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②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대한제국 전역에서는 의병들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청나라와 러시아를 격파한 동아시아 최강의 일본군을 상대로 저항한 의병들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었다. 논에서 일하던 농부들, 거리에서 장사하던 사람들,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던 사람들, 일본군에 무기를 빼앗긴 군인들, 집에서 바느질을 하던 여인들…. 이른바 ‘민초’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중과부적이라는 것을 알고도, 친일이라는 편한 인생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조국을 위해 무기를 들었던 의병과 그들의 항일 정신을 계승한 독립군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이름도 얼굴도 없이 살겠지만, 다행히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얼마 전 종영한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의 한 대사이다. 의병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이다. 의병들의 사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도 없으며, 어떤 일들을 행하였는지에 대한 기록도 없다.
의병으로 인한 국가유공자로 국가보훈처에 기록된 숫자는 2,600여명이다. 실제로 얼마나 될까? 역사가들은 너무 적게 잡은 숫자라고 이야기한다. 최소한 수만 명이라는 것이다. 그보다 많으면 많지, 절대로 적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기록의 부재로 인한 아쉬움이다.
누가는 탁월한 문장가이다. 예수님의 일생을 정리하면서 단 5개의 동사로 요약하였다. 행하셨고, 가르치셨고, 사도들을 택하셨고, 성령으로 명하셨고, 승천하셨다. 크리스천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예수쟁이라는 말로, 또는 작은 예수라는 말로 대신한다. 즉, 성도들의 삶도 예수님의 삶처럼 다섯 단어로 요약되어야 한다. 행하였고, 가르치고, 제자들을 선택하고, 성령으로 행한다. 마지막은 조금 다르게 표현해야 한다. 기록하여야 한다.
만약 누가의 기록이 없었다면, 데오빌로를 비롯한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 무지했었을까!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되는 사도들의 행적과 초대교회를 통한 주님의 역사도 전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기록의 힘이다.
한국 사람들은 기록에 참 약하다. 일주일 동안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고인의 유품을 정리해도, 기록다운 기록이 전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라면, 나는 당연히 부모님이라 대답한다. 그런데 부모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생각해보니,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궁금해졌다. 그런데 지금은 이야기해 줄 사람도, 기록도 전혀 남아 있지를 않다.
사람은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사망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있는 자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때 진정으로 숨을 거둔다.이런 의미에서 누군가를 위한 기록을 남기면 좋겠다. 자녀들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그 누군가를 위해서. 기록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예수쟁이로서의 기록이면 좋겠다. 예수쟁이이기 때문에 해야만 했던 고민, 예수쟁이이기 때문에 선택했던 순간들, 그래서 겪었던 아픔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겼던 승리의 순간들……. 그 기록을 잠자는 배우자의 머리맡에 놓아도 좋고, 등교하는 자녀의 가방에 넣어주어도 좋고, 사랑하는 부모님의 책상 위에 놓아드려도 좋다.
글은 꼭 명문장이 아니어도 괜찮다. 긴 글이 아니어도 물론 괜찮다. 물론 명필이 아니어도 괜찮다. 예수쟁이로서의 신앙의 결단이 담긴 글은 분명 누군가에게 성령님의 도구로 사용된다. 2,000년 전, 이러한 글들을 모아 성경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남기는 기록을 성경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누가복음 또는 사도행전처럼, 누군가의 영혼을 일깨우는 성령의 도구가 될 것이다.
‘기록하였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행하다’는 의미의 ποιέω이다.누가가 예수님의 생애를 정리할 때 첫 번째로 사용했던 ‘행하시며’와 같은 헬라어 단어이다.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사랑, 그것은 예수님에 관련된 일들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로마의 관리였던 데오빌로가 예수님에 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 한 사람을 위해 수도 없이 많은 자료들을 수집하였고, 정리하였다. 데오빌로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방대한 작업을 해낼 수가 없다. 누가복음은, 그리고 사도행전은 데오빌로라는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의 결과물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는다.’ ‘오래 참는다’라는 말은 ‘희생하다’ ‘제물로 바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인 행위이다. 구약시대의 제사를 생각해보자. 제사 때는 반드시 제물을 바쳤다. 제물을 바친다는 것은 제물을 죽인다는 말이다. 소나 양이 희생하는 대신 사람이 산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제사를 ‘희생 제사’라 불렀다.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식은 부모의 희생으로 성장한다. 누구든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찡해지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부모님의 희생 속에서 성장하고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누가는 자신이 사랑해야 할 데오빌로를 위하여 누가복음 24개 장과 사도행전 28개 장을 기록하였다. 총 52개 장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쓴 것이다. 일반도서의 경우로 따져 대략 100쪽에 이르는 긴 분량의 글을 데오빌로, 단 한 사람을 위하여 쓴 것이다.
지금처럼 컴퓨터가 있어서 지우고 삽입하는 것이 용이하던 시대가 아니다. 편리한 필기도구도 물론 없었다. 파피루스 줄기를 종과 횡으로 겹쳐 만든 갈대 종이에 새의 깃털로 글을 적었다. 그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총 52개 장에 이르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다는 것은 자기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 안에서 데오빌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누가의 사랑을, 사랑의 열매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성경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 한 줄도 기록을 남기지 않으셨다. 그 대신 당신 자신을 희생하셨다. 당신 생명의 한 부분이 아닌, 돌아가시기까지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희생하셨다. 인간을, 우리를,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죽음마저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은 우리를 살리는 생명과 구별되지 않는다.
해방되기 전, 황해도 해주에 살던 한 여성이 서울로 유학, 이화여자대학 성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고향 해주로 돌아가 결혼하였는데, 남북이 분단되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북한에서 살게 되었다. 39세 때, 남편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북한군에게 총살당했다. 얼마 후에는 아들 둘마저도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역시 총살되었다. 79세가 되던 2003년 겨울, 신앙의 자유를 찾아 두만강을 넘었다. 지금은 정부에서 제공한 임대아파트에서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50년 동안 북한에서 살았던 인생의 결론은 간단하다. “공산당은 사랑이 없어!”
다 같이 힘을 모아 생산하고, 생산한 것을 똑같이 분배하자는 것은 좋은 이야기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겠다. 그런데 말과 현실은 너무 다르다. 북한에서는 가진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의 차이가 너무 크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안에는 자기희생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더 많이 가진 사람의 주머니를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희생이다. 희생의 결과는 생명이다. 부활이다.그 엄청난 사랑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영혼에는 철필로 쓴 기록이 있다. 그것을 문자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성경에는 사랑이 기록되어 있다. 그 사랑이 없다면, 성경은 더 이상 성경일 수가 없다.
교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 중 ‘나눔’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말인데, 잘못 오용되는 것 같다. 사랑이 없는 나눔은 행사에 불과하다. 자기희생이 있는 ‘나눔’이 진정한 사랑이다. 교회처럼 많이 나누는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교회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이, ‘자기희생’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희생을 주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희생은 곧 자기 소모라고 생각하기 따름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자녀는 부모의 희생으로 성장한다. 부모가 살면 자녀가 죽고, 부모가 죽으면 자녀가 산다. 목사가 살면 성도가 죽고, 목사가 죽으면 성도가 산다. 참을 때, 희생할 때,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는다. 언제 진심으로 사랑해보았는가? 언제 누구를 위해 자기희생을 해보았는가? 신앙이 성장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진심으로 자기희생을 해야 한다.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듯, 희생하지 않는 신앙은 절대로 성장할 수 없다.
자기희생의 사랑인지, 자기만족의 사랑인지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아까운 마음이 들면 자기만족을 위한 사랑이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면, 십자가의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면 자기희생의 사랑이다.
누가는 사도 바울에게 가려졌다. 사람들이 사도 바울은 기억하지만, 그의 옆에 서 있는 누가는 도무지 봐주지를 않는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이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누가는 언제나 함께하였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끊임없이 그를 위로하며, 그를 대신해 복음을 전한 것도 누가이다. 세상에서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주 유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그의 자기희생을 알기에, 그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꺼이 성경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장현수는 참 뛰어난 축구선수이다. 2015 동아시안컵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남자축구 금메달로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그는 이후 2017년 12월부터 2개월 동안 모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훈련했다며 196시간의 봉사활동 증빙서류를 제출했는데,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돼 논란이 됐고, 결국 서류조작을 시인했다. 서류조작의 결과는 너무 비참하다. 국가대표에서 영구 퇴출된 것이다. 일평생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문자로 기록하는 이력서는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 없는 박사 학위를 만들어내고, 없는 경력을 만들어낸다. 예수쟁이란 예수님 안에서 자기 삶의 이력서를 문자가 아닌 삶으로 매일 기록해 가는 사람이다. 삶의 이력서는 절대 위조되지 않는다. 위조할 수가 없다.
“⑱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⑲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8~19) 하나님 앞에서는 감출 것이 없다. 감출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글씨로 된 이력서를 보시지 않으신다. 삶의 이력서를 보신다.
“⑫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⑬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⑭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⑮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5)
명함을 받았다. 경력이 하도 많아, 앞면이 모자라 뒷면까지 인쇄하였다.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대부분은 이름만 걸어놓은 것이다. 그러한 경력을 바라보며 존경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신은 그 경력들을 대단하게 여기겠지만, 오히려 불쌍하다. 얼마나 자신이 힘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그렇게 나타내고 싶으면……. 이 모든‘공적’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다 탄다. 종이 이력서에 기록된 모든 것들은 다 탄다. 사라진다.
하나님 앞에 들고 갈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재산이다. 참된 이력서이다. 내 삶을 통해서 기록된 이력서에는 무엇이 기록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