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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 노컷 뉴스 인터뷰를 위한 ⌜우리가 몰랐던 북간도 독립운동 이야기⌟ 요약 1부
인도에서 20여 년 동안 달리트와 아디바시 사역에 집중했던 선생님께서 3년 동안 중국에 거주하며 보고 느끼며 쓴 북간도 독립운동사, <우리가 몰랐던 북간도 독립운동이야기> 책을 출판하셨는데 어떤 책인가요?
*20세기 초기 캐나다장로회와 크리스천들이 중심이 되어서 일으킨 북간도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아 그렇군요.
오늘이 3월 13일, 전주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난 날입니다. 그런데 북간도 용정에서도 3월 13일에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지요. 책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으셨지만 먼저 북간도 용정 <3.13만세 시위>에 대하여 소개 좀 해주세요.
*용정의 <3.13만세시위>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서곡입니다. 그런데 이 서곡이 캐나다장로회 신년 초 <기독교대전도회 총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1919년 신년 초 북간도지역 기독교대전도회 총회 개최되었어요. 그 때 독립운동계획을 마련하고 국내외와 상응하여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연해주에 보낼 대표선거와 자금모금위윈회를 구성하였어요. 그들은 1919년 1월 25일 연변대표로 김약연, 정재면, 이중집을 대표로 정하고 정기영을 수행원으로 선거로 뽑았다. 훈춘지역은 문병호, 윤동철을 대표로 선정하였다.
2)연변대표들이 연해주로 가는 목적은 ①로령대표들과 함께 <대한국민의회>를 설립, ②<독립선언서>를 작성해서 공포. ③금후 민족독립운동방침을 토의 결정 ④대표 중 1명을 선발하여 이동휘, 백순과 함께 파리로 가서 강화회의에 참여한다.
3)대표들이 떠난 후, 연변지역 독립투사 33명이 2월 18일, 2월 20일에 국자가의 박동원 집에 모여서 독립운동방침을 토의하면서 <독립운동의사부>를 구성. 3가지 합의
①첫째 간도 각지의 교회 및 단체는 서로 일치단결하고 협력하여 민족독립운동에 힘쓴다. ②로령의 조선인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 간도의 각 단체들은 일제히 시위운동을 전개한다. ③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면 간도의 각 단체의 협력자들은 용정촌에 집합하여 독립선언을 공포하면서 민족독립운동기세를 앙양시킨다.
4) 3월 7일, 3월1일 서울의 만세시위와 <독립선언> 소식을 접하였다.
<독립운동의사부>는 연해주에서 오는 선언서를 기다릴 것인가? 조선 국내와 보조를 맞추어 일어날 것인가? 로 의견이 분분.
5) 3월 10일, 국자가와 용정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하고 시위행진.
<독립운동의사부>를 압박하였다. <독립운동의사부>가 <독립선언서반포축하회>로 거행하기로 결정하고 서울 독립선언서를 한글과 한자로 인쇄하였다.
6) 3월 10일 이후, 용정촌 북쪽, 서전대야에서 <조선독립축하회>, 대회장 김영학, 부회장 배형식목사 결정.
7) 3월 13일 오전 12시, 캐나다장로회 부속 영신학교 앞 공지에서 모임.
시간과 장소 변경/ 오후 1시, 영신학교 동북쪽 700미터 떨어진 (현재 간도보통학교 뒤쪽, 용정 제1유치원 마당), 서전대야에서 조선독립축하회에 3만여 명~ 2만여 명 정도가 모였다.
①김영학목사 <독립선언서포고문> 낭독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의 명의.
②배형식 목사, 류례균, 황지영여사의 연설.
③시가행진 일본용정영사관 앞으로, <조선독립을 성원>이라는 오장기, 태극기와 중화민국기, 학생 충렬대 300명, 군중대오.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 구호를 외치다. 서전대야에서 상부지(도심의 상가지역) 내로 들어갈 때 수십 명의 군경들이 발포(맹부덕)하여 현장에서 10명 사망. 병원에서 4명 사망. 퇴원 후 5명이 사망하고 48명이 부상, 94명 체포되었다.
8)3월 13일 – 국자가 서쪽 교외 솔만자에서 <간도독립운동기성총회>가 모여 구춘선를 회장으로 마진을 부회장올 뽑았다.
9)3월 17일 – 순국자들의 장례식에 3,000여명(1,500여 명)이 모여 시위하였으며 그들은 합성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10)3월 20일 – 황병길을 중심으로 하는 훈춘시위, 2천명이 참가하였다.
11)3월 말 - <간도독립운동기성총회>를 <간도국민회>로 개칭하였다.
12) 30여개의 무장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되었다.
-책의 목차를 살펴보면 북간도 독립운동의 태두들부터 시작해서 다시 용정에서 보다 에 이르기 까지 한 장 한 장 귀한 이야기들이 적혀있습니다.
- 하나하나 소개 좀 해주신다면?
먼저 1부 <북간도 독립운동의 태두들>을 소개하겠습니다.
<1부 북간도독립운동의 태두들>
태두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쉽게 붙일 수 없지요. 그러나 구춘선, 황병길, 이동춘 세 분은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태두” 라는 호칭이 전혀 아깝지 않으신 분들이십니다.
가끔 삶 전체를 독립운동에 바친 세분들의 이름이 한국사회에 알려지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 분에게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①세 분이 다 1945년 이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므로 살아서 자신들이 활동한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말로 전 할 수가 없었지요.
②세분의 후손들이 아무도 해방 이후 한국으로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러므로 후손들 중에 아무도 한국사회를 향해서 자기 조상들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지요.
③구춘선은 1921년 고려공산당에 가입을 했으므로 반공주의를 국시로 택한 한국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었지요.
황병길은 본인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지만 1남 3녀가 다 공산주의 독립투사로서 치열하게 활약을 했기 때문에 한국에서 입지가 어려워요.
이동춘은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한국 독립운동의 거점이 간도에서 상해로 바뀌면서 독립운동사의 초점이 임정과 관내에서 활동한 투사들에게맞춰지면서 자연스럽게 소외가 되었어요.
먼저 간도국민회 회장인 구춘선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겠습니다.
구춘선은 북관의 땅이 자연재해와 기아에 극심하게 시달리기 시작하는 1860년 도문을 마주보고 있는 온성에서 태어났다. 1897년 북간도로 가족 전체가 이민. 1903년에는 양수천자에서 이범윤을 도와서 일하다가 1905년에 용정으로 이주.
그는 용정 최초의 크리스천으로 1906년 구례선선교사, 홍순국조사와 함께 용정시교회를 개척, 설립하였으며, 1913년 하마탕교회를 세워 교회 조사(전도사)로 활동하였다. 또한 교육가로서 하마탕에 ❮보진학교❯를 세웠다.
구춘선은 <간민교육회>, <간민회>의 주요간부로서 활동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학교를 세우는 등 북간도 조선이주민들의 생활과 교육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는 <독립운동의사부>의 지도자로 3.13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3.13 만세시위> 이후 국내외를 망라해서 최고 큰 독립운동단체인 <간도국민회>의 회장이 되었지요.
그는 간도국민회 회장으로서 북간도에서 설립된 30여 개의 독립운동단체들을 연합시키고자 노력하였으며 도독부, 대한독립군, 신민단, 국민회군을 연합시켜서<북로독군부>를 만들어서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어요. 그는 무기 구입을 위해서 간도국민회 지회를 통해서 17만원을 모금하여 독립군에게 무기를 제공하였지요.
(17만원이 얼마나 큰돈인가 하면 1920년 길회선(길림~회령) 부설자금으로 용정에 온 자금이 그 당시 18만원이거든요. 18만원이면 4개 사단을 중무장시킬 수 있는 돈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한민회군, 의민단, 신민단을 연합시켜서 홍범도연합부대를 형성하여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요. 구춘선 없이 간도국민회 없고 간도국민회 없이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도 없습니다.
경신참변과 자유시 참변 이후에 ❮국민회❯성원들과 함께❮고려공산당❯에 가입하여 이동휘 노선과 적기단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24년에는 은퇴를 선언하고 하마탕으로 돌아와서 교회 조사로서 시무하며 ❮간도국민회❯ 재건에 힘을 다하였다. 근 마지막까지 하마탕에서 자신의 조사 직분을 다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일로 인하여 한국사회에서 기피를 당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아직도 제대로 된 연구가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기독교우회 황병길과 그의 가족들>
다음엔 1909년에 <기독교우회>를 세워 독립운동을 시작한 황병길과 그의 가족을 소개하겠습니다.
황병길은 1885년 음력 4월 15일, 함경북도 경원군 양하면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출생. 그는 1904년 러일전쟁당시 러시아군 통역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이범윤, 이위종, 최재형이 발의한 창의회에 의병으로 가입하여 1908년 신아산전투, 서수라전투 등에 안중근과 함께 참전. 회령전투에 패배한 후에 1909년 초에 안중근과 함께 단지동맹을 맺어 무명지를 잘랐다. 그는 러시아의 조선독립운동가 추방을 피해 연추에서 훈춘으로 나왔다.
1909년 훈춘에서 백규삼, 오병묵 등과 함께 <기독교우회>를 만들어서 구국교육, 구국신앙 운동을 펼쳤다. 그의 활동으로 훈춘현에 많은 민족학교와 교회가 세워졌다. 그는 훈춘성내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신풍학교와 북일학교 설립에 기여하였다. 그는 1912년에 전 훈춘순경국장 왕결청, 길림참모부원 빈보현, 오병묵, 이종활, 윤해 등과 함께 한족과 조선인이 연대하여 항일운동을 꾀하는❮둔전영❯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또한 같은 해인 1912년에 항일사상 고취를 위해서 김학천과 함께 ❮훈춘상무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1917년 10월에 훈춘일본영사분관에 체포되었고 1918년 일제는 그를 친일선전에 이용하고자 조선시찰단 단장으로 세웠다. 그는 시찰단 단장으로서 4월 28일 훈춘을 떠나서 5월 25일에 훈춘으로 돌아왔다. 그는 6월 2일에 일제가 기획한 시찰보고회에 예정대로 참석하였으나 독립운동에 대한 신념과 용기를 결코 잃지 않았다.
그는 1920년 3월 20일에 훈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기독교우회>를 <훈춘한민회>로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훈춘한민회> 산하에 <급진단>을 두어 무장독립군을 친히 양성, 훈련시켰으며, <급진단>을 <의사단>과 <포수단>을 함께 묶어서 <군무부>로 개조, 발전시켜서 <훈춘한민회>산하의 독립군부대로 만들었다. 그는 1920년 일본군에 쫒기는 중에 비를 맞은 일로 급성 폐렴에 걸렸고 6월 1일, 봉오동전투를 사흘 앞두고 36세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갔지만 그가 양성한 <한민회군> 200명은 홍범도연합군부대로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황병길의 아내 김숙경투사를 소개합니다.
황병길의 가족은 아내 김숙경, 세 딸과 아들 전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습니다. 아내 김숙경은 남편 황병길과 함께 계몽운동과 여성 교육에 주력, 3.20 훈춘 만세시위 후에 <훈춘애국부인회>를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여성인권,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부상자들을 보살폈다. 42세에 과로사 하였습니다.
*큰 딸 황정선을 소개합니다. 큰 딸 정선은 민족학교인 3.1학교의 교사, 1907년 연추에서 출생. 1930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 부녀교육 계몽운동, 1932년 중국공산당 훈춘현위 통신부 사업에 적극참여. 1931년 남편 김규봉이 연통라자 서골에서서 항일유격지를 창설하고 공산당을 조직할 때 헌신적으로 협력. 1934년 남편이 <반민생단투쟁>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 후에 만주군에게 잡혀 고초를 치르다가 도망하여 관내로 도피. 해방 후에 북한으로 들어감.
*둘째딸 황정신을 소개합니다. 둘째딸, 1910년 연통라자에서 출생. 193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연통라자구 선전위원사업. 1932년 연통라자 소비에트정부에서 부녀위원으로 활동.
1933년 6월, 삼도구에 있는 인민혁명군 위문하고 유격대실에서 쉬고 있을 때 일본군과 위만군의 습격. 적군을 유인하기 위해 동료들과 반대방향으로 달리다가 잡히는 순간 절벽 아래로 투신. 부상당한 채 살아남. 1933년 11월 일본군 토벌대에게 잡혔으나 기밀을 누설하지 않으려고 혀를 깨물다. 적군들이 귀틀집에 불을 질렀으나 살아남.
1934년 2월 14일, 음력 설날에 일본군 토벌대 300여 명이 급습. 부상중인 그를 최현숙과 만족 투사인 안서지가 부축하고 도망치다가 포로가 되지 않으려고 벼랑에서 뛰어내림. 23세에 죽음.
*셋째딸 황정일을 소개합니다. 막내딸, 1913년 연통라자 서골에서 출생. 1929년 항일투사 김남극의 아들 항일연군 소속인 김원익과 결혼. 1930년 17세에 청년단 가입. 192년 부녀회장으로 활동. 남편은 중공연구구위의 공청단 서기. 1933년 남편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국. 1935년 동녕현 공산당지부에서 활동하다가 위만군에게 포로로 잡혀감. 1945년 해방 후에 훈춘에서 의류업에 종사. 1948년 동녕현에서 포로된 건으로 당적과 군적 상실. 1987년 <역사문제>가 해결되고 공로가 인정되어 항일투사 간부로 예우.
*막내 아들 황정해를 소개합니다. 막내이며 아들. 1918년 연통라자 서골에서 출생. 1932년 공청단에 가입. 훈춘현위, 중공동만특위 통신원으로 맹활약. 1935년 노흑산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1937년 19세에 제2군 교도퇀 2련의 기관총 패장. 1938년 5월에 항일연군 제1로군 사령부의 기관총반 반장.
1940년 교수하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제1로군 부사령 위증민을 서북차밀영지로 호송하고 병을 치료하는 동안 10여 명과 경호임무 책임자. 도중에 화전현 쟈피구밀영지로 이동. 굶주리는 부하들을 위해서 사냥을 갔다가 곰과 사투를 벌임. 곰을 잡아 놓고 죽음. 그의 나이 23세였다.
황병길과 그의 가족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두가 독립운동을 자신들의 삶의 목표와 과제로 삼았다.
둘째는 모두가 ❮조선독립❯이라는 민족의 꿈과 희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초개처럼 여겼으며 안전을 돌보지 않았다.
셋째는 그들은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지위, 명예나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다.
넷째는 가족 모두가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투사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애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
북간도 독립운동의 태두 세 번째로 이동춘지사를 소개합니다.
그는 1872년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부모를 따라서 화룡현 광제욕 (현재 용정시 광개향) 으로 범월잠입 하였다. 일찍이 한족 서당에서 공부하여 한어에 탁월하였으며 중국경찰학당을 졸업하였다. 그는 청의 지방 사무소인 ❮광제욕분방경력아문❯에서 통역을 하였으며 그 일로 인하여 1894년 서울의 ❮총리교섭통상대신아문❯에서❮파총❯관직으로 통역하는 파격적인 기회를 얻었다.
1904년 광제욕으로 돌아와서 1907년에 <양정학당>을 세워 조선인과 중국인이 함께 수학하는 학교를 설립. 1909년 가을에 북간도 조선이주민사회의 최초의 공식단체❮간민교육회❯의 창립하였으며 회장으로서 이주조선인들의 생활향상과 민족교육에 남다른 열정으로 헌신하였다, 그는 조선인자치를 위한 단체인❮간민회❯설립 준비위원으로 민국의 부총통을 만났으며 1913년 설립 후에는 식산과장으로서 간도 조선인들의 식생활향상과 농업개발, 항일교육 및 항일 의식 고취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그는 1915년 연길도윤 도빈이 ❮획일간민교육방법❯을 공포하자, 조선인이 일제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하여 중국교육방침을 의거하면서도 언어 등 제반 특수상황을 감안하여 중국교재를 번역하여 사용하며 조선학교에서는 조선역사와 조선 글을 가르쳐야한다고 제언하여 승인을 받았다. 그는 조며 조선인의 중국 귀화입적과 토지 소유 합법화라는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사와 독립운동사에 획을 긋는 뚜렷한 공을 세웠다. 그는 하와이에 본부가 있는 <대한인국민회>의 북간도 지부장으로서도 활동을 하였다.
북간두 독립운동의 태두인 구춘선, 황병길, 이동춘에게는 크리스천으로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①캐나다장로회 선교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교회를 개척하였다.
구춘선(용정시교회, 하마탕교회), 황병길(훈춘성내교효, 연통라자교회), 이동춘(마적달교회)
②캐나다장로회 선교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학교 (구춘선- 보진학교/ 황병길- 신풍학교, 북일학교/ 이동춘–양정학당,광성학교) 를 세웠다.
③<간민교육회>,<간민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④구춘선과 이동춘은 용정에서 황병길은 훈춘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
⑤구춘선과 이동춘은 간도국민회에 황병길은 간도국민회 훈춘지회인
<훈춘한민회> 지도자였다.
세분은 20세기 초기 북간도 독립운동의 태두로서 삶 일체를 독립운동이라는 용광로에 불태웠습니다. 이제 크리스천 독립투사였던 그분들의 행적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분들이 태두에 걸맞게 존경과 예우 받는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20232.8일 새벽에 올리다
우담초라하니
2부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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