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야속하게 깨버린 잠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뒤척이다 결국 충혈된 눈으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 제주올레 8코스를 따라 마녀의 언덕을 지나 진황등대까지 왕복 3km의 길을 걸었다. 거센 파도가 쉴새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흰 포말을 일으키며 갯바위에 부딪쳤다. 그 소리는 마치 대자연이 연주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 교향곡 같았다. 영화 촬영지로도 유명하다는 마녀의 언덕 위에서, 바다와 나 단둘이 맞이한 그 새벽의 울림은 제주 여행의 마지막 3일차를 알리는 강렬한 서막이었다.
아침 8시, 치아바타 빵과 계란, 요거트, 그리고 따뜻한 커피와 홍차로 가볍게 배를 채우고 10시경 더본호텔로 향했다. 백종원 세프의 호텔로 유명한 이곳 지하 탐모라 뷔페에서 다 함께 오찬을 즐겼다. 취향에 맞는 맛잇는 음식들로 입과 배를 호강시킨 뒤 우리는 가파도로 향하는 배를 타기 위해 모슬포 남항(운진항)으로 이동했다. 산방산과 송악산을 거쳐 하모해변 입구에 다다랐을 때, 안내를 맡은 이영호 팀장이 푸른 들판을 가리켰다. 일제강점기 당시 모슬포 주민들을 동원해 건설했다는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아래 벌판'이라는 정겨운 이름을 가졌지만,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중국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발진기지로 쓰였다는 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곳. 여전히 남아있는 콘크리트 격납고와 지하 벙커를 바라보며 다행히 장차 '평화대공원'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라는 말에 나는 암, 그래야지 하고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나무숲길과 하모해변을 지나 마침내 운진항 여객선터미널에 도착했다. 오후 2시, 가파도로 향하는 여객선에 올랐다. 평일인데도 빈자리가 없을만큼 만선이었다. 전인구 동문과 함께 2층 갑판으로 올라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았다. 탁 트인 망망대해와 점점 멀어지는 제주 본섬의 풍경에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상쾌했다.
생전 처음 발을 디딘 가파도는 마치 바다 위에 납작하게 엎드린 가오리를 닮아있었다. 우리나라 유인도 중 가장 낮아 수평선과 하나가 된 듯 나지막한 평지의 섬. 섬에서 가장 높은 곳이 해발 20,5m에 불과해 '키 작은 섬'이라 불린다. 벽화마을과 150여 년 전 주민들이 직접 파서 만들었다는 상동우물을 지나 섬의 최고봉인 '소망전망대'에 올랐다. 가파도는 제주 유인도 중 유일하게 물 걱정이 없던 섬이라는데, 그 우물 덕분이었나 보다. 올레길 10-1코스(4,2km)의 순탄함 덕분에 부담없이 걷다 보니 전망대에 다다랐다. 소망전망대에 서자 가파도의 아기자기한 마을과 푸른 바다,
그리고 그 너머로 한라산, 산방산, 송악산, 마라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웅장한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마을길로 들어서니 전교생 9명과 유치원생 2명이 다닌다는 아담한 가파초등학고가 나타났다. 그 옆 화율공원은 가파도 출신 독립운동가 김성숙 선생의 뜻을 기리는 곳이라 하여 잠시 고개를 숙였다. 넓은 벌판을 따라 바다와 맞닿은 해안길을 걸어 다시 선착장 광장에 도달했다. 달콤하고 고소한 청보리 아이스크림 한 입에 여정의 갈증과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단 2시간의 짧은 머무른 시간이었지만 가파도의 진면목을 느끼기엔 충분한, 참으로 값진 시간이었다.
오후 4시 20분경, 다시 본섬으로 돌아와 산방산 탄산온천으로 향했다.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묵은 때와 피로를 씻어내니 온몸의 세포가 즐겁다고 소리지른 듯했다. 저녁에는 중문의 식당에서 매콤달콤한 갈치조림과 노릇한 고등어구이로 풍성한 만찬을 즐겼다. 밤 8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기절하듯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새벽 5시10분, 눈을 뜨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짐을 챙기고 논짓물 횟집에서 소박하지만 따뜻한 아침을 먹은 뒤, 3박 4일간 수고해 준 가이드 두 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제주공항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돌아와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며 각자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이번 여행의 핵심은 제주올레길을 걸으며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숨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는 것이었다. 제주는 여러번 찾았지만 올때마다 늘 새롭고 이국적이다. 무엇보다 이번 여정을 통해 동문들과 나눈 진한 정과 웃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가파도의 푸른 청보리 바람과 함께, 이번 제주여행은 내 인생의 기념비적인 한 페이지로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영원히 박제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