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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박물관에서 펴낸 '금강록(박종훈 국역 2016)은
1832년 수원 사람 지상은의 유람기인데,
그는 '말 한 필과 오천 냥을 여행경비로 해서 떠났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은 이제까지 발굴된 금강산유기 중 문장이 제일 길단다.
문장이 길려면 팩트이건 감정이건 자세히 적어야 가능하다.
그는 무엇을 그리도 소상히 기록하고 싶었을까.
책을 이리저리 넘기다가,
'어느날 메밀국수를 먹았다.'
'복어회와 해삼 전복을 회로 먹었다' 등의 구절을 읽고서는
어랏!
그러고보니 조선시대 금강산행은 자그마치 한달여가 소요된 원정이었다.
그동안 양반들은 과연 무엇을 자시며 금강산에 다녀왔을까가 궁금해졌다.
그리하여 이 글의 제목은 '그들은 무얼 자시며 금강산에 갔는가'가 되시겠다.
그러고보니 소래섭은 시인 백석의 시에 담겨있는 음식 이야기로 박사논문을 완성하였겠다.
금강산을 '맛'으로 접근한 사계의 논문이 물론 있겠다만, 혹시라도 없다면 자료의 부족이기 쉽겠다.
이 책 '금강록(동유록)'은 그런 결핍을 해결할 좋은 자료가 된다.
아래 글은 추후 글(한국산서회에 내년쯤 투고할까나...)을 위한 자료성의 의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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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일 수원을 떠난 지상은 일행은 4월 7일 도봉산 아래 누원(다락원)에서 유숙을 한다.
식사 이야기는 4월 9일 축석령 넘어 포천에서 처음 등장한다.
'아침에 일찍 길을 나서 장거리(지금의 신읍동)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라고만 적고 있다.
4월 10일자에는
역시 '아침 일찍 출발하여 굴운천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다'라고만 적고 있다.
요즘에는 젊은 아해들이 자기들이 무얼 먹는지 일일이 찍어 인터넷에 올리고,
나이 자신 분들도 먹방에 열광하는 시대이나,
당시 양반들은 먹는 이야기를 남에게 알리는 것을 대체로 추접다고 생각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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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조금 더 머물러 달라는 아전 고여극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렀다.
이날은 남대천으로 놀러가서 돼지를 잡아 술을 마셨다.
또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고서는 솥을 걸고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이때 잡은 돼지는 솥에 걸고 푹 삶은, 요즘말로 하면 수육이겠지.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의 원문은 '회팽취반(膾烹炊飯)이다.
그러니까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가 아니라 민물회(膾)와 탕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 같다.
간디스토마를 몰랐던 당시에도 민물회를 즐겼을 것이다.
지상은은 저녁에 고여극의 집에가서 저녁을 먹었는데,
'저녁밥이 훌륭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릇이 정갈하고 음식이 맛있고 풍성한 것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만 적는다.
남대천 어느 아전이 차려준 4월 봄날의 저녁밥상은 어떠했을까?
4월 14일 그는 울명현에 도착했다. 이제 금강산 권역에 들어선 셈이다.
울명(鬱鳴)현은 세조가 금강산에서 돌아올 때 단발령을 돌아보며 울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때 그는 '아침밥을 먹은 후에 길을 나섰다',
'말휘리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라고만 적고 있다.
단발령에서도 16일 장안사에서도 '아침을 먹고 나서'라는 식으로 끝낸다.
지금 처음 맞닥뜨린 금강산에 압도되어서 음식이야기는 잊고 있는 것일까?
정양사에서 먹은 저녁밥은 그렇지 않다.
밥은 정갈하고 희었으며 국은 고사리로 끓인 것이었다.
나물 반찬은 고경(苦梗), 석이, 새송(賽松) 용적(龍炙) 해의(海衣)였다
저녁밥상에 차린 것들이 정갈했으며, 그 맛도 향기로웠다.
고경이 도라지이고 석이는 석이버섯인줄 알겠는데, 나머지는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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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원통암 지나 계곡에서)
원해가 아직 중천에 이르지 않았기에 밥을 지으라고 하고는 점점 더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
15리쯤 와서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백운대로 갔는데 만폭동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갔다.
잠시 후에 중에게 내 이름을 바위에 새기라고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이름을 다 새기고
그곳을 붉은 색으로 메웠다.
산에서는 해서 먹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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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8일 이제 외금강으로 가려다 눈이 많이 와서 장안사로 돌아간다)
이에 함께 갔던 김익경과 상의하고서는 그날 아침밥을 먹은 후 장안사를 향해 출발했다.
4월 19일)
아침에 밥을 물에 말아 허기를 달랜 후, 악공 세사람을 돌려보내기로 했고...
4월 20일 통천에서)
처음 출발할 때, 혹 여행경비가 부족할까 걱정이 되어....
이 고을의 호장 김대경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10냥을 빌려서
다음날 총석정에서 놀 때 길을 안내해 주는 사람과 배를 젓는 사람 등에게 주는 돈으로 쓰고자 했다
당시도 돈을 빌리고 빌려주고 했다는 것.
4월 21일 총석정에서)
동쪽으로 10여리 가니 고제촌이 있었다.
이곳에는 육백여 집이 있었으며, 집들이 연이어져 있고 풍요로워 보였다
초가집과 기와집이 서로 섞여 있으면서....
남자는 준걸했고 여자는 아름다웠으며 물색도 선명하고 밝았다......
그러나 비린내와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찌르기에 오래 머물수는 없었다.
일제 때 원산쪽으로 해수욕을 가는 이들은 원산 근처의 여인들을 키가 커고 미인이라고들 했다.
아마 북방계통인 여진족 등과 혼혈이 된 결과가 아닐까
이 노인과 헤어지고 다시 길을 따라 돌아와 고제촌에 도착했다.
주변의 풍경을 구하느라 먹을 때를 놓쳤기에 배고픔이 심했다.
그래서 주막에서 메밀국수를 사먹었다.
반갑게도 '메밀국수'가 등장한다.
'메밀국수를 사먹었다' 에 해당하는 원문은 '매끽백면(買喫白麵)'이다.
당시에는 그냥 국수라고 불렀을 것이다. -> 황광해의 나는 왜 '막국수'인가? 참고<_
검색해보니,
메밀국수는 고려시대부터 백면(白麵)이라 하여 이미 만들어져 왔고, 18세기 말 이후 《농가월령가》· 『규합총서』· 『동국세시기』 등에서는 10월이나 11월의 계절식으로 메밀냉면과 비빔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냉면이 여름의 계절음식처럼 인식되어 있지만, 원래 북쪽지방에서 메밀의 수확기에 맞추어 겨울에 주로 먹는 음식으로 발달했고, 여름(음 6월)에는 새로 수확한 밀로 뜨거운 국수나 칼국수와 수제비를 만들어 먹었습니다[출처] 한국의 면요리 (시젠에서 펌..)|작성자 에그랑
당시그 주막의 국수내리는 틀과 부엌풍경은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가산 김준근이 1880년대에 그린 그림인데, 저만치 막걸리병과 잔들도 보인다.
지상은이 잠자리를 청한 주막의 방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여인숙이라도 국수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은 들믄들믄 더웁기도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누어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깜아니때를 올리고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사람들의 얼골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본다
백석의 '산숙'
4월 22일 통천 부근)
10리를 더 가서 두백에 이르러 포구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서는 홍합을 팔고 있었다.
팔고 있는 홍합은 아무래도 건조된 것이겠다.
4월 23일)
아침을 먹은 후에 임관용에게 점심을 싸게 하고서는 곧바로 백정봉으로 올라갔다.....
간신히 정상에 올랐는데., 그 가운데 샘물이 제법 고여 있었다.
깊이는 2~3척 정도 되었고, 개구리 같은 생물이 그 가운데 알을 낳아 놓았다....
샘물의 맛이 좋은 곳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싸서 먹기도 한건 당연한데, 어떤 통에 담았을까.
반찬은 짠지이기 쉬울 것이다.
장진은 모두 어부들이 사는 곳으로 전복과 미역을 캐고 물고기와 해삼 잡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복어를 많이 사서 회(膾)도 쳐먹고 익혀(熟) 먹기도 하면서 길손의 허기를 채웠다.
또한 해삼과 전복을 샀는데,
값은 저렴하고 물건을 많이 주어 길을 가면서 오랫만에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어랏 당시에 복어를 회로 쳐먹어???
원문을 검색해보니 '살아있는 복어'에 해당하는 게 생복(生鰒)으로, 이는 살아있는 전복의 뜻이다.^^
동해에 가서 생선회가 아니라 전복 해삼 등을 먹는 건 이후 7,80년대까지 이어졌다.
2000년대는 역전되어 생선회가 주이고 전복 해삼은 스끼다시 신세가 되었다.
지금은 수량이 부족하여 전복 해삼도 당당히 메인안주로 복권되었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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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 온정리에서)
온천 주변에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이곳을 오가며 목욕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온천의 좋지 않은 냄새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온천이 일반화되지 않은 시대 이야기이다.
'냄새'나는 온천도 좋다고 하게 된건 아마 20세기 들어서서일것이다.
그는 만물상쪽으로 길을 향했다.
만물초로 가는 길이 몇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그 마을에 사는 사람에 물었더니,
손으로 북쪽의 한 봉우리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곳이 온정령인데 이곳에서 40리입니다.
10리를 조금 못가 길가에서 동쪽으로 바라다보이는 곳이 바로 만물초입니다.
그 사이에 서너 인가가 있고 계곡의 입구에 주막이 하나 있습니다.....
가는 길 중간 중간에 쌀가루를 물에 타서 마시기도 했고, 목마름을 해결했다.
휴대식으로 쌀가루를 들고 다녔군.
당시에도 금강산은 인기있었는지, 만물상 입구에 주막까지 있었다니....
조금 후에 길을 안내하는 사람(중)이 술을 사가지고 왔다.
이에 다시 길을 나섰다.
술을 사가지고 온 곳이 아마도 그 주막일 것이다.
참고로 그는 계속해서 가마로 이동 중이다. 조선시대때는 당연히 이랬다.
일제시대 때는 일본인(조선인도 물론) 돈이 있으면 금강산에서 가마타고 유람했는데,
이를 꼭 '민족차별'의 시각으로 보아야만 할까?
나는 민족간 차별보다 같은 민족내 계급차별을 더 흉악한 거라 생각한다.
4월 26일 유점사 근처에서)
아침 일찍 출발하여 10리를 가서 백천교에 이르러 아침밥을 먹었는데, 이곳은 개자령 아래였다
주막은 하나 밖에 없었고 주막의 주인은 본래 평양 사람으로 국수(麵)를 잘 만들었다.
그래서 아침을 먹기 전에 우선 국수 한그릇을 먹었다.
여기서도 또 (메밀)국수가 등장한다.
평양사람이 국수를 잘만든다는 건 , 다시말해 평양이 국수의 원조라는 뜻이겠고,
당시 조선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라는 뜻이겠다.
4월 27일
아침을 먹은 후에 가마를 타고....
30리를 가서 백천교에 이르러,....... 메밀국수를 먹은 후에 다시 출발했다.
같은 주막에서 먹은 걸로 보인다.
그는 이윽고 해금강으로 향한다.
선돌촌의 동남쪽은 바닷가이고 마을은 백 여 가구 쯤 되었다.
들판에서 밭을 갈아 농사짓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활하니 삶이 풍족했다..
주막 주인과 수많은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저녁밥이 차려졌다.
놋쇠 그릇은 빛날 정도로 깨끗했고, 밥이며 반찬 모두 정갈했다.
그리고 생선으로 끓인 국도 입맛에 딱 맞았으니 평범한 밥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주막 주인과 아내는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의 풍속과는 달리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이처럼 곡진하기에 유람 온 나그네들이 모두 이곳에 머물면서 밥을 먹는다고 했다.
바닷가 주막에서 사기가 아니라 놋쇠 그릇이라구라..
그리고 생선으로 끓인 국에 해당하는 원문은 '팽선작갱(烹鮮作羹)이다.
갱은 '제사에 쓰는 국. 무와 다시마 등을 넣어서 끓임. 멧그릇 옆에 놓음. 메탕 '이라는 뜻이니,
요즘말로 하자면 생선지리라고 해야겠다.
사선정 근처에서)
고을의 역참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이 주막은 개성의 상인들이 장사를 하고 있었고 고을 사람도 많이 모여 있었다...
개성 상인이 저시절도 물론 유명했네요..~
화전민 촌에서)
산골짜기의 초라한 마을은 너무 적학했다.,..
아직 산중에 해가 지지 않았는데 밥을 하는 연기가 부엌에서 올라왔다....
그런데 반짬 썩은 소나무 밥상에 한그릇의 조밥과 몇가지 거친 채소나물이 전부였다.
아 옛사람들은 날마다 만전(萬錢)을 들여 밥을 먹었는데도 오히려 젓가락 둘 곳이 없었다고 했는데,
하물며 거친 밥과 나물국이 본래 내 입맛에는 맞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지금까지 천리길을 오면서 먹고 자는 어려움이 이곳에 와서 가장 심했다.
음...거친밥과 나물국이 원래 그의 입맛에 맞지 않았나 보군.
조선시대 양반들과 서민들이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는 '그림속의 음식, 음식속의 역사' 등 주영하 교수의 책을 보면 좋겠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는 먹는 거 관련해서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
여주 이천에서 쌀밥 이야기 할법도 한데 말이다...
그는 금강산도 좋았지만, 돌아가 아들 손자랑 노는 것도 좋다면서 글을 끝맺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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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책장에서 더 참고꺼리가 있을까 찾으니,
작가정신에서 펴낸 '금강기행문선'은 이 글과 관련한 자료로서의 가치는 덜하고.
심경호 교수의 '산문기행'중 금강산 관련한 유기에 이런 이야기가 많이 있다.
이는 추후 올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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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4월 21일자에 총석정에서의 한 구절인데요.
이 고을의 책객과 내아가 악공을 데리고 이곳으로 놀러왔다.
그런데 예전에 금순채라는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다.
또한 내금강과 외금강의 볼만한 풍경이 있는 곳이면 금순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한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악공 중에누구냐고 ㅁ룰었더니 금순채가 대답하며 나왔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금강산 이야기가 수원의 저자거리에서도 횡행하고,
금강산 놀러간 한량들이 바위에 글을 새길 때, 유명한 악공인 금순채와 함께 놀았다라는 것도 새겼나 봅니다.
이때가 1832년이니 언제 금강산에 여유롭게 노닐 때가 오면 한번 찾아보고 싶은 이름입니다...
4월20일 통천에서....10냥을 빌어서...
번역문엔 4월6일 출발하며 5000냥을 싣고 여행을 시작했고 5월4일까지 근 한달간의 일정인데 그 중간인 14일만에 벌써 돈을 빌렸을까..?...원문을 찾아보니 출발할때 준비한 돈은 5000냥이 아니고 5000전(錢)이다. 해도 그 이후 여행경비는 어찌 지불했을까...? 그 당시 500냥은 어마어마한 금액이기에 혼자 부담하기는 어려울듯한데..같이간 분들(최소한 동지)이 모은 돈? 여행 중간에 준비한 돈의 1/50의 돈을 빌렸다는건 그 이후 (최소한) 먹고 자는 비용 지불을 누가 했냐하는 의문을...
^^ 그러게요. 저도 조선의 돈에 대해 깜냥이 없다고 해도 오천냥은 조금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설령 오천냥이 적당하다고 한다면, 10냥은 어느 입에 붙일까..갸웃했습니다.
먹거리 정리라는 갈길이 멀어서 그랬는데...역시....^^ 감사드립니다...
이번 기회에 이래저래 보면서 민감한 부분은 번역문을 믿을 게 아니라 원문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가능하면 한문도 배워야 좋은데....말이죠....`~~
일본어도 벅차서 버벅되고 있는 판에..한문에 관한 한 형님의 연학에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모자이크-등산박물관 맨 앞머리 자주봐서 그런지 국역이... 전을 냥으로 한거빼고.. 어디서 끊을까하는게 문제인데. 예를 들어 동행인중 '김군오'는 김군. 오~로가 맞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