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금)
♡물음표보다 느낌표!♡
나는 주로 묻는 쪽이었다,
옷을 고르면서도 "이거 예쁘네. 사야겠다!"라고 말하는 대신 "이거 어때? 나한테 어울려?"라고 물었다.
옷 고르는 정도의 질문이라면 답이 틀리더라도 그냥 스타일 조금 구리면 그만이다.
나는 그런 사소한 것에만 물음표를 띄웠던 게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 필요할 때도 밖을 향해 물었다.
"A가 나을까, B가 나을까?", "갈까, 말까?", "살까, 말까?"
나보다 남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지만 동시에 나에 대한 확신이 모자랐다.
더 자세히 말하면 '나‘에 대해 잘 몰랐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사람인지 말이다.
잘 모르겠으면 연구해야 하는 게 먼저인데, 누구라도 결정을 내려주면 좋다고 생각했다. 타인과 함께 무언가를 정할 때도 대체로 "너는 뭘 먹고 싶어?", "너는 뭘 하고 싶어?라고 묻는 쪽이었다.
흔하디 흔한 식사 메뉴를 정할 때도 먹고 싶은 것을 먼저 꺼내는 일은 드물었다.
기저에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친구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것은 싫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못하는 내 성격과도 연결이 된다.
인간이란 상대를 이해할 때도 나의 범주 안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으레 내가 못 하니까 상대방도 그러겠지 하는 것이다. 무던하고 편안하다는 평판을 들어온 이유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내가 싫어하는 메뉴를 골라도 '그래, 친구가 먹고 싶다는데 같이 먹어주자.’ 라며 기꺼이 상대에게 게 맞춰주는 쪽을 택했다.
상대가 무슨 제안을 해도 "응응. 난 좋아. 다 괜찮아!" 라고 말했지만, 속마음은 A도 B도 완전히 싫은 건 없으니 네가 더 원하는 걸로 내가 맞출게.' 에 가까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A보다는 B가 높은 확률로 좋은 경우가 많았다. 결국 '싫지 않음'과 '좋음'은 다른 영역인 것이다. 아무거나 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명백하게
있었던 게 사실이다.
몇 년 전 직장에서는 4명의 멤버가 고정 점심 메이트로 함께 식사를 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오늘 뭐 먹지?'가 화두지만,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는 메뉴 선정에 애를 먹다가 요일별로 담당을 지정하기로 했다.
해당 요일마다 담당자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르면 나머지는 싫더라도 다 따르자고 합의한 후부터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게 어렵지 않게 되었다.
점심 협약을 맺은 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식당이 선택지로 나오고 매번 새로운 메뉴가 등장하여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때 새삼 깨달았다. 누구나 명확하게 원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어느 때는 배려 한다고 마음을 숨기거나 때로는 유심히 관찰하지 않아 미처 몰랐을 수는 있겠지만, 요즘은 "느낌표!" 를 쓰며 살고 있다.
내 기준에 더 큰 의미를 두고 무엇보다 내가 좋으면 묻지 않고 그냥 한다. 내가 내린 답이 정답이라서가 아니라, 스스로 답을 내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조금 더 편안해졌다.
타인의 선택은 결코 내 마음을 들여다 봐주지 않는다.
- 이지현 에세이, <오늘도 거절을 못했습니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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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2:26]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시편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잠언 21:2]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누가복음 6:45]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디도서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