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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
-문학작품과 우스개 이야기를 중심으로-
30)문 성 대 **
국문초록
이 글은 조선중기 붕당, 전쟁, 사화 등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살았던 유가적
문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대상으로, 그와 관련한 우스개 이야기와
문학작품의 조명을 통해 그의 골계(滑稽)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을 살펴
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항복의 문학작품과 그와 관련한 우스개 이야기에는 중세 사회에서 웃음의
통제를 빗겨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항복의 골계적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기질적 면모는 웃음에 대한 당대인들의 관심을 반영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당대인들이 삶을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부정적인 현상들을 웃음을
통해 전복하고 치유하고자 했던 긍정적 상상을 증거한다. 그가 웃음을 통해 당
대 사회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성격적 결함이나 행위의 잘못
된 점들을 문제 삼았던 것은 법적 처벌이나 공적인 규제가 미칠 수 없는 상황
에서 그로 인해 빚어지는 다양한 불만들을 희극적 공상[상상]으로 풀어내기 위
함이었다.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통해 드러나는 웃음 속에는 언제나 인간
의 삶을 억압하는 사회에 대한 긍정적 상상을 담보한다. 비록 심각하고 진지한
사회문제나 공적인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가볍고 즐거운
웃음 속에서 삶의 장애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고치도록 의도하여 인간의 삶의
*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KRF-2008-361-A00006).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HK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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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의미지향을 우리들은 그 속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이
다. 이러한 웃음의 비판적 성격은 당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들을 웃음
의 틀에 담아내어 감정의 대립이나 충돌, 인간관계의 악화 등을 막거나 완화시
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심각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인다면 할 수 없는 문
제들을 웃음으로 포장하여 표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주제어 : 이항복, 백사집, 골계, 웃음, 희극적 공상(상상), 기질, 감성, 정치성, 소통
1. 들어가며
본고는 조선중기 붕당, 전쟁, 사화 등 정치·사회적 격변기를 살았던
유가적 문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1556~1628)을 대상으로, 그와
관련한 우스개 이야기와 문학작품의 조명을 통해 그의 골계(滑稽)적 기
질과 웃음의 이면(裏面)을 살펴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이항복과 관련된 우스개 이야기는 그가 살았던 조선 중기 이후부터
오랜 시간동안 폭넓게 유전되어 왔다. 현대인들에게도 이러한 이야기들
중에는 낯설지 않은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지기지우 한음(漢陰) 이덕
형(李德馨, 1561~1613)과의 재기 넘치는 이야기인 ‘오성과 한음’, 그의
장인 권율(權慄, 1537~1599)을 선조 앞에서 골탕을 먹이거나 담장 하나
사이로 휘어져 넘어온 감나무 가지에 얽힌 기지의 이야기, 그리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 사건에 대한 풍자 속에 다소 무거운 웃음이 깔린
일화 등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그의 문집 백사집,1) 역사적 성격
1) 백사집은 1629년 江陵에서 초간 되었고 1636년 晉州에서 중간 되었다. 이후
1726년 嶺營 신간본이 나왔는데 1988년 경인문화사에서 영인하여 출판하였다.
본고에서는 영영 신간본을 대상으로 하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한 강릉 초간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23
의 필기류와 야담, 패설 등의 문헌설화 뿐만 아니라 구비설화에서도 다
양하게 변개되고 유전되어온 것이다.2) 그래서인지 이항복의 이러한 면
모는 동시대의 여러 문인들에 의해 재치가 있고 재담을 잘한다 하여 ‘농
담의 왕(浮談天子)’3)으로 평가되기도 하였고 이후 후세인들에게도 ‘회해
(詼諧)’나 ‘해학(諧謔)’을 잘한다거나,4) ‘궤변 잘허여난 충신’5) 등으로 오
랜 동안 기억되었다.
웃음과 관련된 이러한 기억들의 공통적인 속성은 ‘희극적 공상’이나
‘허구적 과장’을 통해 현실을 비틀고 전도하여 그 속에서 통쾌한 웃음을
일으키는 것이다.6) 따라서 그러한 ‘공상’의 역사적 진위나 ‘상상’의 결과
로서 얻어지는 ‘웃음’의 효용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
다. 우리에게 익숙한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서도 다섯 살 터울의 오
성과 한음은 실제로는 죽마고우가 아니라 약관의 나이를 넘기고 벼슬살
이를 하면서 처음 대면하였다. 그들의 총명함과 재기 발랄함은 다양한
각편의 우스개 이야기가 집적되고 과장되면서 오랜 시간 동안에 ‘비범한
소년’의 이미지가 강조된 것이다.7)
본(문집총간 62권)도 참고하여 활용하겠다.
2) 구비문학대계를 보면 이항복과 관련된 우스개 이야기가 6편 채록되었다. 대부
분이 기존의 문헌설화를 기층적 성향으로 변개되어 유전된 흔적을 살필 수 있다.
3) 고금소총(동양문고본) 51화 <浮談天子>.
4) 성호사설 권9 <人事門> <善戲謔>.
5) 한국구비문학대계 9집 2책 <오성 이항복>.
6) 웃음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베르그송에 의하면 ‘희극적 공상은 (현실에서) 심하
게 탈선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그 광기와 같은 것에도 조리
가 있으며 꿈을 꾸는 듯하지만 곧 사회 전체의 승인이 되고 이해가 되는 환각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하면서 ‘실제의 삶에서 나온 예술과 같이’ ‘사회적·집단
적·민중적인 인간의 상상작용’에 관해서 탐색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앙리
베르그송, 이희영 역, 웃음, 동서문화사, 2008, 13~14면.
7)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에서 이 둘은 어려서부터 친했던 것으로 전해져오고 있으
나 그들은 다섯 살 차이가 나고 자라온 곳도 오성은 필운동, 한음은 남대문 밖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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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항복과 관련한 다양한 문학작품과 우스개 이야
기에는 그의 ‘골계적 기질’이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웃음과
관련한 그의 문학론8)은 웃음이나 골계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던
중세 사회의 보편적인 시각에서는 특징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9) 이항
복은 조선 중기, 그것도 선조와 광해군이라는 당쟁과 전란으로 점철된
시대를 살았던 유가적 문인이다. 그는 각박한 당쟁과 위중한 전란 가운
데서도 편당을 지양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했다. 백사집을 비롯한
여러 문헌자료에 남아있는 그의 문학작품을 읽어보면, 항상 해학과 풍류
의 여유로움을 잃지 않음을 볼 수 있고 그의 인간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인 평가에서도 ‘문장가’나 ‘문학가’로서 보다는 ‘청백리’나
‘경세가’로서 주목을 받았던 상황에서,10) 웃음과 관련된 그의 독특한 정
신적 태도나 활용은 그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이항복의 인간적 면모를 웃음과 관련된 그의 골계적
기질로 재조명하고 혼란기를 살았던 유가적 문인의 감성이 어떻게 웃음
로 서로 가깝지 않아서 그들이 이릴 적 친구였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음연보에도 한음 20세, 오성 25세 때 승문원 부정자로 같이 발령을 받으면서
처음 만났다고 기록되었다. 두 사람 모두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언행이 비
범하여 이웃에 소문이 퍼지게 되고 또 동시에 벼슬길에 올라 임금과 대신들의 총
애를 받으면서 서로 허물없이 교분을 갖고 지내게 된 것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우스개 이야기 거리로 과장되어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추측된다.
8) 허균의 문집에 부친 <성소잡고서>에 의하면, 이항복은 시의 가치를 ‘문구를 새기
고 흥얼거려 한때 사람을 기쁘게 할 뿐이다’라고 해이론(解頤論)의 입장으로 바라
보고 있다. 백사집 권2 <惺所雜稿序>.
9) 이종건, 백사 이항복의 문학연구, 국학자료원, 2002; 이종묵, 「이항복의 삶과
시」, 한국한시작가연구, 7집, 한국한시학회, 2002; 김종진, 「백사 이항복의 시
의 몇 가지 국면들」, 대동한문학, 25집, 대동한문학회, 2006; 서한석, 「이항복
한시의 시사적 성격에 관한 소고」, 대동한문학, 24집, 대동한문학회, 2006. 등
의 논의에서는 조선 중기의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이항복의 문학론과 한시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을 살피고 있어 참고할 만하다.
10) 서한석, 위의 논문, 285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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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통해서 소통되고 작동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부담천자(浮談天子)’ 이항복의 전유된 웃음
이항복은 1556(명종11)년 10월 15일 서울 서부 양생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문 경주 이씨로 한성부판윤, 이조판서와 의정부 좌참찬을 역임했
던 이몽량(李夢亮)이 그의 부친이다. 몽량은 전의(全義) 이씨와 혼인하
여 2녀 1남을 두었고, 이조판서를 지낸 눌헌(訥軒) 최사균(崔思均)의 표
손(表孫) 전주(全州) 최씨를 계실로 맞아 2녀 2남을 두었는데, 이항복은
그 막내였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 소년시
절에는 부랑배의 우두머리로서 헛되이 세월을 보냈으나 모친의 교화로
이후 학문에 몰두하였다고 한다.11)
그의 문집에 의하면 이항복은 유년 시절 홍역을 앓아 등 몸이 허약했
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부터 그 성품이 매우 관대하고 사려가 깊었
다. 여섯 살 때 물건을 훔친 여종을 보고 몰래 도로 가져다 두라고 일러
준 일화나 13세 때에 자신의 옷과 신발을 가난한 아이에게 벗어준 일화
에서 그의 너그러운 성품이 일찍부터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9세
에 부친을 잃고 15세에 모친을 잃었으므로 유복하지는 못하였지만 이후
학문에 힘써 18세에 사학(四學)에서 거듭 장원을 하였다. 그는 가학이나
독학으로 학문의 기초를 익혀 특별한 학문적 사승(師承) 관계는 보이지
않지만 다양한 교유 관계를 통해 학문을 성취한다. 다음은 이항복 자신
이 그의 젊은 날을 회상한 대목으로 이와 같은 상황을 잘 보여준다.
11) 백사집 <年譜>, <行狀>, <墓誌銘> 참조. 이후 이항복의 생애는 이종묵(앞의 논
문, 325~327면)과 정억기( 「백사 이항복과 서인과의 관계에 대한 연구」, 경주
사학, 24・25합집, 경주사학회, 2006)의 논문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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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타고난 운명이 기박하고 고독하며 또한 좋지 못한 때에 태어나서 겨
우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15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부모를 잃고 형
제들이 동서로 헤어지고 나서는 혈혈단신으로 혼자 외로운 그림자뿐 의지
할 곳이 없었다. 남들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자랐다. 여기서는 아버지의 가
르침을 받지 못하였고 자라서는 文友의 도움을 입지 못하였다. 미친 듯이
제멋대로 쏘다니면서 짐승처럼 저절로 자랐다.12)
경서를 탐독하는 한편 고문에 노력을 기울여 일정한 성취를 이루자
명류들이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19세인 선조 7년(1574) 권율의
딸과 혼인한 것도 그 때문이다. 권율의 부친 권철이 당시 영의정으로 있
었는데 그의 명망을 듣고 손녀를 그에게 맡긴 것이다. 이항복은 평소 한
칸의 집도 없어 장인인 권율의 집에 더부살이를 하였고 그 집이 필운산
에 있었기에 필운(弼雲)이라는 그의 호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13)
웃음과 관련된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은 어린 시절 그의 모친 최씨 부
인의 훈계와 장인 권율의 가벼운 언변에 대한 질책 등의 단편적인 기록
에서 확인할 수 있다.14) 특히 동시대의 여러 문인들의 이항복과 관련된
일화를 수집하여 그의 문집에 실었던 <諸公記識>15)는 정치적인 사건의
전말을 그려내는 우스개 이야기가 많이 수록되었다. 간단한 예화를 살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상국 이항복은 우스개 소리를 잘하였다. 근래 나라에 일이 많아 해당
12) 백사집, 권2, <寒食思先墓次杜子美七歌 幷序>.
13) 이종묵, 앞의 논문, 327면.
14)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웃음에 대한 경계의 일화는 이후에 이항복의 재치와 관련
하여 허구화되어 우스개 이야기로 더욱 확장되어 전유된다.
15) <諸公記識>에는 牛溪先生日錄, 象村求正錄, 月沙集, 寄齋壬辰日錄, 芝
峯類說, 荷潭破寂錄, 南溪集, 柳夢寅野談 등의 동시대 문집이나 필기류,
소화집, 야담집에서 우스개 이야기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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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부서에서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예에 따라 대신과 의논하여 임금께 보
고하였다. 그런데 지나치게 자주 하여 자잘한 일에 있어서도 대신의 의견을
물어 이를 고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하루는 예조의 낭관(郎官)이 의견
을 받아 가려고 와 있었는데 이항복이 구상 중에 있을 때, 나이 어린 종이
안에서 나와 고하기를 “말 먹이 콩이 떨어졌으니 무얼 먹이면 좋겠습니까?”
하고 묻자, 공이 “말 먹이 콩이 떨어져 무얼 먹이면 좋으냐는 것도 대신의
의견을 물으라고 하더냐.”고 야단을 쳤다. 듣는 사람이 모두 배꼽을 잡았다.
(2)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자산(慈山) 사람 이춘복(李春福)을 어떤 사람
이 고인(告引)하였으므로 금오랑(金吾郞)이 자산에 이르러 종적을 살펴보
니 경내에 이춘복은 없고 이원복(李元福)만 있었다. 금오랑이 이 사실을 조
정에 아뢰니 국청(鞫廳)에서 이원복을 잡아 심문하려 하였다. 그 때 공(이
항복)이 위관(委官)으로 그 자리에 있다가 중론을 보니, 이미 굳게 정해져
깨트릴 수가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자 하여도 무고한 사람이 횡액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었으므로 이내 말하였다.
“내 이름 또한 저 자와 더불어 서로 비슷하니, 모름지기 글월을 올려 내
자신을 변호해야지만 무사할 수 있겠구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 웃
었고, 그 옥사는 마침내 그치게 되었다.16)
이 이야기들은 무고와 옥사가 횡행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알 수 있다.
하찮은 일에도 걸핏하면 대신들을 불러 모아 의논을 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짐짓 조정일을 빗대어서 자기 집 하인을 나무라는 (1)의 이야기는
당시의 시사를 가벼운 우스개로 풍자하고 있다. 이에 반해 (2)의 이야기
는 제법 진중하다. 이항복이 살았던 당대의 정치적 사건인 계축역옥과
관련하여 그가 국청의 일에 관여할 때 겪었음직한 사건이 웃음으로 포장
되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이야기집에 실려 있는데, 당시 역적을 다스리
는 옥사가 크게 일어나 수사(收司)의 형률이 매우 엄하였는데도 백사는
16) 백사집 부록 권6 <諸公記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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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동요하지 않고 한마디 말로 옥사를 해결했다고 감탄한다. 이 이야
기는 한동안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다가 다양한 문헌에 전재된
다. 특히 조선 후기 청구야담에 실린 이야기의 말미에는 이러한 그의
태도에 ‘그를 위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人莫不偉之)’고 덧붙
이면서 그를 ‘기상은 넓고 컸으며 해학을 섞었으니, 옥사가 그에 힘입어
그릇된 것을 바로 잡는 것이 무척 많았다’라고 평하고 있다.17)
이 외에도 <제공기지>에 실린 여러 이야기들은 공통적으로 정치적인
사건과 관련된 것이 주를 이룬다. 문집에 실린 이야기의 특성상 역사적
사건에 결착하여 마치 그러한 이야기 속의 사건이 이항복의 정치사를 그
려내듯 재구된다. 동시대의 여러 문인들의 문집과 필기류 등의 문헌에
실린 단편의 이야기들이 긍정적으로 평가되어 그의 문집에 실린 것이다.
중세의 웃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문집에 이러한 이야기를 수
재할 수 있는 이유는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을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웃음의 기능을 일면으로는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골계, 해학, 희학, 회해 등 웃음과 관련된 사회적
인식, 적어도 상층부의 양반관료나 유가적 문인의 인식은 그렇게 관대하
지 않았다. 엄격한 중세 신분제 사회에서 웃음은 드러내기 보다는 통제
되어야 할 천박하고 하찮은 감정적 표출로 인식되거나 상대를 기만하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계도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임금 앞에서 웃음
을 머금은 이는 중형에 처해지기도 했고18) 교육적 목적의 예절서나 마음
을 수양하기 위한 경서에서도 ‘희롱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라’,19) ‘구차하
17) “其氣像恢廓 雜以諧詼 獄事賴以平反者 甚多” 청구야담 54화(고전번역원,
1995).
18) 연산군 6년(1500)에는 임금 앞에서 웃음을 머금은 내관 박승은을 당직청에서 장
1백을 치게 했다. 왕조실록(동방미디어) 연산군 6년 경신(1500) 6월 9일 기사.
19) 《예기》<소의>.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29
게 웃는 것(苟笑)은 도(道)를 욕보이는 것이다’라고 했다.20) 특히 ‘부모
가 병환에 있으면(父母有疾) 웃음이 나더라도 잇몸을 보여서는 안 된다
(笑不至矧)’21)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웃음의 통제는 감각적(육체적)인 것에 대한 통제와 함께 윤리
적인 이데올로기의 강화로 고착화 되었다. 특히 성정론(性情論)에 바탕
을 둔 ‘웃음은 정에서 나온다(笑出於情)’22)라는 동양적인 전통의 웃음관
은 유교적 중세사회에서의 정(情)에 대한 통제의 연장선에 놓였다. 물론
각종 우스개집의 서문에서 표명하듯, 웃음은 풍습이나 역사를 이해하거
나 세상살이의 근심을 풀어내거나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
잘못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등 긍정적인 인식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긍정은 공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바둑이나 장기가 낫
지 않겠느냐는 말과 비슷한 소극적 인식으로 어디까지나 일부 문인들의
웃음에 대한 개인적 관심과 문학적 표출의 한 면모였을 뿐이다.
이와 같은 웃음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웃음에 대한 윤리적 관점이
미학적인 관점으로 전환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웃음이 대상에 대한 직
접적인 공격이나 비난에서 벗어나 무화되고 용해되면서 누구에게도 수
치심과 모욕감을 주지 않게 되었고 웃음의 긍정적인 기능들은 오히려 긴
장을 이완하고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러한 웃
음의 미학적인 관점은 이전의 웃음 담론에 비추어 보면 전혀 새로운 것
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백사 이항복이 살았던 시대는 이러한 전환이 시
작할 무렵이다. 그 이유는 동시대의 여러 문인들의 웃음에 대한 관심과
개인적 표출이 급격하게 늘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특성이 서서히 하나의
전통을 형성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이항복
20) 소학 내편 <명륜> <明父子之親>.
21) 소학 내편 <경신> <明威儀之則>.
22) 이이엄집의 <默可笑論>; 笑天笑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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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대상으로 하거나 그와 관련된 정치적 사건을 소재로 한 우스개 이야
기가 많은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정치적 이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3. 골계의 이중적 구조와 웃음의 정치성
골계라는 용어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楚史 <卜居>에서 굴원
이 ‘청렴과 정직으로 스스로 맑게 할까? 아니면 순종하며 골계하며 기름
처럼 모난 곳 없이 둥글게 할까?’라고 말한 대목이다.24) 여기서의 ‘골계’
는 ‘청렴’과 ‘정직’에 대비되는 부정적인 개념이지만 시류에 맞게 처세하
는 삶의 태도로 볼 수 있다. 이후 사마천의 사기 <열전>의 <저리자감
무열전>에서는 주인공 저리자를 “저리자는 골계하고 지혜가 많아 진나
라 사람들이 지혜 주머니라고 불렀다”25)고 소개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
한 <색은>注에서는 “滑은 어지럽히는 것[亂]이고 稽는 같은 것[同]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그른 것을 옳은 듯이 말하고, 옳은 것을 그른 듯이
말하여 같은 것과 다른 것을 어지럽힐 수 있음을 말한다”26)고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골계의 의미는 대상의 진위를 어지럽힐 수 있을 정도의 빼
어난 말솜씨로 시비의 개념을 전도시켜 같거나 다른 사실을 혼란시킬 수
있게 한다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27)
23) 대부분의 웃음과 관련된 필기, 야담, 패설, 소화, 일화 등이 16세기와 17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게 되고 동시대의 문인들에 의해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가 문헌
전재되는 특징은 여러 연구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
24) “寧廉潔正直 以自淸乎 將突梯滑稽 如脂如韋 以潔楹乎” 성범중, 「골계한시의 성격
과 계승」, 울산어문논집, 15집, 울산대학교 국어국문학부, 2001, 294~295면
재인용.
25) “樗里子滑稽多智 秦人號曰智囊” 사기 <골계열전> <樗里子甘茂列傳>.
26) “索隱 滑亂也 稽同也 謂辯㨗之人 言非若是 言是若非 謂能亂同異也” 사기 <골
계열전> <樗里子甘茂列傳>.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31
그러나 골계는 그것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대체로
미적 범주의 한 부분으로 인식되어 갔다. 즉 숭고나 우아, 혹은 비장과
같은 미적 범주와 동일한 층위로서 다루어진 것이다.28) 한편 이 골계의
의미에 대해서 미적 범주로서가 아닌 일반적인 인식이나 사전적 의미 규
정에 있어서는 ‘웃음’이 본질적인 요소이거나 최소한 매우 밀접한 연관
을 가진 것으로 이해 혹은 설명되고 있다. 사전마다 약간의 표현상의 차
이는 있지만, 대체로 ‘익살’의 동의어로 “남을 웃기기 위하여 일부러 하
는 재미있고 우스운 말이나 짓”29)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
한 범박한 어휘적 설명이 미적 범주로서의 골계의 의미를 전적으로 포괄
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골계를 ‘말’이나 ‘짓’과 같은 대상적
속성으로 그리고 웃음을 골계의 본질적 속성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30)
이처럼 골계는 전통적으로 인간의 삶의 태도나 처세의 언변술로 이해되
었다가 이후 미적 범주나 웃음과 관련된 본질적 속성 혹은 그것과의 밀접
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골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실재적인 것[현실]과 기대했던 것[이상] 사이의 ‘모순과 충돌’ 속에서 실재
적인 것의 패배에서 발생하는 미적 쾌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골계는
근본적으로 ‘불일치’ 혹은 ‘모순’의 미학이라 정의할 수 있다.31)
27) 하지만 <正義>注에서는 ‘滑은 淈로 읽는데 물줄기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고, 稽는
헤아림이다. 그 지혜와 계책이 물줄기처럼 다함이 없이 흘러 나온다’고 하여 골계
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正義 滑讀為淈 水流自出 稽計也 言其智計宣吐 如
泉流出無盡” 사기 <골계열전> <樗里子甘茂列傳>.
28) 이러한 시각은 서구에서 골계에 대한 이론적 분류 체계가 도입되고 소개되면서
골계나 풍자, 해학에 대한 이론적 점검을 위해 인용되었다. 유병관, 「풍자의 개념
에 대한 몇가지 문제」, 반교어문연구, 6집, 반교어문학회, 1995, 341면.
29) 신기철 외 편저, 새우리말 큰사전, 삼성출판사, 1986.
30) 유병관, 앞의 논문, 342면.
31) 유병관, 앞의 논문, 347면.
132 우리어문연구 36집|고전문학·한문학
요컨대 골계는 기대했던 것과 실현된 것 사이의 양적 혹은 질적인 모순에
서 나온 미이며, 그 주관적 체험은 기대와 실현의 모순이 갑자기 의식되어
긴장되고 있던 심적 에네르기가 급격히 분출될 때 생기는 쾌감이지만, 동시
에 그 의외성에서 발생한 놀라움이나 환멸감 따위의 불쾌감이 주체의 정관
적・유희적 태도로 극복될 때에 성립하는 미감이다.32)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골계의 속성이 ‘모순과 충돌’의 미학이면서도
‘불쾌감이 주체의 정관적・유희적 태도로 극복될 때에 성립한다’는 사실
이다. 골계를 통해 ‘현실의 모순’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모순의 화해’
를 담보한다는 특성은 앞서 살폈던 웃음이라는 감성의 표출이 윤리적이
고 이데올로기적인 제한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현실 세계에 대한 부정이, 부정 자체에 있기 보다는 부조리와 모
순을 포착하고 그것을 드러냄으로써 시정하고 개혁하는 ‘인간애의 정당
성’에 있기에 골계는 역사나 문학에서 점차로 긍정적인 기능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적어도 서양의 웃음관의 변모와 인식의 변화
와 동궤를 이룬다. 대표적으로 이런 의미에서 베르그송은 웃음을 ‘이상
한 짓거리를 교정하는’ ‘사회적 제스처’라고 정의하기도 했다.33)
미적 범주로서 골계의 기능이 주목되면서 사회에 대한 껄끄럽고 불편
하며 거북스러운 감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 중기의 문인들에게는 개인적인 표출이나 소극적인 활용으
로 비춰진다. 골계를 통해 사회적 모순과 불만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웃음을 자아내어 무릎을 치면서 권태로움을 잊거나(擊節忘倦) 몰려오는
졸음을 깨는(禦眠, 破睡) 등의 일시의 흥미와 재미를 추구한 것이다.34)
32) 편집부편, 미학사전, 논장, 1988, 401면.
33) 베르그송, 앞의 책, 21~22면.
34) 물론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야담, 패설, 소화 등의 이야기집에서는 웃음의 사회적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특히 개화기의 일부 재담집에서는 중세의 웃음관과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33
이런 정황에서 보자면 이항복과 관련된 우스개 이야기에 나타나는 골계
적인 면모와 웃음의 이면은 더욱 특징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선조와
광해군 때 발생한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현실의 억압적인
일체의 것 가령 공적인 것, 정치적인 것, 불편한 것에 대한 순간적인 무
화와 전도가 골계를 통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항복의 문집을 보면 당쟁과 옥사가 팽배했던 당시의 각박했던 세풍
을 풍자한 시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술을 가지고 자주 글자 물으
러 올 것 없네 / 요즘 경박한 무리가 남 엿보기 좋아한다오”,35) “애사에
도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 야박한 풍속이 남 엿보아 말 만
들기 때문일세”36) 등의 시구에서는 남을 엿보아 약점을 찾아내려 하거
나 말을 만들어 내기를 좋아하는 당시의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세태 속에서 심지어 이원익(李元翼;1574~1634)이 사람을 보내어 안부
를 묻되, 편지를 사용하지 않고 말로 전하기만 했다는 일화도 발견된다.
이항복은 이런 정황이 조정의 선비들이 편지 때문에 해를 입은 경우가
많자 이를 경계하여 자취를 없애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다음과 같은
장난스러운 시를 짓기도 한다.
口報平安信 입으로 안부의 소식을 전하여라.
何無折簡辭 어찌 편지로 말을 하지 않는고.
時情喜窺密 세태가 남의 비밀 엿보길 좋아하기에
公意在三思 공의 뜻은 심중함에서 나온 것이라.37)
1613년 박응서를 비롯한 서양갑 모반 사건이 일어난 후, 선조의 장인
는 질적으로 변모되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35) “載酒未須頻問字 近來輕薄喜窺人” 백사집 권1 <隣有少年勤來問字書示>.
36) “哀詞不敢分明語 薄俗窺人喜造言” 백사집 권1 <漢陰李公德馨挽>.
37) 백사집 권3 <梧老數使人相問 …>
134 우리어문연구 36집|고전문학·한문학
이자 인목대비의 아비인 김제남이 사사되고 이듬해 영창대군도 강화도
에서 죽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계축역옥의 파장은 이후 인목대
비에까지 이르게 되고 결국 폐비문제가 거론되는 등, 당시 살벌한 정치
적 분위기에서 수백 명의 신료 중 반대의견을 개진한 사람은 기자헌(奇
自獻; 1567~1624)과 백사 등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38) 이 무렵 이이
첨 등 폐비론을 주도한 인물들은 반대의견을 개진한 인물들을 주시하던
상황에서 감시를 당하는 인물들은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극히 조심스럽
게 행동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광해군이 자문할 바가 있어 금
오랑을 노원촌사로 보내었는데, 집안 식구들이 사약을 들고 오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니 이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39)
그러나 백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모두 당시의 정치적인 분위기와 사
건들과 관련해 사회적인 모순과 비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
집 소재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후의 다른 이야기집에 실린 이야기는 웃
음의 흥미성이 부각되고 허구화되어 유전된 것들이 보인다. 다음의 예화
가 대표적이다.
이항복과 그의 장인인 원수 권율은 빈정대며 희롱하기를 좋아했다. 더운
여름날 입궐하게 된 이항복이 장인에게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몹시 더워
장인께서 견디시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버선을 벗고 신을 신는 게 좋겠습니
다.” 권율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대궐에 들어가서 한참 있다가 이항복이 왕 앞으로 나오며 아뢰었다. “날
씨가 몹시 더워 나이든 재상들이 의관을 갖추고 있기에 가려울 듯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신을 벗도록 해주시옵소서.”선조는 매우 옳은 말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영의정부터 차례로 신을 벗게 되었다. 권율은 선뜻 신을 벗지
못한 채 이항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는 것이었다. 선조는 권율이 임금
38) 정억기, 앞의 논문, 340~341면.
39) 백사집 권3 <聖旨有所咨詢 金吾郞馳至 時余方俟罪蘆原 時議洶洶 渾含驚懼>.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35
앞에서 신을 벗기가 어려워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고 내관에게 신을 벗겨주
라고 명했다. 그런데 신을 벗기고 보니 맨발이 그러났다. 권율은 도포 자락
으로 발을 가리고 엎드려 아뢰었다. “이항복에게 속아 이리 되었나이다.” 임
금은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여러 신하들도 배를 움켜쥐었다.40)
장인 권율에 대한 이야기는 이야기책(利野耆冊)에도 보이는데, 금
실이 좋은 권율이 초저녁에 행방을 하는데 권율은 두 귀가 막히는 듯하
다고 하고 부인은 사지가 녹아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말을 몰래 엿
들은 이항복은 일부러 인기척을 내고 권율과 이야기를 나눈다. 권율은
이항복에게 자네의 문장은 으뜸이지만 말을 삼가지 못하는 것이 흠이라
고 한다. 그러자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하고서 이후부터는 사지가 녹아나
든지 두 귀가 막히든지 분별하지 않겠다고 대답하는 내용이다. 이런 이
야기는 대부분이 골계의 사회적 기능이 드러나기 보다는 이항복과 그와
관련한 역사적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해 내려오는 짤막한 단편의 이
야기를 흥미 위주로 허구화하거나 재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이 편찬했던 명엽지해에 실린
다음의 이야기는 기축(1589)년 옥사와 관련된 정치적인 비화가 한때의
웃음거리로 전해진 것이 있다.
선조 기축 년간에 역적을 다스리는 옥사가 만연하여 몇 개월이 지나도 끝
나지 않았다. 그래서 추관(推官)들이 괴로워하면서 늘 말하곤 했다.
“이 옥사가 언제나 끝날꼬?”
그러면 오성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이번 옥사는 필경 쉽사리 끝나지 않
을 거외이다.”
혹자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 오성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아산의 현감이 연법주(衍法主)를 입량진배(入量進排)하니 옥사가 어찌
40) 기문총화 5권 600화.
136 우리어문연구 36집|고전문학·한문학
속히 끝날 수 있겠소?” (…) 이 이야기는 한때의 웃음거리로 전해졌다.41)
사실 이 이야기를 읽고 웃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한다. 우스개
라기보다 무슨 암호에 가깝기 때문이다. 생략된 원문을 보면 이러한 이
유 때문에 몇 가지의 단서로 해석을 돕고 있다. ‘입량진배(入量進排)’라
는 말뜻을 풀이하면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을 ‘진배(進排)’
라고 하고, 그 들어오는 양에 따라 진상할 물건을 갖춰 올리는 것을 ‘입
량진배(入量進排)’라 일컫는다”42)고 설명하고 있다. 이런 의미라면 ‘연
법주(衍法主)’를 그 들어오는 양에 따라 바친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으나
이 또한 석연치 않다. 그래서 또 다시 “연법주란 당시 이름난 스님으로
소문이 나서 역당으로 몰려 피해 다니고 있었다. 마침 아산현감이 공로
를 세우고자 하여 스님들 이름 가운데 ‘연(衍)’자만 들어가도 붙잡아서
형틀에 묶어 서울로 압송했다. 그러니 전후에 잡혀 들어온 자가 무릇 여
섯 명이나 되었으니 그래서 했던 말이다”43)고 부연한다. 따라서 이 이야
기는 ‘연법주’가 중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입량진배’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속성이 있음을 포착하여, 중(僧)을 나타내는 ‘주(主)’를 술을 뜻하
는 ‘주(酒)’와 말바꾸기를 하여 웃음을 유발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이야기의 구조는 독특한 그의 골계적 구조적 속성을 본떠서
흥미롭다. 가로 처져 생략된 부연의 설명은 비록 후대의 사람들이 웃음
유발을 돕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하지만, 당시 이 이야기가 행해졌을 발
화 상황에서 보자면 필요 이상의 반대 담론들을 일시에 무화시키고 전도
하는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이 더욱 강조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었음
41) 명엽지해(동양문고본) 17화 <倅進衍主>.
42) “俗語 自下奉上 謂之進排 隨其入而供進 謂之入量進排”
43) “衍法主稱名僧 以逆黨逃躱 時牙山倅 希功倖賞 捕得僧名之衍字同音者 械繫上送
前後凡六人 故云耳”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37
직한 청자들은 ‘연법주’와 ‘입량진배’라는 말바꾸기의 놀이에 동참하면서
각박했던 사회의 정치적인 문제를 유희적으로 풀어나가고 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야기 말미의 야사씨(野史氏)로 시작하는 평문에서는 백사
의 골계의 의의를 “백사의 이 말이 한 때의 우스개 소리로 나온 말이기
는 하지만 실제로는 남을 모함하는 자들에게 천고의 경계가 될 것이
다”44)라고 평가하고 있다.
4. 마지막 선택 그리고 또 하나의 소통
이항복이 적어도 그의 문학 작품과 우스개 이야기 속에서 골계라는
긍정적 기능을 수용하여 사회적인 모순과 그것의 반성적 모색을 허구(상
상)를 통해서 드러냈다면 그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와의 소통일 것이
다. 이러한 소통의 욕구는 그 사회가 불안하고 경직되며 억압적일 때 더
욱 강해진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의 억압이 그러한 욕망보다 거대하거나 강력했을 때에는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이며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된다.
이항복의 말년에는 수많은 정치적인 부침과 좌절 속에서 스스로를 반
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백사집을 보면 이항복이 경북 영덕에 벼슬을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영덕과 차운한 시가 있다. 시의 내용은 이항
복이 지난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영덕이
어떤 인물이며, 이항복이 언급하고 있는 잘못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
만 삶에 대한 이항복의 반성적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 해가 저물 무렵, 이영덕이 시를 보내와 안부를 묻기에 차운하여 다시
44) “白沙此言 雖出於一時之諧謔 而實可爲千古陷人者之戒也”
138 우리어문연구 36집|고전문학·한문학
보내다>
錯料一生事 일평생의 일을 잘못 헤아렸더니
不念年遲春 나이가 늙는 것도 생각지 못했네.
居然到六十 어느덧 나이 육십이 되고 보니
攬鏡心獨苦 거울을 봄에 마음이 유독 괴롭구려.
分甘甑生塵 쌀독에 먼지 낀 것 당연한 분수요
何嫌屋因樹 나무를 이어 지붕 삼는 걸 무어 꺼리랴.
世事爛熟思 앞으론 세상 일을 익히 생각하여
誓不再作誤 맹세컨대 다시는 그르치지 않으리라.45)
뿐만 아니라 <스스로 후회하다>라는 시에서는 제목 그대로 자신의 반
평생을 돌이켜 보고 스스로 후회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시의 후
반에 이르러서는 마음 수양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스스로 후회하다>
少年言笑太非情 소년 시절 우스개말은 너무도 정에 어긋났어라.
錯料幾虛過半生 잘못 생각에 거의 반평생을 허송으로 보냈네.
晩矣瑞巖閒老釋 늦게서야 서암의 한가한 늙은 스님이
夜深初喚主人醒 깊은 밤에 처음으로 주인을 불러 깨우는구나.46)
“서암의 한가한 늙은 스님이 주인을 불러 깨운다”는 것은 심경에 나
오는 내용으로 마음 수양하는 것을 뜻한다. 이 고사는 주희가 “서암의
스님이 매일 항상 스스로 자신에게 묻기를 ‘주인옹은 스스로 마음을 경
계하여 깨닫고 있는가’라고 묻고는, 스스로 답하기를 ‘마음을 경계하여
깨닫고 있다’고 하였다”47)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이 시는 젊은
45) 백사집 권1 <舊歲將盡李盈德寄詩相問次韻却寄>.
46) 백사집 권3 <自悔>.
47) “瑞巖僧每日間常自問 主人翁惺惺否 自答曰 惺惺” 심경. 김종진, 앞의 논문,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39
시절 이후 당쟁과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둘리어 살아왔던 자신의 반평생
을 돌이켜 보고 자신의 마음 수양을 위해 읊은 시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년 시절 우스개말은 너무도 정에 어긋났어라’는 부분을 보자면, 그것
이 마음 수양을 제대로 못한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을 단정지어 말한 것
일 수도 있지만 어린 시절의 웃음과 관련된 그의 기질적인 면모의 반성
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말년에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폐모론이라는 정치적인 사건의 예고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실 광해군 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조정과 재야의 기대가 모두 이항
복에게 쏠렸다. 월사 이정귀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나는 오성 어른께서
반드시 한 말씀 하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멀리 유배를 가지 않을 수 없
으리라 생각했다.”고 하였다. 이정귀 자신도 이 상황을 면할 수 없을 것
같아 작별 인사를 드리려 말을 타고 독촌에 찾아 가서, 묻기를 “저는 병
을 핑계로 문을 닫고 있으나 직책을 갖고 있고 도성에 살고 있어 대론
(폐모론)이 일어나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른께서는
물러나 교외에 계시면서 조정 일에 전혀 간여하지 않으시니 비록 말씀을
하지 않으셔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48)
한번은 어떤 손이 와서 묻기를 “듣건대 소장(疏章)을 갖추어 곧 올릴
것이라고 하니, 한 번 보여주기 바랍니다.”라고 청한다. 오성이 “무슨 상
소를 말하는가?” 하니, 객은 “경사(京師)에서 많은 사람이 요즘에 의당
소대궁(昭臺宮)의 일이 있어 오성 노인이 상소를 갖추어 곧 올릴 것이라
고 말들을 합니다.”라고 말한다. 이에 오성은 “내가 양현(兩賢)에 관한
상소 때문에 여러 말이 당시의 재상에게 촉범되어 지금까지 뜻밖의 앙화
가 되어왔다네. 그리고 지금은 내가 관직에도 있지 않으니,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참여하여 알 까닭이 없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라
393면 재인용.
48) 백사집 부록 권6 <諸公記識>.
140 우리어문연구 36집|고전문학·한문학
고 항변한다.49) 이런 상황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장난기 어린 시를 지어
다시는 정치적인 일에 나서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自愧虛名抗疏餘 부끄러워라 헛된 이름으로 항소한 나머지요
衰年況復迫懸車 쇠한 나이는 더구나 치사할 때도 임박하였네.
桑楡始得安身計 만년에야 비로소 몸 편히 할 계책 얻었으니
北闕從今休上書 앞으로는 대궐에 글을 올리지 않으련다.
世人疑我發棠餘 세인들이 나에게 당을 열게 할까 의심하지만
馮婦如今悔下車 풍부가 이제는 수레에서 내린 걸 후회하노니,
地坼天分渾不關 하늘과 땅이 갈라져도 전혀 관여하지 않고
閉門終日讀吾書 문 닫고 앉아 종일토록 글이나 읽으리라.50)
당(棠)은 제나라 당읍(棠邑)에 있는 창고를 말한다. 맹자가 일찍이 제
나라에 등용되었을 때, 마침 흉년이 들자 제왕에게 권하여 당읍의 창고
를 열어서 빈민을 구제하게 한 적이 있었다. 이후 맹자가 조정에서 물러
난 후에 또 흉년이 들자, 진진(陳瑧)이라는 사람이 맹자에게 와서 말한
다. “국인들이 부자(夫子)께서 장차 다시 당읍의 창고를 열게 할 것이라
고 여기나 다시 그렇게 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자 맹자는 다음과 같
이 설명한다. “그렇게 한다면 바로 풍부(馮婦)와 같은 사람이다. 진(晉)
나라에 풍부란 사람이 있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곤 하다가 끝내 착
한 선비가 되었었다. 그후 들판을 지나는데 뭇 사람이 호랑이를 쫓으니
호랑이는 산기슭을 등지고 있어 아무도 감히 덤비지 못하고 풍부에게 가
49) “客有來問 聞具疏將上 乞賜一見 答云何疏 曰 京師多言近當有昭臺宮事 鰲老具疏
將上 答曰 我以兩賢疏 語侵時相 至今爲奇禍 今不在位 事無大小 理無與知 何有是
歟 因戱爲詩” 백사집 권4.
50) 백사집 권4 <客有來問 聞具疏將上…>.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41
서 그를 맞이하였다. 그러자 풍부가 팔뚝을 뽐내고 수레에서 내리니 뭇
사람들은 기뻐하고 선비는 그를 비웃었다”51) ‘발당(發棠)’과 ‘풍부(馮婦)’
의 고사를 인용하여 마치 제왕(齊王)이 능히 맹자(孟子)를 등용하지 못
하였고, 맹자(孟子) 또한 장차 떠나려 한 것 같이, 이항복도 더 이상 정
치사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폐모론이 일어나고 결국 <정사의(丁巳議)>를 올리고
북청으로 유배를 가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연보>에 의하면 1617년 “겨
울에 대북파 일당들이 인목대비를 폐위하기를 결의하고 상소문을 거듭
올렸다. 나라 안이 흉흉하고 시끄러웠으며 공도 침식이 모두 줄었다. 갑
자기 큰 우뢰가 치자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아마도 경계하며 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잠시 후에 추부의 실무 관리인 낭청이 원로대신
에게 자문을 구하여 의견을 수렴하러 왔다. 공이 시중드는 이에게 자신
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라 하고 붓을 휘둘러서 의(議)를 쓰기를 …”52)
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때 쓴 의(議)가 그 유명한 <丁巳
議>다. “누가 전하를 위해 이런 계획을 세웠습니까 … 춘추의 의리는
자식이 부모를 원수로 삼는 의리는 없습니다”53)라는 구절이 들어가 있
는 <정사의>가 올라가자 “모든 관료들이 두려워하였고 의가 쓰여진 문서
를 들고는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54)고 한다. 그후 삼사에서는 백
사를 탄핵하여 아주 외딴 곳에 유리안치(圍離安置)할 것을 요청하였고
대북파의 지시를 받은 무뢰배들은 극형에 처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
나 <연보>와 <정사기문록>은 모두 “공이 평소처럼 편안하게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51) 맹자 <盡心下>.
52) 백사집부록 권1 <연보>.
53) 백사집 권14 <丁巳議>.
54) “議至 百僚竦然 有執之流涕者” 백사집 부록 권1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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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이 말년에 보인 이러한 변화는 경세가들이 취하는 일반적인 정
치적인 처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임금에게 간언을
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그의 비장한 태도를 보자면 단순한 웃음
(言笑)에 대한 폐기는 아닐 것이다.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
적인 억압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지성인의 마지막 양심적 선언은 아니었
을까? 공업(功業)을 이룬 경세가의 면모와 정치적인 중립을 이루려고 했
던 정치적 지도자라는 역사적 평가와는 달리 그가 문학사에서 그렇게 크
게 주목을 받지 못한 부분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많은 문학작품을 남겨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한 그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을지라도 현실 속에서, 적어도 당시에는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더라
도, 그의 골계적 면모와 웃음은 그의 사후에도 끊임없이 그 힘을 발휘했
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5. 나오며
지금까지 본고에서는 이항복과 관련된 문학작품과 우스개 이야기를
중심으로 중세 사회에서 웃음의 통제를 빗겨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항복의 골계적 면모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기질적 면모는 웃음
에 대한 당대인들의 관심을 반영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당대인들이 살아
가면서 마주치는 부정적인 현상들을 웃음을 통해 전복하고 치유코자 했
던 긍정적 상상을 증거한다. 그가 웃음을 통해 당대 사회의 부조리와 그
속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성격적 결함이나 행위의 잘못된 점들을 문제 삼
았던 것은 법적 처벌이나 공적인 규제가 미칠 수 없는 상황에서 빚어지
는 다양한 불만들을 희극적 공상[상상]으로 풀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래
서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담긴 웃음은 언제나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사
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43
회에 대한 그의 긍정적 상상이 담보된다. 비록 심각하고 진지한 사회문
제나 공적인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가볍고 즐거운 웃
음을 통해 삶의 장애들을 제시하고, 그 자체로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
키고자 하는 그의 인간적인 의미지향을 우리는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항복에게 있어서 골계와 웃음은 긴장 이완의 평상시
기능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비상시의 위기감이나 불안감을 해소하
는 효과적인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웃음의 비판적 성격은
당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들을 웃음의 틀에 담아내어 감정의 대
립이나 충돌, 인간관계의 악화 등을 막거나 완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는 심각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인다면 풀 수 없는 문제들을 웃음으로
포장하여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선 중기 격변기
를 살아갔던 이항복의 역사・문학사에서의 평가는 ‘웃음을 통한 사회와의
소통’을 끊임없이 시도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새롭게 주시할 필요가
있겠다. 다만 그의 문집 소재의 이야기와는 달리, 이후의 이야기집에 실
린 이야기들이 점차로 웃음의 흥미성이 부각되고 허구화되어 유전된 특
징이나 그 속에 다양하게 굴절된 웃음의 의미지향을 본고에서는 정치하
게 분석하지 못한 바, 이러한 문제는 후속 과제로 기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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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복의 골계적 기질과 웃음의 이면(裏面)|문성대 145
Abstract
The Nature of Lee, Hangbok’s Humor and Inside of Laugh
-With the literary works and humorous stories about him-
55)Moon, Seong-Dai*
This thesis is studied for closely inspecting about the nature of Lee,
hangbok’s humor and finding the inside meaning of the laugh with the literary
works and humorous stories about him lived in the Mid-Choson dynasty,
which is characterized by the turbulent times because of the faction(朋黨),
war, sahwa(士禍) etc.
We can look for his tendency toward the humor by reviewing the literary
works and humorous stories about him and find out that he made a detour
around the Middle age’s control about laugh(laughing). This appearance of
him reflects the public interest in laugh at that times, further proves that
he would have imagined the overthrow and cure for the social evils he had
happened to meet through the laugh. Therefore the laugh showing in these
humorous stories always includes the positive imagination against the bad
social suppressing the common people. Although he didn’t completely deal
with the serious or public problems of life, but constantly showed the
hindrances of life by laugh for the purpose of healing them. This critical
character of laugh would have carried out preventing and easing the conflict
of emotion, deterioration of the human relations etc.
Key words : Lee Hangbok, Baksajib(白沙集), humor, laugh, humorous imagination,
emotion, politics, communication
* Chonnam National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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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성대
전화 : 010-7900-7735
전자우편 : anstjdeo@hanmail.net
논문 접수일 : 2009. 12. 6
심사 완료일 : 2010. 1. 4
게재 결정일 : 2010.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