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3월28일 육군 소위로 임관한 후 4월 초에 동기생 12명과 함께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전곡역에 도착한 뒤 사단 인사장교 안내로 20 사단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사단참모들이 도열하여 전입을 축하해 주었다. 사단 신병교육대에 짐을 풀고 사단장 민경중 소장(육사 8기생)에게 전입신고를 하였다. 사단장은 전입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하면서 소대장으로서 맡은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줄것을 당부하였다. 일주일간 사단 신병교육대에서 기거하면서 사단 소개와 신병교육훈련, 칼빈소총 사격 테스트를 하고 각 연대로 배치되었다. 각 연대로 배치되기 전날 저녁에 연천에서 선배님들이 환영만찬을 베풀어 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선후배간에 끈끈한 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대걸, 이삼용 소위와 함께 62연대 소속이었다. 군용트럭에 탑승하고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연대에 도착하였다. 연대장 김창열 대령(육사 10기)에게 보직신고를 하고 연대 수색중대 제3 수색소대장으로 부임하였다. 연대 수색중대는 GOP연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연대 수색중대장은 ROTC 1기 김 대위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출신이었다. 중대장은 취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소대장들과 다과회를 베풀어 주었다. 나는 소대장 취임사에서 '여러분과 생사고락을 할 수 있어서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소대에 주어진 임무 완수를 위하여 함께 노력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소대원들의 화합과 전우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소대원들은 대부분 중졸 학력이었으며, 고졸이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초등학교 졸업자와 중퇴자도 다수 있었다. 월남전에서 전투경험을 쌓은 선임하사와 분대장 1명은 소대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소대장 임무는 DMZ내에서 수색작전과 매복작전을 수행하는데 있다. 소대장으로서 맡은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수색및 매복작전 교리를 완전 숙지하였다. 수색소대는 교대로 DMZ에 투입되어 수색작전과 매복작전을 병행하였다. 수색및 매복작전에 임하기 전에 적과 조우시 상황조치요령에 대한 예행연습을 철저히 하였다. 그리고 GOP부대와 GP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DMZ에 투입될 때는 항상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시 GOP 철책문을 담당한 소대장은 이광길 소위였다. DMZ는 대북방송과 대남방송 소리만 들릴뿐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경계를 철저히 하였다. 수색작전지역에 들어서면 중요한 고지에 기관총사수를 배치하고 수색작전을 펼쳤다. 수목과 수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관측이 제한되었다. 그래서 쌍안경을 반드시 휴대하고 의심스러운 지역은 집중적으로 관찰하였다. 수색작전간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적이 언제 어디서 나타날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수색작전시 가장 무서운 적은 지뢰와 북괴군이었다. 항상 주의깊게 관찰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적을 발견하면 즉각 사격하고 은폐, 엄폐된 장소로 신속히 산개하도록 하였다. DMZ는 자연생태계의 보고요 동물의 왕국이다. 온갖 기화요초들이 지천에 널려있어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진동하였다. 노루는 자주 목격하는 동물이다.
토끼, 다람쥐, 오소리, 꿩, 멧돼지도 가끔 눈에 띄였다. 그리고 더덕은 지천에 흔전만전이었으며, 6.25 전쟁으로 수몰된 마을의 논과 밭이 늪으로 바뀌면서 원시 숲을 이룬 곳에는 논우렁이가 서식하고 있었다. 더덕과 논우렁이는 중요한 양식이었다. 매복작전은 매복호를 준비하고 완벽한 전투태세를 유지하였다. 가장 경계해야 할 사항은 졸음이었다. 호 안에 있으면 바람소리, 풀벌레소리, 짐승 울음소리만 들릴뿐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았다. 주위는 첩첩이 어둠에 싸여 적막했다. 그리고 처량한 생각도 들고, 별의별 생각이 떠오른다. 철수시에는 경계를 철저히 하면서 GOP 부대와 암호를 서로 주고 받고 철책문을 통과하였다. 수색소대장으로 부임한지 열흘도 채 안되어
GOP 부대에서 일등병이 새벽에 야음을 틈타 월북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날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으며, 비구름이 가득하여 시계가 매우 불량한 상태였다. GOP 연대는 즉각 비상사태를 발령하고 연대 수색중대 3개 소대를 DMZ에 투입하어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쳤다. GOP 연대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하여 화력계획 등 만반의 대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시야가 앞을 가려 수색작전 진척 속도가 느렸다. 군사분계선 까지 수색작전을 펼쳤지만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미 넘어간 뒤였다. 단지 도주한 발자국 흔적만 채취해서 증거를 확보하였다. 월북 당일에 북한 대남확성기를 통하여 의거 입북했다고 반복적으로 방송하였다. 그 이후에도 20사단은 월북사건이 자주 발생하였다.
가장 큰 사고는 1977년 10월 20일 60연대 대대장 유운학 중령과 무전병 월북사건이었다. 당시 연대장은 육사 14기 김지종 대령이었다.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은 그 즉시 보직해임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재털이까지 집어 던지며 격노했다고 한다. 박대통령의 지시로 5사단으로 전격 교체하였다. 그 이후로는 월북사건이 없었다. 소대장으로 재임한지 약 3개월이 지난 후에는 새로운 중대장이 취임하였다. 갑종출신 유병진 대위였다.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수색중대장이 가을 어느날 밤중에 짚차를 타고 부대로 복귀하는 도중에 부대 근처에서 노루 한마리가 차에 치여 옴싹달싹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상태였다. 중대장은 부상당한 노루를 잡아서 먹었다.
노루는 새끼 밴 어미 노루였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서 아침 점호시간에 폭발사고로 중대 병기계가 즉사하였다. 나는 그때 당직사관이었다. 그날은 마침 포사격훈련하는 날이었다. 포탄이 잘못 떨어져서 사고가 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알고보니 병기계가 크레모아 점검 중에 불이 들어 오지 않는다고 격발기에 삽입하고 바로 눌러버린 것이다. 크레모아의 후폭풍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근처에 있던 사병도 부상을 당하였다. 중대 병기계는 연대 군수과에서 탄약검열에 대비하여 점검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병기계는 제대를 며칠 앞두고 변을 당해 안타까웠다. 중대는 완전 초상집이었다. 사단 헌병대에서 사고경위를 조사하였다. 이 사고로 중대장은 연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중징계를 받았다.
노루를 잡아 먹으면 재수없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그 이후에는 노루고기를 먹지 않았다. 수색및 매복작전이 없는 날은 외출,외박도 가능하였다. 이광길 동기생이 부탁하면 물품을 사서 전달해 주기도 하였다. 그 당시 어머니는 대광리와 전곡을 오가시면서 대광리 하숙집에 머무르시기도 하셨다. 전곡에는 이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6개월간 수색및 매복작전을 마치고 GP 소대장으로 근무하였다. GP 소대장의 임무는 GP 경계를 철저히 하는 한편 북한군 군사동향을 관찰하여 일지에 기록하고 상급부대에 보고하는데 있었다. GP 경계시는 기관단총과 57미리 무반동총을 항시 배치하여 비상시 즉각 사격하도록 하였다. 연대에서 보급추진 차랑이 GOP를 통과할 때는 항상 엄호하였으며,
수색및 매복작전 부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GP 생활은 외롭고 답답하지만 병사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하였다. GP의 공기는 서울에서 느끼는 공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 건강해지는 기분이었다. GP장 생활을 한지 며칠 되지 않아 연대 정보주임 안내로 HID 특수부대 요원이 적 지역으로 침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는 날에는 '서울의 찬가'를 대북방송하기로 약속하고 야음을 틈타 GP 1개분대 엄호하에 군사분계선까지 안내하였다. 침투하는 날에는 조용하였으나 복귀하는 날에는 북한군의 총소리가 요란하였다. 복귀하는 도중에 적에 발각되어 희생된 것으로 보고있다. 살아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대했는데 마음이 몹시 아팠다.
연대 정보주임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GP 소대장 6개월을 마치고 1대대 정보장교로 전보발령되었다. 나는 소대장 재임기간에 소대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시 하였다. 그 당시는 북한 공작원들의 침투 활동이 활발할 때였다. 행운의 여신이 뒤따랐는지 북한군을 한번도 조우한 적도 없었으며, 단 한건의 사고도 없었다.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나는 고별사에서 '그동안 소대장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여러분들이 너무 자랑스럽고 고마웠다. 남은 군대생활을 잘 마무리짓고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소대원들과의 추억은 영원히 잊지않겠다'고 하였다. 소대원들의 환송 도열 속에 일일이 악수하고 소대장 생활을 마감하였다.
첫댓글 이 글을 읽으니 마음이 숙연해 집니다. 육사 출신 동기들 모두 존경합니다. 그대들이 있었기에 조국은 안전했습니다. 그대들은 진정한 애국자입니다. 부디 직업 군인들이 존경받는 나라로 되돌아 가기를 간절히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