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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103] 창녕, 밀양, 청도 문화유산 여행도보 사전답사 - 첫번째 후기
2017년은 잠시 쉬었던 역사문화 답사기행을 가열차게 이어가는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1월은 한양, 2월은 한성백제, 3월은 부여 익산, 4월은 경주가 준비되고 있답니다.
그중 5월 초에 2박3일로 예정하는 창녕, 밀양, 청도 문화유산 여행도보를 위한 사전답사를
두 딸들과 다녀왔답니다.
지난 토요일(12/10) 새벽 5시에 출발한 차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경남 창녕입니다.
창녕을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직도 시골스런 모습의 시내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저희 아이들은 창녕 시내를 보며 충청도의 어느 읍내 같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창녕이 지닌 역사적인 내력은 제2의 경주라고 불릴만큼 만만치 않아
자꾸 가고 싶은 맘이 드는 곳입니다.
이번 여행에서 창녕, 밀양, 청도를 갔지만 그중에서 두 딸들에게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창녕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지역이지만 비사벌이라 불리던 이 땅에 깃든
석역치 않은 내력을 아이들이 느끼길 바랬습니다.
비화가야 시대의 왕릉과 귀족릉인 교동 고분군을 가던 길에 먼저 만난 석빙고입니다.
큰 고분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 영조 때 지어진 것으로 보물310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쨍하게 맑았던 하늘을 배경으로 찾은 창녕 교동 고분군입니다.
거대한 무덤군 100기가 넘게 있었다는 이곳은 6개 가야국 중의 하나인 비화가야로 일연스님은 비정하였습니다.
비화가야는 그 이름만 전할 뿐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 고분군들이 발견됨에 따라
비화가야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창녕의 비화가야 고분군은 24번 국도가 중간을 가로지르는 바람에 교동 고분군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으나
본래 하나의 고분군이었습니다. 지금 걷는 곳은 도로 서쪽인 교동 고분군입니다.
교동 고분군에서 도로 서쪽의 화왕산 자락에 자리한 송현동 고분군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대략 1,500~1700년 전에 이 거대한 무덤들을 만들었다지요?
도로를 건녀 송현동 고분군으로 넘어왔습니다.
이곳의 고분군은 신라나 백제의 왕릉과 달리 능선지역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왕릉을 2007년 발굴했을 당시 1500년 전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주피장자의 인골은 도굴꾼들의 손을 타서 일부가 사라진 상태이고,
다른 4명의 유골이 뒤섞인 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즉, 4명이 함께 순장이 되었다는 것이죠.
인골의 다리 뼈를 분석한 결과 150~160cm의 17세 여성이었다고 하는데, 아직 성장판 조차
닫히지 않은 어린 17세 소녀였다고 합니다. 4명 중에 2명은 같은 어머니를 두었다고 하네요.
1500년전의 일이 갑자기 눈 앞에서 현실로 펼쳐지니 서러움이 함께 묻어나오네요.
1500년전 모습을 아득하게 그려봅니다. 이 길을 따라 장례행렬이 이어지고,
행렬 중에는 사망한 왕과 귀족들과 함께 산채로 순장당할 4명의 소녀가 구슬프게 울며
뒤따라 걸어왔을 것입니다. 그들의 가족들도, 특히 2명의 딸을 생매장해야 했던 어머니는
딸들의 기구한 운명에 비통해했겠지요. 일부는 순장 당하지 않기 위해 매장 직전 화왕산으로
도주했을 지도 모릅니다. 관군들이 그 뒷덜미를 낚아채 다시 무덤 속으로 넣으며 미안해했을테죠.
그중에는 자기 친구를 혹은 가족을 산채로 무덤 속에 직접 순장해야 했을 지도 모름니다.
'순장'이란 발음은 더없이 순하게 느껴지나 인간의 못된 풍습 중에서도 갑질의 최고봉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듯 버젓이 실체가 있으니 눈을 감지 않아도 상상의 공간이 열립니다.
우리나라에서 순장폐지는 신라 지증왕이 지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동천왕 사망 때(248년)는 스스로 함께 죽어 순장당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동천왕의 아들인 중천왕 이를 금지하였으나 장례식이 있던 날 무덤 옆에서
스스로 자결한 이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신앙과 충성심이 결합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가야와 신라 고분에서 순장을 확인할 수 있는데 보통 4-5명이 순장당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몽골제국이 순장을 많이 하기로 알려져 있는데, 마르코폴로로가 쓴 동방견문록에
보면 몽골황제의 장례행렬에서 시신 운구행렬과 부딛히는 사람은 모두 죽여서 순장해답니다.
몽골 황제 멍케칸(현종)이 1259년 장례 때는 2만명이 살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네요.
3년 전에 이곳을 처음 왔을 당시 창녕박물관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당시 이런 모습으로 장례를 준비 했을 것이라는 디오라마 모형입니다.
리모델링 중인 박물관이 언제 재개관하는지 물어봐야겠네요.
박물관에는 12호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골로 추정하고 '송현이'라는 이름을 붙인 소녀의
복원상도 만날 수 있거든요.
(덧붙임: 리모델링 창녕박물관은 2017년 12월 공사 마무리 예정이랍니다.)
비화가야의 고분군은 시야가 트이는 능선에 자리하다보니 내려다 보는 맛을 갖추고 있답니다.
순장의 시간이 있었던 곳인데, 세월의 흐름은 이마저도 바람에 씻어내고 있군요.
일제강점기 당시 처음 이 고분군을 찾았을 때만해도 150~170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처럼 그 수가 줄어들고 사라지게 된 것은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도굴과
개간에 의한 농경지화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1918년부터 2년 간에 걸쳐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야쓰이 사이이치가 주도하여
이 고분군의 발굴이 이뤄지는데 이때 마차 20대와 화차 2량이 넘는 어마어마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고서 조차 남기지 않았고, 유물들은 일본으로 반출되고 맙니다.
너무너무 안타깝고 억울하고 분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시 도굴이라 다름없는 발굴을 통해 신라에 버금가는 금은 세공품들이 쏟아지자 수많은 도굴꾼들도
달려들었고, 그 많았던 고분들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며 비화가야의 유적은 그렇게 유린당합니다.
당시 출토된 것들 중에 일본 도쿄박물관에 있는 것들이 적지 않은데, 금동관, 금동제 관모,
금은 장식 환두대도 같은 지배자를 상징하는 세공품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참으로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바로 옆에는 창녕박물관이 이후에 수습된 유물 일부를 전시하는데, 현재는 리모델링 공사중입니다.
창녕을 대표하는 유물로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꼽기도 합니다.
국보 제34호에 이름을 올린 이 탑은 불국사 석가탑에 비견될만큼 아름다운 비례와 조형미를 갖춘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전탑에서 발전된 형태인 신라시대 석탑의 최고 정점이 석가탑이라면 이 탑은 정점을 찍고 하향세로 내려가기 직전 정도의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곡선의 사용을 최대한 줄인 절제미를 보여주는 술정리 동삼층석탑에서는 곡선을 딱 두 곳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직접 찾아보세요. ^^
1965년 이 탑을 수리할 때 3층 몸돌 윗면에 뚫린 네모진 사리공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청동으로 만든 잔 모양의 사리용기, 유리로 된 담황색 사리병, 오색 구슬 9개가 담겨 있었고,
사리병 안에는 흰빛 사리 일곱 알이 모셔져 있었다고 합니다.
탑을 다시 짜 맞출 때 이 사리는 새로운 용기에 담아서 제자리에 안치했다고 하니 아직도 이 탑은
사리를 간직한 부처님인 셈입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바로 뒤로 250년이나 된 영조시대 초가가 자리하는데, 잘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쉽습니다.
대문채는 근래에 지은 것이고 그 뒤의 사랑채 너머에 250년된 초가삼간 안채가 자리합니다.
사랑채를 우회해서 안채로 향하는 길입니다.
이 집을 처음 지은 하씨의 18대손이 살면서 직접 관리하므로 조용히 집구경을 해야 합니다.
철따라 피는 온갖 꽃들을 키우시기에 겨울만 아니면 늘 꽃구경을 할 수 있다고 하네요.
오른쪽의 초가집이 바로 영조36년인 1760년에 세운 초가집입니다.
다른 초가집과 다른 점은 지붕을 볏짚이 아닌 억새로 이었다는 점입니다.
볏짚은 해마다 지붕을 새로 해야 하지만 역새는 한번 해놓으면 20-30년을 버틴다고 합니다.
도대체 저 지붕은 얼마나 묵었을까요?
실제 사람이 살면서 이 집을 돌보다보니 정감어린 모습에 하 씨초가를 몹시 좋아하는 분들이 참 많답니다.
물론 저도 그중 한명이고요. ^^
안주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장독입니다.
볏짚과는 다른 뻣뻣한 억새의 질감이 느껴지시나요?
이 집의 특징은 서까래를 종도리에 못으로 박지 않고 묶으로 고정시킨 것이라고 합니다.
그 밖에도 서까래 위에 산자를 깔고 그 위에 알매흙을 덮어야 하는데, 그 대신 대를 엮어서 흙을 대신합니다.
이런 방식은 아주 예전에 쓰던 방식이라고 하는데, 흙이 없다보니 지붕무게가 아주 가벼워서 가는 건축부재를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합니다.
갑자기 이와 상반되게 지붕의 기와무게만도 1500톤이 넘어서 늘 구조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일본의 동대사 대불전이 떠오르네요.
장맛도 참 좋을 것 같다는... ^^;;
집주인의 깔끔함을 엿볼 수 있는 초가 뒤꼍입니다.
굴뚝을 뒤로 멀찌감치 뺀 모습이네요.
다시 제 차로 가기 위해 술정리 동삼층석탑을 지납니다.
새벽 5시에 서울을 출발했는데도 벌써 해가 많이 올랐네요.
비화가야의 이름은 비사벌로 이어져 창녕의 옛 이름으로 흘러내립니다.
지금도 창녕에 가면 가게 상호로 비사벌을 쓰는 곳들이 많지요. 빛이 참으로 그득한 벌판이었나 봅니다.
성수동에 발도행 회원님들하고도 한번 갔던 적이 있던 비사벌콩나물해장국집 사장님도
이곳 출신이신가 봅니다. 참 맛났는데요. ^^
다시 차를 몰아 간 곳은 창녕을 대표하는 절집인 관룡사입니다.
창녕의 금강산이라고 불리는 관룡산을 배경으로 아기자기한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신라시대 고찰입니다.
관룡사에는 유명한 곳들이 많은데, 가장 먼저 만나는 것은 정말 앙증맞은 산문입니다.
오른쪽에 작은 기와지붕을 얹은 석문이 관룡사의 산문이랍니다.
이 소담한 산문을 고개숙이며 겸손하게 지나면 비로소 관룡사 영내에 들어섭니다.
범종루와 천왕문.
관룡사는 신라 진평왕 5년인 583년에 증법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하고, 신라 8대 사찰의 하나로
꼽혔던 명찰이라네요. 원효대사가 제자 1천명을 데리고 화엄경을 설법한 곳으로 전하기도 합니다.
'관룡사'라는 이름은 증법국사가 절을 처음 지을 때 화왕산 위에 있는 세 개 연못에서 용 아홉 마리가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는 것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이후의 기록은 없고, 숙종 30년인 1704년 가을에 큰 비가 내려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0명이
익사하는 큰 변을 당하고는 1712년에 다시 대웅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답니다.
천왕문을 들어서야 비로소 경내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른 곳과 다르게 목상이 아닌 탱화로 사천왕을 모시고 있습니다.
또 동서남북 방위를 지키는 것도 다르게 표기가 되어 있더군요. 남녘에서 간혹 볼 수 있는 표기이긴 합니다.
범종루 지붕 위로 태양이 따스하던 날이었습니다.
관룡사 약사전은 아주 작은 전각이지만 보물 146호로 지정될 만큼 독특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크기로 보면 도리가 3개인 3량으로도 충분히 가능할만큼 작은 건물임에도 도리를
무려 일곱 개나 사용한 7량 지붕인 것이 참으로 독특합니다.
또 도리와 도리를 잇는 '우미량'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 건물에서는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지붕의 가구수법이 대단히 개성 넘치는 관룡사 약사전을 참 보고 싶었답니다.
약사전에서 스님 한분이 독경을 오랫동안 하고 계셨습니다.
안에 모셔진 고려시대의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519호로 지정된 부처님이랍니다.
본래 호분으로 두껍게 칠해져 있어서 그 내면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하여 이것을
안타까워 한 글들을 많이 보았는데, 이날 보니 호분을 모두 벗겨내고, 석물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있겠더라고요.
저는 호분으로 칠해진 모습의 사진만 보았고, 그 모습을 두고 평가가 낮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백색으로 칠해져 있던 호분을 거두어낸 진짜 모습을 보니 고려시대 석불 중에서는 수작으로 느껴졌습니다.
관룡사 대웅전은 1965년 보수공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태종 원년인 1401년에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 9년인 1617년과 영조 25년인 1749년에 중창했다고 합니다.
단청이 내부와 외부 모두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으로도 관룡사 대웅전은 유명하답니다.
가는 사찰마다 잊지 않고 물맛을 보았어요. ^^
관룡사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용선대 부처님을 뵈러 가는 중이예요.
이런 숲길을 15분 정도 올라가야 한답니다.
작은 딸 진아는 아리랑을 부르며 어깨춤을 추며 따랐어요. ^^
헉! 이런,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진 앉음새를 보여주신다는 용선대 부처님이 보수중이랍니다. T.T
그 옆의 바위에 올라서 보면 이런 모습이거든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사진상으로 보았을 때는 제 스타일이었는데요. T.T
이모습을 기대하며 갔었는데요. 많이 아쉽네요.(문화재청 자료사진)
아쉽게 절로 내려가는 중에도 이 부처님을 보겠다고 굉장히 많은 분들이 올라오고 있었답니다.
절집에 보수중이라는 안내판 하나라도 해놓으면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덧붙임; 보수는 2017년 2월에 마무리된다니 5월에는 친견이 가능하겠네요. ^^)
더 머물고 싶었으나 다음 행선지가 있어서 관룡사와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아이들도 관룡사를 참 좋아했어요. 특히 저 아담한 산문을요. ^^
관룡사를 떠나 우리가 향하는 곳은 충절의 이야기와 반전이 기다리는 밀양이랍니다.
첫댓글 이런곳도 있더랍니까?
역사기행 도보가 예정되어 있다니
급! 기대되어지는 2017년 입니다~~
오늘은 저 고분들의 능선에 팍!팍! 꽂혔네요.
고분군 걷기여행으로만 치자면 신라나 백제보다는 가야국 쪽이 더 느낌이 좋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
확실히 기억은 안나지만, 직장생활 할때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이라서 한번 가본 듯도 한데... 기억이 흐릿합니다. 알면 많은 게 보인다는 보편적인 말이 실감되는군요.
좋은 곳 다녀오셨습니다.
흐릿하게라도 남아 계시다니 정말 대단하셔요. 2007년 새롭게 발굴되어 확인된 곳도 있어서 더 의미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송현이 만나러 가야지요. ^^
역사기행도보 기대됩니다!
사전답사기 잘 읽었습니다~~^
네. 시간 되시면 함께 하셔요. 상황봐가며 매달 첫째주를 중심으로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
2017년 역사문화 답사기행 기대하겠습니다.
즐거운 시간들이 되시길 저도 기대해봅니다. ^^
여지껏 무엇하고 있었나 하는 후회가 밀려 옵니다. 아둔한 머리를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발견이님 발꿈치만
따라다니다보면
나라사랑이 저절로
될듯합니다. 고맙습니다~
마치 화가의 스케치 여행기를 보는 듯
사진이 그림입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가야 고분군이 있다는 사실 처음 알고 다소 충격~
이렇게 무식할 수가~ 겨울방학때 창녕으로 발견이님 가신 곳 따라 역사 속으로 텀벙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