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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사랑 여행 스크랩 93년 전, 화성 제암리에는 무슨 일이…
天風道人 추천 1 조회 70 14.08.11 18:2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올해는 3·1 운동이 일어 난지 93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전국각지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만세운동에 대해 일본군은 전국각지에서 보복하기 시작합니다. 그 보복 중에서 한 마을을 통째로 학살하고 불을 질렀던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해서 사건의 배경과 발발, 이에 따른 증언, 일본 측의 사죄와 오늘날의 ‘화성 제암리 3·1 운동 순국 유적' 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암리 학살사건’정확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화성시의 3·1 운동을 먼저 알아 봐야 합니다. 화성시에서는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날 시위로부터 4월 1일과 2일은 각지에서 봉화시위, 4월 3일에는 면사무소 파괴와 주재소 공격, 순사를 죽이는 등 공격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4월 5일부터 화성지역의 만세운동 주모자를 검거하고, 급기야 제암리까지 들이닥치게 됩니다.

1919년 4월 15일 조용했던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 일본군 순사 아리타(有田俊夫) 중위가 들어오면서 ‘제암리 학살사건’은 발발을 하게 됩니다. 명목상으로는 발안의 치안을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들의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제암리에 도착한 아리타 중위는 교회당으로 15세 이상의 남성들을 모이게 한 다음, 미리 만들어 온 명단에 오지 않은 인물들을 찾아 교회당으로 몰아넣고 교회에 못질한 뒤 교회당을 향해 사격 명령, 사격 후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교회당에 불을 지른 뒤 남은 마을에도 방화했습니다. 그 후 천도교일가를 살해하기 위해 옆 마을인 고주리 김흥렬 가족 6명을 총살하고 시체를 유기하는 만행을 벌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 파괴된 제암리 교회 독립기념관 사적지 조사보고서

 

▲ 망연자실한 제암리 마을 주민 독립기념관 사적지 조사보고서

 

▲ 파괴된 제암리 마을과 한 아이 독립기념관 사적지 조사보고서

 

 

‘제암리 학살사건’과 관련하여 당시의 증언은 총 6명에 의해 나타나고 있는데, 대체로 비슷하나 일본군의 증언만이 실제와는 다르게 증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중 세 가지 증언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동례(田同?)의 증언

 

1. 낮 2경 일본인 사사까와 순사보 조희창이 군인들을 데리고 마을에 들어오면서 열다섯 살 위로 남자들은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했다.

2. 양쪽 방향에서 열댓 명씩 와서 교회 안에 들어가고 오지 않는 사람은 불러왔다.

3. 안종후 권사와 안진순 속장은 교회 뒷문 쪽에 서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데 둘에게 먼저 총을 쏘았다.

4. 북새통에 노경태는 탈출에 성공, 산으로 도망쳤다.

5. 교회 안과 밖에 짚을 늘어놓고 석유를 끼얹고 물을 질렀다.

6. 바람이 세게 불어서 교회 아래 있던 집들에 불이 옮겨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불을 질렀다.

7. 두세 사람이 교회 밖에 나와서 죽었는데 창자가 터져 나왔다.

8. 강태섭의 부인은 울고 있는데 군인이 칼로 목을 쳐 죽었다.

9. 「홍」권사 부인은 집을 수색하던 군인의 총에 맞아 죽었다.

10.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나무에 묶고 총살했다.

11. 저녁에 사사까가 일본인을 데리고 와서 교회 밖의 시체를 창으로 찔렀다.

 

전동례-제암리 사건의 희생자 안진순(安珍淳)의 미망인이다. 그의 증언은 숨어서 사건 현장을 목격했던 마을 주민들과 탈출자 노경태의 증언을 토대로 하고 있고, 그는 제암리 사건을 가장 많이 알린 대표적 인물이다.

 

 

 

·스코필드(F.W.Scofield)의 증언

 

1. 4월 15일 이른 오후, 군인들이 기독교와 천도교인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29명이 모이자 교회를 포위하고 창문으로 사격을 가해 모든 사람이 죽거나 부상당하자 교회에 불을 질렀다.

2. 몇 명이 탈출했으나 도중에 사살되었고 예배당 밖에서 도망치다 사살된 시체 6구도 발견되었다.

3. 남편 생사를 알려고 달려온 마흔 넘은 여인은 사살되고 19세 여인은 칼에 찔려 죽었다.

4. 군인들은 마음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스코필드-제암교회 사건과 관련, 가장 주목할 만한 선교사로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한국인 돕기에 앞장서서 언론에 투고하여 일제의 비인도적 만행을 폭로하였다. 1919년 4월 17일 제암리 학살사건 소식을 듣고 18일 사건 현장을 찾아가 사진을 찍고 조사했으며, 같은 날 수촌리를 방문하여 부상자를 돕고 수촌리의 잔악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남겼다.

그가 조사한 자료는 1919년 7월 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상황’(Korea Situation)의 증거자료로 실렸다.

 

 

·일본군의 증언

 

1. 4월 15일 오후 3시 반에 발안을 출발 제암리에 도착, 기독교인과 천도교인 20여 명을 교회당에 집합시키고 아리타 중위가 소요사건에 관해 질문을 하던 중, 한 사람이 도망치려고 해서 그를 막는데 또 한 사람이 의자를 들고 달려들어 칼로 찔렀다.

2. 집단 반항 기세가 보이자 교회 밖으로 나와 병사들에게 사격을 명령해 모두 사살했다.

3. 혼란 중에 서쪽 집에서 불이 나고 거센 바람을 타고 교회당에 옮겨붙어 연이어 20여 호가 불탔다.

4. 중위는 부대를 둘로 나누어 피난 및 가재운반에 종사하게 하고 자신은 병사 2명과 함께 뒷산에 올라 주위를 경계했다.

 

이외에도 당시 영국대사였던 로이즈(W.M.Royds), 프리랜서 기자였던 테일러(A.W.Raylor), 선교사였던 언더우드(H.H.Underwood)의 증언이 있으나 위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특징적인 증언만 골랐습니다.

 

 

 

일본군의 증언에 따른다면, ‘제암리 학살사건’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주민이 반항하여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을에 불을 지른 것도 일본군의 만행이 아닌, 혼란 중에 불이 났고 바람을 타고 교회당으로 옮겨붙었다 하는 걸 통해서 다른 증언과의 차이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의 일본인들은 외신의 보고와 선교사들의 항의에 다급해져 4월 20일 조선 총독이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여 1,500원을 내놓았고 7월에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부치는 등 미봉책을 보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 일본인들의 사죄가 이루어지는데 대표적으로는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1969년 4월 15일에 일화(日貨) 일천만 원을 모금해서 일본인 목사 오야마(尾山令仁)와 아리가(有賀豊三)씨가 한국으로 와 제암리 교회를 다시 세우는 등 추모행렬이 이루어진 걸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이 다시 지은 제암리 교회는 대지 150평에 수용인원 250명으로 지어졌는데, 공중에서 보면 교회 모양이 3자를 12m의 종탑이 1자를 표현함으로써 3·1 운동을 의미하게 만들어졌습니다. 

 

 

▲ 일본인들이 모은 성금으로 지은 교회(위)와 모형도(아래)

 

 

하지만 1997년 당시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서 교회를 허물고, 초기 교회 형태로 복원하였고 그 옆에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을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 현재의 제암교회와 순국기념관

 

 

‘화성 제암리 3·1 운동 순국 유적'은 82년 증언에 따라 9월에 발굴이 되었습니다. 발굴 당시 유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으며, 개중에는 총탄이 박힌 유해와 철사 등이 발굴되어 유해는 제암교회 뒤편에 23인 순국 합동묘지에 위령제가 지내졌고, 발굴품들은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에 지금도 전시가 되고 있습니다.

 

 

▲ 1982년 제암리 발굴현장(왼쪽)과 발굴 당시 통한의 오열을 하는 전동례할머니(오른쪽)

ⓒ네이버 라이브러리

 

 

일제의 만행이 있던 그곳, 제암교회는 1982년 11월 10일 ‘화성 제암리 3·1 운동 순국 유적’ 사적 29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1982년 세워질 당시의 순국기념탑 ⓒ네이버 라이브러리

 

▲오늘날의 순국기념탑

 

 

오늘날의 ‘화성 제암리 3·1 운동 순국 유적'을 가면, 1984년에 세워진 3·1 운동 순국기념탑과 함께 순국하신 23인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기념관, 23인 순국 합동묘지 등을 보실 수 있습니다.

 

 

▲ 23인 순국 합동묘지

 

▲ 순국 23인 상징 조형물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에서 당시의 사진과 함께 발굴되었던 철사나 맥주병 등을 볼 수 있으며, 국내·외의 3·1 운동 관련 자료들을 보실 수 있습니다.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 내부

 

‘화성 제암리 3·1 운동 순국 유적'을 다녀오고 조사하며, 교과서에서 배운 것보다 당시의 고통이 더 컸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앞으로 ‘제암리 3·1 운동 순국기념관’에 쓰여 있던 말처럼 우리는 일본을 용서는 하되 당시의 기억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 홈페이지(http://jeamri.hsuco.or.kr/kor/k_main.asp)를 참조 바랍니다.

 

 

 

<참고문헌>

화성시·수원대학교 동고학연구소, 『화성지역의 3·1 운동과 항일영웅들』,2005

화성시사편찬위원회, 『충·효·예의 고장』, 2005

이장락, 『민족대표 34인 석호필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2007, 바람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9-국내 3.1운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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