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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7주일 ['빛의 열매'로서의 '의로움'] 김성현감독(강석준집사님 정리)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신을 비춰주셨다.
그 빛으로 인해,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 되었다.
빛을 비추실 때는 순종하여, 변화를 받아야 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선한 신자가 되게 하고, 선한 신자는 당연히 의롭게 되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빛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빛의 열매일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또 열매를 맺는 의로운 길을 걷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롭다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다.
의롭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도덕적인 개념과 그리 멀지 않다.
[도덕은 비영적?]
어떤 사람은 의는 도덕적인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한다.
도덕은 비영적, 하나님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의와 도덕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으려고 한다.
의를 도덕적인 것과 무관한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며, 오히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세다.
일단 세상 사람들도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물론 도덕, 윤리에 맞추어서 무엇을 한다는 의미보다, 그냥 선한 것을 일컫는 말이다.
성경에도 누구든지 알 수 있도록 모습을 갖추고 있다.
누구든지 성경을 보면, 도덕적인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보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대단히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사람들도 그렇게 본다. 그들도 달리 볼 수 없다.
성경의 모든 것은 다 노출되어 있다.
누가 봐도, 훤히 보인다.
그런데, 도덕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상하게 볼 수 밖에 없고, 우리를 오히려 부끄럽게 만든다.
도덕적인 것과 기독교 신앙을 굳이 분리하려는 것은 그 저의가 이상하고, 그것은 악행을 하려는 마음을 자극하고, 조장하게 된다.
어떤 종교집단이든, 도덕에 대해 소홀히 하거나, 멀리하면, 반드시 스스로를 해치게 한다.
오늘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함께 나누려고 한다.
(엡5: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기서 세가지 덕목이 나온다. 간단한 한 절이지만, 엄청나게 중요한 내용이 굉장히 간결하면서, 풍성히 담겨 있다.
지난주에는 착함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착한 것은 기독교인에게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마음의 품격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빛을 받은 자로서, 그 결과가 있을 것이다.
빛을 받고, 착해졌든지, 여전히 악하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의로움이란?]
그런데, 착하게 되었다면,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이다.
빛을 비추시는 것 자체가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역의 주요 과정이다.
착한 사람이 되면, 이제는 의로운 자가 되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이끄신다.
착한 자들을 의로운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꼭 착한 자의 과정을 겪는다기 보다, 하나님이 빛을 비추시는 자가 얻게 되는 결실이다.
하나님께서 빛을 받은 자녀에게 의롭게 되도록 역사하신다.
악한 자이지만,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의로운 자로 만들어 주신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빛을 비추실 때,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실제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여전히 악하지만, 그냥 의롭다고 쳐 주는 것이 아니다.
정말 의로운 자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빛의 자녀에게 두번째로 맺어지는 열매다.
'의'는 무엇일까.
의로움은 세상에서 전혀 모르는 개념은 아니다.
우리가 '의'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세상에서도 그 개념을 알고 있다.
이것은 첫째 도리적으로 옳은 것을 말한다.
둘째, 정의로운 것을 말한다.
누가 보든 옳은 자세인데, 선한 자세다.
도덕적으로 옳은 것, 정의로운 것을 말한다.
이 개념은 세상에도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방향성은 똑같다.
그것은 도덕적인 방향이다.
방향성이 같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과 신앙이 다르다고 하면 안된다. 방향이 선하고, 옳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물질, 초월성만 말하면, 대단히 위험하다. 성경과 다른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옳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의는 세상에서도 의라고 보고 있는 것과 도덕적인 측면에서 다르지 않다.
같은 방향이다.
그러나, 해석에서는 차이가 있다.
성경의 의와 세상의 의는 근본이 다르다.
[해석의 차이]
세상은 도덕이라는 그룹 안에 다 집어넣을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의 것은 그냥 선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볼 때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그분의 마음의 기조, 그분의 방향성을 말하고 있다.
어쩌면, 의는 하나님의 성품이다.
또, 그가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성품이 동기가 되어, 이루시는 모든 일이다.
근원은 그의 성품이다.
이에 따라 그가 이루시는 모든 일은 성품에 근거하여, 의를 드러낸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의로우시다.
우리에게 주시는 일은 그의 성품이 그 안에 배여 있다.
세상과 교회는 잣대가 다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세상에서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고귀한 품격을 함축하고 있다.
착한 것을 의라고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그 배경이 되는 하나님의 성품을 말한다.
그 동기가 되어 펼쳐지는 하나님의 모든 뜻도 그 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그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
세상이 보는 의와 그리스도인이 보는 의는 잣대가 다르다.
신학에서는 표준이 다르다고 한다.
세상에서 갖고 있는 도덕에 대한 성향은 비슷하다.
그러나,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문화에 따라,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사람마다 어떤 것을 옳게 보고, 그릇되게 보는 자기 기준이 있다. 그 기준은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영국사람이 갖고 있는 의와 한국사람이 갖고 있는 의가 다르다.
영국사람들은 약자에 대한 배려와 자선이 굉장히 높다.
그것을 의라고 본다.
성경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의 신사적인 모습 자체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존중, 행복에 대한 존중, 동물보호에 대한 마음도 높다.
또, 어린이 행복권에 대해서도 강한 의지가 있다.
동물과 어린아이를 괴롭히면, 그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보다, 그 나라의 개로 태어나는 것이 팔자가 더 좋을지도 모른다.
차를 타고 갈 때, 길에서 노인이 천천히 지나가면, 아무리 바빠도, 기다려준다.
이것은 모두가 다 한다.
문신이 있고, 험악하게 생긴 사람도 다 기다려준다.
좁은 길에 자전거가 나란히 달리면서, 길을 막아도, 그 사람들은 기다려준다.
자전거가 약자라고 보고, 환경도 보호한다고 보는 것이다.
뒤에 차가 이십대가 기다리고 있는데도, 기다려주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안전, 존중을 대단히 의롭게 본다.
내가 먼저 왔어도, 먼저 친절을 베풀 기회로 삼는다.
이렇게 보는 눈이 굉장히 다르다.
한국에서 중산층은 돈이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영국에서는 개념이 다르다. 영국의 중산층은 약자를 배려하는 기질이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들이 베뢰아 사람들이다.
문열어주고, 기다려주고, 배려하는 일을 잘한다.
그러면, 사회적으로 피차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우리나라사람들은 코앞에서도 문을 닫아버린다. 나는 내 아내를 위해 열어주었는데, 제3자가 그냥 들어온다.
한국사람에게 그런 것은 의의 기준이 아니지만, 영국사람에게는 의의 기준이다.
이렇게 정서가 다르다.
좁은 길을 자니갈 때, SORRY 많이 한다. 끙끙대면서, 많이 한다.
너무 과하게 보이기도 한다.
상당히 많은 경우, 인간의 의는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문화적인 정서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도 있다.
사실 의에 대한 기준은 더 있다.
각 사람이 자기가 갖고 있는 감정도 하나의 잣대다.
사회가 어떻게 보든, 진짜 내 마음에 옳으면 의롭다고 하고, 내 마음에 싫으면 불의하다고 하는 성향이 있다.
내 주관에 따라, 똑같은 행동도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래서, 의를 불의라고 하고, 불의를 의롭다고 한다.
정치에서도 많이 그렇다.
실제 악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당이면 무조건 지지한다.
그리스도 교회가 의라고 결정하는 잣대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의라고 보는 잣대는 그들이 속한 사회의 전통과 개인의 감정이다.
그리스도 교회의 의와 세상의 의와 나뉘어져 있는 것은 불만이 없는데, 신자들이 세상의 잣대를 교회에 가져오는 것이 문제다.
교회는 세상의 의가 너무 낯선데,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세상의 잣대로 교회를 심판하는 것이 문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일이 익숙하지 않고, 상상할 수도 없는데, 그런데, 갑자기 세상의 잣대를 들이밀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교회를 세상의 법으로 심판하면서도, 가책을 받지도 않는다
처음 느꼈던 양심의 가책을 이겨내고, 담담히 와서, 교회를 공격할 수 있다
이것은 근래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출애굽시대부터 있었던 일 같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과 뜻에서 드러나는 절대 품격을 표현]
의는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이 기준이다.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은 그의 영구한 성품이 동기가 되어, 성격화한 것이다.
교회안에서 의는 모든 행실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절대 무흠하고, 변하지 않는다.
세상에 있는 의는 짝퉁이다.
그것이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를 심판하면, 가짜가 진짜를 심판하는 격이다.
우리가 객관적인 의를 잘 알지 못하면, 인간의 요동치는 해석으로 혼란하게 된다.
세상사람들은 그나마 그 일을 가치있게 여기지도 않는다.
세상에서 도덕과 의는 선택적이다. 나에게 유리하면 하지만, 그렇게 귀하게 보지도 않는다.
교회를 공격할 때만 귀하게 여기는 척 한다.
세상의 의는 어디서 온 것인가.
이것은 사실 하나님의 것이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다.
(롬1: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선한 조각들이 인류타락 이후에도 흔적으로 남아있는 거이다.
이 부분은 신학적으로도 중요한 부분이다.
타락할 때,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고, 아직 남아있다.
자기도 모르는 하나님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다
과거 하나님을 만났던, 인류의 조상들이 남긴 흔적들이 있어서, 오늘날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히 비춰주신 모습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뜻이다.
그 빛을 비추실 때, 우리도 그의 것으로 재빨리 변해간다.
(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그 빛이 비춰지면, 양심에 느껴지고,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하려고 스스로를 재촉한다.
그러면서, 점차 그와 닮아가는 결과를 얻게 된다.
교회에서 의가 세상에서는 의가 아닐 수도 있고, 세상에서 의라고 하는 것이 교회에서는 의가 아닐 수도 있다.
원천이 다르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는 모든 것을 성문화된 법에 의해서 운영하지 않는다.
교회에는 어떤 법도 필요없다.
이천년동안 그렇게 해 왔다.
법으로 치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마응에 쓰신다고 하셨다.
교회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의해서 운영된다.
맡기는 것이다.
은혜 받은 자라면,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 하고 맡기는 것이다.
법이 필요없다.
그런데, 그 교회안의 일부가 그 약점을 노리고, 세상의 법정을 끌여들여 공격한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법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것을 심판한다.
누가 이런 일을 추진하는가.
존경받던 그리스도인이 한다.
그래서, 도덕적인 것 필요없다고 할 수 없다.
선한 것에 대해서, 마음에 지워버린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한다.
자기 마음에 선한 것이라고 느껴지면, 거기 하나님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작게나마 있어서, 그것이 그를 구원할 중요한 재료다.
양심의 작은 아픔이 자기를 살릴 수 있었는데, 그 양심을 죽이는 작업이 있었다.
또,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행실 없이 오직 믿음만 필요할 뿐?]
성경에 오직 믿음이라는 표현은 없다.
원문에는 only가 아니라 but으로 표현되어 있다.
행실로만 되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고 하였다.
행실의 중요성이 없어져 버렸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자세에 대해서, 사도가 책망하며 가르치고 있는 부분이다.
너희들은 행실로 하나님의 수준까지 가려고 하고 있다.
행실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채워주셔야 한다.
그런데, 마치 행위가 나쁜 것처럼 해석해왔다.
[의로움은 구원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
의로움은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의의 바탕은 그의 선하심과 긍휼과 인자하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우리를 구원하셨다.
인간도 그런 하나님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순종하는 동안,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이다.
(롬4: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리스도의 인자와 긍휼, 사랑, 진실하심으로 행하려고 하는 순종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진짜 그정도의 의는 없지만, 명령대로 순종하고 살 때는 그 의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다.
닮기 원하는 자가 그 의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믿은 날부터 평생 순종해야 한다.
왜 순종하는가. 그리스도인이니까.
순종하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따르는 것이다.
왜 순종하도록 명하시는가. 구원하기 위해서다.
(요일2:12-14,17)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순종하는 이유는 먼저 죄의 속박에서 나오는 것이다.
(요일3:2-10)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언젠가 우리도 주님같은 모습을 가질 것이다. 오늘날 깨끗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의를 행하는 자는 죄에서 멀어지고, 죄에 머물러 있으면, 마귀에게 속한 자다.
원수가 자기를 짓밟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 사역에 함께 하는 것이 순종이다.
하나님의 모든 일이 구원을 위한 것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렇게 애쓰신다.
우리가 순종하는 것은 구원에 유리한 것이다.
순종하는 동안, 계속 예수님을 닮아간다.
착해지고, 의로워지고, 진실해진다. 하나님의 긍휼한 마음과 닮아진다.
그러던 어느날 자기 모든 행실과 생각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가 된다.
(롬16:17-20)
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9.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라.
주님의 명령이다.
분쟁을 하는 자에게서 떠나라.
(히10:24-25)
24.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에 순종하는 모든 행위들이 다 의다.
(요13:14,15,34)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께서 주가 되셨지만, 우리의 발을 씻겨주셨다.
죽는 날까지 사랑만 해주어도, 천국에서 대환영을 받을 것이다.
[구원의 시작에 쓰임받아 의를 이룸]
내가 행한 행위 자체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서 의로워지고, 구원의 일에 내가 쓰임받아서, 의로워진다.
그동안 마귀에게 사용되었던 내가 주님께 쓰여졌으니, 이제 주께 내가 드려졌다.
내가 순수하게 의로워 질 수는 없다.
긍휼을 행하는 하나님의 일을 같이하며, 긍휼을 함께 느끼는 것이 심판을 이길 수 있다.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우리가 부족함이 많지만, 주님이 매꿔주신다.
(고전1:18,24)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의 도는 그가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것이다.
죄만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감싸고, 올려서 성공케 하신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방법이고, 그의 능력이다.
우리가 예수 믿고, 거듭날 때, 우리에게는 새 본성이 주어져 있다.
다만 육신이 문제다.
이것은 훈련해서, 활성화시켜야 한다.
의로운 길을 가는 동안, 누구든지 의를 행하는 자를 보면, 하나님에게서 난 자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헌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헌신으로 의를 이룬다]
내 재물을 하늘에 저장하는 의미도 있지만, 땅에 있을 때, 내 마음에 있는 내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헌신을 하기 싫어하면, 내게 구원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헌신의 심령이 가득하면, 구원이 된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증거하고 있다.
내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주님 나라가 잘되길 바라는 것이다.
성경은 다 헌신한 자를 말한다. 헌신하지 않고, 하늘나라 가는 자는 없다.
헌신은 우리 교회 모두에게 주신 공동의 명령이고, 사명이다.
이 세상 사람들처럼 내가 무엇을 얻을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주님을 섬기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