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서부 경남지역의 거점도시, 남강(南江)이 굽어 흐르는 곳, 임진왜란의 승리와 패배의 역사를 간직한 진주--------------
최원정/KBS 아나운서: 367번째 역사저널 그날, 오늘은 경상남도 진주(晋州)에서 인사드립니다.
허준/방송인: 진주하면 떠오르는게 진주성이고 晋州城을 남강이 끼고 흐르고 있잖아요. 남강 앞에 촉석루가 지금 한 여름인데 촉석루 아래서 바람을 맞으니까 여긴 천국이에요.
이시원/배우: 그리고 또 진주하면 떠오르는 여인이 있잖아요. 남강에서 왜장을 탁 끌어안고 몸을 던진 논개(論介)~오늘 여길 오는데 반지를 열개 끼고 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 했다니까요.
최원정: 누굴 잡으시려고?
이시원: (최태성을 향해) 먹잇감?
최태성/한국사 강사: 내가 왜(倭)요? 여기 진주성 하면 확 떠오르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임진왜란의 3대첩 하면 ①한산도 대첩 ②행주대첩 그리고 하나?
이시원: 진주대첩!
방기철/선문대학교 사학과 교수; 방금 진주대첩을 말씀하셨는데요. 진주대첩은 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를 대첩이라고 얘기하는 거고 지금 이시원씨가 말씀하신 논개 얘기는 2차 진주성 전투의 이야기예요. 2차 진주성 전투의 결과는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진주대첩만 이야기하시는 분들은 오늘 2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의 이야기가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최원정: 패배의 충격이라는 얘기에 무슨 말인지 궁금해 하실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 같은데 이곳 진주성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동영상) 도요토미 히데요시/代役: 이 세상에서 가장 넓은 땅 명나라로 가자!~
해설: 1592년 일본이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부산을 지나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일본군에 조선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의 병력 일부가 방향을 튼다. 이들의 목표는 경상남도 진주, 조총으로 무장한 2만여 명의 일본군과 마주하게 된 진주성, 과연 이 전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시원: 어라! 일본군이 왜 갑자기 진주로 방향을 튼 거예요?
허준/방송인: 진주가 진짜 나오는 줄 알고가 아닐까? 진짜 보석이 넘치는 도시~
최원정: 풍경이 아름답잖아요. 뭔가 관광차 왔나?
최태성: 정답을 알려 드릴게요. 진주를 온 이유는 맛 있는게 있어서~
최원정: 진주 냉면먹으려고~
최태성: 전쟁을 수행하는데 가장 중요한게 뭘까요?
이시원: 보급!
최태성: 일단은 먹는 거예요. 식량과 군수품 보급인데~ 지금 쭉 육지로 치고 올라오잖아요. (이순신-한산도 대첩, 김시민-진주대첩, 이일-상주대첩, 신립-충주전투, 권율-행주대첩, 이순신-명량해전), 식량과 물자가 보급되어야 된단 말예요. 이걸 어떤 식으로 보급하느냐면 바다를 통해서 올라가는 방향과 함께 따라 올라가면서 보급해주는 그런 방식을 택했는데 이분(?) 때문에 막혀 버려요.
허준: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동영상) 영화 <이순신> 中-신에게는 아직 열 두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신의 몸이 살아 있는한 적은 감히 이 바다를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 그 말 그대로/바닷길을 넘보지 못하게 만든 이순신 장군----------------
최태성: 맞습니다. 여기 지금 이순신 장군이 바다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이쪽 (전라남도 해안) 으로 지금 올 수가 없는 거에요. 막혀 버린 거예요. 식량과 군수품을 제대로 댈 수 있는 지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좋은 곳이 어디다? 전라도잖아요. 바로 이곳 진주가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 반드시 여기를 지나쳐야 되는 것이죠.
이시원: 일본군으로서는 당연히 점령을 해야 되는 곳이었네요.
허준: 사실은 육로를 통해서 보급을 할려고 하면 엄청난 말과 인원이 필요하거든요. 그리고 그들이 먹으면서 올라와야 되잖아요. 서울까지 올라오면 식량이 다 없어져요. 그래서 자기네들이 자급자족이 안 되니까 조선의 식량을 약탈하겠다는 거예요.
방기철: 한가지 보충설명을 드린다면 진주 주변에서 주로 활약했던 곽재우나 김면 같은 의병장 들이 이쪽 지역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경상우도 관찰사인 김성일이 진주성을 중심으로 관군을 규합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일본군이 경상도 서쪽 지역을 그리고 일본군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주를 장악해야 된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육상 보급로를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최원정: 그런데 이제 진주(大捷)이라고 하면 크게 이긴 전투인데 이게 병력이 일본군은 2만~3만 그리고 조선군 병력은 3천8백명~
허준: 대충 숫자로 비교해도 거의 10배 가까운 차이인데 사실 공성과 수성은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수성측에서는 10분의 1이라도 잘만 막으면 막을 수 있다 라는 사실은 역사적인 여러 사건들이 있어요. 문제는 이때 서로의 무기가 달랐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다는 전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방기철; 또 한가지 우리가 주목해야 될 것은 뭐냐면 성의 둘레입니다. 일본군이 처음 들어와서 전투했던 부산진성의 경우는 둘레가 511 미터 정도예요. 511 미터 부산진성을 지킨 병사는 3천명이에요. 반면에 진주성은 2750미터로 부산진성의 5배가 넘어요. 그러면 최소한 만명 이상의 군사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3800명으로 지켜낸 진주성 전투를 우리는 대첩이라고 표현을 하는 겁니다.
----------이광용/아나운서: 임진왜란의 역사를 간직한 곳 진주성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KBS 이광용입니다------------------
장일영/진주성 문화해설사: 반갑습니다.
이광용: 역사에 진주대첩으로 기록된 전투의 현장 진주성, 이 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 성이 그러면 임진왜란 즈음에 축조된 건가요?
장일영: 아니죠, 이 성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그때 진주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점에 있었거든요. 그게 서로 다투기도 하고 경계하기도 하고 서로 땅을 빼앗기도 하고 그랬던 곳이죠.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이라고 불렀는데 고려말에 왜구들이 침입이 잦았어요.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 고려 우왕 5년에 흙으로 쌓았던 土城을 石城으로 쌓는 것이죠.
이광용: 지금의 모습은 고려말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해설: 진주성은 남쪽으로 남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가파른 山의 형세를 하고 있어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로 불렸다. 이 성의 원형과 규모를 알 수 있는 증거들은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광용: (발굴현장 도착) 이게 뭔가요?
장일영: 외성 발굴현장입니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에 쌓았던 성인데 이렇게 쌓여진 흔적이 남은 것이죠.
이광용: 시가지였던 곳을 드러내자 진주성의 옛터가 발굴됐다. 통일신라시대 배수로부터 고려시대의 성터 조선시대의 성벽까지 묻혀있던 진주성의 역사가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장일영: 옛날 진주성이었기 때문에 복원의 의미를 가지고 발굴조사를 한 거죠.
이광용: 그러다 이 성벽이 나온 거네요.
장일영: 그렇죠, 이건 조선시대에 쌓았던 성벽 그리고 위쪽에 가면 고려시대에 쌓았던 성벽이 또 있어요.
이광용: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그 규모가 지금 보다 3배는 컸다. 천혜의 요새이자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던 진주성, 일본군은 어떻게 공격해 왔을까?
장일영; 자기들이 대나무로 만든 사다리, 대나무를 엮어 가지고 그 위에 멍석같은 것을 깔고 올라온다든지 산대라고 하는 걸 이용해서 (산대(山臺)-성을 공격하기 위해 높이 대를 쌓아 만든 구조물), 거기다 부쳐가지고 성 위에다 갔다 대고,
이광용: 그러면 그런 도구들을 다 갖추고 성벽에 딱 달라붙어 있으면 성 안에서 막는 우리 조선군 입장에서는 당황했겠는데요?
장일영: 수성군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들도 큰 돌을 굴려서 바로 내려치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펄펄 끓는 물을 그대로 들이붓고~
이광용: 그러니까 거의 500년전 이곳은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그 현장이네요.
장일영; 그렇습니다.
이광용: 성벽을 오르려는 일본군과 저지하려는 조선군의 치열한 싸움, 이곳 진주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힘을 합쳐 일본군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특히 설화로 내려오는 돌팔매꾼 조씨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돌팔매꾼 조씨는 조총을 든 일본군을 돌을 던져 막아냈다. 그의 돌팔매에 이마를 맞고 쓰러진 일본군이 백명에 달했다 고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워낙에 왜군의 수가 많다 보니까 백성들도 싸움에 함께 하고 돌팔매 질로 왜군 백명 넘게 죽였다는 데~ 그게 가능한가요?
장일영: 가능하죠! 돌팔매 잘하면 상당히 먼 거리로 나갈 수가 있고 그 위력이 대단하거든요. 바로 이마를 때리지!
이광용: 지금 왜구가 왔어요! 돌팔매꾼 이씨가 되어 직접 던져 봤다, 빙글~빙글~ 실패다, 맨손이더 낫겠는데요? 제가 저 돌이 왜구예요, 맞춰 보겠습니다. 어림도 없다!
장일영: 돌 던지는게 시원찮다. 내가 한번 던져 볼께, (직접 시범을 보이는 해설) 웹~ 바로 맞추잖아!
이광용: 돌팔매만으로 조총을 든 일본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는 조씨 이야기~ 그 속에서 성을 지켜 내겠다는 백성들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장일영: 잘 던지는 사람은 굉장히 멀리 가요. 그 당시 조씨는 돌팔매꾼으로 이름이 난 사람인데 보통 사람들 하고 다르지,
해설: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게 맞선 진주 사람들, 평범한 백성들이 함께 만든 승리의 역사를 되새기며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최원정: 우리가 숫적인 열세이긴 했지만 결국 백성들이 힘을 모았기 때문에 이 전투가 가능했던 거예요. 우리 지난 번에 한국 전쟁에서도 보면 진짜 우리는 빈손이었지만 아무도 항복하지 않았잖아요. 진주성도 마찬가지였네,
방기철: 그런데 민관군 의병 모두를 한데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한 주인공이 바로 충무공입니다.
이시원: 교수님, 아까 이순신 장군은 바다를 지키고 있었잖아요.
방기출: 충무라는 것은 시호예요 (忠武-국가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내려진 諡號), 충무공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입니다.
최태성; 이건 알면 좋겠네.
방기출: 김시민(金時敏) 장군은 武로써 국가에 忠誠을 다했기 때문에 忠武라는 시호를 받은 거구요. 조선시대에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9명에 불과합니다. (조선시대 충무 시호를 받은 사람은 이순신, 남이, 김시민을 포함 9명),
최태성: 근데 교수님이 지금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9명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지만 일반인들은 충무공을 한 명 밖에 몰라요!
허준: 충무공 김시민 장군, 이름만 들어도 웬지 백성 민초들을 아끼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태성: 김시민 장군은요, 백성들의 마음만 다스린 게 아니라 일본군의 마음도 다스렸어요.
최원정: 도대체 거길 왜 다스려요?
허준: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녜요,
최원정: 잘 들어 보세요. 전투가 엄청 치열하게 전개가 됩니다. 밤이 되고나서 칠흑 같은 어둠이지나 전투에서 복귀하고 하루를 마무리 할 그 즈음 그때~ (구슬픈 피리소리~),
이시원: 이게 무슨 소리에요? 저 악기가 뭐예요? (박인영-진주시립예술단 국악관현악단),
최태성: 느낌이 어떠신지요?
최원정: 눈 감고 들어야 돼요.
최태성; (때는 1차 진주성 전투), 그 칠흑 같은 어둠에 이 소리가 들립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은 악공을 시켜 가지고 진주 성루에 올라서 바로 이 피리를 불게 합니다. 이때 일본군 이게 무슨 소리지?
이시원: 눈물 날 것 같애요.
최태성: 구슬픈 피리 소리를 들은 느낌이 어땔 것 같애요. 집 생각도 나고~ 엄마 생각나고~심리전~
이시원: 엄마가 보고 풀 때~
최태성; 오늘 죽다시피 하고 지금 왔는데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구슬픈 피리소리~ 이게 뭐야~
이시원: 나는 누구인가?
최원정: 그거 생각 나네 사면초가~ 이건 진주초가네!
허준: 그리고 일본 병사들이 막 치열한 내전을 끝내고 이제 좀 쉬나보다 집으로 돌아가나 보다 했는데 갑자기 타향으로 가서 전쟁 치러라 이게 누구를 위한 전쟁이야~ 그러니까 집에 가고 싶죠.
방기출: 김시민 장군은 단순히 이런 피리 소리만 가지고 심리전을 펼친게 아니예요. 성내에 노약자라든지 여성들에게 남성의 복장으로 갈아입힙니다. 그럼 밖에서 봤을 때 굉장히 군사가 많은 것 처럼 보이죠, 그래서 여유로움을 보임으로써 일본군을 심리적으로 압박을 했던 겁니다.
이시원: 김시민 장군은 심리전의 대가였네요!
최원정: 일본에서 고전 소설이나 가부키 연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본 장군이 모쿠소롤 물리치는 게 많이 나와요. 모쿠소가 김시민 당시 목사의 일본 발음이라고 해서~ 일본군에게 김시민 장군의 공포심이 대단했다는 얘기예요.
이시원: 목사 뜻이 정확히 뭐예요?
방기출: 목사는 지방관의 명칭이죠 (牧使-고려, 조선 시대 지방의 행정단위인 牧에 파견된 지방관), 진주 목사를 일본인들이 모쿠소라고 발음한 거구요. 일본의 가부키라든지 문학작품을 보게되면 모쿠소들이 대부분 죽임을 당해요. 이 얘기는 김시민에 대한 공포가 그런 식으로 표현이 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지만 안타깝게도 김시민 장군은 결국 전사를 했어요. 하지만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기 때문에 우리 조선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낼 수 있었고 일본군의 북상을 어느 정도 저지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이시원: 진주성 이 근처에 김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진주성 안에 자리한 김시민장군 동상), (忠武公 김시민(1554~1592년)-1592년 진주 목사로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진두지휘 하다 전사),
-----------------(동영상) 해설: 1차 진주성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인 1593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명나라가 개입한 것이다. 뒤바뀐 전황 속에서 명과 일본은 협상 테이블 앞에 앉는다-----------------
명군 사신: (동영상) (중국어로) 40만 대군이 올 것이오!
일본군 사신: (일본어로) 좋소, 일본군은 부산 방면으로 철수 하겠소, 단 명나라군과 조선군이 우릴 추격하거나 공격해선 안 되오.
명군 사신: 일본군도 철수도중 약탈 살인은 불가하오.
해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각은 달랐다.
도요토미/代役: 12만 대군은 모쿠소성(진주성)으로 출정시킨다.
도요토미/代役: 무릇 협상이라 함은 술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힘으로 하는 것이다.
해설: 아무런 저지 없이 남쪽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은 1년만에 다시 진주로 진격한다. 2차 진주성 전투의 시작이었다.
최원정: 진주 대첩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지만 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다는 사실은 낯선 사람들이 많죠.
최태성; 얘기를 하자면 너무 가슴이 아픈데 일단 제가 배경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 해에 1593년 명나라까지 개입을 하면서 일본과 명 사이에서 협상이 진행이 돼요. 일본이 내놨던 요구조건이 뭐였냐면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그리고 경기도 일대 4도를 달라 그래요.
이시원: 무슨 헛소리를 해요, 아니~남의 땅을 왜 내놔라 말라 그래요?
허준; 그리고 일본이 요구한 건 그쪽은 원래 파렴치 하니까 전쟁을 일으켰으니까 그런데 그걸 왜 우리가 아니고 명한테 물어봐?
최태성: 황당한 제안을 지금 일본이 하고 있는데 과거에 이런 명과 일본의 협상이 진행되는 그 과정에서 일본이 무려 9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이곳 진주성을 공격합니다.
이시원: 그러면 아예 처음부터 명나라와 협상할 의지 자체가 없었네요. 그냥 전략적으로 명이 군대를 못 보내게 할려구 그렇게 던져 본게 아녜요?
허준: 제 생각엔 만약에 협상이 끝나면 더 이상 공격을 하면 안 되잖아요. 근데 올라올 때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톡톡히 당했잖아요. 그러니까 이거 계속 공격 못하니까 철저하게 복수하자~
방기출: 지금 말씀하신게 맞기는 해요. 왜냐면 히데요시가 진주성 공격을 명할 때 이런 말을 합니다. 전년도 공격에 실패한 성이므로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건 분명히 복수심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게 맞죠.
------------(동영상) <임진왜란 1592년>中-히데요시: 모쿠소(牧使) (진주목사 김시민을 칭함) 모쿠소, 모쿠소, 모쿠소의 머리를 가져와라!
(동영상) 진주대첩(1592년 10월 6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겐 굴욕이었을 진주대첩, 히데요시: 아니지, 아니지, 진주성을 점령한 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라!
이시원: 전쟁이라는 것은 승리하는 게 중요하긴 하지만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라니 미친 거 아닌가요?
방기출: 근데 복수만 가지고 진주성을 공격했다 라고 보기는 힘들고요. 이제 명나라와 강화협상을 하면서 일본군은 계속 조선에 주둔 중이에요. 그러면 군량이 필요했고 또 군량을 확보하려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필요한 부분이 하나였구요. 또 하나는 강화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강화가 유리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본이 아직 힘이 있다 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곳이 바로 진주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최원정: 아까 1차 진주대첩에서는 우리 병력이 3800명이었죠. 일본군이 2만~3만 병력이었는데 그러면 2차 진주성 전투 때도 이렇게 열세였나요? 숫적인 차이가 많이 났었나요?
최태성: 아까 제가 일본이 몇 명을 동원하여 2차 진주성 전투를 시작했다고 헀죠?
허준: 9만이요.
최태성: 어마 어마 하죠.
최원정: 거의 10만 대군이네요.
최태성: 거의 그렇게 되는 거죠. 거기에 비해서 우리 조선군은 1만5천여 명~ 병력 차이가 엄청나는 거예요.
이시원: 왜 그렇게 차이가 나죠? (10대 1의 엄청난 병력차이),
최태성: 그러니까요.
방기출: 실제로 조선군 내부에서는 의견이 나뉘어집니다. 곽재우와 선거이 같은 경우는 승산이 없으니까 성을 비우자는 (空城파) 입장이었구요. 반면에 진주 목사 서예원과 충청병마절도사 황진 그리고 의병장 고경명 등은 진주성으로 모여요 (守城파). 그래서 힘을 모아서 일본군과 맞서 싸웁니다.
최원정: 그러니까 성을 비우냐 지키느냐 굉장히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애요.
허준: 전쟁사적으로 봐서 수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인원도 중요하고 자원도 중요하지만 절대 뚫리지 않는다 라는 서로에 대한 믿음이 정말 중요하거든요. 근데 지금 현재 이 상황은 아니 성을 버리자 라고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거예요.
방기출: 1차 진주성 전투는 성내 3800명만 있었던 게 아니에요. 밖에 약 4천~5천 명 정도의 군사가 또 외부에서 지원이 있었습니다. 사실 일본군은 1만명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나름대로 조선이 승산이 있었다면 지금 2차 진주성 전투 같은 경우는 그런 외적지원이 전혀 없었다. 이런 부분이 가슴 아픈 부분인 거죠.
최원정; 외곽에서 지원이 없었다는 얘기는 그냥 외로운 섬 하나 달랑 있었다는 거죠. 이 전쟁 해야돼 말아야 돼~
이시원: 말로만 하기에는 너무 절망적이에요.
최태성: 그러면 이제 우리가 한번 2차 진주성 전쟁이 어떻게 치러지고 있는지를 봐야될 것 같애요. 1593년 6월 21일입니다. 딱 요만 때가 되겠네요. 이 진주성을 그 어마어마한 병력이 에워쌉니다. 그 다음날 6월22일 드디어 공방전이 벌어집니다. 엄청난 공격과 수비가 이루어지는데 이 때만 해도 무려 세번에 걸친 공방전이 끊임없이 벌어지다가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일본군이 물러납니다.
허준: 그래도 10만 대군을 막았구나
최태성: 그리고 6월 23일 일본군은 진주성을 보호하고 있었던 해자 (垓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 판 못) 를 흙으로 메꾸기 시작합니다.
허준: 해자가 사실은 수성을 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성 바깥 쪽에 파놓은 거기에 물을 채워 가지고 성벽을 뚫거나 기어올라가야 하는데 거기서 멈칫하는 순간 집중 포화를 맞게 되는 거거든요. 9만명 이상의 병력이 무서운 게 뭐냐면 해자를 메꿀 수 있을 정도의 포위공격이 가능한 거예요. 근데 해자가 메꿔졌다니~
최태성: 메꿔지면서 거기에다가 높은 언덕을 쌓아요. 그 위에 올라가서 성 안을 향해서 조총을 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은 성 안에서의 장점을 상실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역시 조선군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시원: 어떻게 그 위기를~
최태성; 조선군을 이끌고 있던 황진 장군은 우리 앞에 있었던 황희 정승의 5대손이에요. 이 황진장군을 필두로 해서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에 상응하는 성 안에서 언덕을 쌓아 가지고 왜군과 맞서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시원: 높은 곳을 차지할수록 시야 확보가 잘 되어서 공격하면 유리하고 더 좋은 거잖아요.
최원정: 토성전이 벌어지겠네요.
방기출: 그 다음 날부터 일본군이 전략전술을 바꿉니다. 뭐냐면 나무로 궤짝을 짜구요. 수레처럼 만든 다음에 거기다가 생가죽을 입혀요. 그리고 군사들은 철갑을 입고 성벽으로 접근을 합니다. 그래서 날카로운 물건으로 성벽을 뚫고 성벽을 들어내면셔 성을 허물려는 작전으로 전략전술을 변경하기 시작했습니다.
허준: 느낌이 장갑차 안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거에요?
방기출: (의병장 조경남의 일기) 난중잡록이라는 책에 보게되면 귀갑차(龜甲車)라고 표현을 해놨더라구요.
이시원: 전쟁이라고 진짜 살고 죽는 문제이기 때문에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발명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애요. 왜 나폴레옹도 식료품 보급하기 위해서 통조림 개발했죠. 징기스칸도 분유, 그걸 이용하면서 보급을 했잖아요. 이렇게 발명품이 전쟁 안에서 싹튼 다는게 어떻게 보면 아이러니 같기도 해요.
허준: 현재도 그래요. 근데 조선병사들은 이제 공포에 휩싸이는 거죠. 위에서 화살을 쏘아도 귀갑차에 막혀서 안 되는 데 안에서는 계속 팍팍 성벽을 파는 공포의 소리가 들릴 거 아녜요.
최원정: 우리도 최신 무기 좀 발명하고 그려죠! 왜 안 했어요?
최태성: (그걸 왜 나한테) 너무 화 내지 마세요. 우리도 있어요, 궁금해 가지고 우리도 발명품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까지 이런 발명품은 없었다. 이것은 차인가 비행기인가
이시원: 날아다닙니까?
최태성: (조선 하늘에) 무동력 비행체가 등장을 합니다.
최원정: 이제- 1500년대잖아요. 다 알다시피~
최태성: 기록이 있어요.
허준: 유럽도 독일이 19세기 후반에 무동력 비행체가 나왔고 라이트 형제는 20세기 비행기를 발명해요.
최태성: 그래서 우리는 못하다는 거예요?
허준: 그러면 전 세계에서 조선에서 세계 최초의 비행물체가 나왔다고 발표해 줘야 되는 거 아녜요.
최원정: 지금 누리호 발사성공으로 흥분하신 거 아녜요?
최태성: 6월 21일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 발사성공!! 무동력 비행체인데 정평구 (鄭平九-2차 진주성 전투 때 활약했다고 알려진 진주성의 화약군관) 라는 사람이 발명을 한 거예요. 진주성이 포위 되었을 때에 이걸 비차 라고 하는데 (비거 혹은 飛車-진주성의 화약군관 정평구가 발명한 날아다니는 수레) 기록도 있어요. 이 비차를 동원해 가지고 30리까지 날아가서 성안 사람들을 구해냈다는 기록이 있어요.
방기출: 오주연 <문장전산고>의 기록을 보면 비차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임진년 왜구가 창궐했을 때 영남의 외딴 성(孤城)이 포위를 당했을 때---(중략)----어떤 이가 비거를 만들어 성 안으로 날아들어가 벗을 태워 30리를 난 뒤 착륙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임진 전쟁 때 영남의 고성 외로울 孤자 예요, 외로운 성에서 사람을 구하러 날라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영남의 고성이 진주성인지 아닌지는 사실 뭐라고 정확하게 말씀 드릴 수는~
허준: 듣자니 굉장히 서운합니다. 최원정 아나운서가 아까 뭐라고 했어요. 외로운 성 같은 상황이었다고 얘기했잖아요. 누가 들어도 외로운 성은 여기 진주성이 아닙니까, 교수님!
방기출: 기록에 오류가 있을 수가 있는데 분명히 (그림등장) 비차 또는 비거 라고 하는 발명품이 활용이 됐을 가능성은 충분하고 그건 인정하지만 다만 진주성 전투 때의 일인지는 확신하기는 힘듭니다.
최태성; 제가 말씀드리고~ 저기 비차 보이지 않습니까 날라가지 않습니까?
이시원: 상상력을 발휘해서 보면 완전히 날라다니는 것 까지는 아니더라도 줄을 길게 연결해서 성에서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날라 다니는 것 같잖아요. 짐 라인 그런 느낌 아니었을까?
최태성: 여기 진주성이 한 여름에도 바람이 굉장히 세요. 지금 이맘 때에 이 바람 정도면 충분히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봐요.
허준: 그리고 정말 이거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이잖아요. 우리나라 실크 생산의 80%가 진주 라고~행글라이드의 날개는 실크~
최원정: 저분들의 상상력이 정말~ 비거의 복원에 노력이 있다고 실제로 진주성 근처에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고 들었는데~진주시가 땅을 차입을 해서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니까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려 왔으면 좋겠네요.
허준: 전 세계의 교과서가 바뀌는 거지요.
최원정: 세계 최초의 비행기는 바로 우리나라에서~
방기출: 저도 입장을 바꿔서 간절히 기원하겠습니다.
최원정: 우주 항공 강국으로!
최태성: 비차 얘기하면서 힘이 났는데 요기까지만 해도 좋겠는데 다시 2차 진주성 전투로 돌아오겠습니다. 6월 27일 아까 일본군이 밀고 들어왔던 무기체계가 워라고 했죠? 그 발명품?
허준: 귀갑차!
최태성: 일본군은 귀갑차로 계속해서 성벽을 허물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바라보고 있는 진주성 안에 있는 조선군이 얼마나 두려웠겠어요. 진짜 이거 무너지는 거 아냐 밖에 다가 SOS를 보내는 거예요. 지원군이라도 오면 적을 분산시킬 수 있으니까 지원군을 요청하는 데 1차 전투와 달리 2차 전투 때는 오지를 않아요.
방기출: 명나라 군대가 지원을 오다가 중간에 멈췄어요. 움직이는 척 하다가 안 왔어요. 사실상 진주성을 버린 거죠.
최태성: 그러다가 6월 28일 바로 그 다음날 이죠. 진주성 2차 전투를 진두 지휘했던 황진 장군이 총에 맞아 전사합니다. 장수를 잃은 거죠.
허준: 근데 이게 일반적인 장수가 아니라 수성전을 진두지휘하던 장군을 잃었다는 건 굉장히 커요. 천년의 성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이 함락 당했을 때도 용병장이 끝까지 버티고 지킬 때에는 버텨냈었어요. 근데 용병장이 떠나고나서 남남이 된 것처럼 수성전에서의 진두 지휘장군은 정말 중요해요.
이시원: 타격이 너무 클 것 같애요.
방기출: 황진 장군 말씀하시니까 가슴이 먹먹해 지는데 황진 장군이 일본군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할 때 막은 이치 전투가 있어요. 이치 전투하면 우리는 권율 장군만 얘기하는데 황진 장군이 이치 전투 때 참전을 했구요. 그때 부상을 당했어요. 그리고 일본군이 2차 진주성 전투를 공격할 때 당시 황진 장군은 충청 병마절도사였습니다. 그래서 의병장 성거이가 진주는 장군의 관할구역도 아니고 정부의 지원명령도 없었다. 승산도 없으니까 진주성에 가지 말라고 말려요. 그렇게 만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진은 진주성에 들어와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겁니다.
최원정; 다들 버린 성이었군요. 너무 마음이 아프다.
최태성;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진짜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을 반드시 기억해야 되겠지만 황진 장군도 역시 꼭 기억해야 함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최원정; 전략적으로는 후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워낙 진주성에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함부로 성을 비울 수는 없는 상황이에요.
허준: 유비가 조조에게 쫓겨서 후퇴할 때 제갈량이 그렇게 만류하잖아요. 지금 백성들을 데리고 가다가는 다 죽습니다. 근데 유비가 백성들이 나를 보고 왔는데 내가 이들을 버리면 어떻게 하느냐. 황진 장군도 진주성 안에 있는 백성들 민초들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 같애요.
------------(동영상) 걸어서 진주 속으로 –진주중앙시장(경상남도 진주), 이광용: 추억의 아이스 케키부터 훈훈한 민심까지 정겨운 모습이 가득한 진주중앙시장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반갑게 맞아주는 진주 시민들을 보니 유명 인사가 된 것 같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유래했다고 알려진 음식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진주의 향토 음식~바로 진주 비빔밥~ 진주를 대표하는 음식답게 식당 안은 비빔밥을 먹으러 온 손님들로 북적인다. (한 진주 시민에게 다가 가서) 안녕하세요?
이광용: 지금 드시는게 진주 비빔밥? 자주 드시나요?
시민1: 고향이 진주라서 한 번씩 먹습니다.
이광용: 그러면 타지에서 오시면 가장 추천할 만한 음식이 진주 비빔밥 맞습니까?
시민1: 예, 맞습니다.
이광용: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 때 유래했다는 얘기가 있더라구요. 알고 계신가요?
시민2: 네, 그때는 말고기를 썼다고
이광용: 말고기요?
시민2: 식량이 부족해 가지고 임진왜란 마지막 때 소는 귀하니까 말을 잡아가지고 다들 먹였다고 들었습니다. (진주 비빔밥에) 어릴 때부터 입맛이 길들여져서 정말 맛 있습니다.
이광용: 숙주 호박 고사리 등 각종 나물을 밥 위에 얻는 모습이 여느 비빔밥과 비슷하다. 하지만 진주 비빔밥의 핵심은 바로 이것~ 육회다. 조물조물 양념한 소고기 육회가 고명으로 올라간다. 여기에 선짓국까지 곁들이면 든든한 진주 비빔밥 한 상이 완성된다. 먹음직스러운 모습에 절로 인증 사진을 찍게 된다.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 사람들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소를 잡았다고 한다. 고기는 육회로 만들어 비빔밥에 넣고 선지와 자투리 고기로는 국을 끓인 것이다. 지금도 진주 사람들의 소울 푸드다. 이 식당이 몇 년 정도?
식당주인: 90년!
이광용: 90년이나 되었다구요.
식당주인: 3대 째 해오고 있습니다.
이광용: 일제 강점기 때부터~
식당주인: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와서 먹었던 추억이 담긴 비빔밥 이기도 하지만 이제 그분들이 나이가 들어서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추억을 쌓아가는 음식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래서 많은 진주시민 분들이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광용: 대를 이어 전하고 함께 나누는 추억이 있는 음식,
해설: 임진왜란 때는 군사들을 위로하고 지금은 추억의 음식이 된 진주 비빔밥을 먹으며 진주 시민들의 마음을 느껴본다.
이시원: 오~ 저게 뭐지?
이광용: 자~ 진주 비빔밥과 선짓국이 왔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이 음식을 맛있게 먹었는데요. 제가 듣기로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430년 전 그날을 상기시킬 수 있는 음식이라고 들었습니다.
방기출: 육회를 얹은 모양이 꽃처럼 예뻐서 화반(花盤)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진주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제사 후에 먹는 음보음식의 얘기이기도 있지만~진주성 전투 당시 군사들이 밥 위에 나물을 얹어서 비벼 먹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최태성: 아니 지금 육회에~ 이게요 조선시대 소를 잡는 것은 일상적 모습은 결코 아니거든요. 정말 비장한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최원정: 농사를 짓는 소를 잡겠다는 것은 이제 끝이라는~ 못 먹겠어요.
이시원: 너무 슬퍼요, 어떻게 먹어 (눈물 보임),
이광용: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을 수도 있는 그런 진주 비빔밥입니다. 4벽여 년전 성 안에 계셨던 조상님들을 생각하면서 드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최태성: 이게 맛있게 드시지는 않았을 것 같고 정말 비장한 모습으로 마지막으로 드실 수도 있었겠다 라는 느낌으로 먹어 보겠습니다. (모두 깊은 한 숨과 함께 먹어본다),
일동: 얘기는 슬픈데~ 음식은 너무 맛 있어~
최원정: 물색없이 맛 있는 진주 비빔밥 어떻게 하면 좋아~ 너무 맛 있어~
허준: 병사들이 전투 생각을 잠시 잊을만한 맛이네
이시원: 이거 먹고 내가 살아야겠다는 투지를 다질 수 있는 맛~ 이렇게 세상에 맛 있는 음식이 많은데,
방기출: 비장한 이야기로는 최후의 결전을 앞둔 군사들에게 나물만 먹이는 것이 너무 미안해 소를 잡아서 육회로 육회 비빔밥을 만들고 피로 선짓국을 끓여서 군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것이 진주 비빔밥의 유래다 라고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전쟁과 아주 무관한 음식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최태성: 비빔밥에 선짓국이 나오더라구요. 말씀하신 대로 라면 이유가 있네요.
최원정: 결사항전 하기 직전에 목숨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각오로 먹었다는 비빔밥 너무 비장해 진다. 근데 이거 먹고 힘이 났어야 되는데 결과는 어떻게 됐죠?
방기출: 조금 전에 황진 장군이 전사하면서 조선군의 사기가 어느 정도 껶였다 라고 말씀드렸는데 정말 조선군에게는 불행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당시가 장마철이었어요. 연일 계속내리는 비로 지반이 약해져 있었고 아마 그래서 일본군이 귀갑차로 성벽을 그리고 북쪽 성벽도 무너집니다. 그러면서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난입을 하게 되는 거죠.
이시원: 그렇게 버티고 버텼는데 비 때문에 성벽이 무너지니까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이럴 때는 날씨가 참 야속하네요.
최원정: 하늘도 무심하시지~ 왜 하필 이때 비를~
최태성: 결국 함락된 진주성 안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거예요. 말씀하셨다시피 성을 의지해서 싸우는 것과 성이 무너지고 그 안에서 백병전으로 싸우는 것은 철저히 숫자 싸움일 수 있거든요.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일본군 9만 병력 대 조선군 1만5천 병력이라고 했으니 그 안에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뻔히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끝까지 조선군들이 싸웠지만 밀리게 되었고 조선군 대부분이 전사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전사한 장수들 성함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창의사 김천일과 아들 김상건,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 최기필 이런 장수들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바로 뒤에 흐르고 있는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게 됩니다.
이시원: 적군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 보다는 내 스스로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 그만큼 나라를 지키고 싶었던 분이잖아요.
최원정: 워낙 많은 전사자들이 있어서 진주성 혈전이라고도 표현하잖아요. 처음부터 이길 생각을 하고 버틴 건 아닌 것 같애요. 그냥 백성들과 고향 땅을 지키겠다는 명분과 명예를 위해서 버틴 분들이 아닌가 싶어요. 마음이 너무 짠 하네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의기 논개가 2차 진주성 전투 후 일본군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버린 거죠. 그게 바로 이 때죠.
방기출: 논개가 바로 옆에 있는 로쿠스케 라는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그래서 로쿠스케를 죽였다 라는 얘기가 있는데 (유몽인作 <어우야담>中에서-왜장의 손이 그녀의 연약한 몸을 잡자 논개는 왜장을 힘껏 끌어안는가 싶더니, 마침내 몸을 만길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두 사람은 모두 익사했다), 여기에 대해서도 역시 불명확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요. 논개 출처 같은 경우도 노비다 아니다 관기다 아니다 전사에 따르면 일본군 장수 로쿠스케가 압록강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리고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얘기도 있고 무사히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이시원: 논개와 관련해 너무나 얘기가 많은 거에요. ?
방기출: 근데 제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뭐냐면 왜 논개 이야기가 나왔을까 라는 거예요.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누가 뭐래도 男尊女卑시대였습니다.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차별받은 여성, 그리고 힘없는 여성들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그런 모습들이 논개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 온게 아닌가. 저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시원: 논개는 진주성에서 싸웠던 조선 백성의 하나의 상징이었다.
최원정: 결사항전 했던 백성들의 상징이다 그렇게 봐야 되겠네요. 1차 진주성 전투도 그렇고 2차도 그렇고 결국에는 끝까지 버텨낸 백성들과 병사들이 있었다는 걸 꼭 기억해야 되겠다.
최태성: 중요한 건 진주성이 가슴 아프게 함락되었다 라고 끝나지 않아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렸던 명령 기억나십니까?
이시원: 다 남김없이 죽여라
최태성: 맞습니다.
---------(동영상) 히데요시: (일본어로) 진주성을 점령한 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라------
최태성: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했잖아요. 승리하면서 진주성은 안전한 곳이다 라고 하는 인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백성들이 또 왜군이 쳐들어오니까 안전한 곳 어디로 갔겠어요?
허준: 성 안으로~
최태성; 그렇죠, 진주성 안으로 굉장히 많이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일본군이 아까 이야기 했던 히데요시의 명령,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라.
이시원: 설마~
최태성: 이 명령 수행을 위해서 진주성 학살에 나서게 됩니다. 이때에 학살당한 숫자가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6만명~(2차 진주성 전투학살 규모), 6만명!
이시원: 세상에 이런 끔찍한 학살이 다 있나요.
최원정: 민간인만 6만명요?
최태성: 일본측 기록에 의해서도 4만명 (2차 진주성 전투학살 규모) 그러니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실은 일본 전국통일 과정 속에서도 일본인들 많이 죽였잖아요. 이렇게 까지 많은 사람을 학살한 적은 없었어요.
허준: 그 당시 진주에 인구도 그렇게 많지 않았을텐데~
이시원: 광기라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애요.
최원정: 우리가 또 잘 알다시피 그냥 죽인게 아니라 戰功을 쌓는다고 얼마나 잔인하게 목숨을 앗았을까. 가슴이 멍~~
방기출: 일본군이 사람들 학살만 했던 게 아니에요 일본의 고치시에 가면 도진도후(唐人豆腐) 라는 名物 두부가 있습니다. 이 두부 재료법을 알려준 사람이 박호인(朴好仁)이란 사람이에요. 이때까지 일본이 두부가 없었던 건 아니고요. 일본식 부드러운 두부가 있었는데 조선의 단단한 두부가 박호인에 의해 전파가 되었는데 이 박호인은 웅천 전투에서 사로 잡혔다는 설도 있고 진주성 전투에서 사로 잡혔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보다 충격적인 얘기는 1660년 조선 숙종 때 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갔던 신유한이 남긴 해유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사카 요도강변에 진주도 라는 데가 있는데 島는 섬도 임진년에 진주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고 했다. 그 말이 뭐냐 진주성에서 집단적으로 사로 잡힌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주거지다 그 말을 듣고 터럭 끝이 온통 까칠히 일어섰다.
이시원: 얼마나 잡아 갔으면~
방기출: (그림 등장) 오늘날까지 기록으로 전해지는 일본의 진주島 이야기 (Yodogawa Riv. 國土交通省), 섬처럼 보여요. 굉장히 많은 사람을 죽이기도 했고 굉장히 많은 사람을 일본으로 납치하기도 했습니다 (지도-커지는 비극, 대규모 학살을 넘어 납치까지).
이시원: 정말 알면 알수록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가 묻어 있는 곳이 진주인 거 같애요.
허준: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기억하고 자랑하고 싶은 건 너무나 당연한 마음이잖아요. 근데 이렇게 진 전투에 희생된 분들이 있는 전투도 꼭 기억해야 되겠다.
최태성: 역사는 좋은 거 신나는 거 기억하고 싶은 것만 역사가 아니고 지우고 싶은 거 아픈 거 상처 받은 거 그것 조차도 기억하는 게 역사이기 때문에 너무 당연합니다.
이시원: 패배를 진짜 알아야 승리도 할 수 있고 승리도 맛 볼 수 있는 거 같애요.
최원정: 우리가 진주 비빔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거 다 그들이 지켜낸 결과가 아닌가 싶네요. 우리가 사실 진주 온다고 했을 때 기분 좋게 들떴었는데 여기서 쓰라린 우리의 역사 현장을 배우면서 한 단계 역사의식이 성숙한 느낌이 드네요.
--------------(430여년 전의 그날 민관군이 힘을 합쳐 지켜낸 진주성, 그날의 아픔과 희생이 있기에 밝게 빛나는 오늘의 진주가 있다.)-------------
최원정: 임진왜란의 역사가 남긴 진주성에서 1차 승리, 2차 패배의 역사를 다뤄봤는데 어떠셨나요?
허준: 요즘에 보면은요, 여행을 좋아하다 보니까 아이와 함께 가볼만한 곳, 리조트 펜션 검색 많이 하거든요. 근데요 정말로 아이를 키우고 계신 부모님들, 진주 한 번 꼭 와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역사저널 항상 그 주에 하는 거 살짝 한번 보고, 그 다음에 촉석루를 딱 올라가서 어때? 여기 시원하지? 아이들이 너무 시원해해요. 여기가 이런 곳이었고 진주성은 어떤 곳이야 라고 하면 아이들이 부모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질 것 같애요.
이시원: 그리고 촉석루에 서 본 아이와 안 서 본 아이는 역사를 바라보는 자세가 달라질 것 같애요.
최태성: 아마 촉석루(矗石樓)의 바람은 평생 몸에 기억되지 않을까. 오늘 저는 황진 장군 이야기를 해봤고 그 외에 의병장들 많은 분들의 이름을 제가 직접 언급을 해드렸는데 사실 그분들만 계신 건 아니고요. 정말 진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싸우셨던 진주성 안에 살고 있었던 그 수많은 아무개들, 그 아무개들도 모두 함께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허준: (비빔밥 그릇) 여기 이걸 보면 정말 여러가지 재료가 다 다른 재료지만 하나의 비빔밥이 되었잖아요. 그 모두가 모여서 진주성을 만들고 지켜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원정: 다음 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기록 난중일기 편으로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끝. (KBS 역사저널 그날 367회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서 정리).
① 1592년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의 승리와 패배역사, 임진왜란의 3대첩 하면 1.한산도 대첩 2.행주대첩 3. 진주대첩(1차 진주성 전투) 진주대첩은 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를 대첩이라고 얘기하고 논개 얘기는 2차 진주성 전투의 이야기다. 2차 진주성 전투의 결과는 승리가 아니었다. 우리는 2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다. 1592년 일본이 2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이다. 부산을 지나 한양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일본군에 조선의 군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의 병력 일부가 경상남도 진주로 방향을 튼다, 진주성은 조총으로 무장한 2만여 명의 일본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식량과 군수품 보급 때문이다.
② 일본군은 바다를 통해서 올라가는 보급 방식을 택했는데 이순신 때문에 막혀 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남도 해안 바다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이 올 수가 없었다. 식량과 군수품을 제대로 댈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은 전라도다. 바로 진주가 전라도로 들어오는 길목, 반드시 여기를 지나쳐야 되는 것이다. 일본군으로서는 당연히 점령을 해야 되는 곳, 진주 주변에서 주로 활약했던 곽재우나 김면 같은 의병장들이 이쪽 지역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경상우도 관찰사인 김성일이 진주성을 중심으로 관군을 규합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경상도 서쪽 지역과 호남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주를 장악해야 된다. 그것이 육상 보급로를 확보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③ 1592년 1차 진주성 전투 때 일본군 병력이 2만~3만 조선군 병력은 3천8백명, 대충 숫자로 비교해도 거의 10배 차이, 공성과 수성은 장단점이 있었고 수성측에서는 10분의 1이라도 잘만 막으면 막을 수 있다. 서로의 무기가 달랐기 때문에 쉽지는 않은 전투였다. 또 한가지 성의 둘레다. 부산진성의 경우는 둘레가 511 미터 정도, 병사는 3천명이다. 반면에 진주성은 2750미터로 부산진성의 5배가 넘는다. 최소한 만명 이상의 군사가 필요했다. 3800명으로 진주성을 지켜낸 전투를 우리는 대첩이라한다.
④ 진주성은 삼국시대에 백제와 신라의 경계지점에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촉석성 이라고 불렀는데 고려말에 왜구들이 침입이 잦았다. 왜구의 침입을 대비 고려 우왕 5년에 土城을 石城으로 쌓았다. 지금은 고려말에 쌓은 것이다. 진주성은 남쪽으로 남강이 흐르고 서쪽으로는 가파른 山의 형세를 하고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은 그 규모가 지금 보다 3배는 컸다. 천혜의 요새이자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던 진주성, 일본군은 어떻게 공격해 왔을까. 일본군은 대나무 사다리를 가지고 그 위에 멍석같은 것을 깔고 올라온다든지 산대라고 하는 걸 이용해서 성벽에 부쳐가지고 성 위에다 갔다 댔다, 수성군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백성들도 큰 돌을 굴려서 바로 내려치고 가마솥에 물을 끓여서 펄펄 끓는 물을 그대로 들이붓고 500년전 이곳은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던 현장이었다.
⑤ 성벽을 오르려는 일본군과 저지하려는 조선군의 치열한 싸움, 이곳 진주성의 군사와 백성들은 힘을 합쳐 일본군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특히 설화로 내려오는 돌팔매꾼 조씨에 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그의 돌팔매에 이마를 맞고 쓰러진 일본군이 백명에 달했다. 돌팔매만으로 조총을 든 일본군을 두려움에 떨게했다는 조씨 이야기 그 속에서 성을 지켜 내겠다는 백성들의 간절함이 있었다. 진주성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에게 맞선 진주 사람들, 숫적인 열세이긴 했지만 결국 백성들이 힘을 모았기 때문에 이 전투가 가능했다 그런데 민관군 의병 모두를 한데 힘을 모을 수 있도록 한 주인공이 바로 충무공이다. 忠武라는 것은 시호고 충무공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다. 金時敏 장군은 武로써 국가에 忠誠을 다했기 때문에 忠武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시대에 충무라는 시호를 받은 사람은 9명이다. 조선시대 충무 시호를 받은 사람은 이순신, 남이, 김시민을 포함 9명,
⑥ 전투가 엄청 치열하게 전개되고 밤이 되고나서 칠흑 같은 어둠에 하루를 마무리 할 그 즈음 그때 구슬픈 피리소리, 때는 1차 진주성 전투, 그 칠흑 같은 어둠에 이 소리가 들린다. 진주 목사 김시민은 악공을 시켜 가지고 진주 성루에 올라서 바로 이 피리를 불게 했다. 오늘 죽다시피 하고 지금 왔는데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구슬픈 피리소리, 일본 병사들이 막 치열한 내전을 끝내고 이제 좀 쉬나보다 집으로 돌아가나 보다 했는데 갑자기 타향으로 가서 전쟁 치러라 이게 누구를 위한 전쟁이야, 집에 가고 싶다. 김시민 장군은 단순히 이런 피리 소리만 가지고 심리전을 펼친게 아니고 성내에 노약자라든지 여성들에게 남성 복장으로 갈아입혔다. 그럼 밖에서 봤을 때 굉장히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인다, 여유로움을 보임으로써 일본군을 심리적으로 압박을 했다.
⑦ 일본에서 고전 소설이나 가부키 연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일본 장군이 모쿠소롤 물리치는 게 많이 나온다, 모쿠소가 김시민 당시 목사의 일본 발음이다. 일본군에게 김시민 장군은 공포심을 유발했다. 이렇게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지만 안타깝게도 김시민(1554~1592) 장군은 전사한다.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냈기 때문에 조선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 이후인 1593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명나라가 개입한 것이다. 아무런 저지 없이 남쪽으로 퇴각하던 일본군은 1년만에 다시 진주로 진격한다. 2차 진주성 전투의 시작이었다.
⑧ 1593년 명나라까지 개입을 하면서 일본과 명 사이에서 협상이 진행이 된다. 일본이 내놨던 요구조건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4도를 달라는 거다. 황당한 제안으로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본이 무려 9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진주성을 공격한다. 히데요시가 진주성 공격을 명할 때 실패한 성이므로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죽여라. 강화협상을 하면서 일본군은 계속 조선에 주둔 중이고 군량이 필요했고 군량을 확보하려면 호남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또 하나는 강화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강화가 유리하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본이 아직 힘이 있다 라는 사실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⑨ 1차 진주대첩에서는 조선 병력이 3800명이었고 일본군이 2만~3만 병력이었다. 2차 진주성 전투 때 일본군은 거의 10만 대군에 조선군은 1만5천여 명 병력 차이가 엄청나다. 10대 1의 병력차이, 조선군 내부에서는 곽재우와 선거이 같은 경우는 승산이 없으니까 성을 비우자(空城파)로 반면에 진주 목사 서예원과 충청 병마절도사 황진 그리고 의병장 고경명 등은 진주성으로 모인다 (守城파). 힘을 모아서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성을 버리자 라고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1차 진주성 전투는 성내 3800명만 있었던 게 아니고 밖에 약 4천~5천 명 정도의 군사지원이 있었다. 사실 일본군은 1만명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나름대로 조선이 승산이 있었다면 지금 2차 진주성 전투는 외적지원이 전혀 없었다. 1593년 6월 21일 진주성을 어마어마한 일본 병력이 에워싼다. 6월22일 공방전이 벌어진다. 무려 세번에 걸친 공방전이 벌어지다가 새벽 4시 일본군이 물러난다.
⑩ 1593년 6월 23일 일본군은 진주성 주변 해자를 흙으로 메꾸기 시작한다. 해자가 메꿔지면서 거기에다가 높은 언덕을 쌓았다. 그 위에 올라가서 성 안을 향해서 조총을 쏜다. 조선군 역시 성 안에서 언덕을 쌓아 가지고 왜군과 맞선다. 그 다음 날부터 일본군이 전략전술을 바꾼다. 나무로 궤짝을 짜서 수레처럼 만든 다음에 거기다가 생가죽을 입혀서 군사들은 철갑을 입고 성벽으로 접근한다. 날카로운 물건으로 성벽을 뚫고 성벽을 들어내면셔 성을 허물려는 작전이다. 귀갑차(龜甲車)다. 조선병사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위에서 화살을 쏘아도 귀갑차에 막혀서 안 되는 데 안에서는 계속 성벽을 파는 공포의 소리가 들린다.
⑪ 6월 27일 일본군은 귀갑차로 계속해서 성벽을 허문다. 진주성 안에 있는 조선군은 두려웠다. 밖에 다가 SOS를 보낸다. 지원군이라도 오면 적을 분산시킬 수 있다. 명나라 군대가 지원을 오다가 중간에 멈췄다. 진주성을 버렸다. 6월 28일 2차 진주성 전투를 진두 지휘했던 황진 장군이 총에 맞아 전사한다. 타격이 너무 컸다. 황진 장군은 일본군이 호남지역으로 진출할 이치 전투에 참전했고 그때 부상을 당했다. 일본군이 2차 진주성 전투를 공격할 때 당시 황진 장군은 충청 병마절도사였다. 의병장 선거이가 진주는 장군의 관할구역도 아니고 정부의 지원명령도 없었다. 승산도 없으니까 진주성에 가지 말라고 만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성에 들어와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⑫ 우리는 진주성 전투하면 김시민 장군과 황진 장군을 꼭 기억해야 한다. 전략적으로는 후퇴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워낙 진주성에 백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함부로 성을 비울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진주성 안에 있는 민초들을 살려야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황진 장군, 진주 비빔밥은 2차 진주성 전투 때 유래했다고 한다. 식량이 부족해 가지고 임진왜란 마지막 때 소는 귀하니까 말을 잡아가지고 다들 먹였다고 들었다. 2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 사람들은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소를 잡았다. 고기는 육회로 만들어 비빔밥에 넣고 선지와 자투리 고기로는 국을 끓인 것이다. 지금도 진주 사람들의 소울 푸드다. 진주 비빔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소를 잡는 것은 일상적 모습은 결코 아니다. 비장한 마지막 순간이다. 그야말로 최후의 만찬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앞둔 군사들에게 나물만 먹이는 것이 너무 미안해 소를 잡아서 육회로 육회 비빔밥을 만들고 피로 선짓국을 끓여서 군사들에게 제공했다는 것이 진주 비빔밥의 유래다.
⑬ 결사항전하기 직전에 목숨이 내일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각오로 먹었다는 비빔밥 너무 비장해 진다. 그런데 황진 장군이 전사하면서 조선군의 사기가 껶였다. 조선군에게는 불행한 일이 하나 있었다. 연일 계속내리는 비로 지반이 약해져 있었고 일본군이 귀갑차로 성벽을 무너뜨린다.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난입한다. 결국 함락된 진주성 안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백병전은 철저히 숫자 싸움이다. 일본군 9만 병력 대 조선군 1만5천 병력, 조선군들이 싸웠지만 밀리게 되었고 조선군 대부분이 전사한다. 전사한 장수들 중에는 창의사 김천일과 아들 김상건, 경상우병사 최경회 의병장 고종후 최기필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한다.
⑭ 논개가 2차 진주성 전투 후 바로 옆에 있는 로쿠스케 장수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내렸다. 로쿠스케를 죽였다 라는 얘기가 있는데 불명확하다. 논개는 노비다 아니다 관기다 아니다 전사에 따르면 일본군 장수 로쿠스케가 압록강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있고 울산성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얘기도 있고 무사히 살아서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의 영향으로 男尊女卑시대였다.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차별받은 여성, 힘없는 여성들이 일본군과 맞서 싸웠기 때문에 그런 모습들이 논개의 이야기로 전해져 내려 온게 아닌가. 논개는 진주성에서 싸웠던 조선 백성의 하나의 상징이었다. 결사항전 했던 백성들의 상징이다. 1차 진주성 전투도 2차도 끝까지 버텨낸 백성들과 병사들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야 되겠다.
⑮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하면서 진주성은 안전한 곳이다 라는 인식하에 또 왜군이 쳐들어오니까 백성들이 안전한 곳 진주 진주성 안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일본군이 히데요시의 명령, 한 명도 남김없이 죽여라. 이 명령 수행을 위해서 2차 진주성 학살에 나섰다. 학살당한 숫자가 조선측 기록에 6만명, 진주성 백성들은 끔찍한 학살을 당했다. 일본측 기록에 4만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서도 많은 일본인을 죽였다. 그 당시 진주에 인구도 많지 않았다. 광기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일본군이 학살만 했던 게 아니라 납치를 했다. 일본의 고치시에 가면 도진도후(唐人豆腐) 라는 名物 두부가 있다. 이 두부 재료법을 알려준 사람이 朴好仁이다. 이때까지 일본이 두부가 없었던 건 아니고. 일본식 부드러운 두부가 있었는데 조선의 단단한 두부가 박호인에 의해 전파가 되었다. 박호인은 웅천 전투에서 사로 잡혔다는 설도 있고 진주성 전투에서 사로 잡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 보다 충격적인 얘기는 1660년 조선 숙종 때 통신사 제술관으로 일본에 갔던 신유한이 남긴 해유록에 기록되어 있다. 일본 오사카 요도강변에 진주도 라는 데가 있는데 島는 섬도, 임진년에 진주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다. 그 말은 진주성에서 집단적으로 사로 잡힌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주거지다. 일본의 진주島 이야기,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 김시민과 도요토시, 김시민 장군에 의해 히데요시의 1차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히데요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납치해 갔다. 430여년 전 그날 민관군이 힘을 합쳐 지켜낸 진주성, 그날의 아픔과 희생이 있기에 오늘 밝게 빛나는 진주성이 있다. 진주성 전투에서 끝까지 싸웠던 수많은 아무개들, 모두 함께 기억하자.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