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욥에게 재난을 주는 어리석은 위로자들(욥16:1-17:16)
욥은 엘리바스와 빌닷 그리고 소발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16:2)이라는 말로 단호하게 물리친다. 그들은 욥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욥을 괴롭게 하였다. 욥은 만약 입장이 바뀌었다면, 그들처럼 그럴듯한 말로 그들을 치며 머리를 흔들며 말할 수도 있지만(시 22:7; 사 37:22), 그들처럼 하지 않고 진실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하며 근심을 풀어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욥은 하나님의 진노와 무리의 공격을 언급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손에는 포학이 없고 자기의 기도는 정결하다고 말한다. 욥의 말이 사실이라면, 욥은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임에 틀림이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말한 시 24:4의 말씀은 욥의 삶에 해당된다. 욥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죄에 대한 징벌로 간주하며 공격하는 것으로 인해 고통과 슬픔 속에서 울부짖고 눈물이 마를 새 없어서 하나님께만 호소한다. 이는 욥이 여호와를 찾는 족속의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임을 증거한다(시 24:6).
이러한 욥의 고통과 슬픔의 하소연은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16:18)는 표현을 통해 드러난다. 이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 보증할 수 있도록 땅으로 하여금 자신의 피를 덮지 말라는 뜻이다. 이처럼 모든 것이 자기에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결백함을 말해줄 증인이 하늘에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16:7-9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향하여 진노하셨다고 말하였지만, 16:19-21에서는 하나님만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 줄 유일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욥은 자기에 대한 정확한 판결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하나님께로 향한다. 욥을 찾아온 세 사람이 합심으로 욥을 괴롭게 함으로 욥은 더욱더 기력이 쇠하여 갔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이 심할수록 욥에게는 하나님만이 피할 바위가 되셨다. 욥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억울함과 정결함을 보증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욥은 세 사람의 공격으로 인하여 기력이 쇠하여 갔지만 그럴수록 욥은 더욱더 자기를 보증할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욥은 세 사람을 향하여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17:5)는 격언을 사용한다. 이 격언은 친구들을 잔치에 초대하여 과시하지만 정작 자기 자녀들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들이 욥을 찾아온 것은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욥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었음을 의미한다(2:11). 그들은 욥과 함께 있으면서 고통 중에 탄식하는 욥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욥에게 비난의 화살만을 쏘았다. 욥은 그들을 자식들은 굶주림과 고통 가운데 내버려둔 채 친구들을 위해 연회석을 마련하는 어리석은 묘사한다. 그들이 욥에게 해야 할 바람직한 행동은 비난과 조롱이 아닌 용기를 주는 행동이어야 했다.
17:6의 "하나님이 나를 백성의 속담거리가 되하시니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라는 말은 "하나님이 나를 악인에게 넘기시며 행악자의 손에 던지셨구나"라고 말한 16:11의 내용과 짝을 이룬다. 욥은 이제 자기의 유일한 소망은 자기 집과 가족을 발견하게 될 '스올‘(17:16)이라고 말함으로 '스올'에 내려갈 때에 그의 소망도 함께 가게 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창 37:35; 사 14:9에서는 스올이 죽은 자들 모두 가는 곳으로 소개되며, 시 6:5; 30:3, 9; 88:3,6에서는 악한 자들의 운명을 말할 때 사용된다. 또한 시 49:14,15에 의하면 '스올'은 구원받을 영광을 확신하며 고대하는 자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구약성경에서 '스올’(쉐올)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죽은 자들이 가는 땅 아래의 공간을 의미한다. 이처럼 욥이 소망을 잃고 '스올' 곧 '흙 속'에서 쉼을 찾으려는 절망의 끝자락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욥을 찾아온 어리석은 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생하였다. 욥은 그들의 지혜 없음과 어리석음을 "너희는 모두 다시 올지니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17:10)는 말을 통해 책망한다.
출처: 『톰슨III 성경주석』, “욥기”.
첫댓글 욥의 친구들이 물리적 재난을 주었다기 보다는 심리적, 정신적으로 괴롭히는 말을 해준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신자에게 흔히 범하는 잘못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번역 욥16:1-2 욥이 대답하였다. 그런 말은 전부터 많이 들었다. 나를 위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너희는 하나같이 나를 괴롭힐 뿐이다.
매우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기독교인은 불신자에 비해 타인에 대한 관심이 많고 어떤 사안을 종교적, 신앙적으로 해석을 하다가 낙심한 자에게 더 큰 좌절과 심리적 재난을 끼치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하나님과 특정인의 관계를 정확히 아십니다. 어줍잖은 오지랖으로 타인에게 상처주는 추태는 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을 크리스천들이 똑같이 반복하고 있군요. 우리들 인간적인 시각으로 잘잘못을 따지고 불행과 죄의 원인을 파헤치고자 하면 욥의 친구들 같이 되는 것 같아요. 그것과 달리 욥이 시원하게 해결을 본 것은 하나님의 책망 속에서였죠. 인간과 차원과 격이 다른 창조주 하나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욥은 할 말을 잃고 말죠. 어떤 반박도, 항변도 할 수 없는 너무나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맛을 보았으니까요. 죄와 형벌의 문제에 매달리고 갇혀 있는 동안 욥과 친구들은 벌 주시는 하나님, 진노의 하나님만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와 질서 속에 들어 있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지혜를 조금이라도 엿보게 되면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결핍에 그만 놀라 자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항복하게 된 것이죠. 역사와 창조질서 속에 드러난 하나님에 대해서 그 깊이와 넓이를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코람데오 깊은 분별의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시편3:1-2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개역한글: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본인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행해 보이는 타인은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속단하는 것은 대적(foe, 적군)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공감합니다.
세 친구들에 대한 욥의 책망(욥기 17:10-16) <-- 『매튜 헨리 주석』
욥의 친구들은 그가 다시 번성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말을 들려줌으로써 그를 위로하는 척했다. 이에 대한 욥의 견해를 살펴보자.
Ⅰ.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10절). "너희는 다시 올지니라. 너희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나로 하여금 너희를 설득하여 내 마음을 알게 만들도록 하라. 내가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어려운 섭리를 설명할 줄 모르며, 그 언약의 위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모르는구나." 이 세상에서 잃은 것을 다시 찾게 되어, 번성하게 될 수 있다는 것으로써 위로하려는 자들은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자혜로운 위로를 줄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실망을 안겨다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갖 애매모호한 사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일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 위에 세운 위로도 역시 무너지게 된다. 그러므로 환난 중에 있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데 있어서, 무너지지 않는 것들, 곧 하나님이 약속, 그의 사랑과 은혜, 그리고 영생이라는 기초가 튼튼한
소망으로써 위로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 하겠다.
Ⅱ. 그러한 위로에 그가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
1. 욥의 모든 추측은 이미 깨어졌고 그는 깊은 혼돈 속에 빠졌다(11, 12절). 그는 번영 속에서 그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를 계획하고 그 전망을 기대하면서 때때로 기뻐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욥은 그의 날이 지나갔거나 끝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의 모든 경영은 끊어졌고, 그 기대는 깨어졌다. 그는 그의 땅을 넓히고, 그의 가축을 증가시키며, 자손들을 잘 교육하고, 그의 나라의 믿음을 장려하기 위한 여러 경건한 계획을 세우고, 근심스러운 일들을 복구시키고, 잘못된 일을 개혁하며, 가난한 자를 위로하고, 구제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일 등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의 마음에 사모하는 이 모든 것들이 끊어졌으므로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만족을 누릴 수 없으리라고 단정지었다.
우리의 날이 끝날 때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계획과 소망도 끝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마음의 모든 계획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죽음도 그 뜻을 끊지는 못할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충고를
받은 후 욥은 계속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다(12절). "내 마음의 사모함"이 끊어졌을 때, "그들은 밤으로 낮을 삼고, 빛이 어두운데 가깝다 하는구나." 어떤 사람들은 헛되고 방탕스런 일을 하기 위해, 밤으로 낮을 삼고, 낮으로 밤을 삼는다. 그러나 욥은 고통과 영혼의 번뇌로 인한 방해 때문에 밤으로 낮을 삼지 않을 수 없었다.
(1) 휴식을 해야 할 밤에도 욥은 깨어 있어야 하므로 밤은 그에게 낮과 같이 지루했고, 밤의 시달림은 낮의 노동과 같이 그를 매우 지치게 했다.
(2) 욥은 낮의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다. "아침의 햇빛은 기쁘게 빛난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어두움 때문에 그 기쁨은 곧 사라지고, 내게는 낮도 어두운 밤처럼 암담하구나"(신 28:67). 황혼과 아침의 햇살을 모두 반갑게 맞을 수 있게 해 주는 건강과 편안함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 가를 보라.
2. 이 세상에 대한 모든 기대는 곧 그와 함께 무덤 속에 묻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희망찬 말로 아첨한 것은 그를 조롱한 것에 불과했다(5:19; 8:21; 11:17). "슬프도다, 너희는 단지 나를 희롱했구나."
(1) 욥은 그 자신이 곧장 무덤 속으로
굴러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편안한 집과 포근한 침대 그리고 좋은 인간관계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즐거움들이다. 욥은 땅 위에서 이러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가 본 모든 것 그리고 그가 느낀 모든 것들은 불쾌하고 합당치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땅 아래에서 그는 이러한 것들을 기뻐했다.
[1] 욥은 무덤 이외에는 어떤 집도 바라지 않았다(13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만 일 내가 다시 편히 쉴 곳이 있다면, 저 무덤 속일 뿐이다. 만일 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죽음 이외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그것처럼 내게 확실한 것은 없다." 우리는 번영하는 가운데에서도 죽음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든지간에 반드시 그것을 예측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막을지도 모르지만, 그 어느 것도 그것을 막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순종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라. "그것은 내 집이라." 무덤은 집이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그것은 감옥이 되며(24:19, 20), 거룩한 자에게 그것은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베다바라(Bethabara)" 곧 "여관"이다. 그것은 나의 집이다. 내가 거기서 태어났노라. 그것은 내 아버지의 집이라. 내가 그것을 샀으므로 내 것이 되었다. 내 스스로 그것을 얻기 원하였다." 우리는 모두가 곧 그 집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예비해 두는 것이 지혜롭다. 우리는 그곳으로 이주해야 하며, 먼 본향에 가기 전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2] 욥은 흑암 속에서만 그의 조용한 침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그는 말했다. "내 침상을 베풀었다. 그것은 이미 마련되어 있으므로, 나는 단지 가기만 하면 된다." 무덤은 침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땅에서의 우리의 날이 다했을 때에는 그곳에서 쉬며, 우리의 영생의 날을 맞이한 아침에는 그곳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사 57:2). 이러한 사실은 선한 자들로 하여금 기쁘게 죽도록 만든다. 죽음은 그의 침상으로 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이 피곤하고 졸리워 침상으로 갈 때가 온 것이다. 그들의 아버지가 부르시는데 왜 그들이 기꺼이 가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것에 대비하여 내가 침상을 베풀었노라. 양심을 정결케 지킴으로써, 그것을 편하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이 침상에 누워 계시는 것을 봄으로써 그것을 향료의 침상이 되게 했고,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을 바라게 되었다."
[3] 욥은 무덤 속 이외에서는 어떠한 좋은 인간관계를 기대하지 않았다(14절). "나는 무덤(즉 썩을 육신이 있는 무덤)더러 너는 내 아비라(우리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는 구더기더러 너는 내 어미 내 자매라 외치리라. 그는 그들과 섞이고(인간은 구더기이기 때문이다), 그들과 대화하리라. 왜냐하면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기 때문이다"(21:26). 욥은 그의 친족들이 그로부터 떠난 것을 불평했다(19:13, 14). 그러므로 그들이 그를 무시했을 때 그를 좇으려 하는 다른 친구들과 사귈 것을 여기에서 원하고 있다.
첫째, 우리 모두는 무덤과 구더기와 가까운 형제이다.
둘째,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명상 속에서 그들과 함께 대화함으로써 그들과 친숙해 지는 것이 좋다. 그것은 무절제한 인간의 사랑을 떠나게 하도록,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도록 많이 도와 줄 것이다.
(2) 욥은 이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이 그와 함께 무덤 속으로 빠지는 것을 보았다(15, 16절).
"내가 이제 곧 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아노니, 나의 소망이 어디 있느냐? 살기를 원하지 않는 내가 어찌 번영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는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소망은 그들이 생각하는 곳에 없을 뿐이었다. "이 생에서만 이 소망이 있다면" 그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불쌍한" 자였다. "나를 위로하고 도와 주는 내 소망을 누가 보겠느냐? 내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일시적인 소망처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 영원한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그의 소망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19:25). "내가 알기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에 서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로 들뜨게 하려고 들려 준 소망이란 나를 음부의 문으로 몰아넣는 것이로다. 너희는 죽어가는 자들이므로 너희의 약속을 이룰 수가 없다. 나도 죽어가는 자이므로 너희가 약속한 좋은 것들을 즐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흙이 되어 휴식하게 될 때는,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의 모든 잡념들은 털어 버리고, 저 다른 세상에 소망을 두자." 우리는 곧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덤 속에서 먼지와 재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음부의 문 안에 갇혀 있고, 부활할 때까지는 죽음의 끈을 풀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쉴 것이다. 함께 쉴 것이다. 욥과 그의 친구들은 지금 합의할 수 없으나, 그들은 모두 무덤 속에 조용히 누울 것이다. 흙이 되는 그들은 곧 입을 벌리지 못하게 될 것이며, 모든 논쟁도 그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다투는 자들의 모든 마음을 냉각시키고 이 세상의 분쟁을 멈추게 하자.
@장코뱅 충실한 해설 내용에 공감합니다.
참된 신자는 고난 당하는 다른 성도를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진실하고 신중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오늘 성경본문과 해설이 너무나 좋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한 위로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