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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필자 김옥순 씨 딸 연정 씨의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사진 왼쪽부터 필자, 허분이 여사, 손녀 연정, 손자 인혁, 뒤 큰 딸 경자
어머님, 저도 할 말이 많아요.
최영 장군의 후손이며 뼈대 있는 가문에 시집온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천주님을 믿고 사는 집안이라서 제게는 축복이었지요. 신앙이 같은 사람끼리 산다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지요. 저의 가문도 만만치 않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이니까요. 친정어머니도 사위 될 사람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에 흡족했답니다. 어머님을 처음 뵙던 날이었지요. 식사하면서 성호 긋는 제 모습을 보면서 흐뭇한 웃음을 지으셨잖아요. 십자성호로 우리는 인연이고 꼭 만나야 할 사이였던 것 같아요.
저는 가난이 싫어서 부잣집에 시집가리라 꿈꾸었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짝을 만나리라 벼르며 나의 망상은 시끌벅적 끝이 없었지요. 어머님의 살가운 일곱째는 멋진 남자였고 저에게 세상 좋은 것은 다 해줄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같았어요. 화려한 미끼를 덥석 물고 낚싯대에 낚였지요. 망상에 빠져 살았으니 사리 분별이 없음은 당연한 이치였답니다. 겉치레에 콩깍지가 씌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부잣집 아들에다가, 사업을 하고 있었으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팔 남매의 일곱째 아들이라 더더욱 날개를 달았지요. 어머님, 사실은 비둘기 둥지 같은 곳에서 저희 둘만 사는 줄 알았답니다.
꿈은 그냥 꿈일 뿐이었습니다. 꿈에서 깬 현실은 냉엄했어요. 다른 형제들은 다 출가하여 나가고 시동생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기에 시댁에 들어와 살아야 한다고 했지요. 싫다 하지 못하고 저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갔으니 어리석었지요. 어머님 당신은 호랑이같이 무서웠어요.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살림도 할 줄 모르는 얼뜨기가 그 굴에서 삼십 년을 살았지요. 이제야 말하지만, 그동안 흘린 눈물은 잴 수가 없고 속으로 삼킨 울음만도 한 드럼은 될 거예요.
시집살이가 그리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님도 잘 아시잖아요. 고생 모르고 살아온 당신의 아들은 씀씀이가 헤펐지요. 아버님을 그대로 빼닮았다고 하셨잖아요. 좋은 옷을 입었고 맛난 음식만 먹으면서 뭐든지 최고만 하고 살았던 일 다 기억하시지요. 어머님은 언제나 아들 편만 들었잖아요. 성씨가 높을 최(崔) 씨라 그렇다고 했지요. 뻔쩍뻔쩍한 야마하 오토바이를 타면서 천지를 모르고 까불다가 결국 쪽박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요.
어머님, 저도 마음고생을 꽤 했습니다. 잘난 시댁과 잘난 남편에게 눌려 기죽고 풀 죽어 살았지요.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몸도 마음도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제 일상이 편안해 보였겠지요. 물 위에 뜬 백조는 아름답지만, 물속에서 갈퀴를 바쁘게 움직여야 산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긴장의 연속은 연하고 부드러운 저의 속성까지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살아온 세월은 현실에 순응하는 생존 법칙이었겠지요. 현실은 고까웠지만, 스스로 단련시켰답니다. 마치 대장간에서 불에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고, 찬물에 담그고 또 달구기를 반복하며 담금질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어요. 달군 쇠가 물에 들어가면 '찌직' 소리를 내지만, 그마저도 참았다니까요.
참고 살아온 수십 년이 헛것이 아니었습니다. 적당히 혼쭐도 나고 지청구 들으며 야물고 다져졌지요. 일 못 하는 며느리를 가르치고자 하는 어머님의 꾸짖음은 서럽고 야속하기까지 했다니까요. 소고깃국을 끓이면서 "파는 몇 센티로 썰어야 할까요?", "물은 몇 컵을 넣고 끓일까요?" 이 정도였으니 답답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지요. 여자가 신경 써야 할 이불 홑청 푸새도 잘 하지 못했잖아요. 눈치채셨지요. 땅이 꺼질 듯 내쉬는 어머님의 한숨 소리가 들리면 오금이 저려 하던 일도 덤벙거렸습니다. 쏟고, 깨고, 태우고. 일도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시집을 왔느냐면서 노골적으로 친정어머니 원망까지 하셨잖아요.
1994년 허분이 여사 팔순잔치. 사진 아랫쪽 네 번째에서 손자를 안고 있는 허분이 여사
그래도 어찌하겠습니까? 눈물을 달고서도 "죄송해요, 다음엔 잘하겠어요." 하면서 애교를 떨었지요. 어머님 기억나십니까? 살살 웃고 살았더니 노여움도 타지 않는다면서 모자란다는 소리까지 하셨잖아요. 어머님께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서 정신도, 육체도 고단하게 살았어요.
어머님 한 가지만 물어볼 말이 있어요. 미국에서 시누이가 친정에 다니러 왔을 때 저더러 부엌으로 들어가 문을 열라고 하셨잖아요. 연탄가스 냄새가 난다면서 저를 먼저 떠밀었어요. 그때 속상했어요. 나도 우리 엄마한테는 귀한 딸인데 당신 딸만 귀할까 생각이 들더군요. 차라리 그때 나이 많은 내가 먼저 들어가야겠다고 하셨다면 제가 그냥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생각해보니 멀리서 온 손님이라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이해했지요. 그러나 아직 그 응어리가 남아있어요. 저는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답니다. 일일이 말을 다 할 수 없지만, 삼십 년 동안 어머님 모시고 살면서 비 오고, 눈 오고, 바람 불던 날 무수히 많았지요. 고초 당초 시집살이 서러움은 간곳없고 지금은 아련한 그리움만 남았어요.
친정에서 자란 햇수보다 어머님과 살아온 세월이 더 길었잖아요. 타박도, 투정도 조금씩 도타운 정으로 이어졌지요. 어느 날부터 제가 어머님을 엄마로 불렀잖아요. 고부간이 아니라 모녀가 된 것이지요. "네가 천심이구나." 하는 소리를 듣던 날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딸처럼 생각하시고 사랑하는 마음 다 알기에 제가 달라질 수 있었을 겁니다.
어머님, 당신의 손자가 스무 명이 넘지만, 손수 키우신 우리 아이들을 특별히 귀히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님과 함께 강산이 세 번이나 변하도록 살았네요. 긴 세월이라지만, 짧은 순간이 지나간 듯합니다. 원망이나 미운 감정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잘못한 것들이 꾸역꾸역 기억 바깥으로 기어 나옵니다.
2004년 허분이 여사가 두 딸(왼쪽이 큰 딸)과 함께 청주에 있는 운보 김기창 화백 공방에서 찍은 사진
사람들이 호상이라고 하네요. 증손자가 수두룩 셀 수도 없군요. 복 받으셨어요. 자식들도 마음 아파 우는 사람이 없어요. 잘 사셨다는 말만 하고 있어요. 어머님의 귀한 남동생, '김해 허씨' 가문에 대를 이었던 연로하신 외삼촌이 휠체어를 타고 오셨네요. 자손들이 교수가 되고 은행지점장도 되고 번창했습니다. "우리 누님, 우리 누님" 하면서 어깨 들썩이며 눈물 흘립니다. 머지않아 외삼촌도 어머님 곁으로 가시게 되겠지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요. 좋은 날 좋은 시에 떠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렇지만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아서 보속을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머님, 기억이 오락가락 하면서도 "자식들은 내 마음 다 모른다."고 하면서 저더러 외롭게 살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날 저는 충격 받았어요. 아버님 돌아가시고 마흔다섯 해를 혼자 지내셨더군요. 혼자 사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저희만 행복하면 되는 줄 알았어요. '자식이 여덟이나 있었는데 얼마나 외로우셨으면 과부가 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별생각을 다 했지요. 어머님의 외로움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어떻게 그 말씀을 해석하며 받아들여야 합니까? 저도 먼 훗날 이런 말을 할까 걱정됩니다.
어머님의 며느리로 함께 살면서 좋았던 기억만 남았네요. 저도 시어미가 되었으니 어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어머님만큼만 살면 흉잡히지 않고 살 것 같습니다. 어머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가만 계셨는데 나 혼자 생각으로 섭섭했고, 무서워했다는 것 이제 알아요. 어머님은 인자하셨고, 제가 늘 부족했으니까요. 천국에 드시면 사랑하는 아들, 일곱째가 마중 나올 겁니다. 모자 상봉하시거든 제 얘기도 좀 해주세요. 잘 살더라고요. 어머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저도 어머님처럼 며느리를 아끼겠습니다.
어머님, 당신의 일생을 대하소설로 탄생시키고 싶은데 며느리의 능력이 여기까지인가 봅니다. 영정 앞에서 당신을 회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습니다. 씩씩하게 여장부로 살아오신 나이테의 두께를 허공에 날리면서 하얀 나래 고깔 쓰고 마음의 고향, 영혼의 고향으로 귀천하소서.
어머님과 살아온 세월의 정담을 나누다 보니 밤을 지새웠나 보다. 어머님으로부터 삼십 년간 들어온 이야기가 머릿속에 저장되어 녹음테이프 돌듯이 돌고 돌았다. 우리 세대 모든 어머니의 이름이 '분이'일지 모른다. 아침이면 분이는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지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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