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시집 제3권 2-6 2 석로釋老 6 여남방승기운문산與南方僧期雲門山남방의 승과 운문산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다
유승자남래有僧自南來 한 중이 南에서 찾아와
도아운문호道我雲門好 내게 일러주네, 운문산 좋다는 걸
운문하소유雲門何所有 운문산에 있는 게 무엇이더냐?
랍매춘전조蠟梅春前早 납매臘梅 꽃이 봄 먼저 일찍 피고
갱유천간죽更有千竿竹 다시 천 줄기 대나무 있어
소소취불로疎疎翠不老 드문드문 푸르름이 늙지 않는데
가이소기하可以嘯其下 그 아래서 휘파람 불 수도 있어
탕차륜균회蕩此輪囷懷 구기고 뭉친 가슴 가셔낼 걸세.
아문희욕전我聞喜欲顛 내 듣고 하 기뻐 미칠 것만 같아
무장기배회撫掌起徘徊 손바닥 두드리며 일어나 서성댔네.
천극자유죽千戟子猷竹 천년전 자유子獻의 그 대나무야
만고화정매萬古和靖梅 만고의 화정和靖의 매화이어서
문자막불송聞者莫不竦 듣는 이 송구한 듯 않는 이 없었거니
립피완부회立彼頑夫懷 저 어두운 사나이의 생각을 세워 줬네.
여년신약건餘年身若健 남은 해 이 몸 만일 건강하다면
차거운문위且去雲門喂 다시 또 운문산 모퉁이로 가서
매변가소옥梅邊架小屋 매화 곁에 작은 집 얽어 두고서
죽하평고추竹下評敲推 대 아래서 글 평하며 고치리로다.
지자당유의之子倘有意 이 사람 혹 뜻이 여기 있거들랑은
포금시왕래抱琴時往來 거문고 안고서 때로 오고 가게나.
►납매臘梅 원래는 개동백 나무.
섣달에 노란 꽃이 피는 것을 '납매'라 하는데 여기서는 梅花가 섣달에 피는 것을 말한 듯하다.
<납매臘梅(蠟梅)>
납매는 중국이 원산으로 당매唐梅라고도 부르며 관상수로 많이 식재.
납매라는 이름은 12월(臘月)에 꽃이 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과
꽃의 색깔이 밀랍蜜蠟을 닮아 붙여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납매蠟梅/이덕무李德懋(1741-1793)
1
가자라부득柯自羅浮得 가지는 나부산羅浮山에서 구했고
근종유령래根從庾嶺來 뿌리는 대유령大庾嶺에서 왔네.
한파유미득寒葩猶未得 겨울 매화梅花가 아직 피지 않아서
봉랍철지간蜂蠟綴枝間 밀랍蜜蠟을 가지 사이에 엮어 놓았노라.
2
랍본화정양蠟本花精釀 밀蜜은 본디 꽃의 정수精髓로부터 생겨난 것이라
재화반숙진裁花反孰眞 만든 꽃과 심은 꽃 중에 어느 것이 진짜인가.
정간공색상靜看空色相 조용히 맑은 하늘빛을 바라노니
완이시전신宛爾是前身 완연宛然하구나, 이것이 바로 전신前身이로다.
송인이황매위랍매宋人以黃梅爲蠟梅 송나라 사람들 황매를 납매라 부르지
여상주랍위매화余嘗鑄蠟爲梅花 일찍이 나는 밀랍으로 매화를 빚었네
철어매지綴於梅枝 식이고분植以古盆 매화가지에 엮어 낡은 화분에 심어
치지안상置之案上 방불진매彷彿眞梅 책상에 두니 참 매화와 다름없다
인다미변기가人多未辨其假 사람들 대부분 진위를 가리지 못하니
인명랍매因名蠟梅 이로 납매라 부른다.
비송인지황매화야非宋人之黃梅花也 송나라 사람이 말하는 황매가 아니다.
►륜균輪囷 구불구불함. 높고 큼.
►자유子猷 진晉의 왕휘지王羲之의 아들인 휘지徽之의 자字.
<차군此君 대나무의 별칭>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대나무를 몹시도 사랑하여 사는 곳마다 대나무를 심었는데
남의 빈 집에 잠깐 거처하게 되었을 때에도 대나무를 심어 놓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하가일일무차군何可一日無此君
어찌 하루인들 차군此君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했다/<晉書80권 王羲之傳>
►화정和靖 북송北宋의 임포林逋(967-1028)의 시호諡號.
그는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隱居하면서
매梅를 아내로 삼고 학鶴을 아들로 삼아 길렀다고 한다.
●매처학자梅妻鶴子 임포林逋/<송사宋史>457권
북송의 시인. 자는 군부軍復. 인종이 내린 시호 임화정林和靖으로 불리웠다.
일생 독신으로 서호의 고산에 은거하며 매화 300본을 심고
학 두 마리를 기르며 20년간 성안에 들어오지 않고 풍류 생활을 했다.
시인으로서 뛰어났으며 대표적 高士로서 세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행서에 뛰어났고 수경痩勁한 서풍에 고사다운 풍운을 발휘했다.
대표작가에 친필인 <잡시권>(타이페이 고궁박물관)이 있고 <정운관법첩> 모각이 있다.
이상적 은둔자로서 그림의 소재가 되기도 하여 학을 길들이는 고사를 묘사한
<무학도><준학도> 등 외에 매화를 사랑한 고사에 따른 <애매도>는 四愛圖의 하나가 되었다.
임포는 일찍 부모님을 여의어 가난하고 고아로 자랐지만
어린 시절 학문에 힘써 박학다식했다.
또한 그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오만한 성격이었으며 또한 세속적인 영리를 추구하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 집을 떠나 강회江淮와 中原 일대를 여행했으며
40세 전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西湖의 孤山 아래에 은거해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줄곧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의 여행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의 시가를 통해 일부 상황은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느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쓸모가 있는 사람으로 자임하며 이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오만함과 협기, 굽힐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그 이상은 실현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인물들과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지만
이들 역시 대부분 권문세가가 아니라 풍류를 즐기는 평범한 인물이나
실의한 관리 그리고 佛道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청소년 시기의 경험으로 더더욱 세상의 명예를 경시하는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만의 고매한 인격과 사상이 형성되었다.
그런 결과의 하나가 바로 이상 실현을 위해 권문세가를 찾아다니며
추천을 바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가 통치 집단에 대해 분개하거나 비판하는 의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즉 그가 은거한 이유는 세상에 대한 반감은 아니며
세상의 번다한 일을 싫어하고 고상한 품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에서 은일 생활을 시작한 임포는
西湖의 孤山에 은거한 후 20여 년 동안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결혼도 하지 않으며 시를 짓고 매화와 학을 기르며 살았는데
이 때문에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녀로 한 시인[梅妻鶴子]’으로 현재까지 이름이 전한다.
은거한 후에 그의 고매한 품성이 오히려 널리 전해져 많은 인물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중 황제인 眞宗이 곡식을 하사하고 관리를 시켜 안부를 물은 일이 있어
그의 이름은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임포에 관한 기록이 있는 문헌들을 보면 새로운 측면이 보이는데
예들 들면 그는 시를 잘 지어 명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서예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위키백과
►‘빼어날 당, 배회할 상倘’ 빼어나다, 뛰어나다. 갑자기, 별안간瞥眼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