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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8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마르코 8,14-21
나눔의 공동체가 신적 존재의 증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이 ‘배로 가져온 빵이
한 개밖에 없어서 그런 말씀 하시는가 보다.’라고 수군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5천 명, 4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 일곱 광주리가 남은 것을 보고도 당신께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완고한 마음을 질책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이 기적이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게 할 충분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이기적 본성으로 태어납니다.
생존 욕구만을 지녀 나눌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족과 자기 것을 나누어 앞으로 먹을 것을 공동으로 비축하는 바이러스나, 기생충, 모기 같은 것들은 없습니다.
이것들은 오로지 자기만 압니다.
그런 결과 이들이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은 ‘나눔의 공동체’입니다.
진정한 가족 공동체가 이뤄지려면 그 구성원이 자신의 것을 희생하면서 내어줄 수 있는 본성으로 탈바꿈돼야 합니다.
부모는 서로서로 자기 것을 나누고 자녀들도 그렇게 가르침으로써 가족 공동체를 이룹니다.
이영숙 베드로 수녀님이 호스피스 병동에서 소임을 하고 있을 때, 곤지암에서 온 안나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혼자 묵주기도만 열심히 하고 수녀님이 와서 인사해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할머니를 찾아오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수녀님은 그냥 할머니 옆에서 묵주기도 1단 함께 해 주고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일이 있어서 함께 할 수 없었는데 다음에 갔을 때는 “아니, 어디 갔다가 이제 오는 거야? 어딜 갈 땐 간다고 말을 하고 갔었어야지!”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사랑을 충분히 받아보지 않아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었지만 그래도 사랑받고 있음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시집을 가서 29세 때 자식 없이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부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친정집도 가난해서 연락이 끊겼고 형제들도 다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머리에 비단을 이고 장사하셨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어머니도 돌아가셨습니다.
계실 땐 힘들어서 짜증도 났지만 혼자 되니 너무 적막했습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대세를 받았고 그때 할머니도 안나라는 세례명으로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성모상을 놓고 기도를 드리는데 외로움이 사라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을 시어머니처럼 대하며 살았습니다.
밥도 한 그릇 더 차려놓고 대화하고, 비단을 팔아서 번 돈을 반반으로 나누어 반은 성모상 밑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둑이 들어서 자기 돈과 비단을 모조리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상 밑의 돈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니, 집 잘 보라고 했더니 자기 돈만 지키고 내 돈은 가져가게 내버려 뒀어요?” 라며 성모님께 호통을 치셨습니다.
뉘어놓고 매도 때렸습니다.
며칠 뒤 한 청년이 비단과 돈을 가져와 무릎을 꿇고 “제가 아무리 이곳을 벗어나려 해도 계속 이 집 문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용서를 청했습니다.
할머니는 청년이 딱해서 취직도 시켜주었습니다.
그리고 79세에 방광암이 들어 이렇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런 이야기를 하며 검사를 받으러 병실을 비울 때는 수녀님에게 작은 보따리를
맡겼습니다.
그 보따리 안에는 통장과 폐물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수녀님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몇 번을 권해드렸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자신이 평생 모은 돈인데 왜 남에게 주느냐며 수녀님을 “도둑년”이라고 소문을 냈습니다.
수녀님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되는 줄 알고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할머니가 마음을 열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할머니는 며칠 뒤 눈물을 흘리며 꿈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친정어머니인지, 큰언니인지 모르겠지만 참 나를 사랑해주는 여자가 왔다 가셨어.
갑자기 내 손을 잡고서는 ‘안나야 놀러 가자.’라고 하시는 거야.
놀러 가는 집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나에게 도움을 줬던 집들이었어.
집안에 알곡으로 가득 차 있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집으로 들어왔는데 알곡은 없고 짚단 하나만 달랑 있는 거야.
내가 왜 우리 집만 이러냐고 따졌는데 그 여인이 ‘넌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한테 다 얻어먹고 살았지. 그런데 네가 남들에게 베푼 것은 짚단 하나밖에 없더구나.’
‘짚단은 뭐지?’ 내가 한참을 생각해보니 기억이 났어.
내가 어렸을 때 앞집 송아지가 하도 울기에 우리 집 짚단을 준 기억이 난 거야.
수녀야, 어쩌면 좋냐! 난 베푼 게 없어. 우짤꼬!”
수녀님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정말 줄 사람이 없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양자가 한 명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비단과 돈을 훔쳤던 그 청년이었습니다.
이후 청년을 양자로 삼았었고 6년을 함께 살다가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자주 찾아오지만 자기 시부모처럼 그 아이에게 짐이 될까 봐 알리지 않고 병원에 들어온 것입니다.
당시 핸드폰도 없을 때라 양아들도 연락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수녀님은 그 아들에게 전화했고 온 가족이 할머니를 보러 왔습니다.
아들은 보자마자 울면서 6개월 동안 팔방으로 찾아다녔다고, 이러신 줄 몰라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당신 유산을 아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묵주를 수녀님에게도 주며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게 이렇게 마음이 꽉 차고 기쁜지 몰랐어.”
그러며 “우리 엄마 같기도 하고 큰언니 같기도 한 그 여인이 성모님이셨던 것 같아.” 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셨고, 양아들 가족도 할머니의 유지에 따라 모두 세례를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었습니다.
[출처: 『내 가슴에 살아있는 선물』, 이영숙 베드로 수녀]
안나 할머니는 어머니와 언니에게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남편의 사랑도 받았고 어쩌면 시부모의 사랑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으면 썩어버릴 것을 남에게 줄 수 있는 마음은 갖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가족 아닌 이에게 내어줄 만큼의 사랑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사랑이 내 안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기 안에서 무슨 사랑이 솟아나서 서로 나누겠습니까?
분명 우리 부모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으로 우리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수천, 수만 명이 되는 커다란 공동체가 그렇게 서로 나누며 배불리 먹고도 음식이 많이 남을 정도로 나눌 수 있는 것은 부모의 사랑을 넘어서는 엄청난 사랑이 그 공동체에 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나눔의 공동체 자체가 사랑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의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는 부모가 있다는 증거인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작은 가족 공동체의 창조자이고 하느님은 교회 공동체의 창조자이십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수많은 부모도 포함됩니다.
제가 오산 성당에서 주임 신부를 할 때 첫 주일 헌금은 무조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신자들은 다른 어떤 주일보다 더 많은 돈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나누어줄 돈이 흘러넘쳤습니다.
각자 사는 것이 빠듯하지만 이웃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이는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힘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있는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의 가족이 부모가 존재하고 그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나눔의 공동체인 교회 자체가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심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도 또 다른 표징을 보이라면 이는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닌 믿으려 하지 않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람은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고는 가족을 사랑하게 될 수 없고, 하느님 없이 가족 아닌 사람들과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8일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8,14-21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화요일 강론>
(2025. 2. 18. 화)(마르 8,14-21)
<걱정한다고 비웃지 말고,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8,14-21).”
1) 여기서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은,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뜻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라고 생각한 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부자들’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죄인들, 하느님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서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은 아주 잘못된 사고방식이니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2) 예수님께서 ‘재물’에 관해 가르치셨을 때,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는 말이 루카복음에 있습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돈을 좋아하는 바리사이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비웃었다(루카 16,13-14).”
그런데 그 당시의 상황을 보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파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고, 사도들도 그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에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얘들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그러자 제자들이 더욱 놀라서,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마르 10,23-26).”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라는 제자들의 말은, “하느님의 복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되는 부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뜻이고, 사도들도 그 당시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자본주의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같은 오늘날에는 그런 사고방식이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와 부귀영화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결코 ‘하느님의 복’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복’이 아니면 무엇인가?
어떤 경우에는 ‘사탄의 장난’인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들을 전부 다 ‘사탄의 장난’이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어떻든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3)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라는 말은, 빵이 없다고 제자들이 걱정했다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순서와는 다르게 제자들이 걱정한 일이 먼저 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14절의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라는 말에서, ‘배 안에 있는 빵 한 개’를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차적으로는 ‘빵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위해서는 ‘빵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제자들만을 위해서는 그런 기적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시비를 건
일은(마태 12,1-2), 예수님과 제자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제자들이 빵이 없다고 걱정한 것에 대해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전에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고달팠을까?”를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는 ‘가난한 이들’을 함부로 비웃거나 꾸짖으면 안 됩니다.
남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랑 없음’은 ‘죄’입니다.
신앙인이라면, 이웃이, 또는 형제가 그런 문제로 걱정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사랑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4) 제자들의 걱정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빵의 기적’을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