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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조물의 불완전함에 대한 하느님의 긍정
신학교에 녹음이 우거지고 있다. 가슴을 설레게 한 봄의 연두색 향연도 막을 내리고, 짙어 가는 녹색의 물결이 낙산의 숲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성큼 여름이 다가왔지만 북핵 문제와 북한 동포의 비참한 실상은 우리 마음을 여전히 얼어붙게 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발생하는 자연 재해도 녹색의 캔버스에 커다란 흠집을 남긴다.
이렇게 자연과 역사는 아름다움과 추함,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동시에 지닌다. 조화와 행복, 모순과 갈등이 혼재하는 자연과 역사의 한복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로 자연도 하느님의 성사(聖事)이고 역사 또한 하느님의 성사다. 성경은 자연과 역사의 의미와 목표를 일러 주는 불후의 이정표다.
하느님께서는 창세 1장에서 ‘보시니 좋았다(tob)’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과연 좋음의 의미와 조건은 무엇일까?
창조와 구원
첫날, 어둠은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하느님께서는 어둠을 좋게 보시지 않고 어둠의 한복판에 빛을 만드시고 빛에 대해서만 좋았다고 하셨다. 시편에도 창조를 암시하는 대목이 여럿 있다. 시편 74,13은 하느님께서 바다를 당신 힘으로 뒤흔드시고 물 위에서 용들의 머리를 부수었다고 표현하여 창조를 혼돈의 세력에 대항하는 신화적 전투로 묘사한다. 창조는 하느님의 최초의 구원 행위이다(시편 74,12-17 참조).
그러나 창세 1장은 하느님과 용의 전투 같은 신화적 요소를 제거하였다.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혼돈과 심연에 질서를 부여하셨다. 혼돈과 무질서에서 질서 있는 세상, 코스모스(cosmos)가 출현하는 일련의 과정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장차 약속의 땅에 이르는 구원의 역사와 겹친다. 자연 질서의 출현과 역사적 구원의 과정이 바로 창조이다. 그러므로 태초의 혼돈과 싸워 얻은 창조의 기적은 구원의 기적이다(폴리쾨르). 창조와 구원의 단일성을 확인시켜 주는 말씀이 바로 “보시니 좋았다”(창세 1,4)이다.
창조와 유한성
창조는 시간과 공간의 창조에서 시작한다. 하느님께서는 첫날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고 부르셨다. 여기서 시간이 발생하였다.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만드시어 이를 하늘이라 부르셨고 뭍을 땅으로,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여기서 공간이 출현하였다.
시간은 변화를 일으킬 조건을 부여하고, 공간은 개체가 출현할 자리를 제공한다.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에서 사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조건이자 한계이다. 피조물은 시간의 화살을 타고 있다는 점에서 생명의 유한성을 갖고, 몸을 가진다는 점에서 장소의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창세 1장의 저자는 피조물의 한계를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피조물의 한계에 대한 긍정이 더욱 잘 드러나는 대상은 바로 혼돈의 흔적인 어둠이요 심연의 흔적인 바다이다. 어둠은 빛과 함께 밤과 낮의 주기적 시간에 통합되고, 심연은 하늘과 땅의 질서에 통합된다.이처럼 창세 1장은 세상의 양면성을 통합한다. 밤과 낮이 질서 있게 교차하며 하루가 구성된다. 사제계 학파가 생각하는 창조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창세 1,31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참 좋았다’고 긍정하셨는데, 성경은 한 번도 자연이 완전하다고 암시한 적이 없다.
사실 자연 그 자체는 불완전하다. 자연에는 불완전한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심연이요 어둠이다. 좋다는 말은 미학적 아름다움이나 내적 효율성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의 기대에 부합하도록 무질서에서 질서가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창조의 과정에서 하느님의 창조 목적과 실현 사이에 여전히 간격이 있다.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한처음의 완전함을 기리는 회상의 말이 아니다. 혼돈과 심연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긍정하고 강복하는 말씀이다. 그것은 점진적으로 발생하는 피조물의 다양성과 복잡화의 구조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현재 상황이 완전하지 않은데도 ‘좋았다’고 긍정하는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권능과 자비에서 비롯한다. 하느님의 창조가 불완전하다는 것은 창조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과정에 놓여 있는 피조물의 죄와 한계를 구원의 역사, 곧 지속적인 창조의 역사를 통하여 용서하고 치유하실 것이다.
창조적 구분과 통합
둘째 날,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창조하고 물을 위와 아래로 갈라놓으신 다음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왜 그러셨을까? 확실히 성경은 창조 과정에 반드시 구분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밤과 낮, 남자와 여자 등 물리적·생물학적 구성 요건이 바로 구분이며 분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경은 이 개별화에 필요한 구분이 갈등적·차별적 분열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한다. 일반적으로 분리는 갈등과 반목, 마침내 전쟁으로 치닫는 파괴적 과정으로 나아가기 십상이다. 특히 남녀 차별, 계층 갈등, 인종 차별이 사회적 불안과 갈등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구분은 개별성을 최대한 존중하되 개별적 주체가 전체의 화합과 일치를 추구하는 공동 지체성의 구분이다. 그것은 사도 바오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 개념과도 같다(1코린 12,27 참조). 구분과 통합 또는 분리와 일치의 두 긴장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원하신 창조질서이다.
창조의 단일성과 창조의 다양성이 바로 창조의 신비다. 이런 의미로 하느님께서는 둘째 날 창조 후에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어 구분과 분리가 생명의 출현에 꼭 필요하지만, 그것이 자칫 분열과 갈등을 일으켜 마침내 전쟁으로 나아가는 폭력적 · 파괴적 행보를 밟지 않도록 경고하신 셈이다.
자연과 역사는 인간이 사는 집이다. 집이 완전하지 않고, 더욱이 사는 이가 관리를 잘못한 탓에 물이 새고 지붕이 날아가더라도 하느님께서는 보시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창세 1장의 위대한 낙관주의는 자연과 역사의 불완전함을 보시고도 ‘좋았다’고 말씀하신 하느님의 위대한 긍정과 강복에 근거한다.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우주는 생명을 지향한다
지난 현충일에 지인들과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여름이 시작되었는데 비봉 부근에서 라일락 향기가 흩날리고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라일락이 군락으로 펼쳐져 있지 않은가! 덕분에 우리는 여름의 초입에서 봄의 향기에 흠뻑 취하는 호사를 누렸다. 곳곳에 깔린 소나무에서는 초록의 옷을 입은 여리디여린 솔방울들이 우리의 시선을 놓아 주지 않았다. 초록빛의 잎사귀를 가만히 바라보면 초록색 안에 다양한 빛깔이 살포시 숨어 있었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시인처럼 중얼거렸다. “아, 하느님은 초록이라는 팔레트 안에 온갖 색깔을 섞어 놓았네.” 푸른 생명으로 뒤덮인 북한산 자락에서 우리는 생명의 신비에 감동하며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파란 지구의 출현은 우주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우리는 과학자들이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를 통해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더욱 맛깔나게 느낄 수 있다. 우주의 출현과 전개 과정에 아주 미세한 조정(fine tuning)이 있었는데, 이 미세 조정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지혜)에 의한 것이다.
빅뱅 우주론에 의하면 138억 년 전(플랑크 우주 망원경이 보내 준 자료에 의하면 우주의 시작이 종전의 137억 년보다 8천만-1억 년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 물질과 에너지 등 모든 것이 수조(數兆) 도에 이르는 뜨거운 점에서 시작하여 순식간에 분리되었다고 한다. 태초에 기본 입자인 쿼크와 렙톤이 생겨났고, 이 둘이 결합하여 양성자와 중성자가 형성되었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융합하여 원자핵이 만들어졌는데, 이 결합 과정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는 질량 일부를 포기해야 했고 이것이 빛이 되어 우주로 보내졌다. 양자 세계의 창조를 위해 본질적 희생이 필요했고 이 창조에 빛이 동반된 것이라고 브라이언 토머스 스윔은 아름답게 해석한다(《우주 속으로 걷다》, 24쪽 참조). 그리하여 수소와 헬륨 원자핵과 전자들은 태초의 빛의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이 빛을 ‘우주 배경복사’라고 부른다. 우리는 월킨스 마이크로파 관측위성(WMAP)이나 플랑크 우주 망원경이 보내 주는 우주 배경복사에 대한 사진들을 통해 빅뱅 이론에 의한 우주 초기의 상황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우주는 초당 71킬로미터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속도는 팽창하는 에너지 곧 암흑 에너지와 끌어들이려는 중력 에너지의 기막힌 조절로 결정되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주 전체 에너지 가운데 별 · 은하 · 행성 · 가스 등 우리가 정체를 알고 있는 물질은 4%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암흑 물질(24%)과 암흑 에너지(72%)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주의 팽창 속도가 백만분의 일 퍼센트만 느렸으면 우주는 수축 과정을 거쳐 붕괴했을 것이고, 반대로 백만분의 일 퍼센트만 빨랐어도 우주는 단순한 먼지로 확산될 뿐 생명이 탄생할 지구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우주 상수’라 불리는 이 놀라운 미세 조정으로 우주는 생명을 품는 생명 지향적 우주가 될 수 있었다.
여기서 생명 창조를 향한 중요한 과정이 발생한다. 전자와 양성자가 결합하여 전기적으로 중성인 원자가 만들어지고, 원자의 출현으로 별이라는 새로운 구조가 우주에 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별의 탄생은 수소와 헬륨의 구름이 중력에 의해 수축되면서 시작된다. 별은 생명체를 구성하는 기초 재료를 만들어 내는 핵융합 용광로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무거운 원소들과 특히 비옥한 화학 성분을 갖는 탄소가 필요하다.
원자들이 수축하고 충돌하여 온도가 높아지면 핵융합이 일어나 수소 원자가 헬륨 원자로 변환한다. 별 내부에는 중력에 의한 붕괴와 핵융합에 의한 팽창으로 긴장이 조성되고 불안정한 방식으로 균형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별이 수소를 다 소모하여 핵융합이 중단되면 중력에 의한 붕괴가 일어난다. 수축된 별의 중심핵이 뜨거워지면 헬륨이 탄소로 융합되고, 탄소는 산소로 융합되기까지 폭발이 반복되면서 더 무거운 원소가 생성된다. 마침내 초신성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의 핵이 창조된다. 마그네슘, 칼륨, 인, 탄소, 금 등의 원소가 생성되어 장차 지구 행성과 그 안에 사는 생명체를 구성하게 된다. 초신성의 폭발은 우주에서 파괴를 통해 창조를 보여 주는 가장 극적인 장면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구성하는 탄소 원자는 이처럼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다. 폴킹혼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죽은 별의 재에서 만들어진 것이다(《쿼크, 카오스, 그리고 기독교》, 53쪽 참조). 우리 태양계에서 지구만이 생명의 요람이 되었다. 태양은 빛의 원천이다. 태양은 매초 4백만 톤의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시킨다.
지구에 단순한 세포가 처음 나타난 때는 약 38억 년 전이다. 약 20억 년 전에 핵을 가진 더 복잡한 세포가 나타났고, 이 생명 나무의 끝자락에 인간이 출현했다. 생명의 출현이 가능한 이유를 일리야 프리고진은 ‘자기 조직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지구 생명체는 자기 조직화를 거듭하는 심오한 우주 패턴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자기 조직화는 상호 교류로 이루어진다. 생명의 상호 교류를 입증하는 가장 놀라운 현상이 바로 광합성이다. 광합성은 생명이 태양 빛을 이용하여 푸른 지구를 만들어 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작용이다. 엽록소는 빛을 흡수해 초록색을 띠고 에너지를 만들어 생명의 원동력이 되게 한다. 광합성은 산소를 배출하여 대기와 물을 정화함으로써 하늘과 바다를 푸르게 하였다. 광합성이 없다면 산소도 오존도 없을 것이다. 오존층이 없으면 차단되지 않은 자외선이 지표면의 물을 산소와 수소로 분해할 것이고 그러면 바다도 형성될 수 없을 것이다(닉 레인, 《생명의 도약》, 109쪽 참조).
이렇게 지구에 푸른 생명이 나타날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이 참으로 절묘하게 갖추어졌다. 지구가 태양에서 1억 5천만 킬로미터가 떨어져 있다는 적절한 거리 때문에 지구의 온도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적합했고, 목성의 중력이 소행성들의 위협에서 지구를 보호해 주었다. 그리고 지구의 크기는 달처럼 작지 않아 적절한 중력으로 산소를 머금은 멋진 대기권을 만들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지구에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조건을 미세하게 조율한 결과였다. 마침내 지구에 생명이 넘쳐나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번식하고 번성하여 바닷물을 가득 채우고 새들도 땅 위에서 번성하라”(창세 1,22 참조)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다양하고 풍요로운 생명의 바다에서 다른 생명과 함께 유영하는 존재다. 왜 생명이 이토록 강하고 아름다운가? 그것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생명 지향적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주의 목표는 생명의 출현과 풍요로운 번성이다. 왜 생명은 그토록 집요하게 자신의 유전자를 전해 주고자 하는가? 바로 하느님께서 바다와 땅을 채우라고 생명에게 복을 내려 주셨기 때문이다. 이 용솟음치는 생명의 향연에 참여하는 우리는 우주를 창조하신 생명의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뭇 생명을 돌봐야 하지 않겠는가!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우주 안에서 인간의 위치
영화제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시 칸느 앞에는 섬이 두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성 오노라(Honorat)’ 섬이다. 그곳에 자리한 레헹스 수도원의 이름을 본떠 ‘레헹스(L´erins)’ 섬이라고도 불린다. 400년대 초부터 오노라 성인이 그 섬에 정착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한 뒤로 무려 1600년에 걸쳐 수도승들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다.
학생 때 와 보고 20년 만에 다시 찾은 레헹스 섬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수도승 22명은 새벽 4시 반부터 주님을 찬미하는 노래로 새벽을 일으켜 깨우고 섬의 하루를 시작한다. 해가 떠오르기 전 검푸른 하늘을 여행하던 초승달이 울창한 종려나무 사이로 마지막 얼굴을 내비친다. 그때 우뚝 솟은 성당의 종탑이 신비로운 빛을 발하면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꼼짝없이 붙들리고 만다. 차라리 그 자리에 붙박이로 서서 떨어지는 초승달을 보내고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것이 주님께 봉헌하는 또 다른 기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성당에 가만히 앉아 주님을 찬미하기가 힘들(?) 정도다. 낮에는 그냥 해안 길을 따라 거닐면서 기도하고, 밤에는 별을 헤며 찬미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다가 시간경을 바치러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평생 주님을 찬미하며 살아온 수도승들의 화음과 기도가 소박하고 견고한 고딕식 성당의 돌들과 어우러져 천상의 찬미가로 들려온다.
레헹스 섬의 또 다른 특징은 40헥타르에 달하는 전체 면적에서 8헥타르의 포도원을 수도승들이 경작하여 양질의 포도주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수도승들은 육체노동으로 자급자족하는 시토 수도회의 정신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라(Ora er labora)’는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며 살아간다.
이처럼 레헹스 섬은 드넓은 포도원, 소나무와 다양한 수종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 지중해의 쪽빛 해안(Cote d´Azur) ^ 이 조화를 이루는 청정 지역이다. 아울러 인간의 노동과 기도, 온갖 새와 벌레(당연히 모기를 포함하여), 나무, 돌, 흙, 바람, 물 등이 어우러져 창조주를 찬미하는 생태 공동체이다.
하느님, 자연, 인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이 섬의 하루는 일상을 넘어 영원의 시간으로 영혼에 새겨진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평생 헌신한 엠마누엘라 수녀님(1908-2008년)도 이곳이야말로 영적 원천을 제공하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장소 중 하나라고 칭송하였다.
우리는 아름다운 자연에서 창조의 신비를 묵상하지만, 사실 창조의 절정은 인간이 아닌가! 인간이 우주에서 가장 경이로운 피조물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탄성부터 터져 나온다. 부모와 자식의 만남과 연인의 만남이 그렇다. 마르셀 파뇰(Marcel Pagnol) 원작의 영화 [파니(Fanny)]에서 파니는 아이의 아빠가 멀리 떠나고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를 보고 ‘이 세상의 경이(le merveille du monde)’라고 감탄한다. 성경의 아담도 잠에서 깨어나 처음으로 하와를 봤을 때 크게 감동하여 부르짖는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느님께서는 창조의 엿샛날, 곧 마지막 날에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이 창조의 절정이자 목표인 것이다. 생태계의 모든 생명이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심층 생태학(Deep Ecology)은 성경의 이런 인간관을 인간 중심주의 사고의 산물이라고 비판할 것이다. 그러나 사제계 문헌은 분명히 말한다.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날에 매우 특별하게 창조되었다고! 그 특별함은 인간이 하느님과 비슷하게 그분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 비슷함(demut)과 모상성(selem, 라틴어 imago)을 하느님과 겉모습이 유사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흔히 지적하듯이 하느님께서는 형상으로 우상을 만들지 말라(신명 4,16 참조)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모습을 사람의 형상(1,26; 참조 다니 7,13)으로 묘사한 것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상상력이 지닌 가능성이자 한계였을 것이다. 하느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그렸다는 주장(신인동형론, anthropomorphism)과 반대로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이라는 주장(신형상론, theomorphism)은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느님 체험에 대한 인간 표상의 한계를 넘어서 하느님과 인간을 유사하게 만드는 근본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라는 복수형의 어법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누구를 상대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일까? 왕실에서 사용하는 위엄의 복수(pluralis majestatis)는 히브리어 문법에 나타나지 않는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내부 의논 과정이라는 그리스도교의 해석도 창세기 차원에는 적용될 수 없다.
유다교 라삐 전통에 따른 세 번째 해석은 이러하다. 하느님께서는 천상회의에서 네 천사와 의논하셨는데, 각각의 천사는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대표한다. 평화와 진리는 인간이 만들어 낼 파괴와 거짓을 염려하여 인간 창조를 반대했지만, 정의와 사랑이 이를 찬성하면서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네 가지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실현하시려는 가치이다.
마지막 네 번째 해석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창조될 인간과 함께 의논하신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은 하느님의 파트너인 셈인데, 피조계 전체를 상대로 진리, 사랑, 평화, 정의를 구현하는 파트너이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왜 인간을 당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드시고, 그것도 의논하는 상대로 인간을 선택하여 만드셨는가에 대한 최종 답변이 될 것이다.
프랑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는 <미래를 위한 생태학적 도전과 과제>(2012년)라는 문헌에서 인간의 역할을 하느님의 창조 계획에 참여하는 ‘공동 창조자’로 표현하였다. 한편 창세 2,15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에덴 동산을 일구고 돌보게 하시어 피조계의 관리자 또는 청지기로 삼으셨다고 묘사한다. 공동 창조자라는 표현이 인간에게 과도할 수 있지만, 창세 4,1은 하와가 하느님과 함께 남자아이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생명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동반자요,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공동 창조자다. 나아가 인간은 이성의 능력과 삶의 의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도록 우주 안에서 매우 특별한 소명을 지니고 있다. 다음 호부터는 공동 창조자로서 인간이 받은 소명에 대해 살펴보자.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채식에 의한 원초적 생태 질서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 몽고의 대초원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 미국의 거대 목장에서 소들이 한가하게 풀을 뜯는 장면은 숭고하기까지 하다. 풀은 아낌없이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고 동물은 싱싱한 풀을 실컷 먹고 배설한다. 그 퇴비로 비옥해진 땅에 또 새로운 풀이 돋아나 생태계는 아름다운 순환을 반복한다.
사실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느님께서는 생명을 창조하시고 생명이 번성하도록 복을 내려 주셨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취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이어 가고, 자신도 다른 생명에 이바지한다. 먹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모든 생명이 동일할 것이다. 소는 온종일 풀을 뜯으며 행복해한다. 식사는 생명을 주고받는 자리이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황홀해할 때가 있다. 유학 시절, 한국 음식을 정말 오랜만에 먹었을 때 밥과 김치와 불고기가 뿜어내는 냄새와 맛에 매료되곤 했다. 지금도 밥을 먹으면서 황금빛 들녘에서 넘실거린 벼의 싱싱한 생명이 전달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우리는 음식을 눈으로 만나고 냄새와 맛으로 만난다.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이야말로 다른 생명과 소통하는 생태계의 가장 근원적 질서다. 우리도 소처럼 천천히 음식을 씹으며 그 맛을 음미하고 생명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재배와 유통, 요리에 이르기까지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에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이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더 좋을 것이다.
식사 시간에 침묵을 지키는 수도승들의 전통은 공기, 물, 음식 등 다른 피조물과의 동화를 경험하도록 이끌어 준다. 하느님 안에서 음식을 먹는 식사 시간이야말로 하느님, 인간, 자연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장 친밀한 일치의 시간이다.
먹는 것과 함께 동화(同化)의 또 다른 형태는 성적(性的) 결합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라”(창세 1,28 참조)고 말씀하신 다음, 먹을거리를 언급하신 것(창세 1,29 참조)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먹는 것과 성적 결합은 생명 현상의 두 근간이다. 성적 결합으로 생명이 탄생하고, 먹어서 생명이 유지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먹으라고 하셨는가? “이제 내가 온 땅 위에서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를 너희에게 준다. 이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는 온갖 푸른 풀을 양식으로 준다”(창세 1,29-30).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들을 다스리는’(창세 1,28 참조) 권한을 주셨다. 그러나 이 다스림의 특권은 두 가지 제한을 받는다.
첫째,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라”고 복을 내려 주셨지만 다른 생명도 번성하도록 복을 주셨다. 피조물 전체에 대한 강복(창세 1,31 참조)은 인간 중심주의를 제한한다. 토마스 베리는 모든 창조물에게 세 가지 기본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였다. 존재할 권리, 자신의 목적을 이룰 권리,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수단을 취할 권리가 그것이다. 이 세 가지 권리가 모든 피조물에게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권리를 갖는 반면 숲과 동물은 그만의 고유한 권리를 갖는다. 모든 권리는 상대적이며 제한적이다. 그러기에 모든 생명은 서로를 인정하여 함께 번성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둘째, 인간이 본래 채식을 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은 에덴 동산의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 외에는 모든 나무에서 열리는 열매를 따 먹도록 아담에게 허락하셨다. 따라서 동물은 채식하는 인간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고, 인간도 채식하는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평화가 있고, 동물에 대한 인간의 지배는 부드러울 수밖에 없다. 그 부드러운 지배가 인간과 동물이 상호공존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왜 하느님께서 인간과 동물에게 채식을 창조 질서로 부여하셨을까? 풀이나 열매를 먹는 것은 개체성을 소멸시키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풀과 열매는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개체적 생명이 스스로 증식한 결과이다. 뿌리와 줄기가 남아 있는 한 그 결실은 철 따라 반복하여 재생산된다. 식물은 모든 생태계의 근간이다. 식물이 없으면 지금의 생태계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식물이 있기에 곤충이 존재할 수 있고 또 척추동물과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 주기적으로 아낌없이 베푸는 식물이 있기에 생태계는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 개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열매와 풀로 동물과 인간을 양생시키는 식물 덕분에 생태계는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고 창세기는 그리고 있다.
그러나 채식에 의한 생태 질서는 무너지고 말았다. 개체적 생명을 죽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성경은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말한다(창세 6,11 참조). 인간이 인간을 죽이고 인간이 동물을 죽여 먹이로 취하고, 때로는 동물도 인간을 죽여 먹이로 삼으면서 폭력이 세상을 채운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폭력이 세상에 들어왔는가? 이 문제는 아담과 카인의 이야기에서 다룰 것이다.
채식에 의한 생태계의 평화 회복이라는 주제는 이사야서에 다시 나타난다.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이사 65,25; 참조 11,7). 그러나 이 현상은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질 미래의 꿈이다. 여기서 늑대와 새끼 양은 폭력적 인간(제국주의 세력 같은)과 비폭력적 인간(고난받는 주님의 종 같은)을 상징하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모든 생명의 개체적 존엄성을 강조하는 성경은 보편적 채식에서 죽임이 없는 생태계의 질서를 보았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이를 먹을거리로 내놓으신 까닭은 채식으로 생태 질서를 회복하시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채식주의를 창조 질서에 따른 올바른 생태적 삶으로 제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인간에게 육식을 허용하시기 때문이다(창세 9,3 참조). 중요한 것은 채식의 의미를 성찰하는 일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무엇을 먹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We are what we eat). 개체적 생명을 죽여 얻은 고기를 먹는 사람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채식하는 사람보다 폭력성을 띨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와 힌두교의 수도승이 육식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인간의 동물적 폭력성(성적 충동 포함)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하느님의 모상과 부드러운 다스림
창세 1장은 우주 창조부터 인간 창조에 이르기까지 거대사의 품격으로 하느님의 계시를 전한다. 이번 호에서는 하느님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시각을 제시하는 거대사의 서문격인 창세 1장을 종합해 보자.
원초적 축복
창세 1장에는 하느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 표현이 일곱 번 등장한다. 사제계 저자는 하느님께서 창조의 순간마다 당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감탄하시는 모습을 그린다. 하느님께서는 창조 행위 중에 잠시 멈춰 바라보신다. 당신에게서 비롯하였으나 당신과 구별되는 피조 세계를 바라보고 음미하신다. 하느님께서 느끼신 놀라움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은 좋으시다’고 노래할 때 사용한 표현으로 그려진다. ‘주님은 좋으시다(선하시다)’는 표현은 시편 100,5; 106,1; 136,1; 1역대 16,34에 나타난다. 하느님의 창조에는 바라보는 동작이 수반된다. 이 바라봄에서 자신과 구별되는 타자와의 관계에 여백이 생긴다. 그리고 타자에게서 느껴지는 신뢰와 경탄이 그 여백을 채운다. ‘보시니 좋았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피조물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원초적 축복이다.
인간의 소명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후 ‘좋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일부러 생략한 것은 아닐까?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는 복수의 어법과 관련 있지 않을까? 라삐 전통은, 인간이 본래 불완전하게 창조되어 하느님과 함께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기에 ‘만들자’라는 복수 용법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만들자’의 주체는 하느님과 인간이며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 소명을 받은 것이다. ‘보시니 좋았다’는 말씀의 생략은 인간의 책임과 소명에 대한 하느님의 염려를 반영하지 않을까?
하느님의 모상으로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진술에 이어, ‘땅을 지배하고 뭇 생명들을 다스리라’(창세 1,28 참조)는 말씀이 인간에게 과제로 던져진다. 하느님의 모상과 인간의 다스림은 문맥상 깊은 관련을 지닌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보편적 다스림에 인간이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인간이 뭇 생명을 다스리는 방식은 초식(草食)으로 제한된다(창세 1,29 참조). 씨를 맺는 모든 풀과 씨 있는 모든 과일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타자의 생명을 죽이지 않고 다스린다는 점에서 부드러운 지배를 의미한다(폴 보셩). 이는 인간이 뭇 생명을 만나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그 안에 이 세상을 부드럽게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숨어 있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
하느님께서는 영과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영이 태초의 물 위에 감도는 모습은(창세 1,2 참조), 유다인들의 성경 주석에서 어미 새가 새끼 위를 빙빙 도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이렇게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듯 하느님의 영이 만물을 보듬는다. 보듬음은 생명의 원리요 생명을 기르는 방식이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창조 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서 마르둑이 반역적인 신들과 전쟁을 하고, 죽은 신의 시체에서 세상을 만들었다는 폭력적 창조 과정과 전혀 다르다. 혼돈과 공허에 질서를 부여하고 무질서에서 질서와 생명을 이끌어 내는 원리는 전쟁이나 폭력이 아니라 부드러운 말씀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주에 조용히 울려 퍼지고, 조용한 울림이 세상을 변화시키며 세상에 균형과 질서를 부여한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과 더불어 어둠과 빛이 갈마드는 하루가 탄생한다. 어둠은 하루에 통합되고 빛과 더불어 일상을 만드는 한 축이 되어 서로 다른 것들이 공존하며 다양성을 빚어 낸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은 역사를 이끌어 가는 원리이기도 하다. 지혜 12,18은 가나안인들이 만행(지혜 12,3-5 참조)을 저지르는데도 하느님께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아주 부드럽게 다스린다고(meta polles pheidous dioikeis) 말한다. 이 부드러운 다스림이야말로 하느님의 힘이다(지혜 12,18 참조). 하느님의 힘은 그분께서 만물을 소중히 여기시고(지혜 12,16 참조) 만물을 돌보시는 데에서(지혜 12,13 참조) 드러난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다스림은 말씀의 자기 조절 기능과 대화 방식으로 나타난다. 말씀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카오스적 힘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갖는다. 하느님의 부드러운 힘은 어둠과 밤의 존재를 용인하면서 창조주의 전능을 제한하고 조절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말씀에 의한 부드러운 다스림은 대화의 기본 구조를 지닌다. 대화는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를 참여시킨다. 반대로 폭력은 참여와 대화를 거부한다.
카인은 아벨을 죽일 때 아벨과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창세 4,8 참조). 카인이 아벨과 대화했다면 그를 죽일 수 있었을까?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카인과 끊임없이 대화하신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미리 경고하고 타이르시고, 카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는 카인에게 말을 건네며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신다. 이처럼 말씀에 의한 다스림은 부드럽다. 말씀이 사라질 때 폭력과 죽임이 판을 친다. 유다 서간(10-11절 참조)은 카인의 길을 따라 걸은 이들을 ‘지각이 없는 짐승(hos ta aloga zoa)’에 비유한다. 짐승은 소통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대화가 없는 인간은 짐승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안식
하느님께서는 하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참조). 이 쉼이 하던 일을 다 이루게 한다. 창조의 완성과 하느님의 쉼이 상응한다. 쉼이 없다면 창조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쉼(sabat)은 중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하던 일을 멈춰 당신의 창조 능력에 방점을 찍으셨다. 안식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창조 행위를 조절하고 스스로 한계를 긋는 행위이다. 안식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채우려는 의도를 포기하게 하고, 피조물에게 자율권을 부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모든 업적을 바탕으로 뭔가를 하고자(la asot) 쉬셨다(창세 2,3 참조). 뭔가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아마도 하느님의 안식은 인간에게 소명과 자율성이 주어지는 탁월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마르 2,27 참조)이 이 수수께끼 같은 본문의 해답이 아니겠는가?
고등학교 시절, 치열하게 문학을 추구한 친구의 시 제목이 떠오른다. “11월의 태양이 어미 닭의 체온으로 있을 때.” 하늘을 향해 솟구치던 생명이 땅에 떨어져 뒹구는 11월의 모습은 처연하다. 강함과 약함이, 생명과 죽음이 갈마드는 심연에서 새끼를 보듬으려는 어미 닭의 부드러운 날갯짓. 거기서 우리는 심연 위를 감도는 하느님의 영의 이미지를 보고(창세 1,2 참조), 멸망의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절한 마음을 읽는다(마태 23,37-38; 루카 13,34-35 참조). 이처럼 부드러운 배려가 하느님의 모습이고, 그것은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뭇 생명을 만나는 방식이다.
[생태신학으로 성경 읽기] 피로 사회와 안식일
2013년 한 해도 저물어 간다. 저마다 올해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새해를 준비한다. 내가 일한 회사의 실적을 평가하고 개인의 성과를 계산하면서 이 한 해의 끄트머리를 마감한다. 모든 것을 양으로 판단하는 성과 사회의 모습이다.
작년에 출간된 《피로사회》라는 책이 많은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도 우리 모두 성과 중심의 사회, 곧 피로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21세기의 사회가 부정과 제한과 금지의 ‘규율 사회’에서 긍정과 자유와 탈규제의 ‘성과 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규율 사회는 규율과 의무를 내세워 타인을 착취하지만, 성과 사회에서는 ‘뭐든 할 수 있다’는 주문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착취한다. 스스로 가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되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 성과 사회의 인간상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성과 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는 정언만이 사회를 지배할 뿐, 사실 이 시스템의 지배자는 없다. 타인은 나의 소비 대상이 되고 경쟁 대상은 결국 자신으로 귀결된다. ‘너는 할 수 있다’는 명제를 수행하는 외로운 자기 착취는 끝내 나를 만족시켜 나를 이길 수 없으므로 결국 피로의 극단에 이르고 마침내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게 된다.
고립된 성과 사회에서는 최고경영자도 실업자도 다 같이 피로와 소진과 우울증에 빠져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자살하기도 한다. 자신을 착취하는 것은 실직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라 성과에서 오는 자기만족의 나르시시즘 때문이다. 성과가 스스로를 억압하여 실적의 노예로 만든다.
사회적 약자와 분배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20 대 80, 1% 대 99%의 승자 독식 구조를 비판한다. 그러나 이 또한 성과 사회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독식하는 승자도 만성 피로와 과잉 긍정의 주문에 사로잡혀 희생자가 되고 만다.
결국 피로 사회는 성과주의에 중독되어 타인을 대상화하고 자신마저 소외시켜 우울증, 자기 부정, 급기야 죽기까지 이끄는 자본주의의 간계이다.
우리가 피로한 것은 경쟁 구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지만, 그 무한 경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다 같이 피로하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저자는 피로 사회의 문제가 노자의 무위(無爲) 자연 사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자연이 무위이기만 할까? 피로 사회의 근본 원인은 인간으로 하여금 실적과 성공으로 내닫게 하는 자연스러운 충동과 경향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피로 사회도 사실은 자연이 낳은 산물이요, 자연의 한 모습이 아닌가! 유교의 유위(有爲)에 반대하여 무위자연을 주창한 노자의 가르침이 위대하긴 하지만, 피로 사회의 문제가 과연 무위 사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유위도 무위도 다 자연의 모습인데….
창세기는 유위와 무위를 아우르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창조주 하느님은 일하는 하느님이시다(요한 5,17 참조). 자연은 일하시는 하느님의 산물이기에 자연에 속한 모든 존재는 하느님처럼 노동한다. 모든 생명에게는 자기 증식이 지상 과제다. 치열한 생존 경쟁도 번식하고 번성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과정에 속한다.
하느님의 안식, 곧 휴업 또는 파업의 의미는 더할 수 없이 크다. 창조가 이루어진 7일은 ‘일’과 ‘쉼’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완성된다. 쉼이 없다면 완성도 없다.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쉬면서 자기의 본래 모습을 바라본다. 6일의 시간은 유위의 자아로 활동하는 시간이요, 제7일은 자신에게 돌아와 무위의 자아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안식일은 생산성을 지향하는 피로 사회의 유위의 엿새를 마치고,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쉬는 무위의 시간이다. 스스로 유위에 도취되어 자기를 착취하는 것이 피로 사회의 본질이라고 할 때, 하느님께서는 실적과 자아도취의 굴레에서 인간을 해방시키신다.
<탈무드>는 하느님께서 만나와 인간의 얼굴을 통해 안식일을 강복하셨다고 말한다. 만나는 말씀이라는 영적 양식이며, 인간의 얼굴은 기능주의적 인간 모습에서 벗어난 자신의 고유한 인격적 모습을 의미한다. 그것은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표현되며 하느님의 모습을 지닌 인간을 가리킨다.
생명은 선물이면서 과제이다. 유위의 6일은 과제로 사는 시간이되 무위의 이렛날은 선물로 사는 시간이다. 생명은 본질상 선물이다. 그래서 이사야서는 “네가 안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이사 58,13-14) 하시리라고 말한다.
창조의 기쁨을 누리는 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존재와 생명을 복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날이다.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하는 현대인은 아무에게도 인정과 축하를 받지 못하고 자기 공허 속에서 우울증을 앓는다고 한다. 그러나 안식일에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6일의 노동도 칭찬받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다. 인간적인 모든 상대평가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창세 1,31 참조).
안식일은 즈카 14,7에 의하면 ‘낮도 밤도 없는 날’이라고 불린다. 이날이 바로 메시아의 날이라고 말한다. 안식일은 이 영원한 안식과 광명의 세계에 대한 징표요 예시이다. 안식일은 영원의 상하에서 다른 6일을 지켜보는 날이다. 영원한 생명의 시각에서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지켜보는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이루실 창조의 완성을 그려 보며, 지금 내가 하는 일의 소중함과 그 한계도 함께 바라보는 날이다.
타자가 사라진 나르시시즘의 갯벌에서 자기 착취의 덧에 사로잡힌 피로 사회의 인간에게 영원한 타자는 하느님이시다. 나를 만들고 받아 주시는 하느님이 피로 사회에 대한 근원적 해답이다. 그 영원한 타자를 중심으로 그분이 만드신 생명들은 서로를 지켜보고 인정해 주는 따뜻한 타자가 될 수 있다. 타자는 나에게 소비의 대상도, 무한 경쟁의 대상도, 적도 아니다. 생존과 영속성을 향한 무한 경쟁도 영원의 상하에서 보면 다 살고자 하는 생명들의 안타까운 몸짓이 아닌가!
그래서 안식일에는 사람만 쉬지 않고 동물도 쉰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착취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안에서 깊은 휴식을 취하고 존재의 기쁨을 향유한다.
저물어 가는 2013년을 하느님의 안식 안에서 훈훈하게 보내면 좋겠다. 다가오는 새해도 그분의 영원한 빛과 생명 안에서 맞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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