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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제 1편): 노년은 노란 손뼉, 하얀 향기, 상처 난 고추의 추억을 먹고 산다 /
애석하게도 지금은 학생 수가 적어 소풍을 가지 않는 학교가 매우 많다지만, 초등학교시절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나 국민학교 시절엔 어느 국민학교나 봄가을엔 소풍을 갔었다.
현재는 전교생 수가 100여명이지만, 60여 년 전 당시 전교생 수 2,700여명인 우리학교에서도 그랬었다.
그런데, 우리학교는 소풍가는 지역이 대야 지역으로만 한정돼 있었다.
대야면 소재지 내에 있는 광법사, 운심사, 그리고 신촌마을의 강변, 이렇게 3곳으로만 갔었다. 그 중에서 조차 대부분 광법사로 갔었다.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전교생 운동장 조회’를 한주에 두 번 정도 했는데, 그 때 교장선생님께서 훈시 중에 소풍가기 열흘 전쯤 소풍날을 알리면 그날부터 우리 학생들 대부분은 설렘의 입덧을 시작했다. 그러다 소풍가는 전날이 되면 우리 학생들의 가슴은 드디어 설렘의 만삭이 됐다.
그리하여 소풍 전날 밤엔 끝내 만삭된 가슴의 양수가 터졌고, 그날 밤은 그터진 양수로 인하여 나와 많은 친구들은 아예 머릿속이 멍하도록 잠을 설치곤 했었다.
광법사는 당시 걸어서 시간이 30여분 걸렸던 절로서, 우리학교에서 2km 보다 조금 더 떨어진 산골에 있었는데, 소풍 갈 때 우리들은 늘 두 줄 서서 길 양편에 동오산마을과 서오산마을을 끼고 오동리 방죽 좌측에 있는 서악마을의 모정까지 약 1km를 걸어간 뒤, 거기서 또 약 1km를 더 걸어가면 마침내 귀티 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산허리에 좌정한 광법사가 햇살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소풍 오는 코흘리개 우리들을 향해 버선발로 뛰어 올 듯, 소풍일행들을 반갑게 맞이해주곤 했었다.
사찰의 직원들과 신도들도 우리 소풍이 끝나는 하산시간까지 우리 소풍일행들에게 봄 햇살 얼굴로 친절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었다.
소풍 갈 때 우리 초등생들은 두 줄로 줄을 서 걸으면서도 선생님의 선창
하에 ‘새 나라의 어린이’와 ’꽃밭에서‘ 등, 노래를 부르며 갔었는데,
광법사 봄 소풍 땐 서악마을 모정을 지나 좌측 야산에 군데군데 모여 하얗게 만발한 아카시아 꽃들이 마치 수만 마리의 하얀 아기 나비들처럼 공중에 수두룩하게 떠 날개 짓하며, 소풍가는 우리 코흘리개들의 콧속이 뻥 뚫리도록 하얀 향기를 듬뿍듬뿍 선사했었다.
또한 양 길가에는 옹기종기 다정하게 모인 민들레꽃들이 갓난아기 손톱만한 손으로 손바닥이 가을 해바라기 얼굴처럼 노랗도록 박수를, 소풍일행이 다 자나갈 때까지, 북 치듯 쳐 환영해줬고, 세수를 미처 못 한 어느 민들레꽃들은 부끄러운 듯, 다른 민들레꽃 뒤에 쪼그리고 앉아 숨어 보다가, 후엔 그들도 나와서 노란 손뼉을 옆 친구와 맞장구까지 치며 대환영해주었었다.
소풍 행선지에 도착하면 작성된 순서에 따라 반장과 담임선생님께서는 인원수를 세어 인원점검을 했으며, 이어 지도 맡은 젊은 지도 선생님께서는 주의사항과 함께 그날 일정을 말씀하신 후, 자유 시간을 2, 30분 정도 주었다. 그리고 그 2, 30분 후엔 점심시간임을 알리셨다.
그때 각 담임선생님은 도시락 두세 개를 들고 학생 중에 도시락을 안 가져온 학생이 있는가를 점검하신 후 선생님들도 점심을 드셨는데, 그 걸 본 주위의 나무 가지와 풀잎들은 서로 윙크를 보내면서도 왈츠 춤을 신나게 춰가며, “선생님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그 시절은 소풍날이라 하더라도 가져온 도시락밥이 꽁보리밥에 반찬이 김치나 새우젓인 학생도 몇몇 있었는데,
그 학생들은 누가 볼까봐서인지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가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를 재주껏 반복하면서도 밥을 꿀밥처럼 맛있게 먹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소풍의 백미는 보물찾기다. 다 찾아봤자 표가 50개였다.
우리 학년의 학생 수는 450여명, 그러니 발표 할 당시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학생도 있었다.
당시 소풍간 우리 학생들은 당선돼 지우개 안 달린 연필을 받게 되더라도 폴짝폴짝 뛰어나가, 고맙다는 90도 각도의 인사와 함께, 웃으며 별빛 얼굴로 받았고, 누런 마분지 색깔의 공책을 받더라도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뛰어나가 그런 인사와 함께 보름달 얼굴로 받았으며, 당선돼 소쿠리를 받게 될땐 아예 사슴처럼 껑충껑충 뛰어나가 역시 90도의 각도로 인사를 하며, 태양 같은 얼굴로 받았었다.
그러고는 그걸 빵모자처럼 머리에 쓴 채, 그는 희극배우처럼 웃어댔었다.
신촌 마을 강변 소풍은 학생들에게 최고 신나는 소풍이었지만, 당시 그 강변에 가는 길은 트럭과 시외버스, 각종 마차 등이 다니는 자갈길이라서 학교에선 4학년 이상만 가도록, 그것도 어쩌다 가도록 했었다.
일부이긴 하지만, 그 강변으로 소풍가는 학년에겐 운이 좋다며 그 학년을 부러워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학년도 허락 않으셔 그곳으로의 소풍은 못 갔는데, 난 6학년 때 기어코 소원을 풀었다. 학교에서 갈 때 간
아니라, 교회에서 갈 때 갔었다.
그곳으로 소풍을 가려면 지금의 만경강 다리까지 약 3km를 간 뒤, 거기서 우측 강변을 따라 약 500여m를 더 가는 곳으로, 그곳으로의 소풍은 거의 모든 학생에게 최고로 신나는 소풍이었었다.
지금도 그 강변 소풍은 나에게 늘 ‘大足은 二足이요, 小足은 八足이라, 前進 後進하는 고기 사시오’ 라는 말이 생각나게 한다.
그것은 古文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알려 줬다며, 같은 마을 친구가 나 고교 1학년 때 내게 들려준 말이다.
친구가 한 말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 이야기인즉, 아주 옛날 어느 가난한 젊은이가 집에 먹을 양식이 떨어지자
식구들을 위해 강으로 게 잡이를 나가 게를 많이 잡은 후, 게를 팔려고 한나절을 “게 사시오, 게 사시오” 하고 외치며 마을마다 돌아다녔으나 게를 한 마리도 못 팔고 헛수고만 한 채, 낙담하여 길바닥에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곳을 지나가던 어느 한 선비 노인이 게 장사에게 말하기를, “여보시게, 게 장사 젊은이! 게를 팔려면 집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길거리에 나오도록 해야 할 것 아닌가” 하며, 게 파는 방법을 위와 같이 말해줬다 한다. 그러자 뾰족한 다른 방도가 없다 생각한 그 게 장사는 그 노인이 알려준 대로 곧장 위와 같이 “大足은 二足이요, 小足은 八足이라, 前進 後進하는 고기 사시오” 하며, 마을마다 또 돌아다녔었다.
그러자 집안에만 박혀있던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큰 발이 2개이고, 작은 발이 8개이면서 앞으로도 가고, 뒤로도 가는 고기가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히 여겨 하나둘 집 밖으로 나오게 됐고, 그래서 게를 많이 팔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위의 말은 당시 고교생이던 나에게 큰 교훈이 되었다.
그래서 그 후 나는 어떤 일이든 할 땐 늘 그 보다 먼저 그에 대한 방법을 생각하는 습관이 생기게 돼, 그 후 내 삶에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교내 축구시합 할 때도, 시험 공부할 때도, 논농사 지을 때도 그랬다.
나는 위의 게 장사 얘기를 나 고교 1학년 때 들려줬던 그 친구와 작년 ‘23년에 전화통화하며 그걸 말하니, 내게 말해준 그 친구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나 초등학생 당시는 거의 다 가난으로 밥상에 채소류 반찬 외엔 다른 찬이 별로 없던 때라, 별미 찬이 생기는 강변 소풍을, 학교선생님들과는 달리, 우리 꼬마 친구들과 부모님들은 거의 모두 반겼었다.
나 초등학교 6학년 때 교회에서 신촌마을 강변 소풍을 갔을 때다. 목적지에 도착해 갯벌을 바라보는 순간 나와 우
리 꼬마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었다.
왜냐하면 그곳엔 포동포동한 게들이 ‘게 반 진흙 반’으로 가득 찬 채, 그 게들은 우리 마을 어른들이 풍물놀이 하듯, 게들이 노는 것에 흠뻑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 게들은 장사꾼들이 매일 우리 마을 집집마다 팔러 다니던 그런종류의 게들 이었다.
그건 마치 그 게들이 우리들을 향해 “날 잡아 봐요” 하고, 일제히 우릴 부르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나를 포함한 거의 모든 남자 꼬마들은 자동으로 갯벌에 뛰어들어 각자의 방식대로
순발력을 발휘, 게들을 잡기에 혈안이 되었었다.
처음엔 갯벌에 들어가지 않던 여자 꼬마들도 나중엔 갯벌에 들어갔었고, 어떤 여학생은 더 혈안이 되어 남학생 것까지 빼앗아갔었다.
다른 친구들은 신발주머니를 하나만 갖고 가거나 그냥 갔지만, 난 나를 극히 예뻐하시면서 게젓을 매우 좋아하시는 새어머니께 보다 많은 게를 갖다드리기 위해 난 신발주머니를 2개나 가지고 가, 장난치지 않고 게한테 손가락 물리면서도 게를 열심히 잡았었다.
그래서 나는 어찌나 잡은 게가 많았던지, 게가 신발주머니 2개와 두 신발에 가득 찼었다. 그리하여 난 신발속의 게는 위 샤스를 늘어뜨려 풀줄기로 묶은 뒤 팬티 속에 넣었다.
강변소풍이 끝남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갯벌에서 나온 우리들은 모두 얼굴과 옷에 갯벌 흙으로 각 나라의 지도가 제멋대로 그려져 있어 우리들은 서로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배꼽잡고 포복절도를 하였었다.
그런데 큰 놈인지 작은 놈인지는 몰라도 어느 놈이 반란을 일으켰다. 풀줄기로 묶여 팬티 속에 있던 어느 한 놈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의 大足이 나의 배꼽 밑 그걸 꽉 물고 놔주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의 뇌는 생각할 틈도 없이 즉시 그 족을 절단하라 명령하였고, 열 손가락들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한마음으로 모두 복종, 그 족을 절단, 그 반란은 천만다행 곧바로 진압되었었다.
나이 70대인 올해 몇 일전 나는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를 둘러보았다. 둘러보니, 내 시절의 흙모래이던 학교운동장은 인조 잔디로 깔끔하게 깔려 있었고, 교실은 컴퓨터와 냉난방 시설이 돼 있었으며, 책상과 의자들은 우리 때 보다 크고 훨씬 좋은 재질이었고, 잘 꾸며진 대형 도서실도 있었으며, 특히 공책, 연필, 미술도구 등, 거의 모든 학용품을 무료로 정부에서 제공하였고, 나 초등시절 당시 실외에 군데군데 구멍 난 판자로 지어진 재래식 화장실은 교실 옆 실내에 벽과 바닥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타일로 된 수세식 화장실로서 바닥에 떨어진 음식도 집어먹을 수 있을 만큼 깨끗하고 아늑하여서 화장실이 아니라 마치 단독으로 쓰는 독서 공간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때 화장실은 외부에 설치된 재래식 화장실로 그 안의 방죽 같은 큰 변기엔 이미 하산한 선배 변들이 토주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어 대변을 눌 땐 매우 조심해야 했었다.
그 이유는, 누가 그 많은 변을 하산시켰는지는 몰라도 이미 덩치가 커질 대로 커진 선배 변들의 심한 텃세 때문이었다.
자기들보다 길게 늘어뜨리고, 그걸 “풍덩!” 하고 소리 내며 누면 건방지다며 그 선배 변들은 여지없이 늘 3단 옆차기로 엉덩이까지 튀어 올라와 기어코 냄새 지독한 그걸 엉덩이에 묻히기 때문이다.
당하지 않으려고 그때마다 엉덩이를 힘껏 ‘높이높이’ 들어보지만 헛수고가 잦았었다.
그래서 그 후부터 우리들은 그게 마려울 때마다 이미 하산한 선배 변들한테 또 당하지 않으려고 선배 변들의 눈치를 보며 잔뜩 긴장한 채, 변을 작게 끊어 한 방울씩 조심조심 하산시키고, 또 조금 있다가 또 작게 끊어 한 방울씩 조심조심 하산시키고를 10여 분간 반복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추억은 그 모두 아름답다 했던가. 그러한 불편함과 비문화적 시설들이 지금은 오히려 우리 노인들에게 별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반짝이니 노년엔 그런 것도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
고등학생 때 초등학교 동창회에 초청돼 오신 최태열 선생님께서 당시 우리들에게 말씀 하신 훈시 중에 “인간은 희망을 먹고 추억을 낳는다” 하시며, 제자인 우리들에게 격려 주셨는데, 난 당시 주신 그 말씀이 지금에 와서야 가슴에 절실하게 와 닿는 ‘금과옥조’의 말씀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들은 우리노인들에게 큰 걱정을 주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학생 수가 너무나 줄어드는 것이고,
그중 또 하나는, 일부지만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학교 선생님께 하는 못된 행위들과 학생이 학생을 괴롭히는 행위들이다.
우리 적엔 결혼은 큰 축복의 과정이라 생각하였고, 조상에 대한 책임감이 가슴 깊숙이 있었으며, 자녀를 그리 계산적으로 낳지 않았다.
또한 학생들은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만큼 선생님을 존경하고 어려워했으며,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었다. 학부모도 그랬다. 급우가 급우를 괴롭히지도 안했었다
선생님들의 가장 큰 보람은 자기 제자들 중에 성공한 제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다. 제자가 잘못 되기를 바라고 꾸짖는 선생님은 없다.
그러니 선생님께 못된 언행으로 대하는 학생과 학부모는 법을 더 수정하고 개정해 초기부터 따끔하게 혼내 못된 언행을 절대 못하게 해야 하며, 교권 또한 더 확실히 바로 서게 해야 한다.
난 가끔 모교인 초등학교의 운동장 옆을 지나가는데, 그때마다 늘 감회가 새로워 나도 모르게 초등시절 친구들과 뛰놀던 모습 및 선생님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엄습해온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듯 숨결까지 느끼곤 한다. 운동회 날의 추억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가마솥에 볶은 보리튀밥을 자랑하듯 간식으로 먹었던 그 시절 운동회 날, 우리들은 얇은 공책이라도 더 받기위해, 지우개 없는 연필이라도 더 타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최선을 다해 뛰었었다.
그 시절도 학생들이 학교 선생님한테 때론 매 맞거나 기합도 받았다. 운동회 연습 때도 그랬었다. 그렇지만, 그 다음날 그 선생님을 뵈면 깍듯이 인사했고, 학부모 또한 자녀에게 그리하라 훈계했었다.
그러니 지금의 학생이나 학부모도 모두 꼭 그리해야 한다.
그리해야 졸업 후 노년 돼 모교의 교정에 들어서는 순간 그 시절이 후회되지 않고 옛 그 친구들과 스승님들이 그리워지면서 자기도 모르게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가 저절로 읊조려지게 된다. 그러면서 인생이 너무나 허무한 것임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이 짧은 인생, 어찌 남을 괴롭히거나 미워하면서 황금기인 학생시절을 먹칠하며 보내겠는가.
노년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학교친구가 나를 가장 격 없이 위해주는 훌륭한 친구였고, 학교 선생님이 나의 가장 훌륭한 성인이었다. 그러니, 노년에 후회 덜하고 살려면, 학생 적에 학교친구들을 귀하게 여겨 사이좋게 지내야 하고, 선생님께도 예의바르게 대해야 할 것이다.
좋은 소문은 살 갓의 향수 같아서 잠깐만 따라 다니지만, 나쁜 소문은 몸속의 암 덩이 같아서 평생을 따라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여자들은 시계를 보여주기 위해 차고 다닌다.” 고 말해, 당시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됐다한 말이 생각난다.
칸트가 그리 말한 게 사실이라면, 난 내가 후에 다시 태어날 땐 반드시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왜냐하면, 내 몸에 그런 장식물 없이도 난 얼마든지 여자로서 행복하고, 멋지게 살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말을 한 칸트를 보기 좋게 한방 먹여 주고 싶다.
아울러, 칸트로부터 그런 말을 듣게 한 겉치레에 맹종하는 여성들에게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싶다.
그런 보여주기 위주로 사는 여성들은 학생 때 급우들과 학교 선생님들을 언짢게 했을 것이고, 엄마가 돼서도 학교 선생님께 그리할 것 같아서 이다. 그래서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난 꼭 여자로 태어나 여성 지도자가 돼 우리 학생들에게, 특히 여학생들에게 학생 때부터 좀 더 알찬 습관이 심신에 물들도록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려면 후에 다시 태어 날 때 난 여자로 태어나야 하는데, 그리 태어날지 모르겠다.
추억은 흰색이나 검정색이나 그 모두 아름답지만, 지난 삶에 있어 솔직히 말하면 난 후회되는 게 많다.
끝.
*위에서,
노란 손뼉: 꾸밈없는 손뼉(노란 민들레라 그리 표현).
하얀 향기: 가공된 향기가 아닌 100% 순수한 향기.
상처 난 고추: 과거에 있었던 (남성)성기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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