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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347
3월27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cpbc 오늘 미사**
https://youtu.be/ob32KgKll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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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놀랍고도 위대한 예수님의 인내심과 비폭력 노선!>
유다인들의 반역과 불충실, 배은망덕과 천부당만부당한 작태가 하늘을 찌릅니다. 아마 이미 유다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특급 현상 수배범으로 정해 놓았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현상금까지 걸어놓았을지 모르겠습니다.
유다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세밀히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여차하면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워 체포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치밀한 유다인들은 회당에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여러 말씀들을 세밀하게 분석하며, 법에 저촉되는 내용들이 어떤 것들인지 정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간 예수님께서 어기신 율법 조항들 하나 하나 자료화해서 파일에 담아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버지께서 정해 주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혹시라도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이 그르치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시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조심조심 다니셨습니다. 초막절 축제를 지내시러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습니다. 정녕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대역죄인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남몰래 다니시게?
정말이지 유다인들의 행태는 해도 해도 너무했습니다. 도를 넘어서도 완전히 넘어섰습니다. 세상에 반역도 이런 반역이 어디 있겠습니까? 무례함도 이런 무례함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자칭 선택받은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러 오신 분, 해방시키로 오신 분, 평화와 축복을 주러 오신 메시아였습니다. 그런 예수님 앞에 환호하고 박수치며 크게 환대해도 부족할 판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쳐놓은 덫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예수님을 체포하고 처형시키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런 살기등등한 적대자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다니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안쓰러워 보입니다. 또한 그분의 한없는 인내심과 비폭력 노선이 놀랍고도 위대해 보입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 같았으면, 사악하고 배은망덕한 유다인들 앞에서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권능과 전지전능하심 생각하면, 생각 한번, 말씀 하나로 그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끝내 무력을 행사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지 않는 것에는 당신이 지니신 초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십니다. 유다인들이 아무리 모질게 대하고 압박해와도, 예수님께서는 그저 묵묵히 바라보시고, 기도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폭력이 아니라 논리정연하고 지혜로운 말씀으로 순간 순간 위기를 넘기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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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의 집을 초막으로 지어라>
오늘 복음의 핵심 내용은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초막절 축제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를 당신이 누구에게서 파견받아 오셨는지 명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에게서 오셔서 다시 아버지께로 가시는 분은 이 세상에서 마치 ‘초막’과 같은 집을 짓고 삽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천 년 만 년 살 것처럼 커다란 집을 지으려 합니다. 내가 어떤 집을 짓고 사느냐가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합니다. 더불어 삶의 질도 결정합니다.
초막절은 3~4월의 과월절, 그 이후 50일 뒤의 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 3대 축제입니다. 9~10월에 포도와 올리브 등을 수확하는 시절에 지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축제 때 집 옆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 동안 집을 나와 그 초막에서 지냅니다. 이는 인생이 한 번 왔다 가는 초막과 같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때, 빨리 이동 해야만 해서 초막을 짓고 살아야 했던 시절을 초막절 축제 때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누구나 집을 짓고 삽니다. 그 집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초막과 같은 집을 짓고 살아서 주님께서 부르시면 주저함 없이 떠납니다. 그러나 누구는 아주 커다란 집을 짓고 살아서 그것을 남겨두고 떠나기를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어떤 집을 짓고 살아가고 있는지요?
1972년 성탄절 때 92명이 탄 비행기가 페루 열대 밀림 한가운데로 추락하였습니다. 91명이 사망하였고 유일하게 한 소녀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하늘에서 그녀의 좌석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추측건대 아래로 떨어지면서 위로 솟구치는 강한 상승기류를 만나 떨어지는 속도가 줄었을 것이고 밀림의 나뭇가지들과 의자의 쿠션이 그녀를 보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떨어져서 살아날 확률은 거의 없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율리아네 쾨프케입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팔의 상처를 제외하고는 다친 곳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밀림에서 살아남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시기적으로 나무의 열매가 열릴 때가 아니며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악어나 뱀, 독충과 같은 것들이 득실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무조건 걸었습니다. 수색대가 비행기 추락지점을 찾아내지 못할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감은 맞았습니다. 그녀는 거의 물만 마시며 열흘가량 버텼습니다. 그리고 한 보트를 발견하고 사람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 결국은 구조되었습니다.
이런 기적 같은 경험을 한 그녀가 비행기가 추락하고 있을 때는 어떠한 마음이었을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가 추락하는 동안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을 텐데, 사실 저는 이상하게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참조: 『확신은 어떻게 삶을 움직이는가』, 울리히 슈나벨, 인플루엔셜]
쾨프케는 어렸지만, 초막에 살고 있었습니다. 초막은 마치 하나의 텐트와 같아서 이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두렵지 않은 사람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밀림을 헤맬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어떻게 살아남을까?’보다 살아남아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더 생각했습니다. 나의 인생을 좋은 일에 쓰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중요한 일, 인류와 자연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는 것, 내 인생이 세상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커다란 집을 짓고 사는 사람은 그 집을 짓고 유지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는 대신, 초막을 짓고 사는 사람은 남는 모든 에너지를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쓰려고 합니다. 쾨프케는 페루 밀림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처음은 56만 평을 사서 보호구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최근엔 3900만 평의 보호구역을 설정하여 남미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가장 큰 밀림 보호구역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짓고 사는 집은 초막입니까, 아니면 커다란 저택입니까? 초막을 짓고 사는 사람들은 하루를 마지막 날처럼 살아갑니다.
(유튜브 복음 묵상)
https://m.youtube.com/watch?v=0ACr9CPKEw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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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7,1-2.10.25-30 :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신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겁내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축제 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놀라워했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분을 잡으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26절) 하고 말했던 것이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또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메시아는 유대아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마태 2,6참조)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즉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말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분 홀로 아시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그리스도를 참으로 알고 있는가?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하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해지기로 결정하신 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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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갈등이 점점 커져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이미 사람들에게는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소문을 들어 알고 계셨지만 아직 그분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특히 요한 복음은 이런 과정 곧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과의 논쟁을 길게 전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대화를 통하여 예수님의 신원을 드러냅니다. 그리하여 요한 복음을 읽다 보면 마치 독자에게 말하는 것 같은 내용을 자주 발견합니다.
오늘 대화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기원을 나타냅니다. 요한 복음에서, 하느님에게서 파견되시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은 ‘위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께서 어디에서 오셨는지 안다거나 모른다는 표현은 장소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원과 기원을 나타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일을 마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다시 위로, 하늘로, 하느님께 돌아가십니다.
예루살렘 주민들과의 대화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독자를 향한 호소이자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읽으면서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동의하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는지 말입니다. 이런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조금 더 예수님을 알아 갑니다. 비록 때로는 그 말씀이 불편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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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것>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예수는 나자렛 출신의 목수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그 생각은 맞다.”고 인정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셔서 이 세상에 왔음을 밝히신 말씀인데, ‘나자렛 출신의 목수’ 라는 것은 ‘인간 예수’의 모습일 뿐이고, 그것이 당신의 참 모습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이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자렛 출신의 목수라는 것만 알고 있고, 참 하느님이시며 메시아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라는 말씀은,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밝히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써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라는 말씀은, 당신과 하느님이 하나로 일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그분과 함께 있었고”인데, ‘전에’ 함께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늘’ 함께 있다는 뜻이고, 이 말씀도 당신과 하느님의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을 하느님께서 이 세상으로 보내셨음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은, ‘지식’뿐만 아니라 ‘하나로 일치되어 있는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알다’의 반대말인 ‘모르다.’라는 말은, 관계가 끊어져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알다.’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에 대해 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의 아버지도 알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나의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요한 8,19)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일, 즉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예수님과의 일치 없이는 하느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요한 14,6)>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하느님과의 일치가 시작되는 일입니다. 이 일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면 완성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라는 말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히 일치되어서 사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천국은 그 일치 속에서 사는 곳이고, 연옥은 ‘그 삶’을 희망하고 보속하면서 준비하는 곳이고, 지옥은 하느님, 예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안 죽고 영원히 산다고 해도, 하느님, 예수님과 떨어져 있으면 그것은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알다.’와 ‘모르다.’라는 말을 모두 사용해서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 10,32-33)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이라는 말씀은, “‘나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다.’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면”이라는 뜻이고, 또 이 말씀은 박해를 받고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에서도 자기의 믿음을 증언하고 고백하면서 신앙을 지키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그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정도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심판 때에 예수님께서 그 신앙인의 믿음을 보증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고, 또 그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이라는 말씀은, 공개적으로 자기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박해 때에 죽는 것이 무서워서 자기의 신앙을 부정하고,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이 말은 아무도 그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자기의 신앙을 부정하고 버린 사람은 심판 때에 구원받지 못한다는 경고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중간에 포기하고 중단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안 한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일은(마태 26,69-75), 비록 사람들의 압박 때문에 겁에 질려서 한 일이지만, 그래도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린 일이고,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한 일이고, 예수님을 배반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 사도가 한 일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고, 베드로 사도처럼 위대한 사도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일이기도 하고, 또 베드로 사도가 곧바로 통회함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다는 점에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쳐 주는 교훈이기도 하고,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면 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리공부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고 여러 가지 공부를 많이 하는데, 그렇게 공부만 하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많은 지식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이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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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영수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우리의 삶은 어느 계절인가?>
언젠가 한 농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농부는 딸한테 두 가지를 부탁했습니다. 하나는 산수 점수는 50점 이상 받아오지 말 것, 다른 하나는 제철에 나는 과일을 먹을 것. 딸이 셈이 밝아서 지나치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사람이 되지 않고, 제때 제철을 알며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합니다.
농부는 때를 압니다. 봄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엔 땀을 흘리고 가을엔 거두어들이고 겨울엔 다음 농사를 준비하지요. 씨앗을 뿌리자마자 열매를 거두어들이지 않습니다. 때를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우리 삶에도 계절이 있습니다. 막연한 희망에 기대어 씨앗을 뿌려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잎을 다 떨어뜨리고 온몸으로 추위를 견뎌내는 겨울나무처럼, 혹독하고 모진 상황을 참고 견뎌야 하는 시기도 있습니다. 겨울에 억지로 꽃을 피운들 금방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나무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지요.
지금 우리의 삶은 어느 계절인가요? 입대하자마자 빨리 제대시켜 달라고 청원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는 했습니다. 30개월 만에 남들처럼 병장으로 제대했지요.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나의 때’에 그 간청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나의 때’가 아니라 ‘당신의 때’에 일을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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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조윤제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어떤 사람이 길에서 아주 큰 소리로 웃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그 사람에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냐고 물으니까.. '저기 돌이 보입니까? 저 돌에 벌써 10명이나 걸려 넘어졌습니다' 하고 말하면서 또 웃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이 '남이 잘못되는 게 그렇게 좋으냐고, 이 사람 아주 몹쓸 사람'이라고 말을 하니까 그 사람이 말을 합니다.
'아니,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이 우스운 것이 아니고, 자신이 넘어지고 난 뒤에 뒷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치워놓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 너무 우스워서 웃는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걸림돌을 만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자신들이 어설프게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걸림돌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터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 사실 다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다"는 그 말씀을 다 믿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나에게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데에 어떤 걸림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게으름, 세상에 대한 걱정, 부족한 믿음 이런 것들이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런 걸림돌은 나를 위해서도 또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치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 그 길에 걸림돌이 있다면 걷어내야 나도 내 이웃도 함께 그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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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한만옥 토마스 신부님]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지만 예수님은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가르치셨다. 그래서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예수님을 혹시 메시아로 알아 죽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메시아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자기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알고 있다며 메시아가 아닐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우리는 사람을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먼저 외모를 보고 출신 성분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다.
일단 잘생겼거나 예쁘게 생겼으면 먼저 호감을 갖게 된다. 그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알게 모르게 외모지상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잘생기지 못하면 취직하기도 어렵단다. 그래서 유명한 성형외과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성형관광을 오기도 한단다. 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이지 않다. 심한 흉터가 있거나 장애가 있어서 성형수술로 모습이 나아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어떤 면에선 해야만 한다.
그러나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그래서 너도 나도 성형을 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또 어떤 집안 출신인지, 재산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학벌은 어떤지, 직업이 무엇인지 등의 외적인 기준으로만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지만, 자주 외적인 조건들을 따지는 함정에 빠진다. 먼저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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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코로나 바이러스는 미국의 한인 공동체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모임과 사순 특강이 취소되었습니다. 사순시기의 미사도 중단 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결정입니다. 바이러스는 사람들의 건강에 분명 영향을 주었습니다. 발열, 기침, 호흡곤란이 수반되기도 하고, 기저 질환이 있는 사람에게는 심각한 증상을 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바이러스 확진 판정을 받았어도 대부분 치유되기도 했습니다. 의료진의 적절한 도움을 받으면 대부분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몸에 영향을 주는 바이러스는 백신이 개발되고, 치료를 받으면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마음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걱정, 공포,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함께하는 기쁨은 함께하는 불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마스크를 독점하여 이익을 챙기려 하기도 했습니다. 협조하고 공개하기 보다는 속이고 감추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국가적인 재난을 정쟁의 도구로 삼기도 했습니다. 불신, 이기주의, 단절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또 다른 바이러스가 되었습니다. 바이러스는 지역, 이념, 세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역, 이념, 세대, 성별을 초월하여 바이러스에 대처해야 합니다.
바이러스 때문에 볼 수 있었던 따뜻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의료진이 있습니다.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서 법회, 예배, 미사를 중단한 종교계의 협조가 있었습니다. 모임은 없었지만 바이러스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의료진과 질병본부 관계자를 위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자가 격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이러스로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해 성금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사스, 조류독감, 메르스, 코로나19처럼 바이러스는 이름을 바꾸어서 찾아올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모르고 지나갔지만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를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통수단의 발달과 국제 무역의 발달은 지구촌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런 그물망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바이러스 확산의 통로가 되기도 합니다. 계절이 바뀌면 찾아오는 감기, 독감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듯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해서도 과도한 조치는 필요하지만 과민한 반응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연대하고, 협력하면 이 또한 모두 지나갈 것입니다.
신부님들과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신발을 벗었는데 냄새가 심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하루 종일 신자들과 만나면서 열심히 일을 했기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해하시는 신부님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희망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시고, 영혼이 짓밟힌 이를 구원해 주신다. 의인이 몹시 불행할지라도, 주님은 그 모든 불행에서 구하시리라.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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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반성>
요한 7,1-2.10.25-30 (저분이 그리스도이신가)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성>
그분은
나의 무엇
뿐만 아니라
나를 아시지
나는
그분의 무엇
만이 아니라
그분을 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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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사냥꾼이 숲속에서 사냥을 하다가 여우를 보았습니다. 여우는 네 다리가 모두 성치 못해 아예 움직일 수 없는 불구였습니다. 그러나 야윈 모습은 커녕 털에 윤기가 흘러 아름답기까지 했습니다.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저토록 건강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지 궁금해진 사냥꾼은 멀찍이 떨어져서 여우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호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와서는 여우의 머리맡에 사냥한 토끼를 던져두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사냥꾼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섭리구나!’
그날부터 사냥꾼은 사냥을 하지 않았습니다. 네 다리를 움직일 수 없는 여우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시거늘 자기 역시 그와 같은 보살핌을 받으리라는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는 사냥꾼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결국 아무 것도 먹지 못해 기운이 빠진 사냥꾼은 자리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너무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존재조차 모르는 숲속의 여우는 돌보시면서 당신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저 같은 자녀는 돌보아주시지 않는다니요!”
그러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숲속에서 여우와 호랑이를 보게 한 것은 나의 섭리를 깨닫고 그 호랑이와 같은 사람이 되라는 것이었다. 너는 어째서 여우가 되려 하느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려하는 예루살렘의 주민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신앙적으로 열심 했던 사람들입니다. 율법에 규정된 내용들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구약의 계명 중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한다는 규정에 따라 율법 해석가들은 이것을 39가지 조목으로 세분하여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규율을 자세히 보면 안식일에는 경작이나 추수, 물건을 나르는 일, 1,250m 이상을 걷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나무를 하고, 불을 피우는 일, 환자를 돌보거나 덫에 걸린 다친 동물들을 꺼내어 치료하는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 기간 중 먹을 음식을 미리 만들어야 했습니다. 장사를 해서도 안 되고 육체 노동도 금지했으며 심지어 불을 지피는 일이나 음식을 만드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규정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살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오직 율법을 통해서만,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하느님을 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편협한 생각만을 내세워 주님을 바라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처럼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지금껏 지켜온 틀을 모두 부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이전의 그들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며 누구보다 하느님을 잘 알고 그분과 가까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젊은 청년이 자기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고 선포하는 사실은 결국 지금까지 그들이 누려운 안정된 생활을 불안하게 하는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이러한 선포를 하시며 보잘 것 없는 이들을 도와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이유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바라보고 깨달아 호랑이와 같은 모습으로 지친 여우들을 보살피라는 것인데 그저 자신들은 여우와 같은 입장으로 주저앉아있으니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 지혜서의 악인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겹칩니다. 악인들은 의인을 바라보며 수군댑니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지혜서는 이에 대해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잘 알아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안다고, 알고 싶다고 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틀에 갇혀서 사냥꾼의 모습처럼 내가 필요한 만큼만 그분을 알려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불순하고 모자란 우리들의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단순히 성당에 오래 다녔다고 해서, 단체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해서 예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 안에서 예수님을 마음으로 만나려 노력하고, 희생과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며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받기만 하는 여우가 되길 원하지 않으시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며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호랑이와 같은 모습이길 바라십니다.
오늘 하루 예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분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참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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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즐겁고 당당하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넘어 막 마을로 가려다가 너무나 밝은 얼굴로 뛰어노는 꼬마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공동묘지 근처인데 너는 무섭지 않니?”라고 묻자, 꼬마는 “아뇨!”라고 대답하면서 오히려 그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왜, 무섭지 않지?”라고 다시 묻자, 꼬마는 활짝 웃으면서 말합니다.
“우리 아빠가 이 공동묘지 관리인이거든요.”
우리 인생의 관리인은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자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소관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의 당당함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당당함을 보게 됩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이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믿음을 두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알기에, 어떤 처지에서든지 두려움이 없이 당당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알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분이 어떤 일로 자신에게 벌을 주는지 몰라 항상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특히, 아버지께 믿음을 두지 않은 사람은 믿음을 잃었기에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을 못 견디고 힘들어합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요즘 예수님께서 수십 번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시다.”
왜 보내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중재자이십니다. 한 마디로 “너희는 혼자 스스로 살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 아들이 필요한 존재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내 아들을 받아들여 혼자 살지 말고 하느님과 연결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오 28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제 저는 “믿음이란 것”이 “두려움을 없애주는 특효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죽음의 때도 하느님께서 결정하시고, 죽은 뒤에도 “가야 할 곳”, 즉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라는 것도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뭐가 두렵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제1독서 지혜서를 보면, 악인들은 옳지 못한 생각으로 저희끼리 말합니다. “의인들의 종말이 행복하다고 큰소리치고, 의인이 하느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하니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러니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 자기 말로 하느님께서 돌보신다고 하니,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다. 하지만, 악인들의 생각이 틀렸다.”라고 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니,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도,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가까이하신다. 주님의 얼굴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맞서, 그들의 기억을 세상에서 지우려 하시네. 의인들이 울부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해 주셨네.” 아멘.
죽으면 보잘것없이 썩어질 사람의 머리와 몸뚱이가 귀하다 함은? 좋고 선한 일을 하고 예의범절이 바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나 고양이나 말 대가리보다 못하게 되는 것임입니다. 이제 죽으면 보잘것없이 썩어질 것을, 거룩하고 귀하게 만들어가는 의인의 길, 즉 하느님의 뜻을 따라 걷는 믿음의 길이 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거룩한 삶을 살고 흠 없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고운님들의 삶을 책임지시고 붙드시어 이 세상에서 삶이 다하는 그 날에 꼭 안아주시며 고운님들을 맞아 주실 것입니다.
저 두레박 사제도 하느님의 뜻을 따라 몸과 마음이 아픈 님들과 간호하는 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와 함께 거룩한 삶을 살고 흠 없는 영혼으로 살아서 당신이 원하시는 적당한 때에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고 흠 없는 영혼으로 살아가는 고운님들은 즐겁고 당당하게 내려갈 줄 알며, 마음이 부서진 이도 살펴주시는 주님 그늘 밑에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받으며 한없이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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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449)
♧♧ 시편 78편 33절…"이에 그분께서는 그들의 날수를 단숨에, 그들의 햇수를 공포 속에 스러지게 하셨다."
* 그분께서는 그들의 날수를 단숨에...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으로 인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헤매야 했습니다. 이 40년 동안 백성들이 한 발자국도 가나안 땅을 밟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에서 탈출에서 나온 이들 중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없었음을 생각해볼 때, 백성들이 광야에서 보낸 세월은 참으로 헛된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저희 역시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느님께 계속적으로 불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유익하지 못할 것입니다.
* 그들의 햇수를 공포 속에 스러지게 하셨다.
여기서 ‘공포...’라는 ‘두렵다’ ‘떨다’ ‘깜짝 놀라다’ ‘전율’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전혀 평안이 없는 삶이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물론 이는 백성들이 하느님께 계속적으로 죄를 지은 결과 하느님의 진노 아래에 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시편 78편 34절…
"그들을 죽이실 제야 그들은 그분을 찾고 돌이켜 하느님을 찾아..."
* 그들을 죽이실 제야...
‘죽음’의 형벌은 더 이상 하느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하느님의 가장 큰 진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남은 이들에게 경계거리로 삼도록 하시기 위해 악하고 완고하기 그지없는 자들을 이러한 죽음의 형벌에 처하게도 하셨습니다(31절. 참조).
* 그들은 그분을 찾고 돌이켜 하느님을 찾아...
불신앙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남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의 잘못을 하느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민수기 11장 1-3절. 참조) 그러나 이 회개는 단순히 눈앞에 닥친 재앙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상황이 호전되자 백성들은 또 다시 죄를 저지르곤 하였습니다.(36-37절. 참조) 이처럼 백성들의 범죄와 하느님의 심판, 백성들의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하심의 끝없는 반복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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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중세 때 어느 수도원에서는 기도 중간에 수사 한 명씩 나와서 영적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 수사님은 이 시간이 너무나도 힘들었습니다. 말재주가 없었고, 특히 남들 앞에 서면 떨려서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원장 수사님을 찾아가서 다른 수사님께 방해가 될 뿐이니 자신은 빼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원장 수사님은 이럴수록 더 많이 해야 한다며 오히려 세 번 연속으로 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첫 번째 나눔 때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십니까?”라고 말합니다. 모든 수사는 고개를 흔들며 모른다고 표시했지요. 그러자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분명히 아십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여러분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열심히 사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 날, 전날과 같이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수사들은 전날과 달리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여러분이 모두 아는데 제가 무슨 말을 더 드리겠습니까? 그저 아는 대로 실천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나눔 때, “제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십니까?”라고 또 묻습니다. 이에 절반은 고개를 안다고 끄덕이고 나머지는 고개를 모른다고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반반씩이니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모르는 것도, 아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주면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살지 못하는 우리이고, 잘 모르는 사람이 오히려 아는 척하며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과거 예수님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나자렛에서 살았다는 것은 알지만 베들레헴에 대해서나 그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신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아버지에 대해서도 참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정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두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잘못 아는 것은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잘못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음으로 몰았던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맡기면서 열심히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이 마치 하느님의 뜻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늘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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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을 부린다.>
‘진상을 부린다. 진상을 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운 짓을 할 때 많이 쓰는 말이지요.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진상이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사람, 다른 이에 대한 부정적인 판단을 늘어놓는 사람, 불같이 화를 자주 내면서도 자신은 뒤끝이 없다고 하는 사람, 그 밖에도 많은 진상 신앙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기란 정말로 어렵습니다. 누구의 말처럼 신앙의 힘으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상 신앙인들은 자신이 진상이라는 사실을 대부분 모릅니다. 이렇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피곤한 진상 신앙인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앞서 말했듯이 신앙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면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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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의롭고 신비롭고 거룩한 삶>
-하느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의 삶-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예화를 나누며 강론을 시작합니다. 사순시기,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된 팬데믹 코로나19 사태가 성삼일에 이어 부활대축일은 물론 당분간 그 부정적 여파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참으로 가톨릭 신자뿐 아니라 전세계인의 회개를 촉구하는 ‘정화淨化의 시기’, 사순시기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무지와 탐욕, 오만에 대한, 인간 스스로 자초한 재앙이요 하느님 징벌의 표지처럼 생각됩니다만 이 안에도 하느님 섭리의 손길이 미치고 있음을 봅니다. 코로나 앞에는 그 가공할 핵무기와 첨단무기도 속수무책, 무용지물입니다. 기후위기, 미세먼지, 자연 및 동물착취등 병들어가는 자연의 몸부림처럼 들립니다. 자연이 병들고 망가지면 인간도 병들고 망가지기 마련입니다. 한번 병들고 망가진 자연의 회복이 요원하듯 인간도 그러합니다. 시편 2장의 몇구절도 오늘 날 힘센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주시는 말씀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시도다/주께서 저들을 비웃으시도다.
임금들아, 바야흐로 깨달으라/땅을 다스리는 자들아, 익히배워라.
두려움으로 주님 섬기라/기뻐하며 두려워하며 예배드리라”-
코로나 사태를 대하면서 대한민국을 새로 발견하게 됩니다. 온갖 명암이 교차하는 한국이지만 진짜 선진국은 한국임을 깨닫게 됩니다. 얼마전 어느 자매님이 마스크를 사놓고 잊어 버려 급히 가보니 약국 탁자 위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에 한국인들의 정직함에 감격했다 합니다.
사재기가 극성한 선진국들과는 달리 한국은 모두가 질서있게 진행됩니다. 어제 교황님은 강론시 “주여, 우리가 우리의 두려움을 이기게 도와 주십시오.” 기도하셨지만 한국인은 용감하고 민첩하게 이미 두려움을 정복했습니다. 코로나 사태에 가장 안전한 지역은 한국이라 하여 교포, 유학생들이 고국을 향해 끊임없이 줄을 잇고 있으며 세계 유수한 지도자들이 한국에서 배우고 있으며 세계인들 역시 경탄의 눈길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늘이 돕는다”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덧붙여 ‘하늘이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함이 좋을 것입니다. 좌우간 회개한 우리들에게는 코로나 사태는 전화위복이요, 재앙이자 축복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하여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로 최선을 다할 때 하늘이, 하느님이 돕습니다. 정부가 온힘을 다해도 못잡든 아파트갑을 코로나가 잡고 있다고 합니다. 예전 모 대선 후보의 ’사람이 먼저다’라는 슬로건이 인상적이었는데 이번 모 정당의 ‘국민을 지킵니다’라는 선거 슬로건도 감동적입니다.
모든 재앙과 불행의 근원은 하느님을 잊은 무지의 망각에서 기인합니다. 거룩함과 신비의 하느님을 잊은 자업자득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하느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잊은 탓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하느님을 잊을 때, 하느님 뿌리와 전통에서 단절될 때, 식욕만 추구하는, 성욕만 추구하는 좀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뿌리와 전통에서의 단절이 얼마나 큰 재앙이요 불행인지요!
주름살이 쌓여가면서 덕도 지혜도 쌓여가야 하는데 죄악과 악습과 탐욕만 쌓여간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요. 나이만 먹었지 철부지 노인들도 참 많은 세상입니다. 요즘 ‘텔레그램 n번방 성착취’ 사건으로 세상이 참 시끄럽습니다. 혹자는 ‘사이버 강간의 왕국’이라 칭하며 한 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는 “n번방의 남성성, 존재하지 않는 ‘허기虛飢’를 쫓는 좀비와 같다”며 텔레그램 박사방의 관전자 26만명을 좀비라고 표현했습니다.
참으로 식욕과 성욕의 허기虛飢를 하느님을 찾는, 진리를 찾는 열정으로 잘 승화하지 못할 때 누구나의 가능성이 좀비입니다. 요즘 제 관심은 최대한 이웃에 짐이 되지 않고 떠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며 짐이 아닌 선물같은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식사후 세기시 요셉 학사님이 선물한 잔잔한 감동도 잊지 못합니다.
슬며시 앞치마를 한 후 제자리를 차지하며 ‘제가 고무장갑도 꼈으니 제가 하겠습니다.’ 말하며 세기를 대신 해줬습니다. 순간, ‘사람이 됐다. 사제될 자격이 있다’하는 생각이 스치듯 지나갔습니다. 그 무엇보다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것이, 가장 상식적인 것이 ‘사람이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마다 50대의 자매들까지 자리를 양보할 때는 참 착잡한 기분입니다만 그럴수록 남은 인생 품위있게 살아야 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하게 됩니다.
결론은 하느님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또 하나하나의 임마누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을 자각할 때 두려움이요 부끄러움입니다. 하느님을 닮아갈 때 신비롭고 거룩한 삶입니다. 이젠 좋은 신자가 아니라 신비를 간직한 거룩한 신자가, 즉 신비가이자 성자같은 신자가 절실한 시대라 합니다. 어제 결혼을 앞두고 초대장까지 준비했는데 파혼당한 40대 초반의 불쌍한 형제를 위로하고 격려한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듣고 보니 자기 탓은 하나도 없었던 훌륭한 공무원 형제였습니다.
“훌륭하게 살았네요. 됐습니다. 하느님이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힘들어도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고 끝까지, 꿋꿋이, 한결같이, 버텨내고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찾는 자에게 하느님이 친히 길이, 희망이 되어 주십니다. 요즘 교황님의 강론에서 주목되는 말마디가 신비입니다. 성 요셉 대축일 강론도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요셉은 믿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살았던 분이다. 복음은 요셉이 꿈중에 주님의 천사와 대화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가 신비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통제할 수 없는 신비에 들어갔다는 그것이 바로 요셉의 거룩함이다.---교회가 신비에 들어가는 가능성을 잃을 때 교회는 흠숭할 능력을 잃는다. 흠숭은 사람이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갈 때 일어난다.
신비에 들어가지 못하는 교회는, 신자는, 규칙과 법규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지라도 반쪽일뿐이다.---신비에 들어가는 것은 꿈꾸는 것이 아니다. 신비는 구체적이다. 신비에 들어가는 것은 분명코 말하건데 흠숭하는 것이다. 신비에 들어가는 것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다, 우리 하느님의 현존안에, 신비안에 들어갈 때 흠숭한다.“
또 교황님은 성모영보대축일 강론시, “우리는 신비 앞에 있다”, 말씀하신후 다시 복음을 읽으신후, “그것은 신비다(It’s a mystery)”로 강론을 끝내셨다 합니다.
하여 요셉은 영원한 배경이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참으로 깊었던 의인이자 성자이자 신비가라 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거룩한 전례의 신비에 참여하여 흠숭할 때 거룩한 삶입니다. 악인들이 결코 알 수 없는 의인들의 이런 신비롭고 거룩한 삶입니다. 지혜서 말씀 그대로입니다.
“악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무지의 사람들에 기생하는 악이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악인이, 좀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악인들에 에워 싸인 고립무원의 처지이지만 참으로 혼자가 아니라 신비롭고 거룩한 아버지를 배경한 의인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 말씀이 배경이신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깊은 일치 관계를 보여줍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배경한, 하느님이 함께 계신 임마누엘입니다. 하느님을 알아 닮아갈수록 신비의 사람, 거룩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되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에 온 목적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아버지와 일치된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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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728-29) 이 소리를 듣고 유다인들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랜 역사 안에서 한 분이신 하느님을 섬겨왔고 메시아를 기다려 왔는데 나자렛 촌놈인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습니다. 분노와 시기 질투가 극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은 촌뜨기로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간다 할지라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말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인 확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 한 번의 기도가 모든 것은 해결하는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절망을 극복하는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개천에서 용난다’ 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태어났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예수님상’을 올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나자렛 출신이라 해도 하느님과 함께하면 세상을 구원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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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앎"을 향합니다.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요한 7,10)
일찍이 형제들이 예수님께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요한 7,4) 하고 종용한 바 있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홀로 조용히 올라가십니다. 형제들도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임을 그분은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예루살렘 주민들이 설왕설래 합니다. 예수님 인격이나 하시는 일로 보아 진짜 메시아실 것도 같지만, 그분의 출신 성분이 걸립니다. 어느 지역 출신, 어느 지파 누구의 아들, 직업과 배움과 재산 등등 어느 것 하나 영광의 '메시아'스러운 점이 없어 보이니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착각합니다.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이 그 존재의 전부라고 여기는 짧고 경박스런 몰이해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예수님 덕분에 체험하고 놀라고 기뻤던 모든 경이와 신비의 순간은 잊고, 섣부른 "앎"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태도를 곁눈질하며 진정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권력자의 판단에 숟가락을 얹는 것만큼 안전한 앎은 없으니까요.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29)
예수님께서 폭탄 발언을 하십니다.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 유다인들이 하느님으로 섬기며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그분을 "너희는 모르고 나는 안다"고 직접적으로 밝히신 것입니다.
보내신 분과 파견된 이는 이처럼 상호적 앎으로 충만하십니다. 서로를 온전히 아십니다. 앎이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드님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목숨을 겁니다. 아버지를 알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아드님의 뜻을 무한히 지지하시며 모든 것을 맡기십니다. 아드님을 알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 삼위 하느님 안에서 일치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무지가 끼어들 구석은 없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의인에게 올가미를 놓는 악인들의 생각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녔다고 공언하며 자신을 주님의 자식이라 부른다."(지혜 2,13)
악인들이 의인을 못마땅해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그는 알고 자기들은 모른다는 점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생각을 가만히 들어보면 의인에 대해 악인들이 아는 바는 거짓과 열등감과 악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지만 거짓과 열등감과 악의를 지니고서는 어떠한 "앎"에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앎"이란 인간이 불완전하게나마 지니고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상성이기 때문입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지혜 2,12)
"그를 모욕과 고통으로 시험해 보자."(지혜 2,19)
"그에게 수치스러운 죽음을 내리자."(지혜 2,20)
악인들의 음흉한 모략은 복음 속 유다인들의 속마음을 복선처럼 드러냅니다.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동안 그들은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접해 왔지요. 이제 그 악의 칼끝이 예수님을 겨누고 있습니다. 인간의 섣부른 앎은 하느님까지 죽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제가 좀 아는데요."
살면서 간혹 듣기도 하고 또 말하기도 했던 내용이지요. 사실 안다는 것은 무한대의 층위와 폭과 깊이를 지닙니다. 누구를 안다는 것은, 그래서 엄청난 무게의 책임을 내포합니다.
하느님은 모두 아십니다. 그분이 완전한 앎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성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선물이고, 미약하나마 그분을 닮은 구석입니다. 그런 전지하신 하느님이 바로 사랑이시지요.
그러니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그를 안다"는 말 안에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스며있지 않다면 그냥 침묵하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내 속으로 낳았어도 도무지 모르겠어", "알다가도 모르겠어" 하는 말이 오히려 진실이고, 스스로의 무지를 아는 지혜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우리는 앎과 무지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미천한 우리에게 겸손히 당신을 드러내시다가도 이내 얼굴을 감추시고, 우리는 느닷없는 앎에 전율하다가 다시 무지의 어둠으로 곤두박질치며 더 짙고 깊은 갈망으로 허우적댑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목말라하며 이 영적 파도타기 안에서 꿋꿋이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지혜 2,22)을 기다리며 앞으로 나아갑시다. 언젠가 주님께서 두 팔 벌려 우리를 맞으시며 "나는 너를 안단다" 하실 겁니다. 그때 우리도 아는 그분 품으로 거리낌없이 뛰어듭시다. 말씀으로 통교해온 그분과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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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창공을 나름은 자연의 파스카의 신비다.
나무 잎을 먹고 자란 애벌레를 보면 징그럽다. 그것을 보거나 누구나 자기 옷이나 몸에 붙어 있으면 소스라친다. 그런 추물이 자신을 변신하기 위해 자신 온 에너지를 소모하여 생명의 진액으로 실을 자아내어 고치를 만들어 나무 가지에 매달려 비바람과 폭풍우를 이겨내는 인고의 생을 고치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송장처럼 죽음의 동굴에 갇힌다. 창공을 날기 위한 비상의 자유함의 꿈을 꾸며 … ㅡ
♣실험실에서 고치 속에서 나비가 고치를 뚫고 나올 때 사람이 도와 쉽게 나오도록 고치를 찢어주면 나비는 죽는다. 고치를 뚫고 나오려고 안간 힘을 쓰면서 날개에 근육이 커져야 하는데 사람이 인위적으로 가엾은 생각으로 밖에서 고치를 찢어주면 날개에 탈력이 생기지 않아 비실비실하다 결국 나오기는 쉽게 하지만 날지 못하고 죽고 만다고 합니다.
인생에 고난을 뚫고 나가야 생명이 생기를 얻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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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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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이 다가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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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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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왠지 거슬려>
"그들은 예수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
살다보면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가시게 하는 상대가 어떤 모습이고
무엇때문에 내가 피하고 싶은지
마음을 잘 보아야 합니다.
선한 자극으로 나를 괴롭히는 상대는
그것이 잔소리나 쌘소리로 나오든
버겁지만 내게 특별한 선물이니 가까이 합시다.
자신의 약함으로 상대를 괴롭히는 사람,
인내하며 견디거나 너무 심하면
정신 차리게 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왠지 거슬린다' 왜 그럴까?
"감정을 뒤로하고 관찰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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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3.27.금.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 30)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때만을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시는
주님의 때입니다.
신앙은
주님의 때에
눈을 뜨는
믿음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시간 또한
치유의 때가
기다리고 있음을
믿습니다.
가장 알맞은 때에
목련과 산수유가
피어납니다.
지금이 가장
알맞은 봄꽃의
때입니다.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음을 믿습니다.
지나가는
시간속에서
주님께서
일하시는 주님의
때를 진실로
믿습니다.
주님의 때가
이루어지기위해
나의 때를 먼저
내려놓는 사순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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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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