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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에 대한 고찰>
5/26(토)
하반하 학생 15명 모두 라마단을 잘 마쳤다.
밤에 무엇을 몰래 훔쳐먹었는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통난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굶어죽은 사람없이, 반칙한 사람없이 모두들 잘 해낸 것 같다.
라마단이 끝난 기념으로 함박 스테이크를 먹었다.
밤에는 야식으로 소스 범벅 감자튀김까지 먹었는데, 정말 마약이었다.
삼일간 어렵게 빼냈던 우리 몸의 독소는, 이렇게 하루만에 다시 채워졌다.
기름기 넘치는 스테이크와 감자튀김으로.
하지만 먹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다.
먹을 때의 만족감과 기쁨은, 제외시키기엔 너무나 행복한 감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5/27(일)
집앞 수영장에서 수구를 했다.
집앞에 이렇게 멋진 수영장을 두고, 망설이다 망설이다 이제야 들어간 것이다.
그래도 이곳을 떠나기 전에 수영장에 한번은 들어가서 참 다행이다.
안들어갔다면 아마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써니쌤이 찍으신 영상에 형광색 옷을 입은 아이가 드문드문 나와서 좋다.
수구에서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물을 튀기는 일이라도 해서 뿌듯하다.
5/28(월)
(우리방에서 목숨을 잃은 모기들의 처참한 모습이다)
밤에 문을 열고 잘 수가 없다.
바로 모기들 때문이다.
문을 열어두면 순식간에 수십마리(체감으로는)의 모기가 방안에 들끓는다.
요즘 모기 피해자들의 민원이 이곳 저곳에서 들려온다.
나 또한 그 중 하나지만, 나는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물렸는지 안물렸는지, 어디 물렸는지도 잘 모르고 산다.
나는 모기 물린 자리의 가려움이 이상하게 싫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 가려움과 가려운 자리를 긁었을때의 시원한 느낌이 좋다.
모기 물린 자리는, 놀아달라고 자꾸 내게 달라붙는 동생같다.
‘나 좀 봐봐. 나랑 놀아줘! 날 긁어달란 말야!”
가만히 있는 나를 콕 건드리고 도망가는, 놀아달라고 땡깡을 부리는 동생 같다.
가끔은 이 끈덕진 놈들을 상대하느라 상당히 피곤하지만,
그래도 나는 이 아이들을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간지러운 것은 참 신기한 느낌인 것 같다.
누군가 간지럼을 태우면 고통스럽지만 계속 웃게 된다.
모기 물린 자리도 어쩌면 고통스럽고 짜증나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는 않다.
‘간지러움’이란 무엇일까?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이 느낌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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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모기를 죽이고 싶어 안달이 났다.
모기만 보면 공책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이, 무조건 들고 휘두른다.
모기 약을 방 곳곳에 왕창 뿌린다.
나는 방에 있던 모기가 한마리 죽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요즘은 모기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기는 애초에 태어나기를 피를 먹고 살아야하는 존재로 태어난 것인데,
이렇게들 모기를 미워하고 죽이려하니,
모기는 얼마나 억울하고 분할까.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쫓기는 삶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할까.
자신이 남들에게 이로운 존재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을 수 밖에 없는 비겁한 존재라는 사실이 얼마나 절망스럽고 괴로울까.
내가 모기라면 세상 모든 것이 원망스러울 것 같다.
모기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하고 무작정 죽이려고만 해서.
내가 모기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어떤 위로를 하면 모기가 힘을 내서, 자신의 짧지만 소중한 삶을 당당히 살아갈 수 있을까?
“모기야,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단다.
강아지똥도 민들레가 자라나기 위한 거름이 되듯, 너도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야.
네가 옮기는 병균 덕분에 인간들의 면연력이 강화되지. 이건 너의 아주 큰 역할이란다.
그러니 기죽지 말고, 네 역할을 충실히 해내며 살아가라!”
지금 모기로 살아가는 이들이, 다음 생에는 모두 꼭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났으면 좋겠다.
이제는 모기에게 그냥 물려줘야겠다.
내 피. 그거 한입 모기 준다고 큰일 나는 건 아니니까.
5/29(화)
우리는 베란다에서 메트를 깔고 밥을 먹는다.
밥을 먹을 때면 우리들보다도 먼저 모여드는 아이들이 있는데,
바로 개미떼들이다.
우리가 먹기를 기다렸다가, 빵부스러기나 쨈이 떨어지면 그것들을 주워먹는 것이다.
아마 우리가 있는 한달간은, 이 지역 개미들이 음식 걱정 안하고 살았을 것이다.
떨어지면 어차피 버려야하는 음식인데, 이걸로 개미들의 배를 채워줄 수 있어 기쁘다.
개미는 베짱이와 달라, 부지런히 일년동안 먹을 음식을 잘 비축해 놓는다는데,
여기 이 개미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먹을 것 앞에 눈이 멀어, 일을 게을리하면 안될텐데.
이렇게 음식이 있고, 공급자가 있을때 더 열심히, 현명하게 일을 해서
이곳 개미들 모두가 추운겨울을 따뜻하고 풍족하게 잘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5/30(수)
요즘 제일 대화하고 싶은 아이가 있다면, ‘파리’다.
자꾸 와서 내 팔에, 다리에, 무릎에, 내 몸 여기저기에 달라붙는데,
그 이유를 암만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손을 휘휘 저어도, 때리는 시늉을 해도, 손뼉을 크게 쳐도,
달아나는 듯하다가 다시 와서 앉는다.
음식에 붙는 것도 아니고, 사람 몸에 이렇게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모기처럼 아예 피를 빨아먹겠다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이해라도 해주겠는데,
얘는 정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내게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걸까? 전할 소식이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내가 좋은 걸까?
감히 내가 파리의 마음을 읽어보려한다.
나는 파리가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냥 사람이 좋아. 사람 몸에서 느껴지는 온기,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박동 소리,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 나는 그것들이 좋아. 너희를 보면 살아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거든.
우리의 작은 몸은 금새 부러지고, 찢어지고, 우리는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리지. 하지만 너희의 큰 몸에 올라설때면, 생명을 느낄 수 있어.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것을 말이야.
우리는 하루살이들이지. 매시간 매초,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어.
그래서 80년, 100년을 사는 너희들의 큰 몸이 부러운거야.”
물론 아니라면, 파리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대화가 불가능한 지금으로선 일단 내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하기로 했다.
파리는 인간의 몸이 부러운 것이다.
그래, 부럽다니 그냥 앉아있게 해주지.
실컷 있다가 가라. 이 가련한 자식아.
5/31(목)
오전 11시쯤이면 꼭 우리방에 한번씩 들어왔다 나가는 애가 있다.
벌써 2주동안 그 아이와 실랑이를 벌인 것 같다.
이제는 말을 섞기도 귀찮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고 있다.
뭔가 내게 할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은 안하고 자꾸 수선스럽게 방을 왔다갔다하기만 한다.
조용히 왔다가 갈 것이지, 자꾸 혼자 궁시렁궁시렁 대는데, 그 소리가 너무 귀에 거슬린다.
딱 붙잡고, 면 대 면으로 얘기한 후 빨리 이 관계를 끊고 싶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해버릴지도 몰라, 선뜻 다가갈 수도 없다.
그 아이는 바로, 사진 속 해인쌤 머리 위의 천장에 보이는 조그만 녀석이다.
‘벌’이란 녀석.
(일기에 이렇게 써서 제출했더니, 찬희쌤께서 그 아이가 누구냐고 캐물으셨다.
‘벌’이 비유적 표현인줄 아시고.
“요즘 11시에 여자애들 방에 들어가는 애있니?”
ㅋㅋㅋ이건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나는 ‘벌’, 정말 그 아이를 말하는 것이다.)
6/1(금)
오카리나를 연습하러 폐가로 가는 길에, 풀숲에서 소 한마리를 발견했다.
(다음날 사진을 찍으러 갔더니 이미 다른 곳으로 갔는지, 소가 없었다. 원래 이 공터에 소가 있었다)
사실 지난번에도 길 중간에서 소를 본 적이 있어서, 소를 만난건 이번이 두번째였다.
소는 머리에 띠 같은 것을 둘러메고 풀을 뜯어먹고 있었다.
가족들이나 친구들은 다 어디갔는지, 이 아이 혼자였다.
나는 소들이 보통 어떻게 가정을 이루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이 아이를 버려진 고아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분명 외로운 아이임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1시간 10분 동안 오카리나를 연습하고 다시 나왔을때도,
소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그대로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사실 소는 달리 할일이 없어보였다. 풀을 먹는 것 외에는.
농장에 속한 소도 아니니, 밭을 메는 일 같은 것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었다.
나는 소가 과연 이런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자유롭고 여유로워서 좋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풀만 먹는 삶이 지겹고 나태하다고 생각할까?
혹 지겹고 나태하다고 느껴진다면, 소에게 게임 두가지를 소개해주고 싶다.
소가 느긋하게 서서 풀을 뜯어먹으며 할 수 있는 게임이다.
첫번째는 ‘투명 소 놀이’다.
만약 내가 투명 소였다면, 다른 소들이나 인간들 눈에 보이지 않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는 놀이다.
맘에 안드는 애가 있다면 몰래 가서 떼려준다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안보이게 가서 멋있게 들어올려준다거나 하는 상상을 맘껏 할 수 있다.
두번째는 ‘잠자리 눈 360도 돌리기 놀이’다.
만약 내가 저 소였다면, 저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보는 놀이다.
다투는 소들이 있을때, 만약 내가 저 소였다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
오카리나를 부는 인간들이 있을때, 만약 내가 저 인간이라면 어떻게 오카리나를 불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 두 놀이는, 느긋하고 게으른 소에겐 정말 안성맞춤이다.
특별히 움직이거나, 어렵게 머리를 쓸 필요 없이,
그냥 그 자리에서 상상의 나래만 펼치면 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사실 이 게임 두가지는 희우이모가 여행가기 전 내게 알려주신 것들인데,
가끔씩 가만히 앉아있으면서 혹은 길거리에서 해보면 재미있다.
아마 소도 좋아할 것이다.
이 게임을 통해 생각할줄 아는 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루동안 소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가 가진 지겨울 정도의 여유를 한번 느껴보고 싶다.
바쁘고 다이나믹한 인간들의 삶에서 벗어나,
하루쯤은 소의 생활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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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에 인간 말고도, 내가 이해해야 할 존재들이 참 많다.
모기, 개미, 파리, 벌, 소.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것들.
그동안은 손만 휘휘 내저었지만,
그들에게도 다 각자 나름의 고민과 사정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우리는 다 함께 살아야 하니, 서로를 조금씩 더 이해하고 배려하면
모두가 좋지 않을까?
<디베이트: 운명을 알고 싶다>
저는 운명을 듣는 것에 반대합니다. ‘운명’이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필연적이고 초월적인 것 또는 그로 말미암아 생기는 길화복,’ ‘타고난 운수나 수명’을 뜻하는데요.
간단히 ‘우리의 앞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삶’은 내 앞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 모를 때 의미가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들을 마주하며 우리는 배우고 성장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터키로 이동할 때, 우리는 배를 타기 위해 땡볕에서 약 1시간을 걸어 항구에 갔습니다. 그러나 힘들게 도착했더니, 배가 다음날로 지연됐다는 청천병력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죠. 아마 이때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절망했을 겁니다. 정말 힘들고, 지쳤지만 저는 이때 두가지를 배웠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포기하거나 주저앉으면 안된다는 것과, 차분히 주위를 둘러보면 다 방법이 있다는 것을 말이죠.
운이 나쁘게도 우리가 도착한 숙소의 주인 아줌마는 성격이 정말 괴팍했습니다. 그녀는 우리를 거지 취급하고, 어떻게서든 돈을 더 받아내기 위해 우리를 이불을 훔친 도둑으로 몰아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주인아줌마와 아침에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이느라 이동시간이 지체되었고, 덕분에 쉬어가던 주유소에서 씨라인 사의 아저씨를 잘 만날 수 있었죠.
이때 우리는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것, 심지어 이 주인 아줌마까지도 우리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었단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만약 우리가 배가 지연될 것을 미리 알고 하루 늦게 출발했다면, 아마 이런 깨달음들은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런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상황들 속에서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느끼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이런것들이 우리의 삶을 재미있고 다이나믹하게 만듭니다.
둘째, 최후의 운명은 어차피 바꿀 수 없습니다. 잠시 피하거나 미룰 수는 있겠지만, 언제가 다시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어차피 죽을 놈은 죽고, 살놈은 살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벼락 맞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집안에만 꽁꽁 숨어있으면, 물론 바로 그때는 죽을 위기를 모면할 수 있겠죠. 하지만 벼락이 집을 뚫고 들어올 수도 있고, 며칠 후 더 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드라마 ‘도깨비’를 보셨나요? 원래 주인공 은택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엄마 뱃속에서 죽었어야 하는 운명인데, 도깨비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은택이는 9살에도, 19살에도, 그리고 살면서 끊임없이 죽을 위기를 맞게 됩니다. 죽었어야 할때, 죽지 않았기에 끝까지 기타누락자 명부에 이름이 남아, 저승사자들이 은탁이를 쫓아다닌 것입니다.
이렇듯 아무리 우리가 운명을 거스르려고 해도 그 운명은 우리를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괜히 운명을 피하거나 바꾸려고 하다가, 내일 죽는다는 얘기에 오늘 하루를 방에서 벌벌 떨며 보낼 건가요? 즐길 수 있는 하루를 그냥 포기해버릴 건가요?
저라면 운명을 듣지 않고, 내일 죽더라도 오늘을 맘껏 즐기겠습니다.
셋째, 운명을 안다면 사회만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세상의 순리를 거슬러, 죽어야 할 사람이 죽지 않고 자꾸 남아 있으면, 이상현상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의 운명을 피하려고 하다, 다른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래 돌멩이에 걸려 넘어졌어야 하는데 그냥 지나쳐버려서, 다른 여자가 그 돌멩이를 밟고 고꾸라지다가, 어떤 남자가 넘어지는 그녀를 붙들어주고, 이때 서로 눈이 맞아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군가의 남편, 아내가 바뀔 수도 있는 것이죠.
이처럼 인간의 운명이란 손짓 하나, 몸짓 하나로도 전혀 다르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내 운명을 바꾸고 싶다고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원치 않는 다른 사람의 운명까지 바뀔 수 있습니다.
물론 최후의 운명은 내 몫대로 받게 되겠지만, 그 속에서는 많은 혼란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삶’이란 내 앞일을 모를 때 정말 다이나믹합니다.
내 몫의 운명은 어떻게든 나를 찾아오게 되어있습니다.
운명을 자꾸 바꾸려고 하면 사회에 혼란만 생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저는 운명을 모른채로도 지금 너무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운명을 듣는 것을 반대합니다.
소감: 정말 어려운 디베이트였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운명으로 볼 것이며,
운명은 과연 바꿀수 있는가 등등 생각해야 할 복잡한 문제들이 많았다.
솔직히 운명을 알려준다는 것은 매우 솔깃한 제안이다.
나는 사실 오래전부터 점이나 사주를 꼭 한번 봐보고 싶었다.
하지만 점을 보는 것도, 이것이 반쯤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 운명이 그 사람 말 그대로라면, 나는 두려워서 쉽게 얘기를 듣지 못할 것 같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반대를 택했다.
찬성팀의 말대로, 미래를 알고, 앞일을 미리 준비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운명을 안다면 고민거리와 걱정이 더 늘어날 것 같다.
지금도 생각해야 할것이 이렇게 많은데, 나는 감당할 자신이 없다.
이번에도 결론은 ‘지금 이대로가 가장 좋다’는 것이다.
내가 너무 잘 살고 있어서인지, 지금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 두려워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지금의 평범한 삶이 좋다.
<하반하의 장단점>
장점:
1.집에 있을때보다 정말 많이 움직인다, 운동을 하게 된다
2.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된다-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3.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만나는 모든 것을 통해 배운다
4.정말 라이브한 생활을 한다
5.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6.요리와 여러가지 일들을 배운다
7.밥을 정말 잘 먹는다-집에 있으면 같은 반찬을 기본 일주일은 먹는데, 여기서는 매일 매끼 다른 음식을 먹는다, 계다가 훌륭한 셰프님도 두분이나 계셔서 음식이 매우 고퀄이다
단점:
1.집과 가족이 그립다-엄마 아빠가 무척 보고싶다
2.작은 행동까지도 신경쓸 것이 많다
3.공간이 분리되지 않는다-항상 긴장상태에 있다, 마음이 편치않다
4.힘들다-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살면서 나는 이렇게 많이 움직여본 적도 없고, 이렇게 무거운 가방을 들어본 적도 없고, 이렇게 많은 아이들과 24시간을 함께 살아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첫댓글 그 얘길 안했군...'작은나무' 놀이도 있는데 -. 체로키족 인디언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인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보면, 주인공인 '작은나무'가 백인 학교에 강제로 입학당한 후에 집이 너무 그리워서 울지. 그리고 늘 별과 달과 나무와 대화를 하는데 어느날은 학교에서 억울하게 벌을 서고 선생님께 체벌을 당했어. 그때 작은나무는 놀랍게도 인디언 특유의 방법으로 자기 영혼을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억울하게 맞고 있는 자기 몸을 내려다봐. 그리고 자기 몸에게 속삭이지. "작은나무야. 잘 견디고 있구나. 몸이 아픈 건 금방 나아. 억울하게 그럴 때도 있어. 달님도 별님도 다 알고 있으니 조금만 참아."라고. 기억 가물가물.
맘 편히 팬팬 놀아. 은재야. 퀴리부인-마리 스클로도프스카 양 ^^&-처럼 놀고 지낸 180일을 평생 추억할 만큼 팬팬 맘껏 놀아. 그는 우리로 치면 고 3이후 재수생 나이일 때 그렇게 놀고 4개월 정신차려 공부해서 소르본느 대학에 갔지. 스스로 불안해하지 않고 자길 믿으면 누구도 자기 맘을 불안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애. 잘 놀고 쉬어.
소, 벌, 파리, 모기, 개미와 대화하는 수준을 보니 인디언 추장의 딸 같구나...저절로 작은나무 생각이 났다. ㅋㅋ
은재야. 반갑다.
네 모기, 개미, 파리, 소 얘기가 무척 재미있네. 운명에 대한 생각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요즘 네 입맛이 살아있는 것 같아서 기쁘구나. 지나가면 사무치게 그리울테니 거기 있는 동안 최대한 많은 추억을 쌓기 바란다^^
은재야. 매트리스 사진 두번 들어있다.
첫번째 것은 잘못 올린 듯.
은재양 곤충커뮤니케이터가 되는건 아니겠죠 ^^
모든 사소한것들을 다른 관점에서 관찰하는 은재 정말 깊은 통찰력을 지녔구나
아줌마도 은재 글 보고 지나가는 모든 사소한것들을 다르게 생각해봐야 겠다
덕분에 재밌었어^^-재훈맘
은재의 주위를 맴도는 모든 생명체들은 축복받은 존재구나. 이렇게 마음과 입장을 헤아려주는 인간을 만나다니 ㅋ 은재를 만나는 모든 존재들은 은재로부터 따스한 기운을 얻게 된다고 엄마는 늘 생각해왔었지만 그 존재가 소와 벌, 파리와 모기까지일 줄은 미처 몰랐네 ㅎㅎ
엄마는 요즘 밀림같은 정원에서 풀을 뽑고 가지를 치고 꽃을 심고 장미를 묶어주는 재미에 푹 빠져있어. 이 일을 할때 흥얼거리는 노래는 김광석의 너에게..라는 곡이야..'나의 정원을 본적이 있을까,국화와 장미 예쁜 사루비아가 끝없이 펼쳐있는~'이렇게 시작하는 노래지~^^
얼마전 희우이모랑 낙산공원에서 봤던 노란꽃 금계국이 너무 예뻐서..화훼농장에서 열뿌리 사서 마당에 심어놓았어. 하얀색 보라색 마가레트도.은재가 돌아올때까지 예쁘게 피어있으면 좋을텐데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