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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한 그루라는 조탁
―문경재 시집 『느티나무의 문법』을 중심으로
이영숙(시인ㆍ문학평론가)
프롤로그
첫 시집은 각별하다. 두 번째 시집이 첫 시집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기도 하지만 변주되거나 확장되고 심지어 전복이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은 시에도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든 간에 아무튼 사회화 과정이 끼어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첫 시집은 시인이 통과해 온 삶의 궤적과 사유가 비교적 원본의 형태로 잘 보존된 시공간이다. 기억이라는 저장고에서 끄집어낸 훼손되기 이전의 자연과 풍속, 아직 개념화되지 않은 날것으로서의 일상, 신화적 아우라를 공유하던 사물과 인물 등이 그것이다. 마치 근대화되기 이전의 농촌사회 같은 정신 지대가 첫 시집을 가득 메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들과 달리 농촌에서 성장기를 보낸 시인의 경우, 시적 형상화 능력이라는 필요조건과는 별개로 충분조건을 미리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출발부터 가산점을 얻고 들어가는 일종의 신분적 특혜가 아닐 수 없다. 문경재 시인은 『느티나무의 문법』에서 자신의 프레미엄을 십분 활용하여 식물적 소재가 충만한 첫 시집을 꾸려냈다. 표제작의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단풍나무, 배롱나무, 이팝나무, 화살나무, 대추나무, 모과나무, 진달래, 겹동백, 유자나무, 벚나무, 감나무, 소나무, 참나무, 싸리, 산수유, 목련, 장미, 물푸레 들과 다알리아, 산국화, 상록패랭이, 에델바이스, 리틀마리, 호접란, 금강제비꽃, 봉숭아, 도라지 들, 그리고 고추, 상추, 감자, 오이 들이 그것이다. 시인의 세계 인식의 출발점이 식물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심지어 시인의 “불꽃”은 가슴에서 타오르는 게 아니라 “정원에” 심긴다.
생을 다 담기에 시는 너무 광활하고
시를 다 담기에 생은 너무 협소하다
어느 날 나는 정원에 불꽃을 심기로 했다
한 그루 한 그루 늘어갔다
불꽃이 아니었으면
시도 생도 쓸쓸했을 것이다
―「시인의 말」 전문
대체로 생에 대한 관점, 시에 대한 태도를 응축한 것이 시집의 입구에 놓인 「시인의 말」이고 보면, 이 글의 무게 중심은 생과 시를 생동케 하는 “불꽃”에 있다. “한 송이의 불꽃으로 태어나/ 꺼져가는 호접란에 불을 붙이”(「생의 이면」)는 시가 생보다 더 “광활”하다는 건 시인의 겸손이자 시에 대한 헌사이며, 한편으론 생의 진실이다. 어쩌면 시인은 ‘광활한 시’로 나아가기 위해 ‘협소한 생’에 ‘불꽃의 정원’을 가꾸는지도 모른다. 그곳은 “불꽃이 아니었으면/ 시도 생도 쓸쓸했을” 삶의 현장이면서, 생은 유한하고 시는 무한하다는 점에서 유한을 무한에 잇대는 제례의 장소이기도 하다. 『느티나무의 문법』은 ‘불꽃 한 그루’라는 이 신비한 조탁으로부터 시집의 키워드가 된 식물, 곧 느티나무―배롱나무―단풍나무를 경유한다.
느티나무
느티나무에서
일월, 생략된다 바람만이 주인이다
이월, 겨우내 첨삭 당한 절구節句들이 발밑에서 붐빈다
물기 없는 목소리로 뚝뚝 부러진다
삼월, 멀리서 막 도착한 동사들이 짐을 푼다
사월, 초대장도 없이 꽃샘추위가 다녀간다
껴입었던 비유를 한 겹 벗는다
오월, 이루 셀 수 없는 어휘들이 주어 안에 숨는다
유월, 표정이 만 가지나 되는 술어 위를
벌레들이 기어 다닌다
칠월, 가지를 쭉쭉 뻗던 목적어도
이제 막 임계점에 도달했다
팔월, 은유가 초록으로 깊어지고
구월, 부사는 그늘 뒤로 옮겨 앉는다
시월, 문장력이 절정을 이룬다
비문은 스스로 도드라진다
십일월, 수북이 쌓인 마침표
십이월, 서사가 서정 쪽으로 기운다
주관과 객관이 함께 저문다.
글이 서툴고 생각이 짧은 내가
그를 베껴 쓰기 시작한다
―「느티나무의 문법」 전문
시집은 시의 건축물이다. 바닥을 고르고 기둥을 세우고 문을 내고 쌓은 벽돌 위에 지붕을 얹고 문패를 내거는 공간화 과정이 모두 시로 이루어진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자리에 ‘느티나무’를 배치하고 이를 표제작에 넣어 이중으로 강조한 건축주의 의도는 자명하다. ‘느티나무’에 ‘문법’을 아로새긴 것만으로도 알 수 있듯 ‘느티나무’는 그의 시적 표상인 것이다.
‘느티나무’의 열두 달은 인간의 생이나 시의 궤적과 유비 관계다. 말하자면, ‘느티나무’는 인간, 그리고 시의 생애와 한 묶음으로 간다, 이렇게. 일월, 존재하지만 그 누구도 아직 자신의 주체가 아니다. 이월, 그러나 그들은 오랜 기다림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삼월, 심신이 약동하고 사월, 고난이 와도 자아는 싹튼다. 오월, 젊음의 광휘가 주체를 감싼다. 유월, 다채로운 풍요의 제전 속에 칠월, 생장점이 최고의 깊이와 높이에 도달한다. 팔월, 유머와 풍자를 이해할 만해지면 구월, 섭리에 밝아지고 시월, 원숙미는 절정에 달한다. 십일월,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는 가운데 십이월, 그들은 세계의 진실 쪽으로 더 나아간다. ‘느티나무의 문법’이 이럴진대, “글이 서툴고 생각이 짧은 내가/ 그를 베껴 쓰기 시작”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때 베끼기의 대상이 되는 ‘그’는 모든 시적 모티프와 시적 기미들, 그리고 진실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과 세상의 시들을 포괄한다.
시 쓰는 일을 ‘느티나무를 베껴’ 쓴다고 공손하게 돌려 말하는 시인이 또 다른 시에서 고백하듯, “이사 첫날 잠들 수 없었”던 것은 “산개구리가 밤새 서로를 베끼며 울”(「하루가 시 한 편」)어서였다.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시 문답에 귀 기울이느라 그랬을 터. 베낄 것으로 가득 찬 ‘하루’가 어찌 ‘시 한 편’만 내어줬으랴.
어느 해 여름, “테렐지”에 다녀오면서 시인은 “나날의 구름을/ 둘둘 말아 캐리어에 가득 담아”온다. 얼마나 소중했는지 자발적으로 “고액의 통관세를 내려 했으나/ 수입제한 품목에는 없는 아이템이라고 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구름의 완제품”이었던 것이다. 그가 “혼자 보기 아까워/ 여기 구름이 있어요, 알려줘도/ 사람들은 땅만 보고 지나다녔다”. 이어지는 시에서 시인은 선언한다.
구름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여
하늘을 보지 않는 이들이여
하늘이 없는 줄 아는 이들이여
미안하지만 나는 자주 구름에 거주하는
특권층이올시다
눈만 감으면 매번 다른 구름에
흐드러지게 묻혀 삽니다
―「테렐지 구름」 부분
“구름”을 보유함으로써 “특권층”이 되는 일은 시 세계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시인이 “박자의 가시덤불 음정의 칡넝쿨”(「내력」)을 보게 되는 내력도, “오지의 사투리도 서로 다 알아듣는/ 세계시민권자들”인 “새들”의 “목청”(「새들의 모국어」)을 듣게 되는 내력도 다 그가 ‘특권층’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시에 몰두한다고 해서 늘 ‘하루가 시 한 편’이 되어주지는 않는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면 한 계단씩 오르”는 놀이를 할 때 “동생이 지레 포기할까 부러 져 주기도 하”는 ’나‘와는 달리 “시는 한 번도 부러 져 주지 않는다/ 따돌리고 달아나고 약 올리기까지 한다/ 포기할까 겁도 내지 않는다”. 그럼에도 시인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려다보면서/ 이를 앙다물던 동생처럼” 외친다. “시야!/ 수가 빤히 읽히는 줄 나도 알고 있거든/ 그래도 언젠가는 계단 끝까지 오르고야 말 거야!/ 그럼 거기서 봐!”(「가위바위보」)라고 투지를 불태운다. 그런데 ‘계단 끝’은 어디인가. 과연 도달할 수나 있긴 한 건가.
어사화는 접시꽃이 모델이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나는 진달래꽃으로 어사화를 꾸며달라 하겠다 관에 꽂은 어사화를 이도령이 춘향에게 안겨주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진달래꽃 어사화를 네 두 손에 건네주고 싶다
―「진달래」 부분
설마 ‘과거 급제’를 시 등단이나 시집 출간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를 인격과 지성과 세계관의 총체로 보고 이를 관직 등용 의례로 삼은 선대 제도의 이면에는 관직을 ‘계단 끝’으로 치부한 전통이 암묵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시에서 ‘과거 급제’는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며, 여전히 ‘계단을 오르는’ 중의 어느 한순간, 곧 한 편 한 편의 시적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읽힌다. 삶의 끝은 죽음으로, 우리는 너나없이 죽음을 향해 가지만 사는 동안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한다.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보았을 때, 시의 완성으로서 ‘계단 끝’에 도달했다는 시인을 동서고금을 통해서도 아직 본 일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따라서 “진달래꽃 어사화”를 받을 “두 손”은 “춘향”에 비견되는 ‘너’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시’ 자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시 쓴 공을 다시 시에 돌리는 문경재의 시적 태도는 ‘계단 끝’을 매 순간 성취하려는 ‘올곧은’ 행보에 다름 아니다.
배롱나무
시인도 발아한다. 초목처럼 시인도 발아 전에는 씨앗이었다. 한 톨의 잠재태가 현실태가 되는 과정의 초입으로서, 시적 발아는 시에 호감이 생기거나 첫 시를 쓴 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이라는 자의식이 생기기 이전, 더 나아가 시가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시기, 곧 거의 시의 무의식 상태에서 발생한다. 문경재의 경우 그것이 ‘열 살 남짓’의 시기였음을 몇몇 시들이 말해준다.
열두세 살 무렵
천석꾼 제당에서 처음 보았다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꽃나무
지지 않을 것처럼
오래 피어 있었지만
이름도
홍자색이 뭔지도 몰랐던
그 환한 언저리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새로 입주한 아파트 꽃나무 몇 그루에
팻말이 붙어 있다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다듬잇방망이에
살 오르고 잎 돋은 듯
사색적이지만 회의적이지는 않다
비틀며 줄기에 더딘 속도를 밀고 나가는
빈한한 집안에서 올곧게 자란 소년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명화」 전문
세계가 손바닥만 하던 소년 시절, “천석꾼 제당에서 처음 보았”던 “꽃나무”가 외경스러워 “그 환한 언저리/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던 소년의 쿵쾅대는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열두세 살 무렵”, 바로 이때가 아니었을까. 시가 발아한 순간이. ‘제당 앞 꽃나무’가 일순간 ‘명화’로 각인된 순간이. 아직 어린 “꽃나무”(“내 키보다 조금 더 큰 꽃나무”)가 “오래 피어 있”는 동안 소년도 내내 함께 피어 있었을 것이다. 남쪽에서만 자라고, 당시만 해도 희귀목이었던 그 “꽃나무”가 기후 변화와 함께 북상해서 이제 중부지역의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에서 자주 볼 수 있게 되는 동안 소년도 자라 어느덧 중장년이 되었다.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이름을 처음 알게 된 놀라움이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감탄으로 바뀌면서 소환된 건 소년이 처음 맞닥뜨렸던 ‘명화’, 그 선명한 화폭이었으리라.
기억이나 하는지 몰라 어느 날 내 스케치북 한 장을 찢어내 크레파스로 수북수북 그려준 다알리아를, 학교에 가져가 뽐냈던 열 한 살배기 담 아랫집 아이를
선배님, 올해도 소리 없이 다녀가셨군요
몇십 년이 흘러도 지지 않는 다알리아를 또 불러오다가 문득
포털에서 선배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나보다 예닐곱 많던, 고교 시절 독일에서 입상했었다는 풍문의 문재권 화백
―「4월의 화가」 부분
혹은 “열한 살배기”, 이때가 아닐까. “나보다 예닐곱 많”은 ‘담 윗집 형’이 “내 스케치북 한 장을 찢어내 크레파스로 수북수북 그”린 “다알리아”를 건넸을 때. “몇십 년이 흘러도 지지 않는 다알리아” 역시 뇌리에 새겨진 ‘명화’임에 틀림없다. 시인이 시시각각 채색이 짙어지는 ‘집 앞동산’의 4월 풍경을 “문재권 화백”의 작품이라고 확신하는 것도 “열한 살배기”의 순정이 평생을 동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배롱나무’에서 ‘다알리아’로, 혹은 ‘다알리아’에서 ‘배롱나무’로 오가는 시점 어디에서 시의 호흡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물기와 온기와 햇볕이 씨앗에 입김을 불어 넣듯, 어쩌면 ‘도라지꽃 한 송이’도 시의 발아에 관여하지 않았을까.
뜰 안 감나무
싸리 울타리께 피어난
하얀 도라지꽃 한 송이
낡지도 않고 풍경 한 점
마음에 걸려있다
어린 마음이 손에 연필을 쥐어주고
뭔가를 끄적거리게 하고
부끄러움을 감추느라
어느 시인이 쓴 건데 한 번 읽어 봐
친구에게 둘러대게 하던
―「파종」 부분
낭만파 시인인 셸리는 『속박에서 풀려난 프로메테우스』에서 “오랑캐꽃의 우아한 눈이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것의 색깔에 자신의 색깔이 닮게 될 때까지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라고 했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 대상도 우리를 보는데, 우리가 대상의 본질에 도달할 때까지 대상도 집중한다는 점에서 「파종」의 시적 주체는 “도라지꽃”이다. 이 시는 시종 피동형 문장에 주의해야 하는데, 어디 도라지밭이나 길가가 아니라 외따로 “뜰 안 감나무/ 싸리 울타리께 피어난/ 하얀 도라지꽃 한 송이”는 “어린 마음”으로 하여금 시라고도 할 수 없는 “뭔가를 끄적거리게” 했다. ‘마음’이 ‘몸’을 부리던 그 강렬한 장면은 “낡지도 않고 풍경 한 점/ 마음에 걸려” 문경재를 시인으로 이끌어 내고야 만다.
단풍나무
문경재는 식물성이다. 시집 속의 그 많은 식물이 대부분 그의 내면에 ‘파종’되었으며, 삶의 색깔과 결에 영향을 미치면서 가지를 뻗어나갔다. “사색적이지만 회의적이지는 않다/ 비틀며 줄기에 더딘 속도를 밀고 나가는/ 빈한한 집안에서 올곧게 자란 소년들”(「명화」) 역시 “널빤지로 덫을 놓아/ 참새를 떼로 잡아 구워주던/ 늙어 죽은 하루를 묻지 않고 탕을 끓여/ 온 가족을 먹이던/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세계”(「어른들의 세계」)에 진입한다. “호젓한 산등성이 참나무 높은 지경”에 “신혼집”(「새집」)을 짓기도 하고, 해외 골프 투어도 나가지만(「깽짱러이」), 이승을 먼저 하직한 동생 소식을 부모님께 전하며 “하느님/ 두 번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절규하고(「전령」),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비어 있는 고향 집을 팔아 “몇 푼씩을 나눠 갖고” 형제들이 “고향에서 덤이 되”(「덤의 방정식」)거나, 그 고향마저 수몰되며(「수몰지구」), “매일 나를 찾아오던” 친구의 죽음을 맞는 날도 온다(「다탁」). ‘어른들의 세계’는 동물성이 지배하는 치열한 생존 현장이면서 한편으로 소중한 것들의 끊임없는 상실 현장이기도 하다. 식물성이 살아가기에 적절한 공간이 아닐 수 있는 것이다.
상고머리를 돌리며 농악대가 판을 벌였다
꽹과리와 장고를 묵음에 놓고
셔터를 열어놓고 찍은 별자리 사진처럼
수십 겹의 원무가 펼쳐진다
자정이 다 된 허공이 붐빈다
초승달이 가로등을 밟고 지나갈 때
곁에 있는 단풍잎이 반짝인다
수건을 꺼내 땀을 닦을 기미가 없어
이파리들이 대신 땀을 흘린다는 듯
나방과 하루살이가 교대 출연하는지
바통은 어떻게 주고받는지
알 수는 없는
날개 없는 관객 하나 창가에 서 있다
흐벅지게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한 생
산야를 뒤덮던 눈발처럼
춤에 지쳐 한 번 쓰러져보지도 못한 채
잠이 오지 않는 밤
모처럼 벽시계를 흘끔거리지 않는 시간도
묵음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날개 없는 관객 하나」 전문
두 세계가 있다. ‘가로등 밑에서 날개 있는 나방과 하루살이가 수십 겹의 원무를 펼치는’ 동물성의 세계가 그 하나이고, ‘자정이 다 된 시각에 잠이 오지 않아 창가에 서 있는 날개 없는 관객’이라는 식물성의 세계가 또 하나다. 두 세계는 “창”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공연자와 관객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때 “상고머리를 돌리며 농악대가 판을 벌”이는 듯한 “허공”의 지치지 않는 “춤”은 상대적으로 “흐벅지게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한 생/ 산야를 뒤덮던 눈발처럼/ 춤에 지쳐 한 번 쓰러져보지도 못한” 생을 되짚어보게 한다. 전자가 떠돌이도 불사하는 모험과 역동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붙박이로서 평화와 고독을 지향한다. 주목할 것은 ‘수건을 꺼내 땀을 닦을 기미가 없어 보이는 공연자들을 위해 대신 땀을 흘린다는 듯’ “가로등” 밑에서 “잎이 반짝”이는 ‘단풍나무’다.
식물성이 가장 잘 드러난 이 시에서 ‘단풍나무’는 시인의 자아이자 삶의 기본 태도를 보여주는 상관물이다. 느림과 고요가 순리인 세계에서 “기억이 퇴행”하고 있는 “아내”(「미래 시제 時制」)가 “아이처럼 집을 보채”며 “집에 언제 가?”를 몇 번이나 묻고 또 물어도 “응, 두 밤 더 자고”라고 한결같은 톤으로 대답하는 시인은 이어지는 대목에서 “아내”에 대한 이해를 다음과 같이 승화시킨다.
비자림도 녹차밭도 분재공원도 부질없이
아이처럼 집을 보채는 아내
어두워가는 해변을
나 홀로 걷는 것 같았다
시간이 긴 띠를 늘어뜨린 채
뒤처지고 있었다
감탄이 사라지고 무의미만 남은 세계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허허벌판을
아내도 홀로 걷고 있는지 모른다
흰 배를 번쩍이며
갈매기가 허공을 여기저기 찔러댄다
물 샐 것 같은 밤이 오고 있었다
―「마지막 제주」 부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 시는 현실을 부정하지도, 원망하지도 않는다. 부부가 함께 있으면서도 홀로 있는 것 같은 이 고독을 “갈매기”로 치환하고, 다만 “물 샐 것 같은 밤”에 ‘비 올 것 같은 밤’과 ‘울고 싶은 밤’을 조용히 포개 넣었을 뿐이다. 이 바다를 다시 찾는 일이 “아내”에게 아무 위로도 기쁨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인은 감정의 동요 없이 「마지막 제주」라는 제목 안에 담는다. 그러나 “웃자 하면 웃어지나/ 울자 해도 울어지지 않는 것처럼 반나절이 지나도/ 오후가 다 가도 웃을 일이 없”(「혼자 웃는 웃음」)는 일상이나, 나무를 열고 들어가 실종을 꿈꾸는 “꿈속의 꿈”(「플랫폼에서」)조차 죽음의 이미지를 띠지 않는 것은 시인은 식물성의 생애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잘 먹고 고이 잘 자는 손녀는/ 화병에 꽂힌 프리지아의 밝기를/ 한 옥타브 더 높여 웃”(「작명」)는데, “이제/ 내게 손녀 손자가 찾아와 안긴다/ 이때 얼핏 모습을 드러내는 건/ 현재의 내가 아닌 과거의 아버지”(「과거는 미래지향적이다」)라고 했을 때, 아버지이기도 한 ‘나’는 아버지의 ‘계단 끝’이고, 다시 손녀 손자는 나의 ‘계단 끝’이 되면서 ‘나’는 현재를 성취하는 존재가 된다. ‘나’는 심어야 할 불꽃이 아직 많이 남았다.
에필로그
글이 서툴고 생각이 짧은 내가
그를 베껴 쓰기 시작한다
―「느티나무의 문법」 부분
단 한 송이
내게 파종되어 뜰 밖인지
묵정밭 어귀인지
어느새 군락을 이루었는지
도라지 향 풍기는 밤이 온다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시가
나를 부르는
―「파종」 부분
시집을 열고, 시집을 닫는 두 편의 시 사이에는 불꽃 정원이 있다. 그 한쪽 어디에 “단 한 송이” 피었던 ‘도라지꽃’에서 “내게 파종”된 그것이 “어느새 군락을 이루었는지/ 도라지 향 풍기는 밤이 온다”. 시인은 말한다. “아직도 다 쓰지 못한 시가/ 나를 부르”고 있다고. 자신이 얼마나 더 좋은 시를, 얼마나 더 많이 쓰게 될지 정작 그 자신도 모른다. 시인에게는 축복이다.
―문경재, 『느티나무의 문법』 시집 해설, 예술가,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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