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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과 목 명 |
1주차(9.3) | 인천의 역사와 지명 유래 |
2주차(9.10) | 인천 중구의 문화유산 |
3주차(9.17) | 인천 중구의 한국최초·인천최古 |
4주차(9.24) | 인천 중구의 근대 개항장에서의 기억들 |
3주차(9.17)는 인천중구자원봉사센터(센터장 배동수) 4층 대강당에서 「인천중구의 한국최초 · 중구 최고 20선」의 주제」로 자원봉사자 27명이 참여한 가운데 장미희 역사문화 해설사의 강의가 있었다.
1. 각국공원 : 우리나라 최초(1884)의 서구식 공원으로 인천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공원이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는 서공원으로 불리다가 해방해인 1945 ~ 1957년까지 만국공원으로, 그 이후부터 현제까지 자유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2. 세창양행 사택 : 지금의 맥아더장군 동상 자리에 있었던 최초의 서양식 건축물(양관)로 무역회사 독일의 세창양행 사택(1884) - 6.25때 소실되었다.
3. 제물포구락부 : 개항기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 및 기타 외국인과 소수의 중국·일본인들이 친목을 돕는 사교장(1901), 1914년에는 외국인 거주지역인 각국조계(各國租界)가 철폐되고 일본 재향군인회관, 부인회관으로, 광복 후에는 미군이, 1953년부터 1990년까지는 인천시립박물관, 1990년부터 2006년까지는 인천문화원,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하였다. 제물포구락부'의 원래 명칭은 '제물포 클럽'이었으나, '클럽'이 일본식 가차음인 '구락부'로 불리고, 그것이 그대로 굳어져 오늘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4. 홍예문(虹霓門) :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라는 뜻의 인천 시내 남북간 교통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철도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하여 1908년에 준공하였으며, 처음에는 혈문(穴門)이라고 불렀다.
5. 인천기상대 : 일본이 전쟁에 필요한 기상관측을 위해 1904년 4월 6일 제물포에 일본중앙기상대 제3임시관측소를 설치했다.
6. 웃터골 : 1920년 '웃터골운동장'은 인천공설운동장으로 개칭되어 1934년 현 축전용경기장(숭의동 공설운동장)으로 이전 후 자리에 인천부립중 → 인천중 거쳐 '제물포고'가 되었다.
7. 대불호텔 : 1880년대부터 일본인 상인 호리 히사타로(堀久太郎)와 그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掘力太郞)가 호텔을 경영했다. 당시 숙박료는 일본식 호텔의 2배 이상이었으며, 당시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배에서 인천항으로 내린 언더우드 목사 등 서양인들을 상대로 운영했다. 1899년 경인선이 개통하면서 인천항에서 한성으로 가는 시간이 크게 줄어 대불호텔은 쇠락, 1919년 중국인이 대불호텔 건물을 인수해 중화루(中華樓)라는 음식점으로 개업했다
8. 내리교회 : 한국 처음의 감리교 출발, 고딕양식 건물이며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로 꼽히는 영화학교를 설립. 옛 교회를 허물고 1901년 12월에 벽돌로 십자형의 건물 개축, 1955년 ~ 1958년 신축 현재 모습을 갖추었다.
9. 하와이 이민 : 1902년 12월 22일 102명이 인천항을 출발하여 1903년 1월 13일 첫 이민선 캘릭호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86명 도착, 1905년 8월 8일 몽골리아호까지 56회에 걸쳐 7,291명이었으며, 인하대학교는 인천의 仁(인)과 하와이의 荷(하)를 따와 하와이 이민자들의 뜻이 숨어 있다 한다.
10. 영화학당 : 설립은 1892년 우리나라에서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의 기원이며, 영화학당보다 먼저 설립된 서울의 배재학당, 경신학당, 이화학당 등은 중등교육기관이다. 현재 영화여상을 말한다.
11. 성누가병원 : : 1890년 8월, 영국 해군 종군 신부이던 고요한 주교(Bishop Corfe)와 의사 랜디스(Dr. Eli Barr Landis)가 제물포 항으로 입국, 랜디스(약대인이라 불림)는 현재의 교회자리(성공회 내동 성당)에 성 누가병원(영국병원)을 만들었다. 1890년 성공회에서 개원한 성 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다. 랜디스는 8년을 환자치료를 하다 32살에 장티프스로 운명했다.
12. 내동교회(성공회) : 1890년 9월 29일 인천으로 들어온 코르프(Charles John Corfe) 주교에 의해 건축된 한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이다. 원 건물은 한국 전쟁기에 훼손되고 현재 건물은 원래 성 누가병원이 있던 장소인 인천광역시 중구 내동에 다시 세운 것으로 1956년 6월에 완공되었다. 고 주교는 현재 인성여고 체육관 뒤에 교회를 만들어 포교를 시작, 1890년 9월 29일 성당을 건축한 후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2년에는 한 때 러시아 영사관으로, 1904년에는 성공회 신학원으로 1956년까지 운영되었으며, 현 건물은 1956년 6월 23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3. 답동성당 :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가 입국한 후 1897년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처음 건립되었고 1937년에 시잘레 신부의 설계로 증축된 991.74m²(300평) 규모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조 건물이며, 한국의 성당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혜성보육원으로 교육을 시작하였다.
14. 양무호 : 1903년 대한제국의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고종이 들여온 군함으로 한국 최초로 도입한 근대식 군함이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에게 강매당한 화물선이다 양무(揚武)호는 원래 군함이 아닌 화물선으로 영국에서 25만 엔에 사들여 9년 사용한 것을 55만 엔에 사온 것이다.
15. 광제호 : 양무호의 대체군함으로 1904년 11월 대한제국 정부에 인도된 1,056t급 선박으로 대한제국의 상징적 군함이었다. 국책보상은동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16. 인천감리서 :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원산·인천의 세 항구가 차례로 개방되어 개항장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증가하고 무역량이 늘어남에 따라 거류지 관계 사무와 통상 사무 등을 전담, 처리하는 기관으로 1883년 8월 부산·원산·인천항 등에 개항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17. 외국인묘지 : 인천의 개항과 함께 당초 1914년 중국 북성동, 율목동, 남구 도화동 등에 흩어져있던 묘는 1965년 5월 25일 청학동으로 이전하였다가(영국인 21기, 미국인 14기, 러시아인 7기, 독일인 6기 등 모두 11개국 59명)을 전국 최초로 인천가족공원에 외국인 특화묘역을 조성하였다.
18. 인천 선린동 공화춘(共和春) : 1908년 무렵 건립된 이 건물은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중국인이 지은 중국 요릿집이다. 중국 산동 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型)의 중국식 건물로, 현재 정면은 다양한 색깔의 타일로 마감하였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 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음식점의 공간이 확대되어, 대형 연회장을 갖춘 유명한 중국 요릿집으로 198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현재는 자장면 박물관이 있다.
19. 인천 세관 구 창고와 부속동 : 좌우측 벽체의 디자인 요소가 뛰어나고, 구 선거계 사무실, 구 화물계 사무실은 붉은 벽돌 건물로 좌우 대칭의 균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100년 전 인천개항과 근대 세관관세행정 역사를 증명하는 항만유산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20. 구 인천부 청사 ( 舊仁川府 廳舍 ) : 1933년 건립된 이 건물은 인천부 청사로 지어져 인천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해온 역사적인 곳으로 모더니즘 양식의 건축물이다. 광복 후부터 1985년 인천시청이 구월동으로 이전하기까지는 인천시 청사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중구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2층이었는데 1964년 3층으로 증축되었다.
21. 구 일본우선(郵船)주식회사 인천지점 : 1888년 건립, 이 건물은 개항 이후 인천의 해운업을 독점했던 일본 우선(郵船) 주식회사의 인천지점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우리나라 근대 건축물 중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종교 시설과 공공시설이 아닌 민간 소유의 건물이 이렇게 원형으로 남아 있는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 규모의 평면을 단일 트러스로 구성하였고, 천장 위에는 중요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목재 함이 설치되어 있다. 최근까지도 해운업 관련 회사의 사무실로 이용되었다.
22. 인천 구 대화조(大和組) 사무소 :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 동안 인천항에서 조운업(하역업)을 하던 하역회사 사무소 건물로 근대 일본 점포겸용주택의 하나인 정가(町家, 마찌야) 유형의 건물이다. 인천 일본조계지에 현존하는 유일한 정가 양식 건물로써 건축사적인 가치가 높을 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하역노동자의 노동력착취의 현장으로써 역사적 가치가 크다.
23.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 :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는 사적 제424호 「대항성공회 강화성당」 안에 있는 핵심적인 의례물로 1900년 건축 당시 강화도 지역의 화강암을 재료로 제작되었으며 세례대에는 ‘修己洗心去惡作善(수기세심거악작선)’, ‘重生之泉(중생지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개신교의 한국 토착화 사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한국의 성공회 교단에서 최초로 제작된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내부 구조물과 조화를 이루는 단순하고 소박한 형상은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를 띠고 있다. 또한, 유물의 위치와 모습이 원형 그대로 있다.
24.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강당 : 1935년 건립된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 당시 건립된 강당으로, 학교 강당의 기능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 지역 사회의 대형 집회 공간으로 이용해 온 역사적인 장소이다. 15미터나 되는 너비를 중간 기둥 없이 처리한 것이 특징적이며 전체적으로 아주 간결하면서도 기능적이다. 이 건물은 당시 제물포고등학교 학생들이 많은 애국지사 등의 강의를 들으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곳이기도 하다.
첫댓글 귀한 역사자료이군요.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