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은 맛있습니다. 통영은 사철 맛있지만 특히 늦가을부터 초봄까지가 절정입니다.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통영에 와서는 그 맛에 탄성을 지릅니다. 전주나 광주, 목포, 여수 등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큰 전라도 지역 사람들도 통영 음식만은 인정하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충무김밥이나 꿀빵 같은 것이 통영의 대표 음식인줄 아는데 이들 음식은 그저 간식거리에 불과합니다.
진짜 통영 음식은 바다에 있습니다. 찬바람 불면 그 철이 시작되는 통영 굴은 탱글탱글하여 우유처럼 고소합니다. 최고의 술국인 물메기국은 타락죽처럼 부드럽습니다. 온갖 해산물요리가 한상 가득 차려져 나오는 ‘다찌’는 단언컨대 한국 최고의 씨푸드입니다. 해산물 요리의 향연도 즐기고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이중섭, 백석 등 예술가들의 발자취도 더듬어봅니다. 한려수도의 장관이 환상처럼 펼쳐지는 미륵산도 오르고 법정스님이 출가해서 나뭇꾼 노릇하던 미래사 편백숲도 거닐어 봅니다. 늦가을, 여유롭고 행복한 통영 여행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이번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과거 통영은 500여 척의 전함과 3만여 명의 수군이 주둔하던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통영이 본래부터 경상도인 줄 알지만 오랜 세월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습니다. 1603년, “여우와 토끼가 뛰노는” 한미(寒微)한 포구였던 경상도 고성현 두룡포에 신도시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렇게 탄생한 곳이 삼도수군통제영, 곧 통영입니다. 경상도 땅에 건설됐지만 통영의 수령인 삼도수군통제사는 경상도 관찰사와 동급인 종2품이었고, 통제영이 폐지된 1895년까지 독자적으로 통영과 전라, 경상, 충청 3도의 수군 주둔지들을 다스렸습니다. 통영은 3도에서 온 군사들과 군수품 제작을 위해 8도 각지에서 뽑혀온 12공방의 장인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들이 모여 이룬 융합도시였지요.
이들이 경상도와는 별도로 3백여 년 동안이나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습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지요.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습니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습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지요.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입니다.
“짜장면도 맛없다”는 속설이 있는 경상도에서 통영만 유독 음식이 맛있는 이유도 통영이 경상도가 아닌 ‘통제영’이라는 특별자치구였던 데서 유래합니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이지요.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한 곳이라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지 요.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풍요로워야 맛이 개선될 여지가 생기는 법이지요. 과거 통영은 풍요로운 땅이었습니다.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였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습니다. 정조 때는 통영에 주전소까지 있을 정도였습니다. 통영에 엄청난 부가 집중됐었다는 뜻입니다.
전주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것은 인근에 김제만경 평야라는 큰 들녘과 풍요로운 갯벌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또한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습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것이지요.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입니다.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관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ち)飲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카사노바도, 큰스님도 즐기던 굴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고 산을 벼개 삼아
달을 촛불 삼고 구름을 병풍 삼고 바다를 잔을 삼아
크게 취하여 일어나 춤을 추니
긴 소매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네.
문득 호기롭게 낮술이라도 한잔 마신 날이면 생각나는 시입니다. 시를 쓴 분은 조선 명종 때의 스님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로 알려져 있습니다. 진묵대사는 한국 불교사상 가장 신비로운 스님으로 꼽히지요. 수많은 이적과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보였다고 전해지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진묵대사는 걸림 없고 거침없는 삶을 살다 갔습니다. 진묵대사는 계율에 얽매이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다고 합니다. 요즈음 우리가 흔히 술을 달리 부를 때 쓰는 곡차나 굴을 일컫는 석화(石花)라는 말이 모두 진묵스님으로부터 유래했습니다. 스님은 술을 유달리 좋아했지만 술이라고 하면 절대 마시지 않았고 곡차라 해야만 마셨다고 합니다.
더러 스님이 술을 마신다고 타박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스님은 쌀과 누룩으로 만들었으니 곡차지 왜 술이냐고 우기곤 했다지요. “세속인들은 취하기 위해 마시니 술이겠지만 나는 그것을 마시면 피로도 풀리고 기분도 상쾌해지니 곡차다!” 위의 시 또한 스님이 어느 때인가 곡차를 동이 채 마시고 읊었다는 게송입니다. 스님이 김제 망해사에 계실 때는 바닷가 근처라 곡식이 떨어지면 해산물들을 채취해서 허기를 채우곤 했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배가 고파 바위에 붙은 굴을 따서 드시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왜 스님이 육식을 하느냐며 시비를 걸었다지요. 그러자 스님은 “이것은 굴이 아니라 석화”라고 우겼다합니다. 굴이 바위에 붙은 모습은 영락없이 돌에 핀 꽃과 같습니다. 그러니 석화라고 우길 만하지 않았겠습니까.
진묵 스님이 허기를 채우기 위해 굴을 먹었다면 '카사노바'(1725~1798)는 강장제로 굴을 즐겼습니다. 카사노바는 매일 아침마다 눈을 뜨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생굴 50개를 먹었다 합니다. 굴을 다 먹은 다음 욕조 안에서 격렬한 사랑을 나누었다지요. 그만큼 굴은 예로부터 스태미너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굴이라도 먹어서는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옛날 한국에서는 “보리가 피면 굴을 먹지 마라” 했고 일본에서도 “벚꽃 지면 굴을 먹지 마라” 했습니다. 서양에서는 'r'자가 들어 있는 달에만 굴을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r'자가 없는 달인 5~8월(May, June, July, August)은 굴을 먹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5~8월은 굴의 산란기이거나 산란 직후입니다. 이때는 굴에 독성이 있고 바다에도 살모넬라와 대장균들이 득시글거리기 때문에 먹지 않는 것이 좋다는 뜻이지요. 특히 산란기인 5~6월에는 절대 생굴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산란 직후의 굴은 맛도 떨어집니다. 산란으로 영양소를 모두 소진시켜 버린 까닭이지요.
통영은 굴의 고장입니다. 전국 굴 생산량의 70% 정도가 통영바다에서 나옵니다. 통영 굴은 대부분이 양식입니다. 하지만 양식이라 해서 덜 맛있거나 영양가가 덜하지 않습니다. 자연산에 대한 맹신이 넘치는 시대. 자연산이 돈이 되고 자연산이 맛있고 건강에도 좋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산물 또한 무조건 양식은 질이 떨어지고 자연산은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굴 같은 조개류는 양식이냐 자연산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양식굴이라 해서 사료를 따로 먹여서 키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양식이든 자연산이든 굴은 바닷물속의 플랑크톤이나 조류 유기물을 여과해 먹고 자랍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굴이 양식되는 바다가 얼마나 깨끗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오염된 바다에서 자란다면 자연산이라고 해서 좋을 까닭이 없습니다. 양식이지만 통영 굴이 좋은 것은 통영바다가 청정해역이기 때문입니다. 해초 또한 마찬가지. 특히 해초는 해독 작용이 뛰어납니다. 수질 정화에도 해초는 일등공신이지요. 해초는 사람 몸의 독을 제거하는데도 유용합니다. 그런 만큼 해초는 그 몸속에 많은 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미역이나 다시마 등의 해초도 자연산이냐 양식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깨끗한 물에서 자란 것이냐가 관건입니다. 자연산일지라도 오염된 물에서 자랐다면 그것은 독초지요!
산란철이 지나 여름이 가고 찬바람이 불면 굴은 다시 맛이 들기 시작합니다. 가을, 겨울 동안 통영은 온통 굴 세상입니다. 생굴을 하나 입에 넣으면 달고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고입니다. 통영에 직접 먹는 굴은 타 지역에서 먹던 그 맛과 천양지차입니다. 전혀 다른 음식이라 느껴질 정도지요. 어떤 해산물이든 바다에서 막 건저 올렸을 때가 가장 맛이 뛰어난 법. 통영의 굴은 바다의 우유, 바다의 인삼이라는 수식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통영의 굴 한 접시를 먹는 것은 바다를 통째로 마시는 일입니다.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국
물메기의 표준어는 꼼치입니다. 꼼치는 동서남해 모든 바다에서 납니다.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이지요. 동해에서는 곰치, 물곰, 남해에서는 미거지, 물미거지, 서해에서는 잠뱅이, 물잠뱅이 등으로 칭합니다.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 혹은 ‘메기’, ‘물메기’라 부릅니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옵니다. 12월에서 3월까지의 물메기가 맛있는 것은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우기 때문입니다. 보통 수명은 1년 남짓. 대부분 산란 후 죽습니다.
자산어보에도 물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잡히면 버리는 하찮은 물고기가 아니라 술병까지 고치는 명약으로 대접받았다 합니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 정약전 <자산어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우리나라 호남 부안현(扶安縣) 해중에 수점(水鮎, 물메기)이 있는데, 살이 타락죽(찹쌀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옛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물메기국은 그야말로 해장에 최고입니다. 물고기들이 흔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귀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겠지만 물메기 또한 어류의 가계에서 제법 족보 있는 물고기였던 셈이지요.
늦가을부터 통영은 물메기국 끓이는 철이 시작됩니다. 동해안에서는 곰치, 물곰이라고도 하는 물메기. 곰치국이든 물메기국이든 해장국으로 그보다 더 시원한 음식은 드물 것입니다. 물론 대구나 복국이 있지만 시원하고 담백하기로는 물메기국을 따라가기 힘듭니다. 지방이 아주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납니다. 통영에서 마른 메기는 잔치음식의 대표지요. 전라도 잔치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치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이라 합니다.
물메기국은 맑게 끓여야 제 맛입니다. 너무 매운 ‘땡초’(고추)도 넣지 말아야 합니다. 팔팔 끓는 물에 무를 어씃하게 썰어 넣고 소금 간을 한 뒤 무가 익을 즈음에 손질해둔 메기를 넣고 익힙니다. 살이 무른 생선이니 너무 끓이지 않고 살이 익을 정도로만 끓입니다. 다진 마늘을 넣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국을 낼 때 대파를 얹습니다. 그래야 맑고 시원한 메기국이 됩니다. 양파 등 다른 채소를 넣지 않는 것도 물메기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통영에서는 세파에 시달려 지친 사람들의 속을 물메기국이 달래줍니다. 술병도 곧잘 고쳐주는 물메기국의 유혹을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으리오.
윤이상 : 유럽 5대 작곡가,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부친 윤기현과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 가족들과 함께 통영으로 이주해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통영은 윤이상의 선조들이 통제영이 시작될 때부터 대대로 살았던 땅입니다. 윤이상 의 선조는 세병관을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한 분이었고 증조부까지 선조들은 대부분 수군 장교로 통제영에 복무했었다 합니다. 출생지는 산청이지만 삶의 자양분을 얻고 그를 키운 고향은 통영이었습니다. 윤이상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천테마파크에는 윤이상의 동상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윤이상의 흉상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고향에 오고 싶어 했으나 조국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회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했겠지요. 그 대신 그의 동상이 고향 통영으로 왔습니다. 2층 전시실의 흉상은 평양 윤이상연구소에 있는 흉상을 만수대창작사에서 복제해 준 것입니다. 윤이상평화재단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흉상 또한 2009년 6월 인천항으로 반입됐으나 북한의 핵실험 후 정부의 반입보류 조치로 오랫동안 인천세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통영예총의 탄원으로 어렵사리 통영으로 왔습니다.
윤이상의 흉상 또한 생전의 윤이상처럼 고초를 겪었으니 그는 분단의 비극을 사후에까지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윤이상은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 5대 작곡가에 선정됐고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교수들에 의해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 명으로 뽑혀 이름이 동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는 윤이상과 스트라빈스키 등 네 명뿐입니다.
서호시장 뒤편, 도천동 윤이상 생가 터에 윤이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윤이상기념관이란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물 외부에는 기념관 간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원 입구 표지석에는 도천테마파크란 이름만 눈에 띌 뿐이지요. 도천테마파크는 원래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계획되었었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사람들의 반대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껏 근거 없는 주장으로 선생을 비난하고 욕되게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윤이상기념관은 유품 전시실과 실내 공연장과 실외 공연장인 경사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원에는 윤이상이 살던 독일의 집 정원에서 가져온 가문비나무가 기념 식수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은 2층입니다. 전시관 안에는 윤이상의 어머니가 쓰던 함지박과 호리병, 독일유학 시절 쓰던 바이올린, 친필 악보, 그가 입던 옷들과 중절모, 그가 어린 시절 썼던 요강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중섭, 통영에서 황소를 그리다
이중섭이 그의 자화상 같은 <흰소>와 <황소> 등 소 연작을 그린 장소는 통영입니다. 통영에 살던 시절, 이중섭은 또 다른 대표작 <달과 까마귀> <부부> <도원> <가족>은 물론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충렬사 풍경>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통영에는 이중섭이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건물이 아직도 건재합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피난시절인 1952년 봄에 통영으로 와서 1954년 봄에 떠났으니 만 2년을 통영에서 살았습니다. 소련의 비평가들에게 마티스나 피카소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원산미술가동맹 위원장까지 지냈던 이중섭은 1.4후퇴 때 가족들과 원산에서 부산으로 남하 한 뒤 해군경비정을 얻어 타고 제주 서귀포에 들어가 7개월을 살았지요. 그는 1952년 다시 부산으로 나와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부두노동자로 전전했습니다. 그때 이중섭을 통영으로 이끈 이가 유강렬이었습니다. 후일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지낸 유강렬은 당시 통영에 있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하 양성소) 주임강사였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의 근거지가 됐던 양성소는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현재 항남목욕탕 부근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은 3번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1952년 녹음(호심)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서양화 4인전>을 가졌고, 1953년 12월에는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녹음다방 건물은 더 이상 다방이 아니지만 여전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5천 통의 연서를 보냈던 바로 그 중앙우체국 건너편에 옷가게로 변신해 존재합니다. 복자네집이나 새미집 등이 단골 술집이었는데 이중섭은 새미집 다다미방 바닥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할머니의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합니다.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본래 2층짜리 청루 건물이었는데 이를 학교로 바꾼 것입니다. 청루는 기생이 있는 요정입니다. 양성소 부근이 일제 때는 청루 골목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양성소 강사가 아니었으나 늘 이 건물에 살다시피 했고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와 스케치를 했다합니다. 소 연작과 대표작들도 이 건물에서 구상되고 그려졌을 것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의 작품 활동 근거지였던 양성소 건물은 1930년대 초에 지어졌지만 별 훼손 없이 원형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1층은 식당 영업 중이고 2층은 DVD 게임랜드였다가 카페로 바뀌었으나 이내 문을 닫고 지금은 비어 있습니다. 2층의 일부는 살림집으로 이용 중입니다. 최근 주인이 매물로 내놨다는데 통영시 문화관광과에 문의해 보니 시에서는 매입해 보존할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중섭(1916∼1956)이 통영 시절 완성한 <흰소> <황소> 등 소 연작은 이중섭 작업의 백미로 꼽힙니다. 이중섭은 젊은 시절부터 소에 대한 애착이 깊었습니다. 한번은 원산의 송도원 들판에서 끊임없이 소들을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 받았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중섭이 들판에서 소를 관찰하는 동안 소들은 하나 둘씩 이중섭의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소들이 살면서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날마다 소떼가 풀을 뜯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피난민으로 떠도는 와중에도 이중섭은 소들을 키웠습니다. 자신은 굶어도 소들은 풀을 먹였습니다.
오랜 세월 키우던 소떼와 함께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 안에 기르기엔 소들이 너무 커버렸다는 사실을. 이중섭은 마침내 기르던 소들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풀려난 소들이 이중섭의 손끝을 타고 화폭으로 마구 쏟아졌습니다. 이중섭의 화폭 위에서 흰소도, 황소도, 포효하는 소도 마구 뛰어다녔습니다. 이중섭의 소들은 여전히 살아서 펄펄 뛰고 있습니다. 이중섭이 소들을 화폭에 가두지 않고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이 기르던 소떼를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인 것도 통영이었습니다.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던 1952년 통영의 녹음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4인전을 했는데 전혁림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날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합니다.
“장윤성이하고, 유강렬하고, 나하고, 중섭이가 모여서 그림 팔려고 한 거 아닙니까? 팔렸어! 나 그림은 서울 사는 부인이 다방으로 들어오더마는 현장에서 돈을 주고 사가고 그란께 딴 사람들이, 중섭이가 혀를 헤 내밀더만. 중섭이 <소>는 딴 사람이 샀어요. 그때 돈으로 8만원이라고 하드나.”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 중에서)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 동피랑이 지금은 통영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동피랑은 오랫동안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였습니다. 2007년 통영시에서도 동피랑 재개발 계획을 세웠습니다. 동피랑 꼭대기에는 옛날 통영성의 세 망루 중 하나였던 동포루 터가 있습니다. 시에서는 동피랑 마을을 전부 철거한 뒤 동포루를 복원하고 그 일대는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지요. 그때 오래된 마을과 골목, 삶의 흔적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방의제 추진기구 '푸른통영21'에서 재개발 대신 보존을 제안했습니다. 마을을 무작정 철거하기보다는 “지역의 역사와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골목 문화로 재조명 해보자”고 시를 설득했지요. 오래 되고 낡은 마을과 골목길 또한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재라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오래된 마을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요. 대부분 고령인 동피랑 주민들도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든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요.
다행히 주민들과 시민단체, 통영시가 한마음이 됐습니다. 재개발 계획을 중단하고 마을을 보존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낡은 마을을 새롭게 변신시키기 위해 낡고 갈라진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온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자 죽어가던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했지요. 낡은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길입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화가와 자원봉사들의 힘으로 벽화가 완성되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벽화와 골목길, 동피랑 언덕 아래 통영 바다 풍경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요. 단지 채색의 옷만 갈아 입혔을 뿐인데,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동피랑은 새롭게 태어났고 어느새 통영의 아이콘이 됐고 랜드마크가 돼버린 것이지요.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법정스님이 출가해서 나무꾼 노릇하던 절과 편백숲
미륵을 기다리는 절, 미래사. 미륵산 미래사는 법정스님이 출가한 절입니다. 대학생 박재철은 전남대 상대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고뇌하다가 1954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고승 효봉스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합니다. 그는 다음날 바로 통영 미래사로 내려와 부목(땔깜 담당 나무꾼)이 되어 행자생활을 시작했지요.
법정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1888~1966)은 통합종단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고승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 법복을 벗고 스님이 된 당대의 고승이지요. 미래사는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산속에 푹 파묻힌 모습이 더없이 고즈넉합니다. 절 주변에는 효봉암과 구산대 등이 있습니다.
미래사를 잠깐 둘러보고 이제 치유의 숲, 편백숲으로 갑시다. 나그네가 보기에 미래사의 가장 큰 보물은 건물들이 아니라 절 주변의 편백나무숲입니다.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심었던 편백숲을 후일 미래사에서 매입했다 합니다. 편백숲이 암을 비롯한 난치병 환자들에게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환자들이 찾고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건강을 위해 찾아듭니다.
모든 나무는 상처를 입을 경우 병균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톤치드라는 물질을 뿜어
내는데 편백의 경우 소나무 등 다른 침엽수보다 세배 이상의 피톤치드를 뿜어낸다 합니다. 그래서 편백숲의 치유효과가 뛰어나다지요.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수령 60∼100년 사이가 가장 많다 하는데 일제 때 조성한 미래사 편백숲의 수령이 그 정도 됩니다. 편백숲은 모두 5만여 평. 통영의 숨겨진 보물입니다. 곧게 뻗은 편백숲을 걸으면 움츠러들었던 정신의 갈기가 곧추 서고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통영학교 제9강 <특집-통영미식기행>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11월 28일(토요일)>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통영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 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9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생선구이정식)
-통영 걷기(5km)
용화사 입구→관음암→도솔암→미륵산 정상(461m)→편백숲→미래사→띠밭등→용화사
-박경리기념관 탐방
-달아전망대 일몰 감상
-해저터널 걸어서 건너기
-숙소 도착<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
-저녁식사 겸 뒷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통영 해산물 요리의 향연)
-자유시간 및 취침
<11월 29일(일요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물메기탕)
-가볍게 통영 걷기
동피랑마을 탐방→청마거리→세병관→명정샘→백석시비→서피랑→윤이상기념관→이중섭 살던 집→강구안 골목
-점심식사(통영식 한정식)
-중앙시장에서 장보기 혹은 강구안 거북선 산
-제9강 마무리모임. 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화), 따뜻한 여벌옷, 모자, 선글라스, 윈드재킷, 장갑, 우의(+접이식 우산), 스틱, 물통,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강제윤 글, 이상희 사진 <통영은 맛있다>를 참고하시면 통영 답사의 의미가 더욱 깊을 것입니다. ☞<통영은 맛있다>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