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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9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성령충만과 은혜의 수단. 聖霊充満と恵みの手段。
본문: 로마서 8:22~27
롬 8:22 모든 피조물이 이제까지 함께 신음하며,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23 그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 주실 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24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25 그러나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 27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각이 어떠한지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성도를 대신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22. 被造物がすべて今日まで、共にうめき、共に産みの苦しみを味わっていることを、わたしたちは知っています。23. 被造物だけでなく、「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わたしたちも、神の子とされること、つまり、体の贖われることを、心の中でうめきながら待ち望んでいます。24. わたしたちは、このような希望によって救われているのです。見えるものに対する希望は希望ではありません。現に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なお望むでしょうか。25. わたしたちは、目に見え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なら、忍耐して待ち望むのです。26. 同様に、「霊」も弱いわたしたちを助けてくださいます。わたしたちはどう祈るべきかを知りませんが、「霊」自らが、言葉に表せないうめきをもって執り成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27. 人の心を見抜く方は、「霊」の思いが何であるかを知っておられます。「霊」は、神の御心に従って、聖なる者たちのために執り成してくださるからです。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보통 성령강림주일을 교회의 생일이라고 부르는데요. 성령님께서 본격적으로 모든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존재감과 능력을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강림주일은 성도의 성도다움, 교회의 교회다움을 뚜렷하게 간증할 수 있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먼저 오늘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게 된 직접적인 역사적사실을 사도행전을 통해 알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부터 13절을 읽어보시면 성령님께서 강림하셔서 믿는 자들의 공동체에 나타내신 첫 번째 사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그 장소인데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40일동안 제자들을 더 가르치시며 활동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셨지요. 사도행전 1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1:4-5)
제자들과 여인들은 그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오로지 기도하면서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성취될 날이 언제인지는 알지 못하였지만 기도하며 기다린 끝에 오순절이 되었습니다. 이 날 성령님이 기도하던 모든 이들에게 강림하시며 성령세례를 받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의 기도가 대단한 것이었을까요? 물론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기도의 능력보다... 오로지 성령께서 기도자들을 사로잡아 하신 일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지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문제 해결의 능력이 생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친히 해결사가 되셔서 성령님의 능력과 존재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능력의 성령님께서 너무도 평범하고... 아니 오히려 비천한 사람들의 손을 잡으셔서 역사를 뒤엎을 사건을 일으키셨고,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교회의 오랜 전통은 이런 성령님의 역사하심의 은혜가 임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성령강림의 사건이 있고 나서는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의 임재 안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미 은혜를 받아, 그 은혜 가운데 산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민족과 성별과 연령과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는 이들은 모두 성령님과 함께 일상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모두 성령님의 임재 안에 살고 있는 은혜로 사는 것을 믿습니다.
따라서 성도의 신앙생활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은혜를 지키는 생활이라고 할 것입니다. 성령강림주일은 성도다운 자신의 영적인 실제와 실상을 다시금 확인하고 든든한 마음과 은혜의 믿음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살고 있다고 체감(분별)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16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우쳐 주실 것이라고 하시지요. 그런데 보혜사(변호인)이신 성령님의 역할은 단순히 깨우치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로 떠난 강화도 워킹캠프에서 주님과 처음으로 인격적인 만남이 있었는데요. 말씀을 듣다가 제가 지은 죄를 생각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복하게 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며 울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령님께서 제 안에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 후에도 계속 죄를 지으며 또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회개하고… 이렇게 반복해서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저를 범죄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고, 의로운 삶으로 끊임없이 초대하셨습니다. 의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열망을 주셨습니다. 한 편으로는 죄에 대한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있었지만, 여전히 저는 의로움에 대한 더 큰 갈망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처음 대면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통곡과 눈물, 그리고 회개의 고백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동시에 의와 거룩함에 대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그 갈망과 소망을 지켜주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 임재의 복음을 통해 저주와 멸망의 심판에서 벗어났음이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깨우쳐 주신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깨우침(혹은 깨달음)만 있으면 구원받은 것인가요? 어떤 이들은 성령님께서 깨우쳐 주신 날짜와 시각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야만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데요.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여기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깨우침과 믿음의 차이를 분별하기를 원하는데요. 만일 성령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기만 하고 아무것도 역사하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모두 바리새인과 같은 율법적인 신앙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인으로 만족하고 말겠지요.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운명에 관해 깨닫고 믿게 된다면, 이제 거룩한 삶, 주님과 동행하는 삶으로 순종하는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믿음은 믿고 있다고... 혹은 이해하고 납득한다고 머리로 판단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말씀의 명령에 몸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17, 26)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주신 길을 따라 나아갔습니다. 40년 광야의 생활을 하면서 순종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 하나님의 명령에 먼저 순종함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됩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에 발을 집어 넣자 순종하는 만큼 물이 물러나는 것이지요.
성령님으로 인해 깨달은 은혜는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순종하여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저의 모습도 그렇고, 주변을 보아도 그렇지만, 구원과 복음에 대하여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믿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믿음은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에 기대야 할까요? 바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의 삶을 그 말씀에 맡기는 것이에요.
제가 한국에 있을 때 교회에서 수련회를 가면 인간관계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항상 했습니다. 그 중에 뒤로 넘어지기라는 게임이 있는데요… 두 사람씩 짝을 지어주고 한 사람은 넘어지고 한 사람은 등 뒤에서 받쳐주는 것입니다. 짝을 지어 준 첫 날 게임을 할 땐 서로 믿지 못하여 뒤로 잘 넘어지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루동안 서로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밥도 같이 먹고 하면서 신뢰관계가 형성되고 나서 다시 게임을 하면 마음 편하게 웃으며 넘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렇게 흔쾌한 마음으로(안심하고) 상대에게 나를 맡길 수 있는 것을 뜻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생을 던졌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일상생활을 기대고 있습니까? 성령님이 주신 생각에 충분히 마음을 맡겨 놓았습니까?
믿고 순종하여 맡기며 살기로 결단한 성도의 인생과 일상에도 거듭나기 전의 인생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어려움과 환난이 찾아옵니다. 능력이 무한하신 성령이 나와 함께 계시는데도 곤혹스런 상황에 빠집니다. 그래서 그런 곤경이 말씀에 순종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요.
그런 곤경 가운데 있지만, 성령충만한 삶은 말 그대로 모든 일(아무리 정신 없고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라도)에 기도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기도를 많이 하게 된다고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자기 힘이 아닌 성령의 힘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순종의 힘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경우 막상 곤경에 처하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고, 무엇을 구해야 할 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부분 자기 힘으로 기도하려고 하기 때문인데요. 오늘 본문의 26절과 27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십시다.
아멘.
어떻게 기도할지 눈 앞이 캄캄합니까? 그 때 오늘 우리에게 주신 성경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탄식하는 마음으로 나를 대신하여 기도해 주십니다. 성령충만은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나를 다루고 계신 상태인 것을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성령충만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기도할 제목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지키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깁니다.
은혜라는 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았을 때 고백하는 말입니다. 내게 도무지 주어질 수 없는 혜택이나 유익한 것을 그냥 받았다고 깨달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지요. 그래서 죄로 인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영혼에게 천국을 주신다는 복음이 은혜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받지 못할 영생과 천국을 받고, 할 수 없는 성령의 역사에 순종하게 되는 것… 이 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우리가 받은 후에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의 주인이 이 종의 딱한 사정을 불쌍히 여겨서 은혜를 베풀지요. 그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줍니다. 그는 분명히 은혜를 입었고, 받을 수 없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보자마자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동료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주인은 은혜를 지키지 않은 못된 종을 다시 잡아 감옥에 보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존재가치를 바꿔주시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삶의 기회를 은혜로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받은 은혜를 지키고자 말씀에 순종하는 이를 기뻐하십니다. 은혜를 지키기 위해서 순종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순종을 위한 능력이 없더라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가득 임하셔서 순종의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성령충만이란 이처럼 내 힘이 아닌 주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란 기도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충만으로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은혜를 지키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하다는 것은, 성령님과의 관계만으로 충분히 일상을 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일상에서 복음만으로 충분하다고 깨닫고, 믿고, 고백하여 순종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을 주셨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일상생활에서 은혜를 지키겠다고 결단하고, 또 그렇게 살려고 순종할 때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해 집니다. 일상생활 속에 주님께 받은 은혜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혜와 용기도 실은 성령님께서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의 수단이 되는 모든 교회생활과 일상생활에서 성령충만은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성도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함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십니다. 성령님의 간구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때에 완벽하게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어설픈 기도와 순종이라도 성령님의 완벽한 간구하심으로 성취되는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이미 충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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