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김포문학상 우수상 <시> 당선작
봄엔 다 그래요 / 노수옥
우리 집 자(尺)들이 조금씩 자랐어요
그만큼 세상의 길이들은 줄었겠지요
의자들은 부풀고요 치마들은 뚱뚱해졌어요
언니들은 뒷굽을 조심해야 해요
평지들이 뒤뚱거리니까요
봄엔 다 그래요
할머니는 초록 머리카락이 새로 나고
흔들리던 이빨은 모두
새로운 뿌리가 생겨 단단해졌대요
지친 아지랑이가
노인의 이마에 와서 눕고요
삼각 혹은 길쭉한 씨앗도 모두
동그란 열매를 생각한대요
나도 새로운 말투로 말 몇 개를 바꿔야겠어요
말은 관계들 사이를 헐렁하게 풀어놓고요
이름마다 보풀이 일어나요
저녁이 되면 전등이 저벅저벅 걸어와요
조심해, 그건 넘어지는 방법이야
새로운 말투로 알려주고 싶어요
봄의 모서리가 줄어들면
태양은 더 둥굴어지고
밤은 착한 마음씨처럼 훈훈해져요
창문은 문틈에 푸른 귀를 매달아요
다 자란 삼각자는 삼각을 낭비하고요
줄자는 길이를 낭비해요
그건 헤픈 것이 아니래요
길이를, 사이를 줄이려는 거래요
봄엔 다 그렇대요
봄의 아랫목 / 마경덕
역을 낀 백화점
한적한 실외주차장 한 구석
세 명의 사내가 벽을 지고 앉아 볕에 몸을 데운다
끼고 떠돌던 눈칫밥과
눅눅한 한뎃잠을 봄의 아랫목에 말리고 있다
나른한 봄 한 장을 덮고
뻣뻣한 관절을 녹이는 시간
얼마나 기다린 봄날인가
환히 드러난 얼룩도 부끄럽지 않다
졸음이 오고 하품이 나는 것도 오랜만이다
세일 현수막을 펄럭이며 백화점은 하늘로 오르고
부활절을 앞둔 거리는
겨울을 새봄으로 갈아 끼우는데
쓰디쓴 입맛과 묵은 악취는 바람을 피해 볕맞이 중이다
겨우내 굶주린 구지레한 무릎들
볕 한 줌도 다디단 고봉밥이다
죽음의 터널을 막 빠져나온 노숙이
이젠 살았다고
주머니에 봄볕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우수 시 당선작
봄 언저리 / 최덕순
해거름까지 뻐꾸기가 울었다
마주보이는
공동묘지 숲 사이
온산을 흔드는 울음
그 속에는 검푸른 비밀이 있다
봄은 언제나 똑같은 학습이다
답습이 되는
뻐꾸기의 퍼즐이
붉은머리오목눈이 둥지에 담겨 있다
어쩔 수 없는
제 속을 토해야 살겠다고
저를 알아달라고
이른 새벽부터 울기도 했다
그가 쏟아낸 핏빛 눈물에
둥근 흙집지붕이 이슬처럼 젖었다
한때
아이를 친척 손에 맡긴 적이 있다
하염없이
아득하던 봄, 멍울지던 그 언저리
내 몸 한 곳
아직도 꿰차고 있는
먼 뻐꾸기의 울음주머니
해거름의 뻐꾸기
미어지는 소리가 서늘하다
봄에 쓰는 시 / 권운지
제재소 앞을 지날 때 죽은 나무가 뿜어내는 향기에 몸서리친다. 죽은 나무의 혈액이 아침에 넘기는 책장에 묻어있다. 나는 본다. 은폐된 봄의 이미지, 맹렬하게 돌아가는 전기톱과 완강하게 통나무를 밀어넣는 사내들의 말없는 노동, 줄지어 기다리는 야적장의 나무들을. 절단된 꿈의 비명들이 톱밥처럼 흩어지는 봄날. 억압된 충동들이 켜켜이 잘리어져 우리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소하게 변형되고 있는 것을. 사내들의 손에 들리어져 나와 가지런히 묶여지는 저 희고 향기로운 판자들은 무엇일까. 라디오에서는 종일 뇌사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다. 한 죽음이 오랜 세월동안 종료될 수 없음을 본다. 이 봄날
봄, 사생아를 낳는 / 이주언
봄은 정말 냄새나는 동물이야. 기어이 내 심장으로 기어들어 사생아를 낳게 만들어.
풍문으로 시작되는 그의 체취를 맡으면 현기증이 나. 네 아비는 80년대 봄이다가 90년의 봄이었다 이천 년대 염치없는 한량이야. 이별의 문신 아로새긴 향기로운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며 웃고 있어. 한때 나였고 그였던 퍼즐조각 같은 너를 사랑아, 하고 부르면 모니터 켜고 전자음악을 튼 네 작업대에서 광양자와 전파와 메탈이 목을 조르며 꽃 피우는 세상. 이런 날 내 목소리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까? 너는 아비였다 아들이었다 어쩜 해마다 다른 붕어빵이니? 똑같은 술수로 꽃 피우며 꽁지깃을 세우는 수탉이니? 해마다 나는 환호하며 속는다. 화면 가득 매화꽃이 피었어. 안경 너머 차창 너머 컴퓨터 너머 티브이 너머 굴절될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세상을 이제 더 믿고 싶어. 그런 시선들이 너를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언명하는, 음흉한 낭만마저 없어진 이 시대의 봄이 한껏 몸을 부풀리고 있어.
그 여자의 출산예정일은 사월이래, 너무 빠른 실연이지 않아?
봄, 피다 23 / 신병은
롯데시네마에서 한재 터널 방향 산비탈에 매화가 활짝 피었다
그중 유달리 환하게 핀 매화가 있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웬걸 스티로폼 하얀 조각들이 저도 꽃이라고 피어있다
아, 분명 봄이었어
쓰레기도 꽃이 되는 봄이었어
봄, 55일 면허정지 / 박남희
신호위반 과태료를 못냈다고
면허정지 고지서가 날아왔다
55일 면허정지,
하루 5시간 교육필시 20일 감면
나는 망연히 창 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겨울 햇빛이 나뭇가지 사이를 무수히 들락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