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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 세워진 만물
잠 8:22-31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24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25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27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28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29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잠 8:22-31 / 여호와께서 세상 만물을 지어내시던 태초에 그 무엇보다도 먼저 나 지혜를 지어내셨지. 23) 까마득한 옛날에 땅이 생겨나기도 훨씬 전에 그분께서는 나를 지어내셨지. 24) 바다와 강과 샘이 생겨나기도 전에 나 지혜는 태어났지. 25) 산맥들이 솟아나기도 전에 언덕들이 울룩불룩 일어서기도 훨씬 전에 나 지혜는 이 세상에 태어났지. 26) 땅도 들녘도 흙 한줌조차도 생기기 전에 하나님이 나 지혜를 지어내셨지. 27) 나 지혜는 하나님이 하늘을 지어 펼치실 때 거기에 있었고 깊은 바닷물 위에 수평선을 새겨 넣으실 때 바로 그 자리에 있었지. 28) 또 하나님께서 저 위로 구름을 하늘에 달아매시고 깊은 물에서 샘물이 힘차게 솟구치도록 하실 때에도 나는 거기에 있었지. 29) 바다에 금을 그어 놓아 그 위로는 바닷물이 넘치지 않게 하실 때, 또 땅의 기둥을 튼튼히 박아놓아 견고하게 만드실 때에도 나는 거기에 있었지. 30) 나 지혜는 이렇듯 하나님이 무엇이든 지어내실 때 늘 그 곁을 따라다니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거들었지. 언제나 그분 곁에 붙어다니며 그분을 기쁘고 흐뭇하게 해드렸지. 언제나 그분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해드렸지. 31) 사람이 사는 이 온누리가 좋아 나는 그분이 지어내신 땅, 이 대지 위에서 사람 곁을 떠나지 않았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그리고 창조하실 때 지혜의 위치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지혜는 모든 피조물들보다 먼저 존재했으며, 모든 창조물들 속에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던 지혜(22-26) 의인화된 지혜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세 가지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해 줍니다. 그리고 이 단어들은 창조와 창조물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 의미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이 일하시기 전에 ‘가지셨으며’(22) 땅이 생기기 전부터 ‘세움을 받았고’(23), 바다와 큰 샘이 생기기 전, 산이 세워지기 전에, 땅, 들, 세상의 진토의 근원이 지어지기 전에 ‘이미 났습니다’(25). 지혜는 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한 것처럼 존재적 우선성을 갖습니다. 이와 같은 지혜의 존재적 우선성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설명해 줍니다. 첫째, 지혜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들의 나타남과 운행에 관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둘째, 인간은 이 지혜를 얻을 때 만물에 깃들어 있는 지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지혜와 창조(27-31)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실 때 지혜가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단순히 정적인 의미로 ‘거기 있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 ‘창조자가 되어’(30) 함께 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과 창조의 사역에 함께 하면서 세 가지 역할을 했습니다. 지혜는 만물 속에 특유의 존재적 특성을 갖게 했으며, 만물 간의 관계 속에서 각각의 한계를 정하고, 만물의 운행을 위해 질서를 생성시키는 데 관여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창조의 사역을 함께 했습니다. 이러한 지혜의 역사는 하나님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창조물 가운데 나타나는 특징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며 기뻐하였습니다. 따라서 창조에 함께 했던 지혜의 속성은 본질적으로 초월입니다. 이 지혜는 개인의 노력으로 얻을 수 없지만 이 지혜를 구하게 될 때, 성도들은 지혜를 통해 창조의 비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적용: 지혜가 만물의 창조에 함께 했기에 이 지혜를 통해 성도들은 만물 속에 새겨진 질서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이 당신에게는 어떤 도전이 되고 있습니까?
톨스토이 단편선 '세 가지 질문'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의 왕이 인생에서 풀지 못한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언제인가? 두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세 번째,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이후 피투성이가 된 청년의 이야기가 전개되며 다음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일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 설 교 >
지혜는 신적 존재다
잠 8:22-31 / 김성도 목사
오늘 본문 성경에서는 지혜를 의인화(擬人化)한 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서 지혜의 기원과 활동 상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참된 지혜는 만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기에 지혜를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경외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에서부터 오늘 본문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해석하였던 것입니다. 고전1:24에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고, 고전1:30에서는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또한 고전2:7-8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하는 유일한 지혜이시며, 창조된 우주의 원리를 깨닫게 해 주는 지혜이며,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신 하나님의 비밀로서의 지혜이시며, 인생들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1. 지혜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있던 영원한 존재입니다(22-26절).
여기에서 지혜의 기원, 즉 지혜는 우주 안에 어떤 것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혜의 선재성(先在性)이라 할 수 있습니다.
(1) 지혜는 여호와께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그 곁에 존재했습니다(22절).
지혜는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어떠한 계획을 세우기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말씀(λογος)이신 그리스도께서 “태초에...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1:1)라고 했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2) 지혜는 영원부터, 즉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세워졌습니다(23절).
‘세움받다’(נסך, 나사크)는 말은 ‘붓다’(to pour out), '임명되다‘(to be appointed)는 뜻으로 기름을 부어 임직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지혜는 미래에 자신이 하여야 할 일을 위하여 만세 전, 즉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지혜인 예수님께서도 만세 전에 구속의 일을 위임 맡았던 것입니다(행3:20, 고전2:7).
(3) 지혜는 천지만물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활동하였습니다(24-26절).
‘이미 났으며’(חול, 훌)는 ‘몸부림을 치다’(to writhe), '낳다‘(to bear)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비유적으로는 ’창조하다‘(to create), '형성하다’(to form)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리빙바이블(LB)에 따라 ‘살아 활동하다’(to live)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지혜는 우주에 어떤 것도 생기기 이전에, 산과 바다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활동했던 것입니다.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골1:15)로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요1:1)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누리던 분이셨습니다.
2. 지혜는 하나님 곁에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자입니다(27-30절).
여기에서는 지혜가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여 그 곁에 있었고, 함께 창조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1)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그 곁에 있었습니다(27-29절).
“내가 거기 있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예비하시고, 궁창을 만들어 밑에 물이 형성되고 위로 물이 둥글게 형성하도록 하시고, 하늘을 견고하게 세우시고, 바다의 샘들이 힘 있게 솟아나게 하시고, 바다의 경계를 정하고 물로 그 경계를 벗어나 지면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견고하세 세우셨던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그 곁에서 우주가 지혜롭고 신비하게 창조되도록 협력하였던 것입니다.
(2) 지혜는 하나님 곁에 있어 창조자로서 활동하셨습니다(30절).
30절에서 “내가 있었다”(אהיה, 에흐예)라는 단어가 두 번씩이나 나와 마치 출3:14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I am who I am)는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지혜는 창조하시는 하나님 곁에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자로서도 활동하며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여기 ‘창조자’(אמון, 아몬)라는 말은 ‘장인’(craftsman)이라는 뜻으로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 곁에서 함께 아름다운 창조를 위하여 수고하고 일하였던 것입니다.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되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하였으되(골1:16)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요1:3)고 했습니다.
(3) 지혜는 날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었습니다(30절).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지혜가 하는 일 하나하나는 날마다 하나님의 기쁨이었습니다. 지혜 자체가 기쁨 덩어리였고, 하나님 자신도 지혜의 활동을 보면서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창조 사역이 이루어질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가 연발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그 창조하심, 활동하심 앞에서 너무나 즐거워서 춤추며 소리를 지를 정도로 좋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웃음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 활동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는 구속주로서 활동하셨기에 하나님의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3. 지혜는 세상과 그 안에 거하는 인간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한 존재입니다(31절).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영화와 존귀의 면류관을 주시고 그들과 자연과 하나님이 더불어 교제하며 즐거움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1) 지혜는 하나님이 창조한 우주의 자연 속에서 즐거워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시시때때로 조물주의 오묘한 지혜를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고 그 안에 있는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하나님을 찬미하며 즐거움 속에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우주 안에서 이 즐거움과 행복, 찬미의 역할을 담당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2) 지혜는 무엇보다 인간의 자손들과 더불어 기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리석고 미련한 자들에게 지혜와 명철을 공급하여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물주를 발견하고 경외하며 찬미하면서 살아가게 하고, 우주의 원리를 깨달아 그 원칙에 따라 지혜롭게 살아가게 하며, 인간들이 서로 더불어 선을 창조하면서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인생들은 지혜의 이러한 목적, 이러한 역할과 활동을 깨달아 지혜를 가까이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과 더불어 있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는 오늘도 인간들이 올바른 길로 가고 창조 원리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려고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혜가 부르는 소리
잠 8:22-31
오늘은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첫 번째 주일로서 교회는 삼위일체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근본 토대가 바로 이 삼위일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빠진 기독교 신앙은 참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삼위일체론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아예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무리하게 삼위일체론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잘못 이해해서 삼신론이나 단일신론에 빠지는 경우도 꽤나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신론이나 단일신론은 교회 초기부터 이단이었고 바른 기독교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성삼위가 한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삼위일체론은 성경과 관계없는 신학적 사변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일찍부터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삼위일체라는 표현 그 자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성서적인 근거에서 출발한 교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진술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본 도마가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요한복음 기자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삼위일체론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성자 안에 성부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분명히 고백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빌립에게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해서 성자가 성부이시고 성부가 성자이시라고 이해하면 아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해는 일찍이 교회가 양태론적 단일신론이라는 이단으로 규정된 잘못된 이해라는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한 하나님이신 것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부가 성자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며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라고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봉독한 잠언 8장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지혜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서 기자들은 이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해서 새롭게 발전적으로 해석했습니다. 때문에 마태복음 기자는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계시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 하반절) 이 지혜가 구체적으로 역사하는 모습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좀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우리 인간의 극히 제한적인 사고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먼저 잠언 기자는 지혜가 사람들을 생명으로 부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8잘 1절 말씀입니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또한 잠언 8장 35절 말씀입니다. “대저 나를 믿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렇습니다! 지혜는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이끌기 위해서 부르고 있습니다. 왜 지혜가 부르고 있습니까? 그 까닭은 궁극적인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지혜가 교훈이나 가르침 같은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소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초기부터 그토록 간절히 부르셨던 그 부르심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하반절)
그리고 지혜는 그 부르는 소리를 듣고 믿는 사람들 안에 거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르게 응답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하나가 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 화평을 어떻게 누릴 수 있게 됩니까? 우리의 수단과 방법으로 가능합니까?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의 삶을 친히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잠언 기자는 지혜가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지혜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때에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27~30)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동참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즐거워했습니다.
일찍이 주님은 자신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6~19)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왜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고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그 사귐이 하늘 나라 잔치를 미리 맛보게 하는 참으로 기쁘고 또 복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항상 기쁨을 안겨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축적해야만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애써 쌓은 많은 지식도 참 지혜로 승화될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지식이 생존의 기술을 가르쳐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궁극적인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시인은 말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열심히 새로운 지식을 구하는 대신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 참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말씀에 대하여 바르게 응답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복된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지혜는 소리 높여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인 생명을 주기 위해서 지금도 지혜가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지혜는 그 부름을 듣고 믿고 따르는 사람 안에 거합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어리석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 지혜를 따르는 사람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장차 그 주님의 보좌 앞에서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게 되는 참으로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잠언 8:22-36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 정한조 목사
지혜의 선재성과 창조(22-31절)
오늘 본문을 ‘지혜의 선재성(先在性)’이라 부릅니다. 즉 지혜는 천지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또 그 지혜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에 함께 동역한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사람들을 초청하는데,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며, 순종하지 않을 경우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 전에 나(지혜)를 가지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지혜가 처음(영원전)부터 존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23)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만세 전’, ‘태초’, ‘땅이 생기기 전’이라는 의미는 ‘시간이 생기기 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시간은 천지가 창조된 이후에 시작이 되었습니다. 즉 시간도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하지만, 지혜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속성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 것인가?’에 대한 토론들이 있어왔는데,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더 나아가서는 2위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3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24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지혜가 영원전부터 존재했음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24-26)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이 구절을 근거로 삼아 초대 교회 때에 하나님의 삼위일체되심을 부인했던 일부의 무리들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최고임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단으로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무리 뛰어난 분임을 강조해도,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면 그는 이단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고 있고, 또 세상에 있는 마술사들이 행한 마술을 다 합한 것을 실제로 행할 능력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분이시라고 하면 이단입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있는 수많은 파리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파리가 우리에게 와서, “나는 인간에 버금가는 파리입니다.”라고 말하며 인간을 모독하는 것보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가장 뛰어난 피조물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만약 실제로 파리가 와서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말한다면, 그 파리에게는 ‘파리채’가 날아갈 것입니다.
지혜가 영원전부터 존재한 것은 물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상을 창조하는 일에 동참했음을 말합니다.
(27-31)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신 놀라운 일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창조 중에서 대표되는 몇 가지, 하늘과 궁창, 구름, 바다의 샘과 바다의 한계, 땅의 기초 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히브리사람들은 지구와 우주에 대해서 생각하기를, 사람들과 동물들이 살고 있는 곳이 ‘땅’이고, 그 땅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땅이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땅의 기둥들이 바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높은 산들은 하나님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서, 하늘이 사람들 눈에 가까이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있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눈에 보이는 곳을 첫째 하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이 떠 있을 수 있도록 거대한 금속판이 있어서 거기에 별들이 매달려 있고, 그 위에 물이 가득 차 있는 곳을 둘째 하늘이라 부르기도 하고, 궁창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넘어 하나님이 계신 곳을 셋째 하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바다 깊은 곳에는 높은 파도가 치도록 하는 솟구치는 샘물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도록 통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닷물이 지면위로 솟구치지 못하고, 바닷물이 일정 범위를 넘어 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바다를 견고하게 창조하셨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창조하실 때에, 지혜가 그 곁에서 창조자(장인,匠人)로 동참을 했다고 합니다.
솔로몬이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과 지혜가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고 있음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정말로 지혜가 이렇게 귀하고, 이렇게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지혜를 간절히 찾음이 마땅하고, 금이나 은을 얻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한숨에 달려가는 것처럼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면 더욱 그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
지혜에의 순종 촉구(32-36절)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32)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우리말 성경은 ‘아들들아 이제’로 시작하지만, 히브리어성경은 ‘이제 아들들아’로 시작됩니다.
‘이제’를 풀어서 설명을 드리면, ‘앞의 내용인 1-31절의 말씀을 다 들었으니’입니다. 1-5절에서는 지혜가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높은 곳에서, 길거리에서 부르고, 마을 어귀 성문에서와 마을 안에 있는 문들에서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6-21절에서는 지혜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지혜의 진실함(진리됨)에 대해서, 지혜의 고귀함에 대해서, 지혜의 강직함에 대해서, 지혜에게 있는 계략과 지식에 대해서, 지혜의 신실함에 대해서, 지혜의 유용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또한 22-31절에서는 지혜가 창조 이전부터 존재한 하나님이시며, 지혜가 세상을 창조했음을 말했습니다.
정말 지혜가 그러한 것이라면 지혜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인생이 없음을. 시편 1편에서는 그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고 말합니다.
또 이렇게 강조합니다.
(33)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으라 그것을 버리지 말라
‘훈계’는 ‘책망’, ‘경고’, ‘교정’ 등의 의미입니다. 훈계를 들으면 지혜를 얻는 것이니 훈계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훈계를 싫어합니다. 또 훈계를 듣는 것은 자기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훈계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성숙한 사람일수록,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감사하게 생각하며, 그 훈계를 자기 훈련의 디딤돌로 생각합니다. 반면에 미숙한 사람일수록, 자기중심적인 사람일수록, 훈계를 자기가 가는 길에 걸림돌이라 생각하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자신을 방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문도 그러하고, 예술도 그러하고, 심지어 운동을 배울 때도 그러한데, 자기 실력이 좋아질수록 스승이나 코치의 훈계를 달게, 그리고 깊이 듣습니다. 운동으로 예를 들면, 골프(저는 골프를 한번도 쳐 본 적이 없습니다.)를 처음 배우며 칠 때는 코치가 자신을 봐 주는 것을 쑥스러워하고 또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지금보다 좀 더 잘하게 되었을 때 코치가 봐주었으면 좋겠고,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뿐만 아니라 코치가 여러 가지 도움의 말을 반복해서 말해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사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실력이 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실력에 올라 있는 사람이나 선수들은 코치가 자신을 집중해서 봐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클럽을 휘두르는 자세는 올바른지, 각도는 적당한지, 휘두르는 속도가 맞는지 등등 자세하게 말해 주기를 원하고, 잘못된 것은 교정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점점 더 실력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훈계를 잘 듣는 사람일수록, 깊이 듣는 사람일수록, 들은 훈계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일수록 성숙한 사람입니다.
또 지혜를 가까이 함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서 문 옆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고, 문기둥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조선시대 왕궁을 생각하면 빨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있는 어전(御殿) 문 밖에는 임금의 시중을 들거나, 숙직을 돕기 위해서 내시들이 24시간 대기를 했습니다. 임금이 어느 순간에든 “밖에 누가 있느냐?”라고 물으면, “전하! 부르셨사옵니까?”라고 응답하며 임금에게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지혜를 임금으로 모시고, 자신을 지혜를 모시는 신하로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35-36)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지혜를 얻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이 되는 것은, 지혜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이유로 지혜를 잃는 사람(지혜의 길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자기의 영혼을 헤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단지 더 똑똑해지고, 덜 똑똑해지는 문제가 아니라 생명을 얻거나 잃는 문제, 자신의 전부가 달린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전부터 존재한 지혜, 우리를 영원히 살려주는 지혜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그 지혜를 얻기 위해서 문 옆에서 기다려가며 소망할 수 있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지혜가 베푸는 거침없는 생명의 은혜를 중심으로 간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를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영원전부터 존재한 지혜,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깨어 있어, 지혜가 주는 거침없는 은혜와 지혜가 인도하는 길로 거침없이 걸어가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영원전부터 존재했으며, 온 세상을 온전하게 창조한 지혜를 중심으로 구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에 필요한 것과 세상에서 나를 돋보이게 해 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새벽이나 늦은 밤을 마다하지 않고 또 원근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지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의미 있게, 또 가치 있게 인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짧은 시간을 내는 것도 아까워하고, 길 하나 건너는 것도 귀찮아하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주신 삶의 자리에서 지혜의 다스림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지혜를 품으며, 지혜가 인도하는 길을 걷는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거침없이 은혜를 베푸는 지혜가 오늘도 풍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지혜를 처음 알고 받아들인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2. 솔로몬은 훈계를 들어서 지혜를 얻고, 지혜를 버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당신이 훈계로 들은 말씀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가장 크게 깨달은 때는 언제이었습니까?
3. 솔로몬은 지혜를 얻기 위해서 문 옆과 문설주에서 기다리라고 권면합니다. 당신은 지혜의 말씀을 얻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해 보셨습니까?
4. 오늘도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심어 주신 삶의 자리에서 지혜를 얻으며, 지혜가 베푸는 거침없는 은혜의 길을 걷기 위해서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주여, 이제 회복하게 하소서
잠언 8:22-31 / 오창우 목사
오늘은 잠언입니다. 잠언 중에 가장 위대한 구절이라고 할 수 있는 8:22-31입니다. 잠언은 솔로몬 왕의 잠언이라고 하여 일부 편집된 부분을 빼고는 솔로몬 왕이 저자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을 통해 우리가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지혜입니다. 지혜는 신적인 차원에 속한다고 하여 인간의 삶의 수준을 높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식이라고 하면 학교를 다니든지 배우면 되지만 지혜는 단순히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배우지 못한 사람 가운데도 지혜로와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많이 배운 사람 중에도 지혜가 부족하여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 8:22-31은 우리가 가질 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여, 다시 회복하게 하소서!”라는 총회의 주제를 가지고 코로나19시대에의 회복은 지혜의 회복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창조주에게는 지혜가 있었습니다(22-26절 창1:1, 요8:32)
지혜는 원리나 질서, 구조나 계획 등을 의미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이런 지혜를 창조 때부터 가지셨다고 하셨습니다. 22에 여호와께서 태초에 일을 하시기 전에 “지혜를 가지셨으며.” 23에는 “세움을 받았다”.. 25에는 “내가 이미 났으니”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지혜라는 원리나 질서, 구조나 계획을 가지시고 천지창조가 이루어 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 원리대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창1:의 천지창조를 보세요. 6일 동안 창조를 하셨는데..처음 3일은 공간을 만드시고 나머지 3일은 그 공간들을 채워 놓으셨습니다. 질서 있게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1일에 빛으로 낮과 밤의 구조를 만드시고..4일에는 낮의 해와 밤의 달과 별로 채우셨습니다. 2일에 물을 나누어 하늘 위의 물과 아래 물로 나누시고 5일에는 하늘에는 새를 바다에는 물고기로 채우셨습니다. 3일에 물을 한 곳에 모아..육지가 드러나게 하시고 나무와 채소를 주시고 6일에는 땅에는 짐승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6일은 공간과 채움의 순서로 질서가 있었습니다. 이 창조의 질서는 지금까지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서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농사도 짓는 것이 아닙니까? 만약에 어느 해는 봄이 없고 어느 해는 가을이 없고..4계절 중에 어느 한 철이라도 없으면..농사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하나님은 이 광대무변한 우주와 만물을 질서있게 창조하시고 질서있고 조화롭게 역사를 주관하시며 운행하고 계십니다.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고전14:33,40에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하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이런 지혜를 우리 인간에게 주심으로 원리와 질서 있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32에도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진리대로..약속대로..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역사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애굽430년으로 민족을 만들어 주시고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을 세우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어 이름도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던 이스라엘이 70년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목자로 믿고 따를 때..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 주셨습니다. 요셉이..다니엘이..남의 나라에서도 국무총리가 되었던 것은 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것이 세계1,2위라지요.. 사회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코쿠닝 현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랍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누에고치를 의미하는 ‘코쿤’에 숨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코쿤’처럼 한정된 공간에서 술 먹고 노래하고 도박하고..스트레스를 풀어 보겠다고 노력을 하지만 결국 숨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질서 안에 들어가야만 살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질서대로 사는 자입니다. 사55:3에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잠16:20 “20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시19:8에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그래서 시1: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하는 일이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은 주일성수와 십일조생활에 정말 충성합니다. 자기가 힘들게 사는 중에 회개하고 선택한 신앙생활로..성수주일, 십일조생활이야 말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게 하는 기본이 되었고 다시 사는 용기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질서의 하나님은 질서인 말씀으로 사는 신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방자히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 받는 길입니다. 창조주에게 있는 그 지혜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지혜는 생명의 창조자요 하나님의 기쁨입니다(27-31 ,창 1:2,2:7 고후 5:17, 행 2:38, 잠 9:10)
30절에 지혜는 생명의 창조자요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창1: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2절에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영이..혼돈과 공허, 흑암과 깊음 위에 운행하셨다는 것입니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수면 위를 운행하신 하나님의 영은 잠언이 말하는 창조자로서의 지혜, 30절의“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입니다. 창조자로서의 지혜인 하나님의 영은 성령하나님입니다. 성령하나님은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창2: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빚어 만드셨지만 아직 생명이 되지 못했습니다. 7절에 보면,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했습니다.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신 생기가 바로 성령입니다. 생명의 창조는 창조자의 지혜인 성령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고후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행2:38에 “38...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되는 것은 죄 사함과 성령의 선물로 받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30,31에 창조자이신 지혜인 성령은 기쁨이 된다고 하셨습니다.“30..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30..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하나님 앞에 사는 기쁨도 주셨습니다.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땅에서도 기뻐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31..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세상에서도 인정받게 하시는 기쁨을 주십니다. 이처럼 기쁨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령을 부어 주심으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기쁨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이 생명이 되고..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지옥이 천국이 되고..생명의 창조자이신 지혜가 주신 기쁨, 그리스도인 된 새로운 피조물 된 자의 기쁨입니다. 행13:52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살전1:6에는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성령의 사람만이 하나님의 원리와 질서대로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성령하나님으로 사는 지혜로운 사람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잠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인 ‘생명창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하나님의 질서를 지키지 않고 ‘생명파괴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롬1:20,21에 “20 창세로부터..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21 하나님을 알되..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난 변화는 ‘나눔으로 생명 창조의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동물의 왕국에서의 약육강식과는 다른 삶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에게 지혜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할 때..하나님의 질서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가진 것을 나누는 행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눔으로의 생명창조의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요14:6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3중 사역은 -제사장으로 십자가로 중보자가 되어 죄인을 용서받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게 하셨습니다. 히4:14,16 “14..큰 대제사장이 계시니..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16..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선지자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요16:16,막15:39에 “16...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39..백부장이..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왕으로 세상을 다스릴 때, 섬김을 받지 않고 섬기셨습니다. 막 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요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말 그대로 나눔으로 생명창조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그 교회역시 예배와 전도와 섬김의 3가지 가치로 생명창조의 삶을 사는..균형과 조화 있는..교회입니다.
지금 북극의 빙하가 녹아 얼마지 않아 지구의 절반이상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탄소배출량이 늘어나다 보니 지구가 더워지는 이상 징후가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과만 보더라도 대구에서 나던 것이..점점 북쪽으로 올라와서 충청도에서 많이 생산이 되고 있습니다. 열대과일인 망고나 커피가 전라도에서도 생산이 된답니다. 뜨거워지는 위기의 지구를 구하기 위해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서 나라들이 기후협약을 하고 전기자동차 생산을 앞당기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미지수입니다. 우리가 많이 먹는 돌연변이 콩도 유전자변이로 많이 생산이 되어 기근문제를 해결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인간을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돌연변이라는 말은 갑자기 다른 모양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진화는 돌연변이를 이론에 근거하여 창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원숭이가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진화이고 돌연변이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넘어서게 할 때는..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돌연변이처럼 사는 삶이 있습니다. 복권을 기대하거나 도박에 희망을 거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심는 대로 거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심을 믿고 지혜와 질서를 가지고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돌연변이의 삶은 불행합니다. 여러 사람이 복권을 사지만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고 돌연변이처럼 자기도 모르게 일등이 된 한명만이 행복할 뿐입니다. 일등복권에 당첨이 되어도 지혜가 없으니까 무질서하여..돈을 관리하지 못하고 탕진하여 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음주운전이나 도박으로 망한 연예인이나 프로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진화나 돌연변이와 같이 일확천금을 노리지 마세요. 사람은 사람이고 원숭이는 여전히 원숭이이지.. 창조하신 질서를 따라 사는 것만이 희망입니다. 인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창조질서의 파괴하는 일은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있지만 자연계에서는 먹이사슬이라고 합니다. 먹이사슬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 주는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얼마 전 만해도 외국에서 들어온 황소개구리, 큰 쥐 뉴트리아, 큰 물고기 베스..등의 생태계 교란종들로 인해..토종들이 씨가 마르는 위기의 생태계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내 버려두었다가는 자연계가 무너지고 인간의 삶까지도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하여 현상금까지 걸고 없애려고 했습니다. 큰 쥐인 뉴트리아 한 마리에 2만원이니까..너도나도 잡았지만 없애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토종으로 먹이사슬이 될 만한 연구를 하여 일시에 해결되었습니다. 황소개구리의 먹이사슬인 쏘가리를 키워 방생했습니다. 뉴트리아의 먹이사슬로는 삭을 키워 방생했더니..황소개구리도 뉴트리아도 거의 없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먹이사슬구조로 자연을 선순환시킴으로 창조세계를 보존하시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먹이사슬을 무너뜨리는 것은 인간의 탐욕이고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코로나19바이러스도 탐욕의 결과입니다. 과학도..우주에도..질서가 무너지면 다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대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만이 모두가 사는 비결입니다. 생명창조를 위한 나눔의 선순환만이 희망입니다. 그래서 교회인 신자와 교회공동체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의 지혜이신 예수그리스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생명창조의 삶인 나눔의 삶을 살게 하심으로 기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특히 세상과 비교하지 마시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생명창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기쁨이 되세요. 창조자이신 지혜와 성령을 따라 생명창조의 나눔을 사는 기쁨으로 사세요. 창조의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과 가정..그리고 교회와 이 땅에 이전과는 다른 회복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신 말씀으로 한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가지셨다
잠언 8장 22~31
오늘 말씀을 통해 저는 여기서 말하고 있는 ‘나’라는 표현에다 우리 자신, 곧 나 자신을 대입시켜서 말씀을 깊이 묵상하였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다시 읽어보면,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의 네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돼요. 우선,
첫째, [여호와께서] 나를 가지셨어요(22절).
이 말씀을 주목하세요. 그 조화의 시작, 곧 창조 역사의 그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여호와께서는 나를 먼저 가지셨어요. 그리고 바로 그때, 즉 땅이 생기기 전에, 태초부터, 만세전에 그 분으로 하여금,
둘째, 내가 세움을 받았어요(23절).
이는 바다가 생기기도 전이었고, 큰 샘들이 있기도 전이었어요. 이미, 그때 나는 ‘생겨난 것’이에요. 그때는 산이 세워지기 전이었고, 언덕이 생기기도 전이었어요.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않으셨을 때에요.
그런 뒤,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고 궁창을 해면에 두르실 때에,
셋째, 내가(나도) 거기 있었어요(27절).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고, 그 하나님과 함께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실 때,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다지시면서, 그 한계를 정하여 물이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
넷째, [내가 그의 곁에 있어서 (함께)] 창조자가 되었어요(30절).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의 앞에서 즐거워하였고,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어요,
물론 본문에서 ‘나’는 지혜를 의인화한 것이에요. 이는 주님의 지혜를 일컫는 말이지요(시편104:24). 그리고 ‘가지셨다’는 동사는 ‘천지의 주재’(창14:19, ‘멜기세덱이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줄 때, 하나님을 지칭하여 일컬은 표현’)라는 뜻으로 ‘주인’, ‘창조자’로 해석돼요(신32:6, ‘네 아버지시오, 너를 지으신 이’).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 17장 5절에서는 예수께서 스스로를 일컬어 말씀하실 때,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설명하시기도 하였어요.
(좀 더 성경의 여러 곳을 근거로 하여 각 구절을 뒷받침 내용으로 삼아 오늘 설교가 이루어져야겠지만, 그러기엔 저의 지식이 아직 너무 짧군요.)
저는 오늘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 가치의 형언할 수 없는 값어치에 대해 함께 묵상하고 나누고 싶어요. 보잘것없어 보이고 하찮은 존재 같지만, 실재 우리는 우리의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값진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볼게요. 나는 ‘미국’ 시민권자예요. 하지만 지금은 한국에 살고 있어요. 언젠가 나는 내 나라로 돌아갈 거예요. 그런데 이곳에 살면서 나는 내 나라의 언어도 잊어버렸고, 그 곳 생활과 문화를 까먹어버렸어요. 또한 내가 돌아갈 집에는 값진 전자기기와 최첨단 디지털 장치들이 가득해요. 그래서 나는 내 나라 말을 배우고 있어요. 당장은 없지만, 언제가 갖게 될 전자기기들의 조작법을 익히느라 때론 피곤하기도 해요.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해요. 당장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두고 열심을 내니까 말예요.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아요. 내가 돌아가 살 곳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그 나라의 언어를 익히고, 문화를 익히느라 열심이에요.
‘노아’도 그랬어요. 남들은 희희낙락 ‘삶’을 누리며 ‘사는 일’에 여념이 없을 때, 이 노인은 산 위에 배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창세기 6장의 말씀이에요. 난데없이 하나님은 고페르 나무를 베어다가 방주를 만들고, 그 안에 칸들을 막고 꼼꼼하게 역청을 바르라고 하셨어요. 그런 노아를 두고 사람들은 뭐라 그랬을까요? 과연 노아는, 한 번도 회의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가끔 그것이 궁금해요. 그러나 어쨌든 그는 끝까지 갔어요.
물론 첫 번째 이야기는 즉흥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예요. 하지만 우리가 돌아갈 천국과 그 곳이 곧 나의 본향이라는 믿음으로, 이 이야기를 이해하면 쉬울 거예요. 두 번째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이야기예요. 이 두 이야기를 통해 왜 우리가 오늘, 이처럼 주일을 기억하고 이 자리에 모이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어요.
추석 연후 전 날, 저는 낚시를 갔어요. 중학교 때 동창인 가장 오랜 친구랑 같이 갔어요. 우린 낚싯대를 던져놓고,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어요. 저는 친구에게 ‘교회 이야기’를 하고, 하나님에 대해 운을 뗐어요. 친구는 언제부턴가 그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해요. 친구로서 그저 저의 가는 길에 대해서는 뭐라 하지 않지만, 자기에겐 강요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곤 가끔 이러고 있는 저를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 나이면 노후 걱정을 하고,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고, 집 늘리고, 돈을 모을 생각은 않고 무슨 뜬구름 잡느냐, 이거예요.
우리 하현교회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에 대해 이야기 했어요. 오늘날 우리 또래의 청소년들이 안고 있는 결핍과 불안증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우리 하현교회가 서로에게 지체가 되어주길 바란다는 이야기도 했어요.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도 했어요. 그리고 주일 날 같이 예배드리자는 말도 했어요. 하지만 그 친구는 나를 안타까워 했어요. 무슨 헛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말예요.
그러게 말예요. 저도 가끔 저 자신을 돌아보며 그 친구가 얘기하는 문제들을 공감할 때가 있어요. 뜬구름 잡는 것 같아 불안할 때도 있어요. 정말 하나님이 계신 걸까? 천국은 있는 걸까? 생각해요. 아주 원초적인 문제를 놓고 답답해 할 때도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이 모든 사실은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부인하든, 존재 그 자체가 위협 받지는 않아요.
하나님은 오늘도 묵묵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세요.
아주 먼 옛날, 하나님은 홀로 계셨어요. 그 곳은 너무 좋은 곳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 곳을 누군가와 함께 누리고 싶으셨어요. 즉 그 사랑이 발동이 되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지으셨어요. 그게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이미 창조 역사 전에 하나님께서 가진 바 된 존재들인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생산하지 않으셨어요. 자유의지, 곧 인격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에요. 그래서 사람은 선택을 할 수가 있어요.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에요. 반대로 하나님을 멀리하고 죄악 된 세상에서 방황할 수도 있는 존재예요.
그런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그 곳은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존재할 수 있는 거룩한 곳이기 때문이에요.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는 오늘의 삶이 필요한 것이에요. 아직 창조는 계속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에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을 묵상해보세요.
전에 언젠가 최인훈의 <문학과 이데올로기>에서 발췌한, 'DNA'에 대한 설명을 한 적이 있어요. 즉 우리 안에는 수 없이 많은 ‘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 말이에요.
DNA=DNA'+DNA'+DNA'+DNA'+… 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을 했어요.
다시 말해서 오늘의 ‘나’는 그저 단순하게 ‘나’라고 하는 존재로만 단일하게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많은 ‘나’들, 곧 나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전적인 존재로서의 ‘나’들이 한데 이어져 있다는 거예요. 이것을 최인훈은 <계통발생>이라 하였어요. 이와 유사하게 또한 우리 안에 수평적인 관계로의 ‘나’들도 존재해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음으로 생겨난 나의 자아가 곧 그것인데, 이는 싫든 좋든 우리는 환경의 지배를 받고 살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오늘의 나는 다른 누구와도 다른 <개체발생>을 이루어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에요. 이 근원적인 뿌리는 아담의 ‘원죄’ 때문이에요. 하지만 바로 그것을 새로 정립하고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거예요. 하나님이 손수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낮고 천한 삶을 살다가 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거예요. 그래야만 비로소 사람의 죄악 된 뿌리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야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다시 본문을 봅시다.
우리는 이제 학습, 세례 문답서를 가지고 성경과 하나님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공부할 거예요. 이것을 머리로 이해할 수 없어요. 인간의 노력으로 알 수 없어요. 지혜를 지식으로 착각해서는 안 돼요. 우리 존재의 근원에는 죄악의 뿌리가 있지만, 아울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고자 하는 뿌리도 있어요.
그것을 증명하라면, 오늘 이렇게 저와 여러분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함께 하현교회를 이루어가는 거예요. 때론 의심이 생길 거예요. 이해가 가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을 거예요. 그럼, 고민하세요. 회의하고, 바로 그 깊이 있는 존재론적인 가치를 찾아 발버둥치세요.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하고 싶어요.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요. 사람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에요.
때로는 이 문제가 너무 복잡해서 차라리 하나님을 몰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생을 부인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이는, 그렇게 한다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서처럼 우리의 존재는 참으로 귀하고 거룩하기 때문이에요. 그 하나님이 나를 가지셨기 때문이에요. 나는 하나님의 것이에요. 그로 인해 세우심을 받았어요. 우리가 하는 일은 그 분을 경외하는 것이에요(9:10). 악을 미워하는 것이에요(8:13).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이 그 분의 사랑을 입는 것이에요(8:17).
우리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에요. 우리는 영원히 살 사람들이에요. 이 땅이 전부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을 따라 살지 마세요. 이 땅의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따라서 귀하게 여기지 마세요.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우리의 마음을 지키며 삽시다.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3:23). 이 말씀을 붙들고 삽시다. 나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명심하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 됩시다.
지혜, 창조영
잠 8;22~31 / 김근중 목사
구약의 <잠언>은 고대 유대인들의 지혜 문학서에 속합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금언이나 격언 모음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혜서는 구약에만 나오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의 탈무드도 이런 지혜서에 속합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헌에도 있습니다.
인도나 중국, 그리고 한민족에게도 지혜에 관한 문헌들은 적지 않습니다.
지혜 문학은 주로 문명권에 남아 있지만, 문명과 담을 쌓고 사는 원시 민족에게도 이런 지혜는 남아 있습니다. 문자가 없다 하더라도 구전으로나마 남아 있습니다. 족장이나 추장들, 그리고 원로들이 바로 지혜 담지자들입니다.
지혜가 무엇일까요? 가장 일반적으로는 머리가 좋다는 것을 뜻합니다. 똑똑하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암기력이나 분석력을 지혜의 기준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것을 ‘지적인 몫’이라는 뜻의 IQ(intelligence quotient)로 표시합니다.
우리나라의 평균 아이큐는 100-110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좋게 하는 영양제도 있다고 합니다. 유전공학이 앞으로 획기적으로 발달하면 모든 아이들이 최고의 아이큐를 갖고 태어날지도 모릅니다. 머리가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머리가 좋아야만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좋아야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노벨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세상을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컴퓨터를 만든 사람은 분명히 머리가 좋을 겁니다.
심장수술을 하는 의사들도 머리가 좋겠지요.
피카소나 정명훈 같은 예술가들도 머리가 좋겠지요.
이런 점에서 머리가 좋은 것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머리가 좋은 것이, 즉 똑똑한 것이 반드시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머리가 좋다거나 똑똑한 것은 악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다시피 악한 사람도 머리는 좋습니다. 한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전쟁은 그 어떤 이유에서도 악입니다.
예> 미국은 2003년 3월에 이라크와 전쟁을 벌였습니다. 미국의 일방적인 선전포고였습니다. 아직도 그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인 이유는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습니다. 전쟁이 어느 정도 정리된 뒤에 미국이 밝힌 사실이기도 합니다. 대량살상무기가 이라크에 있다는 정보는 미국 정보국에서 나왔던 겁니다. 거기에 종사하는 분들은 머리가 좋습니다. 좋은 머리에서 나온 거짓된 정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삶의 근거를 잃고, 불구가 되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런 좋은 머리를 지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혜는 착한 성품을 가리킬까요?
착한 사람이 상황을 늘 바르게 판단하는 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이 대중 선동에 놀아나기도 쉽습니다. 그렇다면 ‘감성지수’를 가리키는 EQ(emotional quotient)가 지혜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이큐의 강조는 지성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착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긴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히틀러도 음악을 좋아했습니다.
네로도 눈물을 많이 흘린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도덕적인 지수인 MQ(moral quotient)가 더 중요한 건가요? 도덕적인 사람은 복음서에 묘사된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자기중심적일 가능성이 다른 사람들에게 비해서 훨씬 높습니다. 인간이 옳다고 판단하는 지성, 도덕성, 감성이 지혜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혜가 무엇인가요? 성경은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하나요?
지혜의 존재론적 능력
오늘 설교 본문인 잠언 8:22-31절은 지혜를 의인화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바로 지혜입니다.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참으로 놀라운 진술입니다. 태초 이전에 이미 지혜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지혜의 선재성을, 지혜의 존재론적 능력을 가립니다.
22-26절에서 이것이 반복됩니다. 땅, 바다, 산, 언덕, 들, 진토의 근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지혜는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의 시작인 태초는 우주물리학에서 120억 년 전입니다. 그때부터 우주에는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어떻게 무엇인가가 나오느냐는 겁니다.
이 세상의 원리에서 본다면 결과는 원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의 이 세상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지혜가 존재했다면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 어떤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태초 이전에 존재하는 분은 하나님이고, 지혜가 태초 이전에 존재한 능력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하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좀 더 자세하게 보십시오.
22절은 여호와께서 태초에 일하기 전에 ‘나를 가지셨’다고 했으며,
23절은 ‘내가 세움을 받았다’고 했고,
24절은 ‘내가 이미 났고’,
25절도 역시 ‘내가 이미 났다’고 했습니다.
이런 구절을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지혜와 하나님이 구별됩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새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태초 이전의 차원에서는 주객개념에서 나온 ‘만든다’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만든다는 말, 또는 피조되었다는 말은 이 세계가 시작된 이후에만 통합니다. 지혜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초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어떤 능력입니다. 그렇게 존재하는 지혜는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방식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이런 설명이 좀 복잡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친근한 요한복음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겁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복음서 쓰기를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여기서 말씀은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언어, 이성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로고스가 태초에 존재했다면 로고스는 잠언이 말하는 지혜와 똑같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는 로고스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 로고스, 지혜는 일치합니다. 지혜가 바로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에서 본다면 로고스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 일치한 분입니다.
이게 과연 말이 될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태초 이후에, 그것도 역사가 한참 흐른 후에 이 세상에서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입니다. 역사의 한계 안에서 살았던 그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한 로고스라는 말은 예수님은 역사를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이런 걸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면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겠지요. 이해가 되어야 믿을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과 기독교의 가르침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문제를 풀어줄 키워드는 ‘성령’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 영을 ‘진리의 영’(프뉴마 테스 알레테이아스)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제자들을 진리로 인도할 것이라는 뜻입니다(요 16:13)
진리의 영이라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진리는 말 그대로 참된 것입니다.
진리의 영은 숨어 있던 진리를 밖으로 끌어내는 힘입니다.
예컨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우주의 역학을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진리의 힘에 의한 것입니다. 원소 주기율표가 있는데, 그런 원소의 속성이 밝혀지는 것도 역시 진리의 힘 때문입니다. 그 진리의 힘이 곧 성령입니다.
요한복음은 그 진리의 성령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요 16:14)
여기서 예수님의 영광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가리킵니다. 무슨 말인가요? 부활은 성령의 활동입니다. 부활을 인식하는 것도 역시 성령의 일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이 태초 이전에 존재한 로고스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바로 궁극적인 진리였습니다. 궁극적인 진리를 알게 하는 성령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성령의 임재와 성령 경험을 강조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예수님의 부활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대한 구약의 다른 용어가 바로 오늘 설교의 주제인 지혜입니다.
창조의 영
어떤 기독교인들은 성령은 무조건 열광적인 은사의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 방언, 신유, 입신 등등의 현상 말입니다. 그런 현상들은 성령 임재의 특수한 결과들입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기능적인 차원에서도 설명했습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의 일도 은사입니다.(고전 12:28)
이런 은사들은 각자가 섬기는 차원에서 감당하기만 하면 됩니다. 문제는 이런 것만을 성령 임재의 모든 것처럼 주장하는 겁니다. 부분적인 현상을 전체적인 것처럼 오도하는 잘못입니다. 성령은 전체적인 차원에서 지혜의 영입니다. 지혜의 능력입니다. 태초 이전부터 하나님과 하나였던 힘입니다. 지혜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잠언은 그 사실을 오늘 본문 후반부(27-31)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을 만드실 때 지혜가 거기 있었다고 합니다.(27)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고 바다의 샘을 힘 있게 하고(28)
바다의 한계를 정하고 땅의 기초를 정할 때에(29) 하나님 곁에 있었습니다.
‘창조자’가 되어 그 창조 행위를 즐거워했고,(30)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고, 인자들을 기뻐했다고 합니다.(31)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한 창세기 1장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잠언이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혜는 곧 창조자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창조자라는 말은 참으로 놀라운 진술이지만,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으로는 받아들이기가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혜롭다거나 하나님에게는 참된 지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가 곧 창조자 하나님이라니요.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권능이, 또는 하나님의 인격성이 훼손될 것 같아서 불편합니다. 불편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불편한 생각은 우리의 선입관 때문에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구름 타고 다니는 도인처럼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옥황상제처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으로 천국에 가서도 더 좋은 상급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는 것이 곧 우상숭배라는 겁니다.
여러분, 지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잠언은 지혜라는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전한 것입니다. 지혜는 바로 창조자라고 말입니다. 이를 거꾸로 하면 창조자가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게 허투루 나온 말이 아닙니다.
다시 잠언 8:22-31절의 설명을 보십시오. 크게 보면 두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는 지혜의 선재성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창조성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지혜가 창조 사건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언 기자가 전하는 단어를 나열하겠습니다. 태초, 땅, 바다, 큰 샘, 산, 언덕, 들, 진토, 하늘, 궁창, 구름 하늘, 바다의 샘, 바다의 한계, 땅의 기초가 그것입니다. 잠언 기자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계가 얼마나 장엄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우주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 무엇인지 그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런 것이 어떻게 운용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모든 인식 능력을 뛰어넘는 그 세계의 창조 능력이 바로 ‘호크마’, 즉 지혜라는 겁니다.
잠언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미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라고 보고, 이런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의 과학적 지식은 우리에 비해서 훨씬 부족했지만 세계 전체 앞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의 지식과 별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세계 앞에서 미숙하기는 그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우주의 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시간이 왜 거꾸로는 가지 않는지 모릅니다. 세월이 흐르면 젊어지고 어린애로 돌아가지 않고, 늙기만 하는 이유를 모릅니다. 왜 식물만 탄소동화작용을 하고 사람은 하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원리만 알지 근본 원인은 잘 모릅니다. 고대인들이나 우리가 세상 전체 앞에서 어린아이라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피조물의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종말이 될 때까지 이런 속성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론적 한계를 넘어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끌어가는 능력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요한복음이 말하는 로고스이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낸 성령입니다.
위의 설교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미 답이 주어졌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잠언이 말하는 창조의 신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적인 눈을 뜨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창조자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이런 관점은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거나 이용해서 편리하게 살아보자는 인간 중심의 욕구가 아닙니다. 창조의 신비에 대한 영적 통찰이며 인식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서 자연과학자와 시인과 예술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눈을 통해서 우리는 창조의 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창조의 지혜인 로고스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과 경험입니다. 그런 인식과 경험 없이 우리가 어떻게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부활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은 창조의 영입니다. 성령은 부활의 영입니다. 진리의 영이며, 생명의 영입니다. 그 영은 우리가 규정하거나 계량할 수 없는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그 영이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리시어 영광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이 성령이 여러분을 창조하셨고, 마지막 때 부활 생명을 주실 겁니다. 그를 찬양하십시오.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김정우 목사
1. 들어가는 말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전에 태어나 창조의 모
든 과정에 증인이 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하고 축하하고 있다. 이런
지혜의 모습은 구약의 지혜 문학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서 유일무이하며, 신
약성경에서도 그 유비를 찾기 어렵다. 또한 현 본문에서 의인화된 지혜는 천지창
조의 주요 과정을 모두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제시되고 있는 천지창조의
과정이 다른 본문들(예, 창 1:1‐2:3; 시 104:1‐35; 욥 38:1‐38)에 나타나는 우주관
및 창조의 과정과 어떤 유사성과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진다.1) 또한 해석
사적 관점에서 보면 현 본문에 등장하는 지혜는 신약성경에 나오는 로고스로서
의 그리스도와 깊은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요 1:3; 골 1:15‐17; 계 3:14), 초
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을 심각하게 불러 일으켜
왔다.2)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여기에 등장하는 지혜의 모습이 이집트 신화와 세
계관에 등장하고 있는 지혜와 많은 유사성을 갖고 있으므로, 히브리 지혜(호크
마)와 이집트의 지혜(마아트) 사이에 있는 상호 연관성 문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
지고 있다.3) 그렇지만, 현재의 히브리어 본문은 너무나 까다롭기 때문에, 한 단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 구약학.
1) 이 본문과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전통 관계는 여러 가지 복잡한 차원을 담고 있으므로 이 논
문에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현재의 문맥은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 전통과도 일맥상통하고 있
기 때문에, 창세기의 전통에 대한 지혜문학적 각색으로 볼 수도 있다. George M, Landes,
“Creation Tradition in Proverbs 8:22‐31 and Genesis 1”, H. N. Beam, et al., eds., A Light unto
my Path; Gettysburg Theological Studies IV (Philadelphia: Temple Uni. Press, 1974), 279‐293.
Roland E. Murphy, “Wisdom and Creation [SBL presidential address, 1984]”, JBL 104 (1985),
3‐11.
2) 아리우스는 본문에 나오는 지혜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한 후, 8:22의 동사 (hnq)를 ‘창조하다’로
번역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로서(고전 1:24) ‘창조되었으므로’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종속한다고 보았으며, 이와 반면에 아타나시우스는 ‘창조의 머리로 세우셨다’(constituted me as
head of creation)로 번역하여 삼위일체 논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R. B. Y. Scott, Proverbs,
Ecclesiastes (Garden City: Doubleday, 1965), 73.
8 성경원문연구 제24호
어, 한 구, 한 절을 해석해 내는 것도 쉽지 않으며, 고대와 현대의 번역본마다 매
우 다른 번역을 제시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본고에서 새로운 번역을 시도함으로
써, 여기에 등장하는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찾아내고 히브리
우주관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간접적으로 경험해 보고자 한다.
이 단락의 구조에 대하여 많은 제안들이 제시되었다.4) 알레티는 이 시를 크게
두 연으로 나누고 있다(22‐26, 27‐31절). 그가 볼 때, ‘그가 하늘을 세우실 때 내가
거기 있었다’(27절)는 구는 ‘나는 날마다 그의 곁에 있었다’와 연결된다고 본
다.5) 그렇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를 세 연으로 분석한다(22‐26, 27‐29, 30‐
31절).6) 대표적으로 게일 이(Gale Yee)는 이 세 연의 구분점에 수사학적 장치들
이 있음을 확증해 주고 있다. 즉, 제 1연은 ‘야웨께서 나를 낳으셨다’(22절)로 시
작하며, ‘그가 땅과 들도 만들지 않았다’(26절)로 마치고 있으며, 제 2연은 ‘내가
거기 있었다’(27절)로 시작하고 ‘내가 그의 곁에 있었다’로 마치며(30상반), 제 3
연은 ‘내가 날마다 기뻐하였다’(30하반)로 시작하여, ‘내가 사람들을 기뻐하였
다’로 마치고 있음을 잘 지적하였다(31절).7) 우리도 이 단락을 아래와 같이 크게
세 연으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1) 우주 창조 전에 태어난 지혜(22‐26절)
(2) 우주 창조 과정에서의 지혜(27‐29절)
(3) 우주 창조를 축하하는 지혜(30‐31절)
3) 이 본문은 이집트 지혜 문학과 너무나 유사성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에, 이집트 지혜를 이스라엘
의 유일신앙으로 가공하고, 지혜의 근원을 태고 이전으로 끌어 올린 후 현재의 자리에 넣은 것으
로 주장하는 학자들이 많이 있다. 이에 대한 토론으로서 Hans P. Rüger, “'Amôn ‐ Pflegekind: zur
Auslegungsgeschichte von Prv 8:30a”, Ubersetzung und Deutung. D. Barthélemy, et al, eds.,
1977. Roger Norman Whybray, “Proverbs 8:22‐31 and its Supposed Prototypes”, VT 15 (1965),
504‐514 참조.
4) 대표적인 잠언 학자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예, Toy, Oesterley)은 본 단락의 구조에 대해서는 별
로 관심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Crawford Howell Toy,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Book of Proverbs (Edinburgh: T. & T. Clark, 1899). W. O. E. Oesterley, The Book of
Proverbs (London: Methuen, 1929).
5) Jean Noël Aletti, “Proverbes 8:22‐31: Étude de Structure”, Bib 57 (1976), 25‐37. 그는 또한 30절
의 ‘그리고 나는 함께 하였다’가 제 3연의 시작점이라기보다 제 2연과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논
증한다.
6) 대표적으로, Patrick W. Skehan, “Structures in Poems on Wisdom: Proverbs 8 and Sirach 24”,
CBQ 41(1979), 365‐379을 보라. 그는 자신의 구조 분석의 근거를 어휘적으로 상세히 분석하며
제시하고 있다. Maurice Gilbert, “Le Discours de la Sagesse en Proverbs 8: Structure et
Coherence”, M. Gilbert, et al., ed., La Sagesse de l'Ancien Testament (Leuven: University Press,
1979), 202‐218 참조.
7) Gale A. Yee, “An Analysis of Pro 8:22‐31 According to Style and Structure”, ZAW 94 (1982),
58‐66.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9
주어의 인칭 변화의 관점에서 볼 때 제 1연(22‐26절)은 ‘그’(22절)와 ‘나’(23
절), ‘나’(24-25절)와 ‘그’(26절)의 교차대구를 이룬다. 제 2연(27‐29절)은 ‘그’가
중심을 이루며, 제 3연(30‐31절)은 ‘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리하여 제 1연
의 ‘그’와 ‘나’가 제 2연에서는 ‘그’를, 제 3연에서는 ‘나’를 중심으로 심화되어
가고 있다. 동사도 제 1연의 ‘낳았다’와 ‘태어나다’에서, 2연으로 넘어가면 ‘그곳
에 있었다’로 넘어가며, 3연에서는 ‘기뻐하였다’, ‘즐거워하였다’로 넘어간다. 시
간과 장소의 부사적 관점에서 보면, 제 1연은 ‘~전’(~d,q, ymed>Q;mi)에서 출발하여
(22, 23절), ‘아직 ~이 없었을 때’(!yaeB.)로 나아가며, 2연은 ‘그곳에’(~v' 27절), 3
연은 ‘곁에’(lc ,ae 30절)로 넘어가고 있다. 이리하여 각 연의 구별과 흐름을 만들
고 있다. 지혜는 자신 존재의 ‘고대성’(22‐26절), 자기 지식의 ‘원천성’(27‐29절),
그리고 ‘주님 및 사람과의 연합’ (30‐31절)에 근거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가르침
을 받도록 호소하고 있다(32‐36절).
2. 우주 창조 전에 태어난 지혜(22‐26절)
본 단락은 아래와 같이 두 개의 소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2.1. 요약적 진술: 주께서 창조 전에 지혜를 낳으심(22‐23절)
2.2. 창조 직전의 부정적 상황(24‐26절)
첫 단락(22‐23절)에서는 우주의 창조 전에 (1) 주님께서 지혜를 낳으시고(22
절), (2) 지혜는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23절). 둘째 단락(24‐26절)에서는 지혜가
목격한 창조 직전의 부정적 상황으로써, (1) 물이 있기 전(24절), (2) 산이 있기 전
(25절), (3) 땅이 있기 전(26절)의 상황을 제시해 준다.
2.1. 요약적 진술: 주께서 창조 전에 지혜를 낳으심(22‐23절)
`za'(me wyl'ä['p.mi ~d<q<ß AK+r>D: tyviäarE ynIn"q'â hw"©hy>) 22
평범하게 보이는 이 짧은 한 절은 논쟁이 없는 단어가 없을 정도로 어렵고 복
잡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8) 이 절에서 유일하게 나오는 동사인 ‘가졌다’(ꡔ개역ꡕ,
8) Johannes B, Bauer, “Encore une Fois Proverbes 8:22”, VT 8 (1958), 91‐92. Bruce Vawter, “Pro
8:22: Wisdom and Creation”, JBL 99 (1980), 205‐216 참조.
10 성경원문연구 제24호
hnq)는 히브리어 사전에서 (1) 사다(to buy), (2) 얻다, 획득하다(to acquire), (3)
창조하다(to create)는 의미를 기본적으로 가지며(HALOT), 우리말 성경에서 ‘가
졌다’(ꡔ개역ꡕ), ‘지었다’(ꡔ공동ꡕ), ‘데리고 계셨다’(ꡔ표준ꡕ)로 달라지고 있다. 연
구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1926년 버니(Burney)는 처음으로 이 동사(qana)에
대하여 다섯 가지 의미를 잘 정리하여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9)
(1) ‘사다’(to buy, 창 47:22; 잠 20:14 등).
(2) 구매한 권리에 의하여 ‘소유하다’(to own, 사 1:3, ‘그 주인’).
(3) 구매한 방법이 아니고 ‘획득하다’(to acquire, 출 15:16; 시 74:2;
78:54; 잠 1:5 등).
(4) ‘낳다’(to beget; 신 32:6; 잠 8:22), ‘얻다’(to get, 낳아서 얻음; 창
4:1).
(5) ‘창조하다’(to create, 창 14:19, 2; 시 139:13).
위의 다섯 가지 의미 중에서 버니(Burney)는 이 단어가 ‘이전에 소유하지 못했
던 것을 얻는다’는 뜻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얻음은 사거
나, 만들거나, 낳거나 (아기인 경우), 마음 속에서 계속 생각함으로 (지혜인 경우)
이루어진다”.10) 위에 제시된 (1) ‘사다’(to buy)와 (2) ‘구매에 의한 소유’(to own)
는 하나님에게 적용될 수 없으므로, 번역사를 살펴보면 세 가지 방향으로 번역되
어 왔다.
(1) 고대의 그리스 역본들인 아퀼라, 심마쿠스, 데오도션 (e;kesan), 그리고 제롬
과 불가타(possedit)와 근‐현대의 여러 번역본들(Luther, KJV, NASB)은 ‘나를 소
유하였다’(possessed me)로 번역하고 있다. 이 번역은 잠언에 나오는 ‘카
나’(qana)의 용법과 매우 잘 어울리고 있다. 예로써, 이 동사는 ‘모략을 얻다’(잠
1:5), ‘지혜를 얻고, 명철을 얻어라’(4:5, ꡔ표준ꡕ), ‘지식을 얻다’(18:15)라는 용법
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혜를 어떻게 소유하였는가?”라는 질
문을 던진다면, 그 대답이 선명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공부하고
생각하여 지혜를 소유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원래부터 지혜로우시므로, 구태여
‘지혜를 새롭게 소유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불필요한 사족처럼 들리게 된
다. 물론 스콧은 하나님께서 지혜가 최초로 등장하던 시점에 ‘하나의 속성이나
기능으로(as a function or attribute) 지혜를 가졌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지
9) C. F. Burney, “Christ as the Arke of Creation”, JTS 27 (1926),160‐177. 버니의 입장은 윤영탁,
“잠언 8:22에 나타난 ‘카나니’(나를 가지셨다)에 관한 고찰’ ꡔ구약신학과 신앙ꡕ(엠마오, 1991),
100에서 잘 소개되고 있다.
10) 윤영탁, ꡔ구약신학과 신앙ꡕ, 100.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11
만,11) 현재 문맥에서 지혜는 독자적 인격을 갖고 있으므로 이 번역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2) 고대의 번역 중 70인역(e;ktise,n), 시리아역(brni),12) 탈굼(arb)은 ‘창조하
다’로 번역하고, 현대에 와서는 RSV, NEB, Japanese NIT 등이 이 번역을 따르고
있다. 주석가들로서 최근에는 슈미트와 올브라잇과 마인홀드(Meinhold) 등이 이
번역을 옹호하고 있다.13)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의 실제적인 용법을 살펴보면,
‘소유하다’ 보다 ‘창조하다’는 뜻이 문맥에 더 잘 어울리는 경우들이 여러 번 나
타나고 있다. 예로써, ‘너희를 지으신 아버지’(신 32:6), ‘내 장기를 지으시며’
(시 139:13), ‘하늘과 땅을 만드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창 14:19, 22), ‘주께
서 지으신 것들’(!y"n>qi // hf,[]m;; 시 104:24)을 들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혜는 하나님의 천지창조가 시작되기 전 가장 먼저 지음을 받은 존재가 될 것이
다.
(3) 현대의 번역 중 소수의 역본들은 ‘낳다’라는 뜻으로 번역하고 있다(NIV
‘bring force’, TOB ‘engendrée’).14) 이 단어는 우가릿어와15) 구약성서에서 출
생과 양육의 맥락에서 등장하고 있다. 예로써, ‘내가 득남하였다’(창 4:1)와 “그
는 너를 낳으신 너의 아버지(^n<Q' ^ybia')가 아니냐 너를 지으시고(hf[) 세우셨도
다(!wk)”(신 32:6)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낳았다’는 개념은 구
약성경에서 너무나 생소해 보인다. 잠언의 세계관에서 하나님이 가나안의 신들
처럼 성적(性的) 관계를 통하여 신적인 존재를 태어나게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개념이지만, 출생 이미지를 은유적으로 본다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왜
냐하면, 잠언 8장의 현재의 맥락에서 지혜는 스스로 ‘내가 태어났다’(yTil.l'(Ax)라
고 말한다(24, 25절). 만약 이 번역이 옳다면, 하나님은 태초의 천지창조가 이루
어지기 전에 지혜를 독자적인 인격으로 ‘낳아서’ 가지셨다. 여기에서 ‘출산’ 이미
지는 은유적이다. 즉, 지혜는 마치 출생처럼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왔으므로 하나
님과 온전한 통일성을 갖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지혜는 주님과 연대성을 갖고
11) Scott, Proverbs, Ecclesiastes, 73.
12) The Peshitta Institute, The Old Testament in Syriac according to the Peshi tta version,
Proverbs-Song of Songs (Leiden : Brill, 1972), 13.
13) Hans H. Schmid, Gerechtigkeit als Weltordung, BHT 40 (Tuebingen: J.C.B. Mohr, 1968),150.
W. F. Albright, “Some Canaanite‐Phoenician Sources of Hebrew Wisdom”, M. Noth and D. W.
Thomas, eds., Wisdom in Israel and in the Ancient Near East. SVT 3 (Leiden: E. J. Brill,
1955), 1‐12. Arnst Meinhold, Die Sprüche, Zürcher Bibelkommentare 16 (Zürich:
Theologischer Verlag, 1991).
14) W. A. Irwin, “Where Shall Wisdom be Found?”, JBL 80 (1961), 133‐42.
15) 라스 샤므라 비문에서 아세라는 ‘신들을 낳은 자’(qnyt ilm, ‘she who gives birth to the gods’),
엘은 ‘피조물의 창조자’ 혹은 ‘피조물을 낳은 자’(bny bnwt, begetter of creatures)로 불리고 있
다. M. Dahood, “Proverbs 8:22‐31: Translation and Commentary”, CBQ 30 (1968), 513.
12 성경원문연구 제24호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으며, 창조 전에 등장한 존재로서 창조 활
동에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고, 주님에게 소유되고 있으나 또한 장차 사람들에게
도 소유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32‐36절).
정리하자면, 히브리어 동사 카나(hnq)에 대하여 위에 제시된 세 가지 번역에
있어서 첫째 번역인 ‘획득하다’(to acquire) 혹은 ‘소유하다’(to possess)는 원래
하나님에게 없었던 것을 새로 얻게 되었다는 느낌을 제시하므로 본문에 어울리
지 않는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따라서 두 번째 번역인 ‘창조하다’(to create)와
세 번째 번역인 ‘낳다’(to beget)가 가능해지는데, 두 번역 모두 지혜의 피조성과
출산의 개념을 제시하므로 기독교 독자들에게는 모두 낯설 수 있다. 바로 이 점
에 대하여 민영진은 한 낱말이 갖는 ‘지시적 의미’(referential meaning), ‘함축적
의미’(connotative meaning), ‘비유적 의미’(figurative meaning)로 지혜롭게 해결
하고 있다. 즉, 우리가 ‘창조하다’ 혹은 ‘낳다’로 번역할 때 그것은 사실에 대한
묘사(즉, 지시적 의미)라기보다, 비유적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16)
이 절을 구문론적으로 볼 때, 전통적인 번역들은 대부분 주어(hwhy) + 동사
(hnq) + 목적어(ynI)에 이어 두 개의 부사구(AK+r>D: tyviäarE; za'(me wyl'ä['p.mi ~d<q<ß)로 분석
하고 있다. 만약 이런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면, 두 개의 부사구는 지혜가 태어난
시간대를 제시해 주게 된다.17) 그러나 최근의 번역들(NIV, NIB, JPS, NJB)과 학
자들(Savignac, Vawter, Waltke)은 이것을 시간의 부사구 대신에 ‘방식의 대
격’(accusative of manner)으로 보고18) 특히 제 1행을 “야웨께서 나를 그의 행적
16) 민영진, “잠언 8장 22절의 ‘카나니(QANANI)’ 재론”, ꡔ지혜 전승과 설교: 구덕관박사회갑기념
논문집ꡕ(대한기독교서회, 1991), 85. 그는 최종적으로 ‘나를 데리고 계셨다’로 제안한다(91-92
쪽). 한국학자들로서 이 본문에 대하여 다룬 글로는, 노세영, “지혜문학에 나타난 창조신학”, 「
신학사상(TheTheologicalThought)」 85 (한국신학연구소, 1994), 94-118. 박종수(朴鍾洙), “잠
언서에 나타난 여성의 지혜: 8:22-31장과 31:10-31”, 「강남대학논문집」 25 (강남대학, 1994),
9-31.박철우, “잠언 8-9장 번역상의 주요 난제들”, 「복음과신학」 3 (나사렛신학대학, 1991),
51-61. 천사무엘, “지혜를 사랑하라 잠 8:1-36”, 「성경연구」 43 (한국성경연구원, 1998), 1-13.
천사무엘, “구약성서의 지혜문학과 창조신앙”, 「기독교문화연구」 2 (한남대기독교문화연구소,
1997), 305-319, 등을 참조하라.
17) 첫 시간 부사구(레쉬트 다르코)는 우리 말 성경에서 ‘조화의 시작’(ꡔ개역ꡕ, 개정), ‘만물을 지으
시려던 한 처음에’(ꡔ공동ꡕ), ‘일을 시작하시던 그 태초에’(ꡔ표준ꡕ)로 번역되며, 외국어 번역
에서는 ‘at the beginning of his work’(NRS), ‘at the beginning of His way’(NAS), ‘im Anfang
seiner Wege’(Lut), ‘prémice de son activité’(TOB)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18) 이 입장은 가장 먼저 싸비냑이 제시하게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번역본에 반영되었다. Jean de
Savignac, “Note sur le Sens du Verset 8.22 dans Proverbes”, VT 4 (1954), 429‐432. B. Vawter,
“Proverb 8:22: Wisdom and Creation”, JBL 99 (1980), 206. ‘방식의 대격’(accusative of
manner)이란 “동작이 수행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로써, “거만하게 다니다”(미 2:3),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섬기다”(습 3:9), “너희가 공정하게 판단하느냐?”(시 58:1 [히 2]). Bruce K. Waltke
and M. O'Connor, An Introduction to biblical Hebrew Syntax (Winona Lake: Eisenbrauns,
1990), 172.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13
의 ‘으뜸’(chief, best, principle)으로 낳으셨다(혹은 가지셨다)”로 번역한다(잠
4:7; 렘 49:35).19)
그러나 여기의 두 구를 ‘시간의 대격’(accusative of time)으로 보는 것이 어휘
들의 용례와 문맥으로 볼 때 더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20) 먼저 문맥을 볼 때, 22
‐26절과 특히 22‐23절은 시간을 이끄는 구들로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영원
전’, ‘땅이 생기기 전’, ‘바다와 샘이 생기기 전’, ‘산의 기초가 생기기 전’ 등). 또
한 고대의 역본들도 시간의 부사로 읽고 있으며(LXX, avrch.n), 특히 탈굼에서는
시간을 가리키는 전치사 베(vyrb)를 붙여 읽고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태초
에’(tyviarEB.)를 표현할 때 전치사 베(b)를 함께 붙이지만(창 1:1; 렘 26:1), 전치사
없이도 동일한 ‘태초’를 가리킬 수 있다(창 10:10). 물론 ‘시작’(tyviarE)이란 단어
는 (1) 질에 있어서 ‘최고 혹은 가장 중요한 것’(암 6:1; 렘 49:35),21) (2) 시간적으
로 첫째(창 10:10), (3) 장자(창 49:3; 시 105:36), (4) 첫 단계(미 1:13; 잠 4:7; 욥
8:7; 42:12), (5) 주요 원리(잠 1:7; 4:7; 렘 49:35)를 뜻할 수 있다.22) 그러나 현재
의 문맥에서는 ‘태초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태초에’와 속격(genitive) 관계를 이루고 있는 단어인 ‘그의 길’(AKr>D:) 역시 번
역에 있어서 매우 까다롭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길’(way)을 가리키지만, 올
브라잇은 우가릿어(drkt, royal dominion)에 근거하여, ‘고귀함(nobility), 주권
(dominion)’으로,23) 코흐(Koch)는 ‘힘, 권세’(잠 8:22; 10:29; 욥 40:19)로 제안한
다.24) 이렇게 본다면, 지혜는 하나님 권세의 으뜸으로 태어나게 된다. 이 번역은
히브리어와 우가릿어에서 확증되고 있지만,25) 현재의 문맥에서는 썩 어울리는
19) “The LORD brought me forth as the first of his works”(NIV), “Yahweh created me, first‐fruits
of his fashioning”(NIB), “The LORD made me as the beginning of His way, the first of His
works of old”(JPS). “Yahweh created me, first‐fruits of his fashioning”(NJB). 다후드(Dahood)
는 두 번째 단어 ~d<q<ß에 대해서도 ‘태고자’(Primeval) 혹은 ‘영원자’(the Eternal)로 번역하고 있
다. Dahood, “Proverbs 8:22‐31”, 513‐514.
20) Waltke and O'Connor, An Introduction to biblical Hebrew, 171. 그들은 시간의 대격에 대한 예
로써 사무엘상 27:1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예레미야 28:16 “금
년에 네가 죽을 것이다”, 시편 55:18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내가 탄식하면서”를
들고 있다.
21) Irwin, “Where Shall Wisdom Be Found?” 140.
22) 사비냑(Savignac)은 ‘야웨의 창조적 활동의 원리로서 나를 창조하였다’로 본다. Savignac,
“Note sur le Sens du Verset 8:22”, 429 ‐432.
23) W. F. Albright, “The Oracle of Balaam”, JBL 63 (1943), 219.
24) K. Koch, TDOT, 3:286 (derekh).
25) HALOT는 derek이 ‘힘, 권세, 능력’을 뜻하는 경우로서 몇몇 본문을 제시한다(렘 3:13; 시
138:5; 잠 31:3; 호 10:13 [‘용사’와 평행을 이룸]). 우리는 시 67:2 [히 2절]도 추가할 수 있을 것
이다. 우가릿어(CTA 2:iv:10, 13; 4:vii:44; 14:22; 16:vi:38)에서 이런 용법으로 나오는 것에 대
해서는 Dahood, “Proverbs 8:22‐31”, 514; J. B. Bauer, “Encor une Fois Proverbes VIII.22”, VT
8 (1958), 91‐92; Cleon Louis Rogers, “An Exegetical and Theological Study of Proverbs 8”
14 성경원문연구 제24호
것 같지 않다. 폭스는 “이 의미는 문맥에 따라 결정된다… 데렉(Derek)은 문제시
된 ‘길’ 혹은 ‘행동’이 통치력과 연관될 때 ‘다스림’을 뜻하지만, 이것은 여기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잘 말했다.26) 왈키 역시 “현재의 문맥에서 지혜는 하나님의
능력의 우월성보다는 창조계에 있어서 시간적 우월성이 부각되고 있음”을 잘 파
악하였다.27)
제 1행에 나오는 ‘행위’(%r,D,)는 제 2행의 ‘행적’(l['p.mi)과 자연스럽게 평행을
이루고 있다(시 46:8[9]; 66:5). 구약성서에서 ‘행위’(derek)는 ‘행적’(po‘al)과 자
주 대구를 이루는데(신 32:4; 잠 10:29; 21:8; 30:20; 렘 50:29), 오직 여기에서만
그 분사형 명사(남성 복수)와 평행을 이루고 있다. 여기의 ‘행적들’은 이후 24‐29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들을 가리킨다.
제 1행에서 지혜는 ‘태초에 하나님의 작업이 처음 시작할 때’ 등장하였는데,
제 2행에서는 이 시점을 좀 더 예리하게 초점화시키고 있다. 즉, 지혜는 ‘오래 전
그의 행적들이 있기 전”(za'(me wyl'ä['p.mi ~d<q<ß)에 등장하였다. ‘오래 전’(za '(me)은 단 한
번 ‘영원 전’(~l'A[me)과 평행을 이루고 나타나지만(시 93:2), 홀로 나타날 때 현재
로부터의 시간적 거리는 문맥에 따라 상대적으로 결정된다(사 45:21; 48:3, 5; 시
93:2).
요약하자면, 이렇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시작하시던 태초에’(제 1
행), 즉 ‘오래 전 하나님의 창조 활동이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등장
하게 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두 개의 시간대는 서로 다른 시간대가 아니라 하나
의 시간대를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즉, 지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존재들(즉, 땅[23절], 바다[24절], 산 [25절], 들[26절])도 나타나기 전에
등장하였다. 그는 창조의 ‘첫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첫 창조가 이루어지기 전에
등장하였다.
`#r<a'(-ymed>Q;mi varoªme yTik.S;înI ~l'A[meâ 23
22절의 지혜의 출현 시기는 23절에서 다시 한 번 더 세 개의 시간 구를 통하여
삼중적으로 보강되어 제시된다.
(1) ‘만세 전부터’(~l'A[me, ꡔ개역ꡕ)는 직역을 하자면 ‘영원 전부터’(ꡔ표준ꡕ)가
되지만, 현재의 본문은 ‘지혜의 영원성’이 아니라, 지혜의 출생 시점을 말하고 있
기 때문에 이 구를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 구는 역사 속의 시간으로서 ‘고
(Ann Arbor: U.M.I., 1991), 104를 보라.
26) Michael V. Fox, Proverbs 1‐9: A New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and Commentary (New
York: Doubleday, 2000), 281.
27) Waltke, The Book of Proverbs, 1, 410.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15
대’(ꡔ개역ꡕ, 창 6:4), ‘옛적부터’(렘 2:20), ‘옛날부터’(ꡔ표준ꡕ, 렘 28:8) 등으로 사
용되고 있으므로, ‘아직 시간을 정할 수 없는 영원 전’을 가리킨다고 보기 어렵다.
히브리어에서 ‘영원’은 무한대의 시간이 아니라, ‘지속성’의 개념을 더 부각하고
있으며 ‘가장 먼 과거와 미래’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2) ‘상고부터’(varome, ꡔ개역ꡕ)는 ‘태초부터’(ꡔ개역개정ꡕ), ‘그 옛날’(ꡔ공동ꡕ),
‘아득한 그 옛날’(ꡔ표준ꡕ) 등으로 번역되고 있으며, 직역하자면 ‘머리(varo)로부
터’이지만 시간을 가리킬 때에는 ‘시작부터’라는 뜻으로 사용된다(사 40:21;
41:4, 26; 48:16). 이 단어는 바로 앞 절에 있는 ‘시작’(tyviare)과 동일한 어근을 갖
고 있으므로, 앞 절의 시간대와 동일한 시간을 설정해 준다.
(3) ‘땅이 생기기 전부터’(ꡔ개역ꡕ)는 이 절에서 측정 가능한 시간의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여기에서 ‘~전부터’(-ymed>Q;mi)는 바로 앞 절에 있는 ‘~전에(~d,q,)와 연
결되며, 따라서 22절의 ‘오래 전 그의 행적들이 시작되기 전’과 완벽하게 이어져
22‐23절이 4행(quatrain)을 이루게 한다. 의미론적으로 ‘~전부터’(-ymed>Q;mi)는 ‘이
전부터, 오래 전부터’(사 45:21; 46:10)28)와 ‘영원 전부터’(시 74:12; 77:6, 12;
143:5)라는 뜻을 동시에 갖고 있으나 현재의 문맥에서는 ‘땅이 생기던 가장 오랜
시간 전에’(from the earliest times of the earth)로 볼 수도 있게 된다.
이 절에서 지혜 출현의 시간을 알리는 세 개의 시간 부사는 ‘내가 세움을 입었
다’(yTik.S;nI)에 연결된다. 이 동사는 우리 말 성경에서는 ‘세움을 입었다’(ꡔ개역개
정ꡕ, ꡔ표준ꡕ)와 ‘모습을 갖추었다’(ꡔ공동ꡕ)로 번역이 갈라지며, 외국어 번역에서
도 ‘세움을 받다’(‘was appointed’, NIV, JPS, KJV, NET; ‘was set up’, RSV; ‘été
établie’, BFC, ‘été sacrée’ TOB; ‘bin eingesetzt’, Luther)와 ‘지음 받다’(‘was
fashioned’, NEB, NIV 난외주)로 제시된다. 이 동사는 크게 (1) (술, 물)을 ‘붓다’
(nasak I)와 (2) ‘(자리에) 세우다, 앉히다’(nasak II)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첫 번째 뜻은 현재의 문맥에 어울리지 않으며, 두 번째 뜻으로 본다면, 지혜는 ‘대
관식’의 배경 속에서 ‘기름 부음을 받고 왕/여왕으로 세움을 받는다는 뜻으로 해
석이 될 수 있다. 마치 시편 2장 6‐7절에서 새로운 왕이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
로 세움을 받으며’(nasak)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yalad)과 같이 지혜
가 주님에게서 태어나며 왕/여왕으로 세움 받는 영상을 우리는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70인역은 이런 관점에서 이 단어를 번역하였다(evqemeli,wse,n;
established). 이렇게 본다면, 지혜는 이후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있어서 능동적
으로 활동하는 것이 명시되지는 않지만,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잠언
에서 지혜는 통치의 능력으로써 그로 “말미암아 재상과 존귀한 자 곧 모든 의
로운 재판관들이 다스리므로”(잠 8:16), ‘왕으로 세우다’는 지혜의 성격 및 역할
28) E. Vogt, “Einige hebraeische Wortbedeutungen”, Biblica 48 (1967), 57‐74.
16 성경원문연구 제24호
에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본문에서 지혜가 대관식의 배경 가운데 (여)왕으로 책봉을 받는
것은 문맥에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오히려 ‘(베, 피륙을) 짜다’(to weave), ‘형
성하다’(to shape)는 동사($ks의 니팔형 HALOT),29) 혹은 ‘베, 피륙’(hk'Wsn>)이란
명사형(사 25:7)과 동일한 어근의 동사($sn 니팔형)로 볼 수 있다(HALOT).30) 따
라서 ‘나는 모습을 갖추었다’(I was fashioned)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
인다.31) 앞 절에서 지혜는 하나님에 의하여 ‘태어났는데’ 이제 지혜는 마치 온전
한 인격체처럼 ‘모습을 갖추고 있다’.
2.2. 창조 직전의 부정적 상황(24‐26절)
하나님의 천지 창조 직전에 등장한 지혜(22‐23절)가 이제는 하나님의 창조 활
동과 연관하여 소개되고 있다. 이리하여 창조의 두 축 가운데 첫 축을 이루는 시
간은 전치사 ‘~전에’(~d,q,, ymed>Q;mi)에서 ‘~이 없을 때’(!yaeB.)로 넘어가고 있으며,
둘째 축을 이루는 공간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
서 가장 낮은 ‘깊음’(24상반)에서 지면의 샘(24하반)을 거쳐, ‘산’(25상반)과 ‘언
덕’(25하반) 위에서 ‘넓은 땅과 들’(26절)을 바라본 후에, 가장 높은 ‘하늘’로 올
라가고 있다(27절). 이리하여 장차 사람들과 뭇 생물들이 살게 될 공간인 바다,
땅, 들이 넓게 그려지고 있다. 이리하여 폭스가 잘 말한 바와 같이 “창조는 현상
의 집합이 아니라 일관성 있는 파노라마”라는 인상을 잘 전하여주고 있다.32)
`~yIm")-yDEB;k.nI tAn©y"[.m;÷ !yaeîB. yTil.l'_Ax tAmïhoT.-!yaeB. 24
이 절에서는 ‘~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yaeîB.)가 두 번 반복되며(24상반, 24하
반), 지혜가 창조 전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강조하여 준다. 제 1행에서 지혜는 ‘바
다가 생기기 전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의 ‘바다’(ꡔ개역ꡕ)는 원어에
서 ‘깊음’(tAmhoT.)으로서 ‘태고의 심연’(창 1:2; 욥 38:16; 시 33:7; 104:6; 잠
29) 이 동사($ks)는 하나님께서 모태에서 태아의 형질을 만들어가는 데 사용된다(시 139:13하; 욥
10:11).
30) R. N. Whybray, Wisdom in Proverbs: The Concept of Wisdom in Proverbs 1‐9 (London: SCM,
1965), 101. 와이브레이에 따르면, 이 동사는 “은유적으로 임신의 과정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다.”
31) D. Barthelemy et al., Preliminary and Interim Report on the Hebrew Old Testament Text
Project (New York: United Bible Societies, Alliance Biblique Universelle, 1977‐1980), 466에
서는 ytiKos;n. (I was hidden/ I was cast / I was fashioned)로 읽도록 제안한다.
32) Fox, Proverbs, 282.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17
3:20), 혹은 ‘바다의 깊음’(135:6), 혹은 ‘바다 물’(출 15:5, 8; 시 106:9; 107:20)
등을 가리킬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태고의 심연’으로써 천지가 자리를 잡기 전
에 온 세상을 뒤덮고 있던 물(창 1:2)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
러워 보인다. 즉, 지혜는 ‘태고의 물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기 전’에 존재하게 되
었다. 현재의 본문을 창세기 1장과 비교해 본다면, 창세기에서 ‘깊음’(혹은 바다)
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빛이 나타나기 전(1:3)에 이미 ‘혼
돈과 공허’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1:2). 그러나 잠언 8장에서 ‘깊음’은 주님의
창조 과정으로 나타나며, 지혜는 ‘깊음’ 전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하여 왈키는, “물이 땅을 덮기 전의 상태에 대한 묘사는 구약성경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지만, 성경의 각 권은 그 자체의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허락되어야 한
다”고 잘 말했다.33)
제 1행의 ‘심연’과 평행을 이루는 제 2행의 ‘샘들’(tAny"[.m;)은 무엇을 가리키는
지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태고의 심연은 아직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로 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구(對句)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격한 대구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 1행의 심연은 현 세상의 ‘바다 물’로
보아야 하며, 2행은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지하수’로 보아야 한다.34) 그러나
‘산과 들’(25‐26절), 그리고 현 세상의 바다와 지하수(27‐28절)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제 1행의 ‘깊음’을 태고의 심연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절의 ‘샘들’(tAny"[.m;)은 심연의 원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구문론적으로
‘샘들’(tAny"[.m;)은 ‘물의 넘침’(~yIm"-yDEB;k.nI)이란 구와 동격(apposition)을 이루고 있
다. 즉, 샘들에서 물이 끊임 없이 솟구치며 넘치고 있다.35) 여러 학자들은 70인역
(phga.j tw/n u`da,twn)과 불가타역(fontes aquarum)을 따라서 ‘물의 넘침’을 ‘바
다의 원천’(~y"-ykeb.nI)으로 읽도록 제안하고 있지만(욥 38:16; BHS), 마소라 사본의
독법도 어렵지만 나쁘지 않다.36) 정리하자면, 제 1행의 ‘혼돈의 물’과 제 2행의
‘샘물’은 합성어(merismus)로써 ‘모든 물’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창 7:11에는 노
아 홍수의 맥락에서 hB'r: ~AhT. tnOy>[.m;-lK'[큰 깊음의 샘, ꡔ개역ꡕ]라는 구가 나온
다).
태고의 심연과 연관된 세상의 모습은 ‘내가 태어났다’(yTil.l'Ax)로 연결된다. 이
동사는 ‘고통 중에 몸부림치다’는 어근(lyx)에서 나왔으며, 일반적으로 어머니의
33) Waltke, The Book of Proverbs,1, 412.
34) Rogers, 112‐13.
35) 왈키는 히브리어 카바드(kabad)의 니팔 형이 동명사적(gerundive)인 의미를 가지며 ‘물로 무거
워지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므로, ‘넘치다’(abounding)로 번역한다. 우리 말 새 번역에서는 ‘물
이 가득한 샘’ (ꡔ표준ꡕ)과 ‘물이 솟구치는 샘’(ꡔ공동ꡕ)이란 뜻으로 번역되고 있다.
36) Landers, BASOR 144 (1956), 31‐33; Dahood, Biblica 49 (1968), 363 참조.
18 성경원문연구 제24호
산고를 가리키며(사 13:8; 23:4; 45:10; 51:2), 남자에게는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동사는 ‘낳다’(dly)라는 동사와 대구를 이루며 하나님에게는 적용된
다. 하나님이 낳으신 ‘이스라엘’ (신 32:18), ‘땅’ (시 90:2), ‘지혜’(잠 8:24)는 모
두 은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지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물(~AhT.,
!y"[.m;, ~yIm;)도 존재하기 전에 태어났으며, 물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다 보게 되었다.
`yTil.l'(Ax tA[åb'g> ynEßp.li W[B'_j.h' ~yrIåh' ~r<j,äB. 25
앞 절에서 ‘~이 없었을 때’(!yaeB.)가 이제는 ‘아직 ~전에’(~r<j,B.)로 넘어가면서
지혜의 출현이 피조 세계가 존재하기 전이었음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해 준다.37)
또한 앞 절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심연’과 ‘샘’이 나왔는데, 여기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들’과 ‘언덕들’이 대비를 나타낸다.
제 1행에서 ‘(산이) 세움을 입다’([bj)라는 동사는 ‘발이 진흙에 빠지다’(렘
38:22), ‘기초가 서다’(욥 38:6)와 같이 산의 뿌리가 바다 속에 심겨지는 영상(影
像)을 제시해준다. 요나 자신이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었다’고 말하는 바와
같이(욘 2:6), 히브리인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산의 기초는 바다 위에 세워져 있
었다(‘산들의 터’ [~yrIh' ydEîs.Am], 신 32:22). 달리 말하자면, 산들은 땅의 형성 과정
에 있어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시 90:1‐2).
제 2행의 ‘언덕들’(tA[b'g>)은 ‘산’과 함께 자주 대구를 이루며, ‘높음’을 더욱 부
각시켜주고 있다(신 12:2; 33:15; 시 72:3; 114:4, 6; 148:9; 아 2:8; 4:6 등). 즉, 25
절에서 ‘산의 뿌리가 깊음 속에 자리를 잡고 세워지는 모습’과 온 세상을 내려다
보는 높은 언덕들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지혜는 바로 이와 같은 주님의 창조사
역이 이루어지기 전(ynEp.l)에 이미 ‘태어났다’(yTil.l'Ax). ‘태어나다’는 동사가 24‐
25절에서 두 번 반복됨으로써 이 두 절을 묶어서 4행(quatrain)을 이룬다.
`lb e(Te tArïp.[' varoªw>÷ tAc+Wxw> #r<a,ä hf'['â al{å-d[; 26
마지막 다섯 번째로 ‘아직’(al{-d[;)이 문장을 열어주면서, 이제 드디어 사람들
이 터전으로 삼고 거주하고 활동하는 ‘땅’(#r,a,)이 나타나고 있다. ‘땅’은 여기에
서 ‘들’(#Wx)과 ‘세계’(lbeTe)와 함께 나타나고 있으므로, 이 세상 전체를 가리키기
보다 다음 절에 나오는 ‘하늘’(27상반)과 ‘바다’(27하반)와 대비를 이루는 공간
37) 주옹과 무라오까에 따르면, 접속사 ~r<j, 다음에는 항상 익톨(yiqtol) 형이 ‘과거 동작’을 가리키
는 데 사용되는데(예, 수 3:1), 오직 여기와 시편 90:2에만 카탈(qatal) 형이 나오고 있다. Paul
Joüon, T. Muraoka, A Grammar of Biblical Hebrew (Roma: Editrice Pontificio Istituto Biblio,
2006), #113 j.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19
으로써, 사람이 거주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을 가리킨다.38) 이리하여 앞
절에 나온 비경작지로서 ‘산들’과 ‘언덕들’과 대비를 이루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땅’과 ‘들’은 자주 평행을 이루며 나타나지만(삼하 22:43; 욥
5:10; 18:17; 사 24:11; 51:23; 렘 7:34; 44:9, 21; 51:4; 애 2:21; 겔 26:11), 오직 여
기에서만 접속사로 연결되어 나타나고 있다. ‘들’(#Wx)로 번역된 단어는 ‘길 거
리’(잠 1:20; 삼하 1:20; 미 7:10; 사 10:6; 왕상 20:34)를 가리킬 때 사용되지만,
기본적으로 ‘외부’ 혹은 ‘바깥’(outside)을 뜻하며 여기에서는 양들이 풀을 뜯는
곳(시 144:13), 도시 밖의 장소(욥 5:10)로 ‘넓은 벌판’을 가리킨다.39)
제 2행의 ‘세상 진토의 근원’(ꡔ개역ꡕ, lb eTe tArïp.[' varo)은 매우 특이한 구(句)
이며, 여기에서 ‘세상’(tebel)은 사람들이 거주하는 경작지를 기본적으로 가리킨
다. ‘진토의 근원’(varo)에서 ‘근원’(ꡔ개역ꡕ)으로 번역된 단어는 평가적 관점에서
‘최고’(겔 27:22)로서 ‘농사에 가장 좋은 땅’으로 볼 수 있지만, 현재의 문맥은 지
혜의 선 존재성을 말하고 있으므로 시간적 관점에서 ‘첫 것’으로 보아야 한다
(HALOT, 출 12:2; 민 10:10; 대상 16:7; 사 40:21 참조).40) 즉, 지혜는 이 세상의
‘첫 흙덩이’가 만들어지기 전에 탄생하였다.41)
3. 우주 창조 과정에서의 지혜(27‐29절)
이 연은 ‘~할 때’(be)가 각 절에서 두 번씩 나타나 모두 여섯 번 반복되면서 통
일성을 이루고 있다. 앞 연(24‐26절)에서 주님의 창조 역사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공간 이동을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정반대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리하여, ‘하늘’(27상반)과 ‘그 (하늘바다) 수평선’(27하반)에서
‘궁창과 구름’(28상반)과 ‘깊음의 샘’(28하반)으로 내려온 후에, ‘바다와 해안
선’(29상중)과 ‘땅의 기초’(29하반)로 내려가고 있다. 주님께서 온 세상의 공간
구조를 확정해 나갈 때, 지혜도 ‘거기에 있었으며,’ 창조의 다섯 사역인 (1) 하늘
을 세움, (2) 궁창의 수평선을 세움, (3) 구름을 견고하게 함, (4) 샘을 힘 있게 함,
(5) 바다의 경계를 정함에 함께 하였다고 한다. 즉, 27‐30절은 이 세상에 있는 중
심 경계로써 하늘과 바다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하늘을 세우는 작업’ 외에
38) Waltke, Proverbs, 1, 413. 왈키는 여기의 땅이 ‘경작지’와 ‘경작할 수 없는 땅’을 모두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39)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벌판’과 ‘들’로 이해한다. 아람어(bar)는 ‘바깥’과 ‘들’을 뜻한다. 70인역
은 ‘비거주지’로, 시리아역은 ‘강’으로 제시한다.
40) ‘the first clods of earth to be formed’(HALOT). THAT 2:708 참조.
41) Fox, Proverbs, 284.
20 성경원문연구 제24호
나머지 네 가지는 모두 물을 정복하며 다스리는 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Ah)t. ynEïP.-l[; gWx÷ª AqWxïB. ynIa"+ ~v'ä ~yIm;v'â Anæykih]B; 27
이제 앞 연에서 소개된 지혜의 탄생으로부터, 우주 창조와 세계 질서에서 그의
역할이 제시된다. 또한 앞 연의 부정적인 상황 설정에서 긍정적인 창조 활동으로
넘어가며, 지혜는 더 이상 ‘출생의 과정’을 거쳐 가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온 세상의 질서가 현재의 형태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목격한 증인의 역할을 하였
음을 밝히고 있다.
이 절은 ‘주께서 하늘을 견고히 하다’(!wk)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하
늘’은 앞 절에 나온 ‘땅’과 대비되는 실체로써 ‘궁창의 공간’을 말한다. ‘견고히
하다’는 ‘세우다’는 뜻으로 ‘창조하다’의 동의어이며, ‘하늘을 세우다’는 ‘하늘을
창조하다’는 뜻으로 빈번하게 나타난다(시 89:2; 103:19; 잠 3:19). 즉, 하나님께
서 하늘을 견고하게 세우셔서 그 경계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제 1행의 ‘하늘을 세우다’와 대구를 이루는 제 2행의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ꡔ개역ꡕ)라는 구는 번역이 매우 까다롭다. 먼저 ‘궁창’(ꡔ개역ꡕ, ꡔ개역개정ꡕ)
으로 번역된 단어(gWx)는 기본적으로 ‘원’(圓) 혹은 ‘환’(環)을 가리키며, ‘해면’
과 함께 나타날 때에는 ‘수평선’을 가리킨다(욥 22:14; 26:10; 사 40:22). 따라서
이 절은 ‘바다의 수평선을 그을 때’로 볼 수 있지만 그것은 29절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태고의 물을 정복하면서 첫 ‘하늘’과 ‘물의 경계’를 만드는 ‘궁창의 수평
선’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42) 또한 ‘두르다’(ꡔ개역ꡕ)로 번역된 동사
(qqx)는 기본적으로 ‘새기다’(inscribe, carve)를 뜻하지만, ‘원을 새기다’는 ‘궁
창의 테두리를 만들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보면서 ‘묵상하고 기뻐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43) 혹은 ‘증인의 자격’으로 있었다(Whybray)는 뜻으
로 이해된다.44) 폭스는 ‘거기’(sham)가 ‘장소’가 아니라, ‘상황’이나 ‘일련의 사
건이 이루어지는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사 48:16하).
`~AhT. tAnðy[i zAz©[]B;÷ l[;M'_mi ~yqIåx'v. AcåM.a;B. 28
42) 크라소비치(Krasovec)는 ‘하늘’과 ‘해면’을 합성어로서, ‘온 세상과 그 경계를 뜻하는 것’으로
본다. J. Krasovec, Der Merismus im Biblisch-Hebraeischen und Nordwestsemitischen (Rome:
Pontifical Institute for Biblical Studies, 1977), 154.
43) Waltke, Proverbs, 1, 415.
44) Whybray, Proverbs, 133.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21
27절의 ‘하늘’과 ‘궁창’의 경계에서 이제 하늘에 떠 있는 ‘구름’(28상)과 바다
아래에 있는 ‘지하수’로 넘어가고 있다. 즉, 높은 하늘에 있는 ‘구름’과 낮은 바다
에 있는 ‘샘들’이 대비를 이룬다.
구름’(~yqIx'v.)의 어근은 ‘문지르다’, ‘가루로 만들다’는 뜻이며, ‘가는 먼지’ (사
40:15)나 구름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에서 ‘구름’은 대유법으로서 ‘천사들’
(시 89:7)을 가리키지 않으며, 기상학적인 용어로서 ‘비구름’을 뜻한다(잠 3:20;
신 33:26; 시 18:12; 77:17 등). 제 1행에서 ‘구름을 하늘 위에 견고히 하였다’는
말은 역설적이다. 어떻게 잡을 수 없이 흐르는 구름을 견고히 할 수 있는가? 여기
에서 ‘견고히 하다’는 ‘강화하다’, ‘확고히 하다’(대하 24:13)라는 뜻을 갖고 있으
므로, 구름이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도록 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구름’이 ‘두들겨 편 놋 거울처럼 견고한 것’으로 인식하였다(욥
37:18). 이리하여 하늘 위에 있는 궁창의 물이 이 세상에 쏟아져 범람하지 않도록
창조되었다고 이해하였다. 즉, 구름도 하나님의 능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어 준
다.
제 2행에 나오는 ‘바다의 샘들’(~AhT. tAny[I 24, 27절)에서 ‘바다’(~AhT.)는 더
이상 ‘태고의 심연’이 아니며, 우리가 알고 있는 대양의 바다를 가리킨다. 이
바다에 있는 ‘샘들’에서 물들이 솟아나 모든 생물들의 식수의 근원이 되고 있
다. 그런데 그 깊은 곳에 있는 물을 어떻게 땅에 있는 생물들이 마실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힘 있게 함으로써’(zAz[ ]B ;)라고 대답한다. 이 동사는 칼 형에서
‘힘이 있다’(to be strong)이지만, 70인역(evti,qei), 페쉬타(!yv[a), 불가타의 독법
(librabat)을 따라 피엘형으로 읽으면, ‘강하게 하다’(zAZ[]B;)가 된다(BHS 각주를
보라). 즉, ‘바다의 샘들을 강하게 하다’는 ‘샘물들이 솟구쳐 오르게 한다’는 뜻으
로 이해할 수 있다. 이리하여 바다에 있는 물들이 땅을 적시는데 도움을 주게 된
다. 지상에 있는 샘들은 바다의 심층수가 솟아오르는 출구가 된다(창 7:11; 8:2).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물들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힘을 주님께서 주셨다.
`#r<a'( ydEs.Amå AqªWxB.÷ wypi_-Wrb .[;y:) al{å ~yIm;Wâ AQªxu Ÿ~Y"“l; AmÜWf«B. 29
이제 하나님의 지혜는 드디어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 이루어지는 창조
의 사역을 목격하고 있다. 그는 멀고 먼 ‘하늘의 지평선’(27절)과 깊고 깊은 지하
의 ‘샘물’(28절)을 떠나 인간 세상에 내려온다. 이 세상은 먼저 ‘바다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바다의 ‘한계’ (qxo)’라는 용어는 인간사회에 적용될 때 기
본적으로 ‘법’과 ‘칙령’을 뜻하며(창 47:26; 출 18:16), 자연세계에 적용될 때에는
‘경계’를 뜻한다(욥 26:10; 38:33; 미 7:11). 하나님께서 바다에 경계를 정하신 이
22 성경원문연구 제24호
유는 난폭한 바다의 물결이 땅을 덮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시 104:9; 욥
38:8, 10). 즉, 바다도 주님의 명령에 꼼짝 없이 순종하게 되었다(욥 38:8‐11). 창
조주 하나님께서는 땅과 바다의 경계를 확실하게 세우셨으며, 이 경계가 불변함
을 말해준다.
제 3행에서 ‘땅의 기초를 세울 때’는 구문론적으로 매우 어색하게 독립절로 존
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리하여 몇몇 번역에서는 이 절을 다음 절로 연결시키기
도 한다(RSV; NET).45) 만약 이 절을 현재의 자리에 둔다면, “바다의 경계를 경
하고, 땅의 기초를 세워 물이 그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였다”로 이해할 수 있
을 것이다. 여기에서 ‘땅의 기초’(#r<a' ydEs.Am)는 ‘산의 뿌리’로서, 이 세상에서 ‘가
장 낮은 곳’을 지시하고 있다(25절; 미 6:2; 시 18:8=삼하 22:8; 사 40:21).
수사학적으로 볼 때 이 절에서 ‘그가 정하실 때’(AqWxB.)는 이 연의 핵심 단어로
서, 27절과 29절의 ‘수미일치’를 만들어주고 있다. 즉, ‘해면의 경계’(gWx)를 ‘그
을 때’ (AqWxB.)로 시작하여, ‘(바다의) 경계’(gWx, 29상)를 두고(AmWfB)와 ‘(땅의 경
계를) 세울 때’(AqWxB.)로 이어지고 있다. 즉,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경계를 확실하
게 세우셨으며, 그 때마다 지혜는 증인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4. 우주 창조를 축하하는 지혜(30‐31절)
긴 조건 절이 끝나고(28‐29절), 이제 지혜가 ‘내가 거기에 있었다’(27절)는 말
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의 곁에서 지속적
으로 함께 하였으며, 주님의 창조를 기뻐하였다. 욥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놓으실 때’ 자신이 그곳에 없었기 때문에,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였지
만’(욥 38:2‐7), 지혜는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우주와 인생에 대한 참된 이치를
밝혀줄 수 있을 것이다.
`t[e(-lk'B. wyn"åp'l. tq,x,Þf;m. ~Ay= Ÿ~Ay Ý ~y[ivu[]v;â hy<åh.a,w") !Amïa'ñ Alªc.a, hy<ïh.a,w") 30
‘내가 거기에 있었다’(27절)와 ‘내가 그 곁에 있었다’(30상반)는 이 단락을 단
단히 묶어주고 있다. ‘곁에 있다’(hyh+lc ,ae)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
리칠 때처럼, ‘곁에 눕다’(창 38:10)처럼 가까운 거리를 말해준다(겔 43:6). 지혜
는 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목격자로 있었을 뿐 아니라, 이제 창조주 바로 곁에 자
45) Yee, “An Analysis of Pro 8:22‐31”, 61. 그는 명백하게 앞 행과 단절을 시키고 뒤따라 나오는 절
로 연결하고 있다.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23
리를 잡고 창조의 과정을 음미하고 있다.
이 절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창조자’(ꡔ개역ꡕ)로 번역된 단어(!Ama')가 원래
무엇을 의미하였느냐에 있으며, 크게 네 가지의 뜻으로 번역되고 있다.46)
(1) 이 단어(!Ama')는 창조 활동과 연관되어, ‘창조자’(ꡔ개역ꡕ), ‘건축자’
(architect, BFC), ‘장인’(NIV;NIB), ‘명공’(master craftsman, NRS, NAS, NJB;
maître d'oeuvre, T0B, der Werkmeister, L45), ‘창조의 명공’(ꡔ표준ꡕ) 등으로
번역된다. 대부분의 고대역본들과47) 고대의 문헌과48) 현대의 학자들은 이 입장
을 지지한다.49) 히브리어에서 개인의 이름으로 아몬(!Ama')이 등장하며(왕상
22:26; 대상 3:14; 렘 1:2; 25:3; 느 7:59), ‘장인’(!M'au)이란 히브리어가 페쉬타(출
28:11)에 나타나고 있으므로,50) 이것은 가능한 번역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예레미
야 52장 15절에 나오는 구(!Ama'h' rt,y<)는 여러 번역에서 ‘남은 장인들’(the rest of
the artisans /craftsmen; NIV, NRS, NAS, NET, NIB, BFC, L45; ‘살아남은 기술
자들’, ꡔ표준ꡕ, ꡔ공동ꡕ)로 번역된다.
그렇지만, 개인의 이름으로서 아몬이 꼭 ‘장인’이란 뜻을 가진다고 말할 수 없
고, 페쉬타 히브리어는 후대의 히브리어이며, 예레미야 52장 15절의 구는 70인
역에 나타나지 않으며, 이 절과 평행을 이루고 있는 열왕기하 25장11절에서는
‘무리’(!Amh'h, rt,y< ‘the multitude’)로 읽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다의 모든
‘장인들’(vr"x'h,-lk')은 주전 586년에 포로로 잡혀갔으며(왕하 24:14, 16), “만약
네레이터가 열왕기하 26장 11절에서 ‘장인들’을 말하고 싶어했다면, 정상적인
히브리어(vr'x')를 사용하였을 것이다”.51) 나아가 우리가 만약 현재의 본문에서
‘장인’으로 읽고 싶어한다면, 이와 유사하지만 발음이 다른 어휘로써 ‘공교한 장
색’을 뜻하는 단어(!M'a')로 제시하였을 것이다(아 7:2 [한 1절]).52) 다른 무엇보다
46) R. B. Y. Scott, “Wisdom in Creation: the 'Amôn of Proverbs 8:30”, VT 10 (1960), 213‐223 참
조.
47) 이 번역은 70인역(a`rmo,zousa, ‘arranger, establisher’ or ‘binding, uniting’)과 시리아역
(metaqena')과 벌게이트(artifex), Jerome (cuncta conponens, ‘binding, arranging, fashioning,
uniting’)를 따르고 있다.
48) 솔로몬의 지혜서 7:21과 8:6도 ‘지혜는 만물을 만든 자’라고 말하며, ‘그녀는 존재하는 모든 것
의 조성자’라고 한다. 필로는 로고스(logos)와 소피아(sophia)의 구별을 없애고, “그로 말미암아
우주가 만들어졌다(di' hou ho kosmos edmiourgeito [de Sacerdot. 5])라고 말하였으며, 이것은
요한복음 1:3이하와 골로새서 1:16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그는 소피아‐로고스가 ‘만물의
띠’(bond of all things)’라고 주장하였으며, 이것은 골로새서 1:17의 근거가 되었을 수 있다.
49) Koenig, Gesenius, BDB, Albright, NIV, RSV 등.
50) Sept. tecni ,thj, Vulg. artifex, 페쉬타 출 28:11.
51) Waltke, Proverbs, 1, 417.
52) Akk., ummanu; 셈어의 장모음 아(a)는 히브리어에서 규칙적으로 장모음 오(o)로 바뀐다 (예,
gibbor). W. McKane, Proverbs: A New Approach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70),
357.
24 성경원문연구 제24호
도, 현재 잠언 8장의 맥락에서 지혜는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창조 과정에 참여
한 ‘창조자’나 ‘명공’으로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마지막 절에서 ‘지혜의
창조 사역’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문맥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잠 3:19, 시 136:5, 렘 10:12, 51:15에는 창조에 있어서 지혜의 역할이 나
온다).
(2) 마소라 사본의 이 단어(!Ama')는 ‘돌보다’, ‘양육하다’는 동사(!ma II)에서 나
온 명사형으로 보고, ‘유아’(!Wma' Qal 수동분사)로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
다.53) 상당히 많은 학자들과54) 고대 번역 가운데 아퀼라역의 ‘어린아
이’(tiqhnoumevnh), 그리고 현대의 여러 번역본들(KJV, JPS, Moffatt)이 이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55) 이 번역은 22절의 ‘나를 낳았다’(ynIn"q')와 24절에 있는 ‘내가 이
미 났었다’(yTil.l'Ax)와 어울리며, 이 절 3행에 나오는 (어린아이의) ‘웃음’(tq,x,f;m.)
과 ‘즐거움’(y[;vu[]v;)과도 잘 연결되고 있다.56)
그렇지만, 히브리어에서 칼형 수동형 분사가 되려면, 지혜는 여성형이므로 여
성형 분사로 나타나야 하며(tn<m,ao ‘유모’ 삼하 4:4; 룻 4:16), 남성형 ‘길리운
자’(~ynImua/')도 현재 우리 본문의 단어와는 다른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애 4:5).57)
또한 31절에 나오는 ‘웃음’과 ‘즐거움’을 꼭 어린아이와 연결할 필요는 없으며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현재의 문맥에서 지혜는
‘태어났지만’(22, 24‐25절), 그 어디에서도 자라가는 과정이 없었으며, 그는 하나
님의 창조 과정에서 목격자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마지막 대미에서 갑자기
‘어린아이’로 등장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53) 칼 능동분사 남성형(!meao)은 ‘유모’(민 11:12; 사 49:23), ‘아이들의 교육자’(왕하 10:1, 5; 에
2:7), 여성형(tn<m,ao)도 유모의 뜻으로 사용된다(삼하 4:4; 룻 4:16). 동일 어근의 남성 복수형
(~ynImua/')은 ‘어린아이들’(‘색동 옷을 입고 자라던 이들’, ꡔ표준ꡕ)로 나타난다(애 4:5).
54) G‐B, Castell, Toy, Gunkel, Fichtner, Kayatz, B. Lang, Fox 등.
55) KJV, ‘one brought up’; JPS, ‘nursling’; Moffatt ‘foster‐child.’
56) 카야츠는 현재의 본문과 이집트의 지혜(마아트) 출현 신화와 연결시키고 있다. “아툼은 그
의 딸이요 수(Schu)의 여동생인 테프누트(Tefnut)가 마아트(Maat)임을 공식화했다. 그는 태
초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에, 오직 마아트와 슈와 그의 자녀들만이 그와 함께 있었
다”(C. B. Kayatz, Studien zu Proverbien 1-9, Eine form-und motivgeschichtliche Untersuchung
unter Einbeziehung aegyptischen Vergleichsmaterial, WMANT 22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66: 93‐95). 이 본문에서도 마아트의 실제적인 창조 활동에 대한 언급은 없으
며, 단지 태초에 놀고 있는 유아로 그려지고 있다. 마아트와 슈는 선재하고 있었다. 땅이 창조되
기 전에 지혜는 존재하고 있었으며, 신들과 같이 있었다. 그러나 잠언 8:30의 지혜와 이집트의
마아트를 동일한 개념적 범주로 보고 연결하는 데에는 두 종교의 근본적 차이를 지나치게 단순
화 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57) 폭스는 이 단어에 대해 아무런 수정 없이 ‘부정사 절대형으로서 부사적 보어’로 보며, ‘그와 함
께 자라고 있었다’로 제시하지만, 이 제안 역시 부정사 능동형은 ‘기르다’(raising up)는 뜻을 갖
고 있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다. M. Fox, “Amon Again”, JBL 115 (1996), 699‐
702.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25
(3) 현재의 구문(!Amïa'ñ Alªc.a, hy<ïh.a,w"))에서 ‘아몬’은 바로 앞에 나오는 전치사
(lc ,ae)의 삼인칭 남성 단수(A)와 동격으로 나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아몬’을
‘상태의 대격’(accusative of state)으로 보고,58) “나는 창조자(명공)인 그의 곁에
있었다”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입장은 브나르(B. Bonnard)에 의해 “j'étais
près de lui, le maître d'oeuvre”로 처음 제시 되었으며,59) 그는 그 근거로 게세니
우스‐카우치의 문법 설명을 제시하였다.60) 다후드는 보나드의 설명을 받아들이
며, 구약성경(시 69:4b; 86:11; 욥 36:2, 22), 우가릿 문헌(UT, 2060:15‐16)과 페
니키아 문헌을 제시하며, 이 입장을 받아들인다.61)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창조
자로서의 지혜의 역할은 배제되고 주님이 창조자가 되므로 전체의 흐름에 완벽
하게 일치된다.
(4) 이 단어(!Ama')는 ‘신실한, 성실한’이란 단어(!ma I)의 부정사 절대형으로 볼
수 있으며 고대의 역본(Symmachus, Theodotion, Targum)과 현대의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62) 왈키는 이런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 절을 번역하고 있
다.63)
나는 성실하게(faithfully) 그의 곁에서 있었으며,
나는 날마다(daily)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at all times)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
만약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혜를 ‘명공’(‘창조자’)이나 ‘유아’로 볼
필요가 없어지게 되며, 단지 그가 하나님 가까이에서 만물의 창조를 세심하게 지
켜보며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64)
58) ‘상태의 대격’ (accusative of state)이란 “동사의 주어나 목적어가 동작이 일어날 때나 그 동작
과 연관하여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묘사해 주는 것이다”(Waltke & O’Connor, IBHS, 171). 예
로써 창세기 25:25, “먼저 나온 자는 붉었다” (ynIëAmd>a; ‘!AvarIh' aceÛYEw:)를 들 수 있다.
59) 보나르(B. Bonnard)의 입장은 André Barucq, Le livre des Proverbes (Paris: J. Gabalda, 1964),
235에 처음 인용되었다.
60) Gesenius‐Kautzsch, Grammatik 131 n. 그는 ha'äB' ‘h'yl,’g>r: lAqÜ (the sound of her feet as she
approached, 왕상 14:6)을 대표적인 예로 들고 있다.
61) 다후드는 상태의 대격(lxey:m.)이 앞서 나오는 전치사의 접미어를 묘사하는 경우로서 시편 69:4
(한 3절)를 들고 있다; lxeªy:m.÷ yn:+y[e WlïK'는 “내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로 번역될 수 있다.
Dahood, “Proverbs 8:22‐31”, 519.
62) J. C. K. von Hoffmann, Der Schriftbeweis (Noerdlingen: C. H. Beck, 1857‐1860), 1:98.
Waltke, Proverbs, 1, 419에서 인용됨. O. Plöger, Sprüche Salomos: Proverbia (Neukirchen‐
Vluyn: Neukirchener Verlag, 1984), 95.
63) Waltke, Proverbs, 1, 420.
64) 윤영탁은 본문에 대한 상세한 주석적 토론을 거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지혜가 창
조 이전에 존재하였고, 또한 창조자가 되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인간을 기뻐하였다는 말씀들
26 성경원문연구 제24호
정리하자면, 우리는 천지창조 전에 태어나, 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목격자가 된
지혜가 30절에서 갑자기 ‘창조자’ 혹은 ‘명공’이 되었다는 입장이나, ‘어린아이’
가 되어 하나님 곁에서 기뻐하였다는 입장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비약을 요청하
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으며, 따라서 아몬을 ‘상태의 대격’으로 보고 창조주 하
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든지, 혹은 부정사 절대형으로 보고 ‘성실하게 그의
곁에 있었다’로 보든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65)
본 절의 제 2행을 이루고 있는 ‘나는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다’(ꡔ개역ꡕ,
ꡔ개역개정ꡕ)는 원문을 직역하자면 ‘나는 날마다 기쁨이었다’(~Ay= Ÿ~AyÝ ~y[ivu[]v;â
hy<åh.a,w"))가 되며, ‘누가 누구를 어떻게 기뻐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히브리어 구문
에서 ‘나는 기도이다’(시 109:4)는 ‘나는 기도할 뿐이다’, ‘나는 평화이다’(시
120:7)는 ‘나는 오로지 평화를 추구한다’는 뜻을 가지며, 따라서 ‘나는 기쁨이다’
는 ‘내가 기뻐하였다’는 뜻이 된다. 즉, “지혜가 주님의 창조를 보면서 기뻐하였
다”는 뜻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70인역은 ‘나는 그가 기뻐하는 자였
다’(evgw. h;mhn h-| prose,cairen)로 읽고 있으며, 여러 현대 번역들도 지혜가 하나님
에게 기쁨이 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KJV, RSV, ꡔ개역ꡕ, ꡔ표준ꡕ, ꡔ공동ꡕ).
폭스(Fox)는 이런 관점에서 지혜는 ‘기쁨의 원천이었다’로 해석한다(사 5:7; 렘
31:20; 시 119:24). 그러나 이 단어는 ‘지혜가 기뻐하다’는 뜻으로 31절 끝에서
다시 한 번 더 나타나므로, 지혜가 기뻐하는 주체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의 전과정을 보아 왔기 때문에,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와 은총
과 영광을 보고 놀라고 기뻐하였다.
마지막 3행에서 ‘그 앞에서 항상 즐거워하였다’(tq,x,Þf;m.)는 ‘(아이들이) 즐겁게
놀다’(슥 8:5)와 ‘춤추다’는 뜻을 갖고 있다(삼상 18:7).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가
시온 성으로 들어올 때 너무나 기뻐 춤을 추었다(대상 15:29; 삼하 6:5, 21). 욥기
38:7에 따르면 천사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보면서, “함께 노래하며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ꡔ개역ꡕ)고 한다.66)
은 단순한 시적 의인화설이나 인격화설로는 도저히 만족한 해답을 주지 못한다…. 하나님과 공
존하며 피조물보다 먼저 존재하였고 또한 창조자인 동시에 하나님과 성령과 구별된 존재로서
의 지혜는 여기에서 제 2위이신 성자를 나타내주는 것이 틀림 없다.” 윤영탁, “잠언 8:22에 나타
난 ‘카나니’(나를 가지셨다)에 관한 고찰’, 118.
65) 우리는 최종적으로 상태의 대격으로 이해하고 번역하였다.
66) 킬(Keel)이 연구한 애굽의 벽화 그림들을 보면, 마아트는 왕의 아내로서, 성적인 자극을 제공하
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왕도 의식적인 행동으로 신들을 기쁘게 하려고 장난을 치고 있다. “잠
언 8:22‐31에 따르면, 세상의 비밀은 신의 기쁨과 즐거움에 있다. 욥기 28장은 세상의 비밀을 아
는 것이 인간에겐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잠언 8장에 따르면, 우주의 기초는 슬픔과 혼란스
러운 우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랑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것이다”. O. Keel, The
Symbolism of the Biblical world :ancient Near Eastern Iconography and the Book of Psalms
(Winona Lake, Indiana: Eisenbrauns, 1974), 72.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27
천지창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갑자기 지혜가 천진난만하게 놀고 기뻐하는
모습은 잠언 1‐9장에서 갖는 지혜의 권위에 일치하는 것 같지 않지만, 이 즐거움
과 기쁨과 웃음을 활력의 상징(렘 30:19; 31:4; 시 104:26)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 될 것이다. 특히 ‘~앞에서 기뻐한다’는 의식
적인 행동으로서, 하나님의 창조활동을 보고 경배하는 기쁨을 드러내어 준다. 사
울과 다윗이 블레셋군을 물리치고 돌아올 때, 여인의 무리들이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하였다 (삼상 18:7). 회복된 이스라엘은 새로운 하나님의 축복을 기뻐하며
(렘 30:19), 춤출 것이다(렘 31:4). 웃음이란 하나님의 은총을 상징해 주기 때문
에, 웃는 자는 특별한 위치를 부여 받은 자이다(창 21:9참조). 지혜가 하나님 앞에
서 뛰노는 것이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d"(a' ynEïB.-ta, y[;ªvu[]v;w>÷ Ac=r >a; lbeäteB. tq,x,f ;m.â 31
30‐31절은 완벽한 교차대구 구조를 이루고 있다(A:B//B’:A’).
30절 나는 늘 그의 곁에서 있었으며, 날마다 기뻐하였으며(~y[ivu[]v;, A)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다(tq,x,Þf;m., B).
31절 나는 사람이 거처할 땅을 즐거워하며(tq,x,Þf;m., B’ )
인자들을 기뻐하였다(y[;vu[]v;, A’)
그렇지만, 이 두 절에 있어서 시상의 발전도 있다. 30절에서 지혜는 하나님 곁
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지만, 이제 사람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제 1행에
서 “그의 땅의 거주지를 기뻐하였다”는 문장의 의미는 모호하며, ‘그의 땅’은 ‘주
님의 땅’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땅은 주님이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이 지으신 땅 가운데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곳(lbeTe)을 기뻐하였다”는 뜻이
다.67) 여기에서 ‘거주지’는 제유법으로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말하는 기법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 세상 가운데서 특히 ‘사람들이 거주할 곳’
을 기뻐하였다는 것은 주님의 창조가 특히 인간들이 살 수 있는 완벽한 공간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제 1행에서 ‘사람이 살 세상’을 기뻐한 지혜는 제 2행에서 ‘사람’을 기뻐한다.
여기의 ‘사람’은 온 인류를 뜻한다. 지혜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과 함께 놀기를
67) 히브리어 구문(lbeteB. tq,x,f;m.)은 ‘그의 땅에서 기뻐하다’로 번역할 수 있지만(ꡔ개역ꡕ,
ꡔ개역개정ꡕ; ‘땅 위에서’ ꡔ공동ꡕ; NJB, JPS), ‘땅을 기뻐하다’(NIB, ‘rejoicing in the habitable
part of his earth’)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NIV, NRS, NAS, NET).
28 성경원문연구 제24호
원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러서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
는 하나님 앞에서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으며 또한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하
나님의 지혜를 그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으며, 간절히 주고자 한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본고에서 잠언 8:22-31의 지혜는 태초의 우주 창조 전에 하나님에게서
직접 태어났고, 천지창조의 모든 과정에서 ‘목격자’로서 창조가 이루어지는 과정
을 직접 보며,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기뻐하였음
을 확인하게 되었다. 본 단락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8:22의 hnq는 ‘낳았다’
로, 30절의 !Ama'은 ‘창조자’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본 단락을 다음과 같이 사역해 보았다.
22 주님께서 태초에 일을 시작하기 전에,68)
곧 오랜 옛적에 일들을 시작하기 전에 나를 낳으셨다.
23 영원 전, 태고의 그 옛날, 땅이 생기기 전에,
나는 모습을 갖추었다.
24 아직 깊은 심연이 생기기 전에,
솟구쳐 오르는 원천이 생기기도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었다.
25 아직 산들이 뿌리를 내리기 전에,
언덕이 솟아 오르기 전에, 나는 이미 태어났었다.
26 아직 주께서 땅과 들도 만들지 않으시고,
세상의 첫 흙덩이도 만들지 않으신 때였다.
27 주께서 하늘을 견고히 세우시며,
궁창 윗물의 수평선을 그으실 때에, 내가 거기에 있었다.
28 주께서 구름이 떠도는 궁창을 저 위에 견고히 세우시고,
깊은 샘물을 솟구쳐 오르게 하셨을 때에 내가 거기에 있었다.69)
29 주께서 바다의 경계를 정하시어,
물이 주의 명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고,
땅의 기초를 세우셨을 때에,
68) 주님(hwhy)을 문두에 둔 것은 마소라 사본을 따라 강조하기 위함이며, ‘시작하기 전에’에서 전치
사를 추가한 것은 제 2행의 ‘전에’(~d,q,)가 이중기능을 하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69) 여기에서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원문에 없지만 생략된 것으로 보고 27절에서 가져 왔다.
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29
30 나는 창조주의 곁에 있었으며,
날마다 기뻐하고, 늘 즐거워하였다.
31 나는 주께서 지으신 땅을 즐거워하며,
주가 지으신 사람들을 기뻐하였다.
<주요어> (Keywords)
잠언 8:22-31, 지혜, 창조자 (명공), 우주론, 로고스, 번역.
Proverbs 8:22-31, wisdom, creation, creator (architect), cosmology, logos,
translation.
30 성경원문연구 제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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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 8장 22‐31절에 나타난 지혜의 성격과 창조에 있어서 그의 역할에 대한
번역적 고찰 / 김정우 33
<Abstract>
A Study on Translating the Nature of the Wisdom and Its Role in
Creation in Proverbs 8:22-31
Prof. Jung-Woo Kim
(Chongshin University)
The aim of this paper is to suggest a most up-to-date translation of Proverb
8:22-31 which is understood as one of the most difficult passages in the book of
Proverbs. Based on the philological, syntactical, exegetical and rhetorical
analyses of the text, I come to the conclusion that the personified wisdom in the
present passage took the role of ‘witness’ in the creation of the universe; as she
was ‘brought forth’ (hnq) before the creation, she has the privilege of witnessing
the whole process of the creating activity of the LORD. I have argued that the
term !Ama' in v. 30 should best be rendered as ‘creator’ rather than ‘architect’,
‘master craftman’ or ‘child’; based on my analysis that grammatically it is used
as the accusative of state, and refers to the creator LORD in the sentence. Thus v.
30a was translated in terms that “I was beside Him who was the creator”. I have
attached a tentative new Korean translation of the passage at the end of the pa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