말하면 사람들이 집중했다 세 번 말하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여겨졌다 간절한가 봐, 강조하고 싶은가 봐, 각인시키기 위해서인가 봐 봐봐, 두 번도 아니고 세 번이잖아!
세 번째 말할 때 입천장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식욕이 돋았다 무조건반사처럼 천장에서 단비 같은 침이 쏟아졌다 o는 그것을 다시 식도 뒤로 꿀꺽 삼켰다
저녁에는 무엇을 드시고 싶습니까?
차장면, 자장면, 짜장면
속사포에서 파찰음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창작과비평』 2018년 봄호
오은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유에서 유』가 있다. 작란(作亂) 동인.
제16회 수상작
뜨거운 곡선
박성준
기념하고 싶은 날을 만듭니다 기억이 잘나지 않는 꿈이
꿈을 꿉니다 나는 내 숨소리에서 네가 가장 두렵습니다
남자가 안개처럼 눈을 감으면 만나지 못한 방들은 햇빛이 됩니다
이때 여자는 눈을 감고 겨우, 냄새에 대해 생각하곤 합니다
새들이 제 그림자를 쫓아 가 울면 맥박은 조금 더 분명해졌을까요
어떻게 한 번쯤 죄인이 되지 않고서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는지
먼 곳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무슨 말이든 해달라는 얼굴로
늘상 고함을 쳐도 좀체 구름 떼는 짐승 바깥으로 돋지 않고
용서나 허락이 필요한 아침입니다
창문들이 어디론가 메스껍습니다
손톱처럼 웃던 여자는 하품을 하다가 눈물을 잘 흘립니다
종이에는 의자가 숨어 있고 물속에는 죄다 수술 자국뿐입니다
벌써부터 도착해 있는 자목련은 남자의 이마를 닮았습니다
신작로 위에 분분하던 잿빛들은 놀랍게도 무릎이 아닙니다
대체 이게 다 라면, 남자는 계단을 내려가고 여자는 계단을 붙잡아 지웁니다
우리는 평평하게 숨을 쉬고 있습니다
나는 나에게 거절당한 적이 있습니다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나는 이유는
꿈에서나 슬퍼할 일을 먼저 예감했기 때문입니다
근작시
태엽은 괜찮습니까
간격 때문에 안전합니까.
한 번도 통과하지 못한 유리창과
어디론가 가는 중인 황소, 어디론가
조금 일찍 일어난 물병
사자 한 마리는 제 머리를 쏟으며 달립니다.
고운 가루가 된 물고기가
구두 속으로 들어가 위험하다는 뜻처럼
곡선은 곡선의 연습입니다.
창살을 만지고 있으면 기차소리가 들립니다. 울기로 작정한 날에도 눈물보다 무거운 몸 때문에 차마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만나기로 작정한 사람을 영영 스스로 해명하는 기분, 여기가 먼 곳입니다. 넘어졌다가 일어나서 본 하늘은 전부 점성술 같은 쪽빛으로 들립니다.
뒤를 돌아보면 참아보려고 하는 버릇과 멈춘 구름 대신 감쪽같은 빛이 흐르지요. 왼쪽으로 기울어질 채비를 하고도 꿈보다 가벼운 이불 때문에 벌거벗은 간밤은 서로 모르는 선물을 가지고 전진합니다.
어두운 창문 곁에 기대어 잠을 청하면 내가 나에게 기대고 있는 것만 같다고. 그 사람은 나를 잘 알아가는 중입니다. 비 오는 날 오전까지 밤의 신체는 젖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으면 눈꺼풀을 따라 꼭 해안선이 펼쳐집니다.
촛불은 늘 젖어 있습니다.
『시와시학』 2018 가을호
박성준 2009년 『문학과 사회』로 등단. 2 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등단. 시집으로 『몰아 쓴 일기』, 『잘 모르는 사이』가 있다. 제16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제17회 수상작
내가 없는 세계
송승언
초기계를 생각한다
인간을 만들었다 여겨지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인간의 운명으로는 감당치 못한
기계장치의 세계
죽은 꽃나무 기계는 인간에 의해
생각된다
신이 스스로가 신임을 견딜 수 없었을 때 신이 의심되었듯이
기계 스스로가 기계임을 견딜 수 없을 때
죽은 꽃나무 기계는 황무지를 걸어 다니고
걸어 다니는 꽃나무 아래에 시체를 묻으면 꽃이 아름답게 핀다는
구식 세계의 믿음은 인간 없이도 전해 내려와
없는 시체가 묻히기를 기다리는
죽은 꽃나무 기계가 있었을 때
없는 계절의 꽃을 피우기 위해
신이 된 체제로부터 나는
생각되었다
송승언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철과 오크』가 있다. 제17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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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수상작
벽화
김학중
1
눈먼자가 처음 그 벽에 부딪쳤을 때 벽이 거기 있다는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벽을 발견하게 된 것은 눈먼자가 자신의 몸을 뜯어 그린 벽화를 보고 나서였다.
2
벽화는 아름다웠다. 거친 손놀림이 지나간 자리는
벽의 안과 밖을 꿰매놓은 듯했고 스스로 빛을 내듯 현란했다. 색색의 실타래들이 서로 몸을 섞어 꿈틀대는 그림은 벽에서 뛰쳐나가려는 심장 같았다. 그 아름다움은
벽의 것인지 벽화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벽화를 본 사람들은 구토와 현기증을 호소했다. 그들은 벽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환희인지 고통인지 알 수 없는 감각을 느끼며 벽화를 벽에서 뜯어내기 시작했다. 벽화가 부서지고 있었다. 벽 앞에 모여든 사람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3
벽화의 잔해를 손에 쥐고 나서야 사람들은 거기 벽이 있었음을 알았다. 벽화를 그린 자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단지 그들은 그 자를 눈먼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를 부를 이름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붙인
이름 아닌 이름
벽을 나누어 가지고도
벽을 볼 수 없었던 자들은 흩어지며
그 이름만을 나누어 갔다.
근작시
암점
병상에 누운 아버지와의 대화는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그는 좀 가벼워지고 있었다. 나는 낡은 그의 안경을 고쳐 씌어 주었다. 그의 시선 속에서 여기가 녹고 있었다. 아들아 나는 오늘도 기억이 깜깜하구나. 날씨는 어떠니. 나는 흘러가는 것을 모른체했다. 오후의 빛이 기울고 있었다. 아버지. 오늘은 강이 얼었어요. 언제 또 겨울이 왔니. 나는 춥지 않으니 걱정 마라. 아버지의 기억은 여기에 없다. 기억은 이제 그 자신만이 아니라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장소에 놓여 있다. 나는 그의 기억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대신 나는 병원 오는 길에 본 언 강을 생각한다. 그런데 아들아. 너는 내가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니. 아버지 우리는 오래 같이 살지 않았어요. 그래서 찾을 수 있었답니다. 그는 여기라고 말할 줄 알았지만 여기가 어디냐는 내 질문에 여기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는 모든 곳이 여기였다. 여기 곁으로 모든 것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병상 가까이에 거울이 놓여 있었다. 가까운 거울을 아버지 대신 내가 본다. 거울 속에서 아버지가 흘러가고 있었다. 어디에서 흘러 왔는지 모르는 데로 그는 아버지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흘러서 어두워진다. 아버지는 그렇게 흘러와 불행했는지 모른다. 이제 아버지는 자신의 입으로 늘 말하던 불행도 잊고 어둡다고 하신다. 여기가 어둡다고 하시면 팔을 가끔 긁으신다. 여기가 좀 가렵구나. 가려운 여기가 주름이져 있었다. 거울을 두고 다음에 또 올게요 인사를 한다. 진찰실에서 만난 의사는 아버지가 그마저도 잊고 있다고 진단했지만 문병만으로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의사가 화면에 띄운 아버지의 뇌 사진을 보면서 그게 그의 여기이구나 생각했다. 그의 뇌에는 여러 갈래의 강이 있었고 오는 길의 강처럼 얼어 있는 듯 보였다. 여기는 결빙되어 어둡구나. 거기에 그가 놓여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창 밖의 언 강을 오래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얼면서 녹는 강의 암점이 보였다. 암점을 바라보며 나도 잠시 팔을 긁적였다. 흘러가면서 녹는 여기란 저 암점인 것이다. 잠시 깊은 점인 순간. 그때에만 잠시 장소인 여기. 잠시 안이자 바깥인 암점. 어쩌면 거기에서 나눈 대화는 한 순간도 흘러가지 않았던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조금 가려웠을지도. 어떤 불행은 간지럽다. 강의 암점에서 갈라져 나오는 선들. 언 주름들. 추위 속에서 암점의 깊이에 다가서는 힘. 거기까지가 다 암점일 것이다. 차창 밖에 걸린 암점을 오래 바라보았다. 여기에 도착해 있는 오래된 깊이. 창밖이었던 시간이 어두워지는 밖을 비추고 있어서인지 나는 같이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현대시』 2018년 7월호
김학중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창세』가 있다. 18회 박인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