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군 주요명소
안심사
안심사는 구룡산 서쪽 기슭의 사동리 절골에 소재한 조계종에 속한 고찰이다. 대웅전 안에 1982년경까지 걸려있던 [안심사고적연대표]에 의하면 신라 혜공왕 11년(775)에 진표율사가 절을 짓고 그의 제자 수십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안심사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충숙왕 12년 (1325)에 원명국사가 중창하고 조선 인조 4년(1626)에 松庵 大師가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사찰 내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의 연대와 대략 일치하고 있다. 또 대웅전의 처마끝에 장식된 암막새기와에 姜熙十一年壬子五月日造瓦大施主···라는 陽 刻銘文이 있어서 창건된지 60년 후인 조선 현종 13년(1672)에도 飜瓦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근래에는 1980년과 1989년에 飜瓦와 단청 공사가 있었고 1984년에 요사를 신 축하였다. 그러나 안심사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없고 조선 후기의 각종 지리서에 다음과 같이 간략
하게 소개되고 있다.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71 안심사 043-260-6165
오창 온천 로하스파
이집트를 옮겨 놓은 듯한 온천테마파크 로하스파는 지상 3층~8층 높이에 강알칼리성(PH 9.18)의 사계절 온천수로 도심 속에서도 실내 파도풀을 즐길 수 있다.
이 밖에 바데풀, 유스풀, 워터슬라이드, 로하스존, 연인스파, 하늘정원, 대형영화관, 청정풀무원의 푸드코트 등 각종 편의시설을 갖췄다. 부대시설로는 유해물질 제거와 살균효과 등이 있는 편백나무를 이용해 아토피 테라피 치료실과 오리지널 터키산 가라루파를 도입한 체험실 등이 있다.
청원군 오창읍 양청리 792-4 043-238-5000
현암사
오죽하면 다람절이라 했을까… 현암사는 바위 끝에 매달려 있는 듯한 다람절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한자화한 현암사(懸岩寺)라는 이름을 같게 되었다. 현암사의 창건시기와 창건주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절에 전하는 얘기에 의하면 백제 전지왕 때 달솔해충(達率解忠)의 발원으로 고구려의 스님인 청원선경(淸遠仙境)대사가 창건했으며, 원효대사가 중창했다고 한다.
현암사는 조선시대의 각종지리서에는 견불사(見佛寺), 혹은 현사(懸寺)로 나와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조선초기의 기록에서는 견불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다가 후기로 들어서면서 현사로 바뀐 것이 지금의 현암사가 되었던 것이다.
대청댐이 들어서기 전 이곳은 내딛는 발길마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자갈길로 구룡산을 에도는 새 도로가 나기 전까지 현암사는 그야말로 구름 위에 앉은 듯한 까마득한 절이었다. 지금은 산중턱까지 도로가 나고, 굽이굽이 팥죽땀을 쏟으며 오르던 산길에는 철제계단이 놓였지만 현암사 오르는 길은 여전히 퍽퍽하다.
그러나 한발 한발 더듬어 올라 마침내 현암사에 들어섰을 때, 뒤돌아 대청호를 굽어보는 눈맛을 어찌 다리품에 비길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 옛날 현암사를 세운 이는 아득한 바위 끝에 절을 매달아 깨달음의 길을 한눈에 일러주려 했는지도 모른다.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50 현암사 043-932-2749
연꽃마을
蓮으로 通하는 청원 연꽃마을 연꽃은 불교를 상징하기도 해서 연꽃에는 신비감과 경외감이 깃들어 있다. 황순원 님의 '소나기'에 나올 법한 풍경이 있는 마을, 바로 충북 청원군에 위치하고 있는 청원연꽃마을이다. 연꽃은 여름에만 피지만 연꽃마을에는 사계절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연을 테마로 한 갖가지 체험거리를 만든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부녀회원들은 2년간에 걸쳐 음식 전문가를 마을에 초빙, 연을 활용한 음식을 배우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 내어놓는 연잎밥과 연꽃지짐은 그윽한 향내가 일품이다. 마을에서 준비한 농촌체험은 신나는 놀이이다. 수생식물도 관찰하고, 봉숭아 꽃물도 들여 보고, 전통부채에 민화도 그려 본다. 아이들이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면 어른들은 연꽃밭을 따라 마을을 거닐고, 마을 정자에 누워 오랫동안 미뤄왔던 책도 읽어보는 여유를 가져 본다.
* 연꽃 생태 관찰체험 연꽃마을로 들어가는 길에는 작은 수련수반들이 인도를 따라 길게 놓여있다. 겨울이 끝나는 봄부터 이 수반은 연꽃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생태관찰 장소가 된다. 진흙더미를 뚫고 새순을 내미는 작은 연잎은 물론, 그 옆 물웅덩이에 방울방울 맺힌 개구리 알까지 가까이에 두고 관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 다양한 연 요리 즐기기 연꽃은 여름에만 피지만 연꽃마을에는 사계절 내내 사람들이 찾아온다. 연을 활용한 다양한 먹을거리와 체험거리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마을에서 직접 농사지은 청개구리쌀로 지은 밥과 연음식이다. 청원연꽃마을 부녀회원들이 전문가에게 배워 쌓은 솜씨와 꾸준히 공부하고 노력하여 자체개발한 연음식은 이미 전문가들에게도 정평이 나 있다. 제철에 수확한 연꽃과 연잎을 첨단 저온저장고에 저장해두었다가 연중 마을을 찾는 손님들에게 음식을 만들어낸다. 연잎밥과 함께 먹는 연근장아찌와 연꽃지짐은 건강한 먹을거리이다.
* 연꽃문양 가죽공예 소품 만들기 가죽공예 소품 만들기는 작은 열쇠고리와 목걸이 등에 다양한 전통 연꽃문양을 만들어 내가 원하는 색을 칠하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연꽃이 피어난다. 가죽공예 소품은 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기념품이다
청원군 강내면 궁현리 368 043-232-8400
월리사
월리사는 충청북도 청원군 문의면 문덕리 5번지 구룡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 법주사의 말사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맑은 물과 호수 위에 섬처럼 떠있는 야산 그리고 새벽이면 물안개가 자욱이 떠오르고 낮에는 쪽빛 하늘과 흰 구름이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곳이 대청호다.
월리사는 이 대청호를 끼고 있는 구룡산 서쪽, 이른바 샘봉산이라 불리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대청호가 가둬둔 물이라면 월리사로 가는 길은 비탈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요동친다. 월리사에 가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구룡산 월리사를 알리는 표석과 ‘이곳은 불존(佛尊)이 있는 특별한 구역이니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적어 놓은 금비(禁碑)다.
아마도 공양미 자루를 머리에 이고 먼지 날리는 길을 걸어 걸어서 절을 찾던 옛 아낙들은 이쯤에서 버선발에 힘이 모이고 노는 입에서는 저절로 염불이 흘러 나왔을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월리사의 창건주는 신라의 고승 의상대사다. 구름을 벗 삼아 이곳 샘봉산 아래 절을 짓고는 보름달의 청정함에 큰 깨달음을 얻어 월리사라는 이름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상으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월리사는 1632년(인조 10)경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호서승람 불우편에 월리초막(月裡草幕)이 등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여지도서』, 『호서읍지』 등에도 잇따라 등장한다. 따라서 조선후기에는 법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증명하듯 월리사에는 1665년(현종 8) 절을 중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월리사사적비』가 남아 있다.
월리사는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사찰로 자연의 풍광을 거스르지 않는 전각들이 천상 고졸한 산사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까닭이다. 월리사에 있는 전각은 대웅전, 삼성각, 요사 등 모두 3동이다. 이 중 으뜸은 하늘로 날아갈듯 한 추녀의 곡선이 빼어남을 자랑하는 대웅전으로 월리사의 중창과 함께하는 건물이다. 대웅전에 들어서 부처님께 참배한 뒤 천장을 보면 색과 선으로 표현된 천상의 세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청원군 문의면 문덕리 5번지 043-221-7600
한국잠사박물관
조상의 땀과 슬기가 담겨있는 잠사문화의 유물과 유적들은 전국 각지에 널리 흩어져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잠사문화의 전통과 자취를 수집하고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주기 위해서 한국잠사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잠사박물관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는 자연 과학을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생생한 학습현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첨단산업으로서 잠사업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하고 있다.
환경친화 산업인 잠사업은 단순한 의류산업에서 벗어나 다양한 기능성 신소재를 개발하고 활용하는 첨단산업으로 발전될 것이다. 이제 한국잠사박물관은 미래의 첨단 잠사산업을 이끌어 나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만 아니라 세계 실크산업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청원군 강내면 학천리 175 043-236-1321,02-783-6072
운용사
운룡사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 운용리 272-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미원면에서도 상당히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찰이 위치한 운룡리에 진입하는 도로가 현재까지 비포장으로 남아있을 만큼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조사당시 운룡리에서 운교리에 이르는 도로를 확장, 포장하는 공사가 진행중이었기 때문에 멀지 않아 쉽게 운룡사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운교리의 운교교 부근에 운룡사의 위치를 알리는 이정표가 설치되어 있다. 운룡사는 청원군 미원면 운용리 272-3번지 삼불산 아래에 위치한 사찰이다.
기존에는 총화종 소속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태고종에 소속되어 있는 사찰이다. 미원면의 좌구산(座龜山)이 남으로 달려 수많은 작은 산들을 만들었는데 운룡리 양달말에 이르러서는 삼불산이라는 나지막한 산을 맺었다. 운룡사는 이 삼불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다. 현 사찰에서 1km 가량 떨어진 절터골이라 불리는 곳에서 석조여래좌상이 발견된 이후 이 불상이 인연이 되어 운룡사는 건립되었다. 건립이후 작은 암자와 같은 규모로 사찰이 경영되었으며, 그리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석조여래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지는 것으로 추정되며 얼굴에 마모가 있으나 그 외의 다른 부분은 매우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어 불상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석조여래좌상이 발견된 절터골에서는 현재도 세월이 오래된 듯한 기와편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 곳에 어떤 절이 경영되었고, 언제 창건되어 언제 폐사되었는지에 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79년 산림정책에 따라 사찰이 한번 이건되었다.
또한 2003년 현 주지인 원근스님이 운룡사에 주석하게 된 이후, 사찰의 대지가 매우 좁은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다른 사찰 부지를 확보한 후, 원 사찰의 남동쪽 부분의 넓은 대지로 사찰을 다시 이건했다. 사찰의 이건 이후 원근스님은 운룡사의 종합 중창 계획을 수립하였고 중창불사를 진행중이다.
현재 계획으로는 대웅전, 인등전, 요사 등을 건립할 계획이며, 불전의 건립 이외에도 장학회를 운영하고, 장애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불우 운동선수 돕기 및 각종 상담실을 운영할 계획이다. 새롭게 약사전을 영건하면서 내부에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했다. 석조여래좌상은 아직까지 문화재로 지정받지 못했으나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며 향후 문화재로 지정받을 것이다. 또한 약사전 내부에는 다른 사찰에서 이건해 봉안한 여러 성보문화재가 눈에 띈다. 석조여래좌상 뒤편에 봉안된 관음보살탱화는 1902년에 조성된 것이며, 신중탱화 및 칠성탱화는 1930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主上三殿下聖壽萬歲”라고 기록된 목패는 다른 사찰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것으로서 국가의 원찰로 조성된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패이다. 운룡사는 중창불사가 시작된지 얼마되지 않아 그 규모가 작고 참배에 불편함이 있을지 모르나 향후 모든 시설이 갖춰지게 된다면 중요한 약사여래도량으로서 거듭 태어나게 될 것이다.
청원군 미원면 운용리 274 043-254-6277
백족사
백족사는 청원군 가덕면 상야리 산 22-1번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백족산 깊은 곳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거대한 규모의 충청북도 공무원 자치연수원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청주방면 혹은 괴산방면에서 진입시 자치연수원을 목표로 삼아 백족사를 찾아가는 것이 편리하다. 또한 청주시와 미원면 사이에 위치한 도로상에 백족사의 납골공원을 안내하는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참조하면 쉽게 백족산에 도달 할 수 있다.
꽃피는 사월에 이 절을 찾으니 춘흥이 한창이고 채찍을 떨치고 걸어가니 내 마음은 너그럽네 어제는 응당 보슬비 내리는 것 꺼려하였는데 이 자리 문득 옛 맹세 식을까 두렵네 부처를 보고 마음을 바로하는 것은 솜을 붙인 듯한데 샘가에서 발 씻으며 급한 여울소리 듣네 枳林(탱자나무숲)의 청정함 저버릴 것을 두려워하여 향기로운 잔에 술을 조금 마시니 얼굴 보기 좋으네 간송 윤영교
백족사는 청원군 가덕면 상야리 산 22-1번지 백족산에 자리한 태고종 소속 사찰이다. 산의 이름이 백족산이라고 불리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는데 그 중 조선초 세조와 관련된 설화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조선초에 세조 임금께서 속리산에 기도드리러 가는데 이곳을 지났다고 한다.
백족산에는 예부터 유명한 영천이 있어서 세조 임금께서 이곳에 발을 담그고 길고 긴 여행의 피로를 풀고자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잠깐 발을 담근 임금의 발이 갑자기 하얗게 변해버렸고 이로 인해 산 이름을 백족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백족산은 나지막한 산이기도 하며 등산로가 잘 꾸며져 있어 많은 사람들의 등산코스로 각광받고 있는 산이다. 백족산 입구에서 백족사를 지나 정상을 통해 미륵사, 공무원연구원으로 이루어진 등산로는 약 1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며 곳곳에 휴게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편하게 등산을 즐길 수 있다.
현재 백족사에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불좌상과 석탑이 전해지고 있다. 분명 고려시대에 사찰이 경영된 것을 알 수 있으나 그 자세한 내막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조선조에도 사찰이 경영되고 있었음을 조선중기의 학자인 이안눌(李安訥:1571~1637)의 문집인 “동악선생집(東岳先生集)”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이외에 더 자세한 사찰의 내막을 알 수 있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사찰은 조선후기 어느 순간 폐사가 되었다가 1930년대에 다시 사찰의 역사를 잇기 시작한 것이다. 사찰의 역사를 잇게 된 사연이 또한 사내에 전하고 있다. 1920년대에 청주가 고향인 송씨가 일본에 가서 살고 있을 때였다. 나이가 40이 넘었는데도 자식이 없어 항상 걱정이었는데 어느 날 꿈에 고향의 모습이 나타났다고 한다. 꿈에서 고향의 백족산을 거닐고 있는데 이때 산신령이 나타나 “나는 백족산 산신령이다. 지금 저 쓰러진 법당 속에 부처님이 파묻혀 계시니 네가 부처님을 구해주면 네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하였다 한다.
꿈을 깨어 급히 고향으로 돌아와 백족산으로 향하니 거기에는 실제로 쓰러진 법당이 있었고 잔해 사이에 돌부처가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에 그는 정성으로 초옥을 지어 이곳에 돌부처를 모시고 정성들여 기도한 후 결국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그 뒤로 백족사의 석불에게 소원을 빌면 자식을 점지해 준다는 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실제로 영험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백족산 등산로를 따라 한참을 오르면 백족사 근처에 넓은 공원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백족사에서 운영하는 납골공원이다. 근래에 새롭게 조선의 전통적인 장례풍속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염려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납골공원이 부각되고 있다. 이런 납골공원의 선구적인 사례가 백족사에 있는 것이다. 백족사에는 뛰어난 석조의 성보가 많다. 이들 중 현재 석불좌상과 석탑을 문화재로 등록하고자 하고 있다. 석불좌상과 석탑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 만큼 문화재 등록에는 그리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만 현재까지 어렵게 전해져 오며 많은 부분이 마모되고 파손된 만큼 앞으로도 지금의 형상 그대로 전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청원군 가덕면 상야리 산 22-1 043-254-56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