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가재도구 중에서 가위는 좀 특별하다는 생각이 든다. 집안 곳곳에서 식구마다 자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독립된 한 생명체로 살아가기 위해 몸의 일부인 탯줄을 자르는 것에서부터 가위와의 인연은 시작된다. 물론 옛날에는 가위 대신에 소독되지 않은 낫이나 칼을 사용하여 신생아 파상풍에 걸리는 경우도 많아서 방송사에서는 계몽 방송을 자주 하기도 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가위는 삼국시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데, 옷감을 짜서 직접 만들어 입던 우리 조상의 반짇고리 속에서의 가위는 가히 규방의 벗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는 가위가 생업의 수단인 경우도 적지 않다. 이발사와 미용사가 그러하고 재단사와 엿장수가 그렇다. 식당에 가면 가위를 들고 나타나는 아가씨들이 무섭기도 하다. 냉면가닥이나 포기김치를 잘라주기도 하고, 고기를 구우며 연신 가위질을 해댄다.
우리는 이 가위를 든 사람 앞에서는 꼼짝 못 하거나 그들에게 잘 보이도록 노력하면 하였지 비위를 거슬려서는 안 될 것이다. 작지만 날렵한 이용가위를 든 이발사 앞에서 부동자세로 가운 속에다 손을 감춘 채 마주 잡고 앉아 있어야 한다. 쉴 새 없이 숙련된 가위 놀림 덕분에 단정한 머리가 되기도 하고 능숙한 재단사의 가위질에 따라 멋진 옷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또한 아무리 고물을 많이 갖다 줘도 엿을 많이 주고 적게 주고는 엿장수 맘대로였다. 엿장수의 투박한 가위는 소리도 커서 듣기만 하여도 그가 왔음을 안다.
어느 날 남자 미용사가 TV에 출현하였다. 가위 하나로 밥벌이를 시작하여 그 가위로 명성을 얻고 성공하였는데, 자기의 직업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가위 사랑은 대단하여서 많은 가위를 갖고 있었다. 크고 작은 것에서부터 모양이 특이한 것과 자르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달리 쓰이는 가위가 아주 많았다.
힘을 겨루지 않고 쉽게 승자나 어떤 일의 순서를 정할 때 '가위, 바위, 보'라는 것을 하게 된다. 역시 가위는 보자기를 잘라버려 파기할 수 있으므로 승자가 되지만 결국 바위에게는 힘을 겨뤄보지도 못 하고 만다. 가위는 어떤 것을 파괴시킬 뿐 아니라 새로운 창조와 완성을 위하여 직접 발벗고 나서는 용기가 있어 좋다. 그러나 아무리 좋고 편리한 기구라 할지라도 그걸 잘못 사용하면 뜻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비단 가위뿐만 아니라 모든 경우에 해당하는 이치다. 오래 전 수술 후에 병상에 누워 수술용 가위가 몸에 들어 있으면 어쩌나 하고 필요 없는 걱정도 하였는데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틀린 것을 나타내거나 글자의 빠진 곳을 메울 때 쓰는 부호 'X'의 이름은 '가새표'인데도 많은 사람들은 가위의 모양과 닮아서인지 가위표라 부르고 있다.
우리 집에는 몇 개의 가위가 있다. 시아버님께서 선물해 주신 재단용 가위가 있고, 옷감의 끝처리를 위한 핑킹가위와 아이들의 공작용 가위, 부엌에서 쓰는 가위, 꽃꽂이용 가위와 반짇고리 속의 바느질용 가위, 두루두루 쓰는 몇 개의 가위가 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아끼는 가위가 하나 있는데 사연인즉 이러하다.
이사를 위해 집을 팔아야 했다. 때는 한겨울이고 부동산 실명제가 발표된 직후라서인지 금방 집이 팔릴 것으로 믿었던 내게 겨울은 길고 기다림은 기약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사기로 한 집의 벽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니 까닭모를 종이가 몇군데 붙어 있었다. 종이를 살짝 떼어내니 부적이 숨어 있었다. 나는 바로 저것이로구나 생각을 하고 잘 아는 스님을 찾아 나섰다. 스님께서는 부적을 쓸 것이 아니라 평소에 자주 쓰는 가위를 대문 앞에 잘 보이게 걸어 놓으라시며, 일주일 안에 좋은 소식이 있을테니 기다려보라고 하셨다. 가위눌린다는 얘긴 들었어도 가위가 그런 효험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이어서 흥미로웠다. 재단용 가위를 걸 수도 없고 꽃가위를 걸 수도 없어 반짇고리에 넣어 두고 쓰는 가위를 골랐다. 현관문의 위쪽 벽에 무엇이라도 싹둑 잘라낼 것 같은 예리한 모양새를 갖춰 테이프로 고정시켰다. 대문이 있으면 가위를 걸어두는데 별 어려움이 없겠지만 아파트의 현관문은 좀 달랐다.
"흥 무슨 가위가 집을 팔리게 한담, 그러면 집 못 팔 사람 하나도 없게?" 라고 했을 내가 온갖 정성스런 마음으로 우리 집 가위 신에게 빌었다. 일주일 후 거짓말 같이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더니 또 다른 사람이 와서는 동시에 집을 계약하겠다고 했다. 일이 안 될 때는 불행조차 겹쳐 온다더니 이건 또 무엇인가. 간발의 차로 일찍 도착한 사람에게 나의 정든 집을 넘겨 주게 되었다.
역시 가위는 해냈다. 꽉 잡고 놓지 않으며 일단 잡으면 센 힘으로 잘라 내어 무엇인가를 이뤄 내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애타는 주인의 새로운 생활을 위해 한 몫을 해준 고마운 가위에게 나는 오늘 조선조의 어느 아낙이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에서 붙여줬던 그 이름에 이 시대에 걸맞는 新자를 붙여 신교두각시란 이름을 붙여 주고 싶은 것이다.
이 비법은 아무에게도 일러주려 하지 않았으되 이 글을 읽어 준 사람들에게만 살짝 공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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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밤
황순원의 '소나기'를 원두막에 누워서 읽고 있었다. 원두막의 문을 받쳐 세웠던 막대기가 쓰러지면서 한쪽 문이 닫히더니 빗소리가 천둥을 몰고 왔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밭을 매고 계시던 어머니와 아버지가 원두막 밑에 와 계셨다. "저 쪽이 훤한 걸 보면 지나가는 비여, 이렇게 한줄금 내리면 시원허지, 아주 자알 오는구먼"
어머니의 삼베 적삼은 소나기를 맞지 않았을 때도 땀에 흠뻑 젖어 있곤 했었다.
"얘, 조금 있다가 집에 갈 때 밭둑을 살펴서 애호박좀 따오구 풋고추도 몇 개 따오렴, 오늘 저녁엔 감자랑 썰어 넣구 칼국수좀 해먹어야겠다."
남쪽 하늘에 무지개가 서더니 날이 들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싶게 뜨거운 태양은 다시 내리쬐었다. 호박 넝쿨을 요리조리 젖혀보니 연둣빛 애호박이 반지르르 윤이 났다. 텃밭의 가지가 보랏빛 꽃을 입에 물고 주렁 주렁, 애오이가 살포시 웃고 있었다. 한아름 따서 안고 집으로 왔다.
어느새 어머니는 밀가루 반죽을 하고 계셨고, 마당에 걸어 놓은 양은 솥에 멸칫국물을 만들고 계셨다. 방망이로 반죽덩이를 밀어 보았다. 어머니는 수제비를 좋아하셨지만 나는 칼국수가 더 좋았다. 눅눅한 보릿짚을 태우기란 정말 눈물나는 일이었다. 땀으로 찌든 몸은 끈적 거리고 보릿짚 속의 습기와 연기는 여름을 길게 느껴지게 했다. 통밀가루의 구수한 맛과 열무김치의 신맛. 우리는 그렇게 넉넉한 저녁을 먹었다. 남폿불 밑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노라면 아버지는 바깥 마당에 밀대방석을 펴 놓으셨다. 아침녘에 베어다 놓은 풀에 쑥을 덮어 모깃불을 놓으시는 동안 우물가에서 엄마와 나는 등멱을 했다. 물이 차가웠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어머니의 모습이 재미있어 자꾸만 물을 끼얹었다. 어머니는 어쩔줄 모르셨는데 그 때 어둠 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하얀 살과 수줍음을 보았다.
할머니와 아버지,어머니와 나 이렇게 넷이서 보내는 여름밤은 고즈넉했다. 바로 위의 오빠가 나보다 여섯 살 위였고 다른 형제들도 객지에 있었으므로 막내인 나는 늘 그렇게 혼자였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어머니의 부채바람을 타고 오는, 모깃불의 풋풋한 내음에 취해 눈을 감았다. "얘야, 반딧불이 좀 보아라. 옛날 차윤(車胤)이라는 사람은 얇은 비단 주머니에 반딧불이를 넣어 모아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지 않느냐." 해박하신 아버지의 음성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반딧불이를 잡으려 뛰어 다녔다.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나의 별은 어디에 있을까'하고 찾아 보았지만 은하수 주위로 무수한 별들이 반짝일 뿐 깜깜한 시골집 마당에 누워 있는 나의 모습처럼 나의 별도 보이지 않았다. "아이구, 잊을 뻔 했네. 아까 뒷담 아래 봉숭아가 하도 고와서 뜯어 놨는디 가져와야겠구먼" 어머니는 나를 무릎에서 내려 놓고 안으로 들어 가시더니 귀빠진 사발을 들고 나오셨고, 무언가를 찧고 계셨다. 내 손톱에 질펀한 무엇이 올려지고 아주까리잎으로 싸고 무명실로 칭칭 동여 매셨다. "얘가 잠을 곱게 자야지, 안 그러면 다 빠져 버릴텐디."
밤이 깊어질수록 부모님의 두런거림이 선명하게 들리고, 풀벌레 소리도 크게 들려왔다. 살짝 눈을 떠보니 별은 더 많이 내려와 있었다.
"내일은 새벽 일찍 서둘러야 해유. 장날이니께 수박이랑 참외랑 좀 따서 아침장에 넘겨야 아들애 등록금 만들지유."
아버지는 중학생이 된 나를 번쩍 들어 안으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대청마루에 뉘어주셨을 때까지도 나는 잠이 든 척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알고 계셨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외로움을 곧잘 타는 내가 일찍 잠들었을 리 없음을......
어머니의 숨소리가 크게 느껴졌을 때 나는 살짝 일어나 내 손가락을 만져 보았다. 내일 아침 붉게 물들어 있을 손톱을 그리며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유난히도 별이 많았던 그날 밤, 아버지의 건강한 모습을 마지막으로 뵈올 수 있었던 그 여름의 밤이 추억 속에서 가물 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