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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저- 류시화
출-더숲
독정-2018.2.5.
ㆍ오디세이아의 주제는 귀향이지만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항해와 여행이다.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착하는 결말이 아니라 모험과 위기와 장애물들이 등장하는 여정이다. 그 여정을 어떻게 경험하고 극복하는가가 모든 여웅 신화의 줄거리다.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 중에 있는 오디세수스이다. 어느 날 이 행성에 태어나 다시 우리 본향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이 삶이다. 생명으로 반짝이는 이 아름다운 별에는 우리 여행을 방해하는 시련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다. 맟치 신이 계획한 것처럼 곳곳에서 장애물이 나타나 우리를 가두고 굴복시킨다. 암초와 소용돌이로 길을 가로막고, 우리가 세운 계획을 무효화시킨다. 그러나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굴복해야 할 때는 잠시 무릎 꿇지만 곧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시작한다. 지도를 수없이 고치고, 경로를 수정하고, 멀어진 꿈을 붙잡는다. 그러나 그 길이 순탄하기를 기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생 자체가 오디세이아이며 삶의 묘미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나는 여행을 통해 배웠다. 내 여행기는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겪은 일과 이야기로 채워진다. 많은 모험과 시련과 근사한 일, 모퉁이를 돌 때마다 온갖 사건이 펼쳐져 이야깃거리가 많아지기를 그 이야기가 없으면 삶은 흥미진진한 여행기가 아니라 안전한 가이드북을 따르는 것이다.
ㆍ우리의 부서짐이 우리를 온전한 존재로 이끈다. 부서진 마음을 가진 사람만큼 온전한 이는 없다.
ㆍ왕에게 특별한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어느 날 금이 가서 보석을 수리할 사람을 찾았다. 노인이 그 금을 고쳐주기로 하며 왕궁에 머물러 그 전보다 더 아름다운 것으로 재탄생시켰다. 다만 금 간 것을 아름다운 요소로 바꿔 놓았을 뿐이다. 이처럼 삶이 우리를 상처 입혀 아름답게 재탄생시킬 때 우리 삶은 예술이 된다.(선 정리)
ㆍ어둠의 시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둠을 치료할 수 없다. 상처와 고통은 단순한 지식에서 통찰력있는 지혜로 옮겨 가는 다리이다. 축복은 영어 단어의 ‘상처 입히다’라는 프랑스어에서 나왔다. 측복은 종종 상처와 고통을 통해 오기에.
ㆍ그 삶을 잘 사는 것만이 그 생명들에게 값하는 길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자신들의 수많은 희생에 값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고
ㆍ자두를 먹는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자신안으로 들어오는 일이었다. 손에 든 자두의 감촉을 느끼며 자두를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입 깨물 때 나는 소리, 입 안에 번지는 과즙의 단맛과 향긋함을 충분히 즐겼다. 자두를 먹으면서 느껴지는 행복감, 평온함, 기쁨, 만족감의 순간들을 좋고 나쁨의 판단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ㆍ마음이 과거에 일어난 일들에 분노를 느낄수록 현재를 사랑하기 더 어렵다. 마음의 문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과거의 일을 계속 곱씹으면서, 그것에 의해 왜곡된 인식으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대한다.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날개를 펼치고 있는 한 바람이 당신을 데려갈 것이다. 새는 날개깃에 닿는 그 바람을 좋아한다.
ㆍ <니글의 잎새>- 톨킨 저
니글이라는 평범한 화가가 긴여행을 떠나기 전에 마음에 품은 그림 한 점을 그리고 싶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하나로 시작해 수많은 잎과 가지를 가진 거대한 나무로 그리고 제각기 다른 빛과 다른 각도로 음영을 표현하고 싶었다. 신비한 깃의 새들을 가지 위에 내려앉게 할 것이다. 나무 너머로느 들판과 들판 끝의 오래된 숲과 그 너머 눈 쌓인 산이 바다보일 것이다. 이런 상상을 담아낼 대작을 그리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커다란 캔버스를 만들고, 화폭 여기저기에 스케[치를 하고 물감을 칠했다. 자질구레한 처리해야 할 일과 이웃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붓 들 틈이 없었다. 비가 오자 이웃들은 가가 가진 커다란 캔버스로 비 새는 지붕을 덮는 것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어 저 세상 가서 자기가 완성하려던 나무가 완성되어 있는 모습을 보고 “이건 선물이야!; 외친다. 저 세상에서 선물 받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그 순간 그는 자신이 가졌던 재능이 신이 준 선물이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ㆍ감동 받아야 감동 줄 수 있다. 남의 마음에 불을 전하려면 먼저 자기 마음이 불타야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내면의 불이 꺼진 사람이다.
ㆍ비평과 비판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믿으며 비판의 눈을 가져야만 의식 있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도 모르게 자기 안에 비판자를 갖게 되었다. 그 비판자는 습관적으로 우리 생각 전면에 등장하고 우리 얼굴 관상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모두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회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바뱀바 부족은 잘못된 구성원을 바로잡는 형식이 있다. 먼저 잘못한 사람을 마을 광장 한가운데 세워두고 한 명씩 돌아가며 그 삶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행한 좋은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한다. 그의 긍정 성품과 재능, 그가 페붚 호의와 선행, 인내심을 갖고 마을 일에 참여한 것 등을. 이 의식은 며칠씩 걸리기도 한다. 그 사람의 현재의 잘못 대신 과거를 더듬어 칭찬할 수 있는 모든 좋은 면을 이야기한다. 그에 대한 불만이나 잘못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부족원 전체가 칭찬거리를 다 찾아내면 의식이 끝나고 즐거운 축제를 벌인다. 잘못 한 사람은 환영 받으뎌 다시 부족 일원으로 돌아온다. 자존심 훼손이 아니라 애정 어린 방법으로 그의 가치를 상기시켜 자존심을 북동아 교화한다. 그래서 법죄행위가 줄어든다.
ㆍ누군가가 자신이 모든 해답을 알고 있다고 하면 그 해답은 당신의 목적지가 아닌 그의 목적지로 당신을 데려갈 것이기에 그를 따르지 말라. 벽에 문을 그려놓았다 해서 문이 아니다. 그것이 문이라고 우리 마음이 세뇌당했을 뿐이다. 문은 우리 스스로 벽을 뚫어야 만들어진다.
ㆍ우리에게 주어진 날들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면 삶이 그만큼 더 소중해진다. 아침을 더 절실하게 맞이하고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인생은 필사본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써 나가는 책이다.
ㆍ<고래 바위>
남자는 떨리는 손을 뻗어 고래의 매끄럽고 까만 피부를 만졌다. 고래는 몸을 뒤집어서 배도 만질 수 있게 했다. 그가 마치 자신의 사라읏러운 아이인 것처럼. 그런 다음 고래는 물소으로 사라졌다. 경이로움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고래의 배가 손가락에 스치는 순간 남자는 지구의 사랑을 느꼈다. 그는 바위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물속으로 헤엄쳐 갔다. 자신이 물에 떠 있을 수 있음을 알고 다시 벅찬 전율과 환희를 느꼈다. 그는 어머니 고래를 다시 만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언제나 사랑의 에너지에 둘러싸여 있음을 부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후 그의 세계관이 달라졌다. 돌처럼 삶 속으로 가라앉을 것 같았던 두려움이 삶의 바다를 헤엄쳐 나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머지는 삶이 알아서 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바위를 움켜잡고 있는 두려움에 찬 손을 놓기만 하면 삶이 알아서 하리라.
ㆍ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면 그만이다. 안에서 자기 스스로 쏘는 화살, 자기 잘못의 되새김은 독화살과 같다.
ㆍ용서는 내개 상처 준 사람을 해방시켜 주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 증오에서 내가 해방되는 일이다. 삶의 지혜는 불행을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 속에서도 건강한 씨앗을 심는데 있다. 그것은 그만큼 생명의 원천을 신뢰하는 일이다. 역경은 씨앗의 껍질을 벗겨 내는 바람 같아서. 우리 존재의 중심부a만 남긴다. 그러면 그 중심부가 놀라운 힘을 낸다. 짜연주의자 소로는 말했다. “나는 씨앗에 대해 깊은 믿음을 가졌다. 당신에게 씨앗이 있다면 나는 놀라운 기적을 기대할 것이다.”
<김혜자씨의 공감 눈물>
그와 네팔 여행 때 카트만두 외곽 유적지에 갔을 때 장신구를 파는 여자를 보았다. 그런데 김혜자씨가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 옆에 가서 앉았다.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니었다. 그제야 보니 그 여인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울고 있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려 싸구려 장신구들 위로 번졌다. 놀라운 일은 김혜자 역시 그녀 옆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말도 ㅇ벗이 한 손을 잡고 울고 잇었다. 국적과 언어와 신분이 다른 두 여인이 서로 눈물의 잉유도 묻지 않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공감의 눈물이었다. 네팡 여인의 울음은 김혜자를 보며 웃음 섞인 울음으로 바뀌었으며 이내 밝은 미소로 번졌다. 공감이 가진 치유의 힘이었다. 김혜자는 팔찌 하나를 고른 후 그 노점상 여인의 손에 300달러를 쥐어 주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횡재를 하고 싶지 않겠어요? 인생은 누구에게나 힘들잖아요.”
김혜자는 그 팔찌를 여행 내내 하고 다녔다. 그 무렵 김혜자 역시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다. 그녀 고뇌와 절망은 대중이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아픔에 대한 진실한 공감능력으로 자기 아픔까지 치유해 나갔다. 공감은 나의 아픔에도 다른 사람의 아픔에 관심을 갖겠다는 선택이다. “그녀와 나는 아무 차이가 없어요. 그녀도 나처럼 행복하기를 원하고 작은 기적을 원하고 잠시라도 위안받기를 원하잖아요. 우리는 다 같아요.”
ㆍ춤안에서 몸과 의식이 하나가 될 때 춤추는 사람은 사라지고 춤만 남는다. 사람은 사라지고 춤 자체가 된다. 나타리즈 춤 명상은 40분 동안 춤과 15분 동안 좌선으로 구성되어 좌선이 끝나면 15분 동안 기쁘게 축복의 춤을 춘다. 춤 명상은 춤으로 하는 자기 치유이다. 무의식 속에 쌓인 잠재의식을 몸으로 표현해 지워 버린다. 몸은 수많은 기억과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가 춤을 통해 몸 깊은 곳으로 들어가 해방시킨다. 우리 안에 피어나지 못한 꽃들이 개화하도록 돕는다. <그리스인 조르마>의 주인공 조르바에게 춤은 상처를 준 세상과의 화해이자 아픔을 승화하는 몸짓이다.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 조르바는 아들의 주검 앞에서 춤을 춘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는 춤을 추지 않았다면 정말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춤의 치료 효과는 오래된 문화들도 인식하고 있다. 아프리카 어느 부족은 아침에 노래 부르고 춤추며 하루를 시작한다. 아픈 사람을 찾아간 치료사는 묻는다. 마지막으로 노래 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춤 춘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언제인가? 마지막으로 고요히 앉아 있었던 것이 언제인가?
ㆍ나는 더 어두워지기 전에 눈 덮인 호수를 한 바퀴 돌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저녁이라 인적이 거의 끊겼다. 그런데 산책로 중간에서 한 백인 노인과 마주쳤다. 그는 오솔길 모퉁이에서 갑자기 나타난 장발의 동양인을 보로 놀랐고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었다. 그날 내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곧바로 월든 호수에 갔다면 나는 그와 마주치지 못했고 그와의 만남에 지름길이 되었다. 때로는 우회로가 지름길이다. 우회로에는 뜻밖의 선물과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 있다.
ㆍ내가 그림 그릴 때 나와 파장이 맞는 고호, 모네같은 예술가들의 영혼이 나타나 나를 돕는다면?
ㆍ우리는 보고 느끼기 위해 태어났다. 그밖에 꼭 무엇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에 몰입하고 감동할 줄 아는 영혼을 가지고 왔다. 그 몰입과 감동이 삶의 문제를 극복하고 인생을 살아 나가게 하는 힘이다. 여행이 내게 준 선물은 삶과 세상에 대한 예찬, 그것이다. 예찬하는 마음 역시 모든 돌들을 보석으로 만든다. 부자는 많이 감동받는 사람이다. 감동 모르는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다.
천문학 점성가 아내가 “매일 천문학 책만 보면 별자리에서 밀가루가 나오나 돈이 나노냐.” 남편을 핀잔 주자 남편은 이제 깊은 명상에 들어갈 건데 한순간에 모인 우주 에너지를 이곳으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다. 당신은 옥수수와 뜨겁게 달군 솥을 준비해서 내 신호에 옥수 알갱이를 전부 솥에 부어야 팝콘처럼 터지면서 황금 알갱이로 변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런데 옥수수가 없어 옆집에 가서 옥수수를 빌려왔다. 남편의 신호“바로 지금이야!”소리에도 “지금이 그 순간인 게 맞아요? 다시 한 번 확인 해 봐요.”하며 기회를 잃었고 옆집 아내는 그 순간 옥수수를 넣어서 황금알갱이를 얻었다.
ㆍ길의 어원이 길들이다 이다. 스스로 길을 들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
ㆍ사람들은 나를 만자지만 사실은 내가 아니라 자신이 상상하고 추축한 나를 만난다. 우리는 하나로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변화하는 무수한 모습들의 종합이라 호랑이의 줄무늬는 밖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안에 있다. 그 내면의 줄무늬는 타인이 읽어 내기 힘들다. 그 불무늬는 삶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며 성장과 변신한다.
<짐 코벳 이야기>
영국인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난 짐 코벳은 주변에 펼쳐진 밀림과 야생동물에 매료되어 식인 맹수임이 확인되지 않으면 죽이지 않고 환경운동가로서 쿠미온에 인도 최초 국립공원을 세우고 멸종 위기에 처한 벵골 호랑이와 야생동물 보호에도 앞장섰다. 그의 업적을 기려 현재 짐 코셋 국립공원이 있다. 코벳의 일화 중 하나다. 코벳이 사냥꾼과 히말라야 발치의 밀림 속을 걸어갈 때 4월이라 자연이 최고 아름다웠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은 주위 풍광을 신비롭게 비추었다. 계절이 주는 선물로 영혼 속까지 충만해졌다. 그러나 동료는 아름다운 풍경을 음미할 마음 여유가 없었다. 자연이 선사하는 꽃. 새소리와 향기는 그의 오감 속에 스며들지 않았다. 밀림 속 오솔길은 자주 끊겨 넝쿨들을 자르며 길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몸에 달라붙는 벌레들도 수시로 떼어 내야만 했고 발이 미끄러지는 진흙탕과 오르막길도 많았다. 해가 남아 있을 때 목적지에 도착할지도 미지수였다. 미지의 환경에 느껴지는 불안감도 컸다. 그러나 코벳은 야생의 정글이 주는 경이로움과 신비로움만으로도 모든 고난을 충분히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을 스쳐가는 풍경을 즐기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야영지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도 목표 지점과 원하는 결과로 가느라 삶이 그 여정에서 선물하는 것들을 지나치기 일쑤다. 삶은 그 여정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ㆍ뉴욕 택시 운전사의 경험담- 한 밤중에 전화를 받고 승객을 태우러 갔는데 연약한 할머니가 짐가방을 들고 나왔다. 그녀는 지금 노인 요양원으로 가는 길이라며 두 시간 동안 시내 곳곳. 자신이 처녀 시절에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빌딩 앞에 차를 세워 창문 밖으로 한참 동안 그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다음에 그녀가 결혼해서 갓 신혼살림을 차린 주택가였다. 지금은 가주 전시장으로 바뀐, 소녀 시절 춤추던 무도회장 앞에서도 멈췄다. 그녀는 건물 앞이나 네거리에 차를 세우게 하고는 아무 말 없이 어두운 차 안에 앉아 밖을 응시하곤 했다. “이제 가야겠어요.” 작고 허름한 요양원 앞에 직원들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차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자 그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이 늙은이가 생의 마지막 기쁜 순간들을 가질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그녀는 요양원 안으로 들어갔고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그녀 인생의 마지막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우리가 하는 행동과 말, 우리가 내미는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 영혼은 그 마지막 느낌을 마음에 간직한 채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사람들은 화가 나면 서로의 가슴이 멀어져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질러야 상대방에게 자기 말이 가 닿는다고 여긴다. 화가 나면 마음이 닫혀 버리기 때문에 상대방이 멀게 느껴진다. 그것이 화의 작용이다 반면에 사랑은 가슴의 문을 열어, 멀리 있는 사람도 가깝게 느낀다. 그게 사랑의 작용이다. 갈등의 10%는 의견 차이에서 오며 90%는 적절치 못한 목소리와 억양에서 온다는 심리학의 통계가 있다. 소리 지를 때 고통 받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자신이다. 불붙은 석탄을 던지는 자는 자기부터 화상을 입는다. 남태평양 부족은 쓸모없는 나무를 제거할 때 소리를 질러 “필요 없는 나무야. 넌 아무 가치가 없어.” 쓰러져라하고 외치면 얼마 안 가 나무가 시들어 죽는다고 한다.
ㆍ 인도와 네팔을 여행할 때 괴로웠던 일 중 하나는 다양한 벌레와 공생하는 점이다. 파리, 벼룩, 도마뱀. 지네. 환경운동가 조애나 메이시가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북인도 히말라야 기슭의 티베트 난민 공동체서 활동 할 때 회의 중 그녀 찻잔에 파리가 빠졌다. 그녀는 노 프라블럼하며 건져내고 마시면 돼요 했는데 최갈 린포체는 그녀 컵 속에 손가락을 넣어 파리를 건져 밖으로 나갔다와서 말했다. “파리는 이제 아무 문제없을 겁니다.” 그는 문밖 나무 잎사귀 위에 파리를 오려놓고 파리가 날갯짓 할 때까지 지켜보고 왔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 난 괜찮아요”생각만 말고 “당신도 괜찮은가요?”다
ㆍ소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있다. 투우사와 싸우다가 지친 소는 자신이 정한 그 장소로 가서 숨을 고르며 힘을 모은다. 기운을 되찾아 계속 싸우기 위해서다. 그곳에 있으면 소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소만 아는 그 자리를 스페인 어로 퀘렌시아라 부른다. 안식처. 파난처라는 뜻이다. 산양이나 순록이 두려움 없이 풀 뜯는 장소, 독수리가 마음 놓고 둥지 트는 거처. 곤충이 비 피하는 나뭇잎 뒷면. 땅 두더쥐가 숨는 굴이 그곳이다. 명상에서는 이 퀘렌시아를 인간 내면에 있는 성소에 비유한다. 우리 안에는 늘 새로워지려는 다시 생기를 얻으려는 본능이이 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자기 안에서 깨우려는 의지가 우리는 본능으로 자아 회복의 장소를 찾고 있으며, 삶에 매몰되어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치유하고 온전해지려는 의지를 지닌다.
ㆍ우리는 자신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여행이 우리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