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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루카 13,1-9
죄로부터의 회개로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 복음은 ‘회개’가 주제입니다.
회개는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결심입니다.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까요? 우리가 지은 죄일까요? 아닙니다.
죄에서 회개하려면 영원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더 근본적인 게 회개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회개의 열매가 맺히지 않으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삼 년 동안 열심히 거름을 주며 가꾸던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가 결국엔 잘리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몸을 가린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잃었을 때 잎으로 옷을 만들어 자신을 가렸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잎은 믿음이 없음을 상징하고 열매는 믿음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믿음’과 관련됩니다.
특별히 나 자신을 믿는 삶에서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회개해야 했던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뱀을 믿었다는 것이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한 행동에서만 회개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회개한 삶이 아닙니다.
이를 잘 나타내주는 영화가 ‘밀양’입니다.
영화 ‘밀양’은 회개에 대한 의미를 성찰하게 해줍니다.
분명 전도연 씨는 믿음을 갖게 되어 용서해 주기 위해 자기 아들을 유괴 살인한 범죄자를 찾아갔습니다.
자신도 잘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도 시골에 와서 돈 많다고 떠벌리고 다녀서 결국 아들이 유괴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유괴범은 평온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납니다.
그리고 교회를 다시 나가지 않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자기도 죄가 있었다고 회개했지만,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죄로부터의 회개를 넘어서 ‘나’에게서 회개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회개하지 않고 죄에서만 회개하려는 것은 여전히 내가 죄를 짓지 않을 힘이 있다는 교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가 죽지 않는 한 나는 여전히 하느님과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나를 믿지 않고 나를 죽이는 봉헌이 되어야지 회개지 내가 한 행위에서 아무리 회개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나의 부정’과 ‘하느님 인정’이 바로 회개입니다.
나의 믿음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돌리는 게 회개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오늘 복음을 다시 살펴봅시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다가 빌리도에게 살해당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제물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바치는 제물 때문에 자신이 깨끗해진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제물을 바친다고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물을 바치면서도 여전히 나를 믿을 수 있습니다.
제물에는 나를 신뢰하는 마음이 못 박혀 그 피가 섞여 있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니 그런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주님께 무슨 가치가 있어서 주님께서 그 제물 덕분으로 나를 깨끗하게
해주어야 하거나 무언가 나에게 해주어야 한다고 믿으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제물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엇을 바랍니까?
그냥 받은 것에 감사해서 앞으로도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는 마음으로 봉헌해야 합니다.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곧 세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례는 받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은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열여덟을 ‘여섯 + 여섯 + 여섯’으로 보고 있습니다.
666. 짐승의 숫자입니다.
‘세속-육신-마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탑은 ‘자아’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으로 씻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실로암이 있는지 자기를 믿었기에 그 자신에 깔려
죽게 될 것이란 뜻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은총은 주님 무상의 선물입니다.
실로암과 같습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격이 있어서 그런 은총을 받는다고 믿거나 세속-육신-마귀를 탑처럼 세워놓고 은총을 받으려 한다면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나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앵그리스트맨’(2014)은 인생의 모든 게 불만인 헨리라는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한 아들은 자신이 원하는 공부가 아닌 춤을 배운다고 해서 연을 끊었고 아내와도 별거 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인생을 비관하는 의사에게 뇌동맥류라는 판정을 받습니다.
언제든 뇌혈관이 터져 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 열이 받은 주인공은 도대체 그러면 얼마나 사느냐고 묻습니다.
의사도 자신에게 다그치는 그 사람이 싫어서 그냥 ‘90분’이라고 말해버립니다.
곧 터지니 정밀검사를 받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쳐나가 마지막 90분 동안 해야 할 일을 찾습니다.
세 가지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데 첫 번째는 아내와 화해하는 것, 두 번째는 아들과 화해하는 것, 세 번째는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보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갔더니 다른 남자와 있었고, 아들은 전화를 받지 않고, 동창은 단 한 명 나왔는데
어렸을 때 여자친구를 뺏긴 것 때문에 당장 죽을 사람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뇌가 터지든 말든 이젠 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은 다리에서 뛰어내립니다.
하지만 주치의는 주인공이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그를 구합니다.
그리고 지금 혈관이 새고 있으니 병원으로 가자고 합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뛰어내릴 때 이미 자존심까지 죽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이 춤 연습하는 곳으로 가기로 합니다.
그리고 2년 만에 처음으로 용기를 내서 아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용서를 청합니다.
어렸을 때 아들과 함께 췄던 춤을 춥니다.
주인공은 수술하고 8일을 더 삽니다.
그러면서 아내와도 친구와도 화해합니다.
봉헌은 바로 헨리가 물로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
내 힘으로 무언가 해 보려는 것이 아닌 주님께 맡기는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이렇게 더는 나를 믿지 않겠다는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만 표현됩니다.
내가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는다는 말은 끝내 나를 믿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믿을 때 가장 먼저 믿게 되는 게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봉헌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결심입니다.
선악과가 그렇게 봉헌되어야 했습니다.
선악과의 봉헌은 더는 뱀을 믿지 않고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표현입니다.
그 때문에 회개는 봉헌과 직결됩니다.
이 선악과가 구약에서는 십일조가 되었고 예수님도 내라고 말씀하셨고 미사 때 빵과 포도주로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끝끝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예수님은 무서운 결말을 제시하시며 참된 회개의 표징을 봉헌으로 표현하라고 재촉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는 내가 나를 의지하지 않겠다고 내 피를 제물에 섞어 봉헌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사에 위탁하겠다고 내 자아의 탑을 무너뜨려 교회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 봉헌에 내 피를 섞고 그래서 내 힘을 빼고 교회의 성사에 위탁합시다.
이것이 회개의 표징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루카 13,1-9
예수님은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주님이십니다!
올봄에 심은 무화과 묘목들을 돌봐주다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밭에 심은 무화과나무 한그루 비유가 현장감 있게 다가옵니다.
과일 나무를 심는 밭주인 입장에서 가장 간절히 바라는 바는 무엇일까요? 너무도 당연하겠습니다.
묘목이 빨리 자리를 잡고 무럭무럭 성장해서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것이겠지요.
저희도 매실나무 밭에 무화과나무 열 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름 여기 저기 묘목 심는 방법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서 정성껏 심었습니다.
물도 듬뿍듬뿍 주고 거름도 넉넉하게 주며 어서 빨리 묘목이 자리 잡기만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두 그루만 남기고 나머지 8그루는 말라죽고 말았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남아있는 두 그루에 지극정성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양질의 퇴비도 추가로 뿌려주었습니다.
무성해진 잡초도 제거해주었습니다.
정성 탓이었는지,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잎도 무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심어놓으신 한 그루 무화과나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시는 바는 밭주인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고, 깊이 뿌리를 내리고, 웬만한 강풍에도 쓰러지지 않는 튼실한 나무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니겠지요. 잎만 무성한 나무가 아니라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실속 있는 무화과나무로 성장하는 것일 것입니다.
겉은 멀쩡한데, 결실이 없는 나무가 부지기수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결실 없는 나무 중에 한 그루입니다.
이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재배인에게 똑같이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복음 13장 7절)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언제나 우리 편이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한번만 선처해주실 것을 신신 당부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를 잘 변호하고 감싸 안아주실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고 계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 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복음 13장 8~9절)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명백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와 죄인인 우리 인간 사이에 서셔서, 배은망덕과 고집불통의 명수인 우리를 어떻게 하면 하느님 아버지께 잘 말씀드릴까 고민하고 노심초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틈만 나면 우리 때문에 아버지께 비는 연민과 측은지심의 예수님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루카 13,1-9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2-3)"
당시 사람들은 어떤 참사가 발생하면 그것을 천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에게 살해당한 갈릴래아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천벌을 받아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천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라는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 사건은 '천벌'이 아니라 빌라도라는 개인이 일으킨 살인 사건일 뿐이다.
그러니 죽은 사람들은 천벌을 받고 죽은 것이 아니라 범죄의 피해자들이다."입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죽은 사람들이 의인인가? 죄인인가? 에 대한 판단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의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의인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은 회개하지 않아서 그렇게 멸망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그 사건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처벌이 아니지만, 최후의 심판은 '그런 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회개하여라."입니다.
1) 최후의 심판은 '갑자기' 시작될 것입니다(루카 12,46).
회개하지 않고 방심한 채로 살던 사람들은 그때서야 회개하려고 하겠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닥치기 때문에 회개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2) 최후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일이고,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닥칠 것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고, 피해서 숨을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3) 최후의 심판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섭고 끔찍한 일이 될 것입니다.
멸망하게 될 죄인들에게는...
(구원을 받게 될 의인들에게는 그날이 행복한 날이 될 것이고.)
그러니 모든 사람이 '지금 바로' 회개해야 합니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4-5)."
이 말씀의 뜻은 앞의 말씀의 뜻과 같습니다.
탑이 무너져서 사람들이 죽은 일은 '사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고는 죄인들에게 내린 천벌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큰 일'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많이 죽게 되면, 혹시 하느님의 심판이 아닐까?, 또는 혹시 종말의 징조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랬다가 시간이 좀 지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노아'가 겪은 대홍수의 경우, 그 일은 분명히 하느님의 심판이었지만 종말은 아니었습니다.
인류 전체가 멸망하긴 했어도 '노아'와 그의 가족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인류 전체가 대상입니다.
누구는 당하고, 누구는 피하고, 누구는 구경하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또 따로 살아남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슬퍼해 줄 사람도 없고, 기도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당하게 될 일이니 장례식도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자체는 그렇게 되는데, 심판이 마무리되면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루카 17,34-35).
그때에는 멸망한 사람들 때문에 슬퍼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의 멸망은 '영원한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지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르침입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8-9)."
'올해'는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입니다.
'내년'은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런데 '회개를 할 수 있는 올해라는 시간'이 언제까지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종말과 심판이 이루어지는 내년'이 언제 시작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미루지 말고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겪으면서도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는 죽음과 상관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이 아주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의지로 자신의 수명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인생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의 인생만 허무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회개하고, 잘 준비해서
그것을 얻게 되는 사람의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