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원주민 에버리진
* 어보리진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 原住民
Australian Aborigine
Aboriginal이라고도 함.
오스트레일리아와 태즈메이니아에 사는 토착 인종.
18세기 후반 유럽의 식민지 개척기에는 인구 30만 명에 약 500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부족마다 공인된 영토와 독자적인 언어 또는 방언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들과 접촉한 결과 전통문화의 대부분이 심한 변화를 겪었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2만 5,000~4만 년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람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한 차례 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지금은 물에 잠긴 사훌 대륙붕을 통해 왔거나, 뗏목이나 카누를 타고 수로를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 색인 : 인구이동). 이주해오던 시기에 딩고라는 종류의 들개도 따라 들어왔다. 케이프요크 반도와 아른헴 북동지역에는 원어 그대로는 아니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말을 공통어로 쓰는 지역이 아직도 있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도 못했고 목축에도 적합한 짐승이 없었기 때문에 식량 채집과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신선한 물이 부족하여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며, 인구가 늘자 일부는 다른 물길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진로'와 '통상로'를 보면 이주 방향을 알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지역 단위의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들 집단은 식량이 남아 있는 한 1년 내내 함께 생활했다. 부계혈통을 따라 이루어진 집단의 영토에는 조상들이 처음 자리잡았던 수원지(水源池) 주변에 밀집되어 있었으며, 현지 부족민들은 조상들의 혼이 처음 정착한 이후 계속 환생을 기다리며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었다. 2번째로 정착한 집단의 조상들과 그 후손들은 공간·시간·풍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처음 정착한 집단과 그 후손들의 친족이 되었다. 모든 사람을 친족으로 분류하는 체계를 통해 간접적 친족관계, 명백한 세대(世代) 기준, 씨족 구성원 자격, 의식을 통한 결연(結緣) 등에 바탕을 둔 상호행동양식이 규정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친족은 2, 4, 8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은 서로 연관된 결혼 및 상속 관습을 갖고 있었으며, 보통 족외혼 규칙에 따른 결혼을 했다. 이러한 친족분류체계는 현대에도 전통적인 부족집단 사이에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지역에 따라 1년에 계절을 5~8개로 나누었는데, 보통 예상되는 기후조건과 그 철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종류에 따라 계절을 분류했다. 자연물과 비를 사회·도덕 질서의 일부로 보고, 의식을 통해 이들과 교통함으로써 되풀이되는 가뭄과 식량 부족을 이겨냈다. 전통적인 부족에 속하는 각 집단의 구성원은 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자연물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다 친족관계에 있었다. 집단(씨족)마다 자연물 가운데 하나를 토템으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남자들은 하나 이상의 자연물과 조상 전래의 영웅들과 관련된 신화·의례·장소·상징들을 관리했다. 의례를 통해 과거의 창조사를 재현했으며, 이러한 의례가 자연물과 사람의 생명이 안전함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신화와 의식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의 영속을 의미하는 꿈의 시대(Altjira)로 이루어져 있었다 (→ 색인 : 꿈의 시대). 노인들만이 꿈의 시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례 및 사회적 행동에 관한 문제에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갓난아이와 노인의 죽음,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제외하고 죽음의 원인은 전통적으로 마법의 탓이라 여겼으며, '현자'인 주술사만이 '부정'을 몰아내고 자신감과 삶의 의지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심령 및 심리 현상에 능통했던 주술사는 죽은 자와 토템 신, 하늘 세계와 교통함으로써 단련되었다. 만약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주술사를 너무 늦게 불렀거나, 마법의 힘이 너무 강했거나, 환자가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원주민의 신화와 의식은 미술·시·음악·춤을 통해 나타났다. 신화는 표현이 시적이고 운율적이며, 가사와 곡조가 복잡한 노래로 되어 있다. 신성한 물건과 부메랑 같은 무기에 신화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새겼으며, 노래 속에서도 신화를 주제로 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의식을 행할 때 배우의 몸에 그림을 그리고, 나무껍질·땅·돌 위에 신화에 관한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 그리기와 조각은 그 자체가 의식이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서도 그림을 그렸으며, 사교적 축제나 비밀 장소에서 모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지역별로 미술과 음악 분야의 기능을 전수하는 곳이 있었으며, 도구와 무기의 형태와 장식도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중요한 종교의식의 내용과 절차 역시 지역마다 달랐다.
19세기의 피비린내 나는 '무력에 의한 화해'에서 현재의 도시화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원주민의 분열을 막기 위해 1920년대말에서 1930년대초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보호구역을 설치했다. 원주민들은 누구나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와 접촉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은 모두 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이 되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남부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확실히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일부 원주민 집단이 등장했다. 그들은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 동화되기보다는 원주민 자신들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다른 오스트레일리아인들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상징으로 스스로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북부지역에서는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산개발에 대한 보상(단순한 사용료가 아닌)과 배당을 포함한 토지의 사유와 관리 문제에 초점을 둔 움직임이 꾸준히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