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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륙영토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역시 대륙에 존재했었다는 학설은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발표한 바 있으며, 다만 그 정확한 위치에 대해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을 뿐이다. 백제와 신라의 대륙존재설은,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삼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중국의 여러 문헌에 기록된 내용들 가운데 기상과 기후, 중국과의 거리, 고대의 지명, 특산물, 삼국의 인구, 일식과 월식의 관측지, 지리적 한계 등이 모두 삼국이 대륙에 있어야만 설명이 가능하며, 따라서 백제와 신라 역시 대륙에서 존재했다는 주장이다.
본서에서는 이미 고구려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 선행되었던 단군 조선의 역사를 토대로 하여 검토해 보았고, 백제 역시 25사와 중국의 고지도들에 나타난 지명들을 토대로 대략이나마 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제 신라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에서 그 일부나마 밝혀보고자 한다.
먼저, 25사에 기록된 내용을 토대로 신라가 어디에서 처음 건국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당나라의 정사인 [구당서舊唐書]는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라국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에서 끝나고 서로는 백제와 접했으며 북으로는 고구려가 있다. 동서로는 천리이며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있다고 했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대로 옛 번한에 속한 하북성과 산동성 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말하는 변한이란 다름아닌 번한(번조선)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역시 25사를 인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당서]와 [구당서]에 모두 이르기를 “변한弁韓의 후예들이 낙랑 땅에 있다.” 하였다.」
계속해서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양한지兩漢志(전한서·후한서)를 살펴보건대 낙랑군은 낙양洛陽에서 동북으로 5천리에 있으며, 주注에 말하기를 유주幽州에 속하며 옛 조선국이라 한다.」
낙랑은 하북성 일대에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유주幽州에 속하며, 이곳 역시 옛 번조선의 강역이었으니 옛날의 조선국이라 한 것이다. 이는 앞서 살펴본 단군조선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하는 내용으로, 이쯤 되면 낙랑과 대방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저절로 빛을 잃는다. 그들의 주장대로 지금의 평양이 옛 낙랑이라면 낙양의 동쪽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며, 나아가 황해 건너 머나먼 한반도에 있는 평양을 두고 굳이 낙양을 기준으로 설명할 까닭도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낙양에서 동북쪽이라면 실제로도 정확히 하북성의 북경 근방, 즉 옛 유주가 되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다만 이 시기는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후이므로 신라가 하북성 남단에 있는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가 대륙에서도 남쪽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구당서]에서 동과 남이 바다로 막혔다고 한 것도 대륙 동남부의 지형에 그대로 들어맞는다. 이후 고구려, 백제가 망한 뒤에 대륙의 일부는 물론 한반도에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강역까지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를 동신라東新羅와 서신라西新羅로 구분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신당서新唐書]도 [구당서]의 기록과 똑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다.
「신라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며, 한나라의 낙랑 땅에 있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변한묘예弁韓苗裔’라는 기록은 ‘변한과 묘족苗族의 후예’로 해석할 수도 있다. 묘족도 고대 동이족의 일파로, 중국의 문헌 중에는 치우 천왕을 묘족의 군주라고 묘사한 책도 있다. 묘족은 일명 삼묘족三苗族이라 하여 지금도 양자강 일대의 여러 지역에 소수민족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신라가 대륙의 남단에서 존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남사南史]에는 백제의 동남 5천여 리에 신라가 있다고 했으며, [수서隋書]에는 백제의 남쪽에 신라가 접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이 모두 거짓이 아니라면 백제와 신라는 모두 대륙에 있어야만 한다. 이제 이와 같은 점을 단편적으로나마 몇 가지 정황을 통해 확인해 보자.
앞에서 고구려의 21대 문자명왕이 백제의 요서군과 백제군을 폐하면서 신라의 백성을 복건성 천주泉州라는 곳으로 옮겼다는 [태백일사]의 기록을 살펴본 바 있다. 신라의 백성들을 대륙의 남단인 복건성 천주까지 이주시켰다는 것은 신라가 대륙에 있지 않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반도사학자들의 주장대로 신라가 한반도 동남방에 있었다면 수많은 신라의 유민들을 뱃길로 수천리나 떨어진 이곳 대륙의 남단까지 실어날랐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부터가 의문인 데다가, 도대체 고구려가 그러한 대역사(?)를 벌일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당시 고구려가 복건성 천주 일대로 신라의 백성을 옮긴 사실은 25사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즉 [진서晉書]¹⁾ 지리지에 의하면 복건성에 있는 천주泉州를 진晉나라 때에는 진안군晉安郡²⁾이라고 했는데, 그 진안군(천주)에 소속된 8개 현가운데 신라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당나라 때 방현령 등이 편찬한 진晉나라의 전사이다. 여기서 진나라는 조조의 위나라를 계승하여 일어난 진나라를 말하는 것이며, 이 진나라가 선비족(흉노) 등의 침입으로 남쪽으로 밀려나면서 남북조시대가 시작되었다.
2)이곳을 지금은 진강晉江시와 천주泉州시로 부르고 있다.
진안군晉安郡에 신라현이 있다는 [진서]의 기록은 고구려의 문자명왕이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겼다고 한 [태백일사]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며, 중국의 역사지도 역시 천주의 서북쪽에 신라현을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현재 발행되고 있는 중국 지도에는 ‘신라’라는 명칭을 없애버리고 그 일대에 대신 나방羅坊이라는 지명을 두 곳에 표기하고 있다. 이는 곧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의미로, 신라방이 산동성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륙의 남단에도 존재했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대륙의 남단은 동북쪽과는 달리 옛 지명의 흔적이 대부분 남아 있는 곳이다. 또 신라방이란 뜻의 나방羅坊이 있는 곳에는 현재 신교新橋라는 지명도 있는데, 이 역시 ‘신라의 다리’라는 의미가 아닐까? 또 지도에서 보듯이 현재 복건성에는 나교羅橋, 나원羅源은 물론 대전大田이라는 지명도 있다. 그리고 복건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광동성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나양羅陽, 나부산羅浮山, 한강韓江, 조주潮州, 조양潮陽 등과 같은 지명들은 결코 우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 광동성 서쪽에 있는 광서장족 자치구에는 아직도 나성羅城, 전주全州, 백제百濟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백제 및 신라와의 관련성을 말해주는 강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태백일사]에서 고구려가 복건성 천주泉州로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고 한 기록과 [진서]에서 그곳에 신라현이 있다고 한 기록은 서로 일맥상통하고 있다. [진서]는 서진(265~316)과 동진(317~420)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로, 당나라 태종 때 편찬된 문헌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진덕왕眞德王 2년에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태종으로부터 그 당시에 막 편찬된 [진서]를 하사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는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으로, 이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가 중원대륙의 남단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즉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에 따르자면 [진서]에 신라현이라는 지명이 기록된 것을 당시 신라의 조정과 당나라에서 모두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만일 그것이 사실과 달랐다면 바로 수정되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기록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으니 이는 그곳에 고구려와 신라가 있었다는 증거이며, [태백일사]의 기록이 모두 사실임을 입증해 준다.
또한 후대에 교간校刊된 [진서]에는 천주에 있는 신라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注를 달아놓았다.
「신라성新羅城이 정주부汀州府의 동남에 있다.」
정주汀州는 신라현이 표기된 곳 바로 서북에 있는 현 복건성 장정長汀을 말한다. 그 동남에 신라성이 있었다는 말이며, 실제로 그곳에는 신라현이 있었고 지금도 신교新橋와 나방羅坊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원사元史] 지리지에 의하면 이곳에 있는 신라를 당나라가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 기록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곳에 신라가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청나라 때에 편찬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도 정주부汀州府에 신라성이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자 한반도와 대륙의 삼국 영토는 발해와 말갈, 신라와 당나라가 나누어 차지하게 되었다. 이 중 고구려가 설치했던 신라현은 당연히 신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훗날 이곳에 신라성이 생겨난 것이며, 혹 보통명사로 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광개토경호태왕의 비문에도 신라성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 이곳이 신라에 귀속되었다면 당연히 신라의 역사에도 등장해야 하는데, 과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으니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재위 917~
924) 8년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봄 정월에 사신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으며, 천주泉州절도사 왕봉규王逢規도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서기 907년에 당나라가 멸망한 뒤 혼란기가 계속되던 50여 년 사이에 중원과 변방에 들어섰던 나라들을 5대代 10국國이라고 하는데, 그 5대 중 하나가 바로 후당後唐(923~
936)이다. 그런데 신라에서 이 후당에 조공할 때 천주절도사 왕봉규도 조공했다는 사실이 왜 신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이는 그가 대륙신라의 천주절도사였기 때문임이 분명할진대, 삼국의 대륙역사를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고의로 부정한 김부식이 모호하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¹⁾
1)김부식이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하여 팽개쳐 놓은 360여 개의 지명 가운데 천주泉州도 들어 있음을 상기하라.
이 무렵 어느덧 신라도 기울어 경명왕 이후 경애왕과 경순왕을 거쳐 고려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직전 경애왕景哀王 때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당(후당)의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를 회화懷化대장군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가 임언林偃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은 중흥전中興殿으로 불러 물품을 하사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라의 천주泉州절도사로 있던 왕봉규가 신라의 강주康州를 관할하는 권지강주사가 되어 있었는데 후당의 명종이 다시 회화懷化대장군으로 임명했다는 내용이다. 천주가 속한 복건성의 서쪽에 광동성이 있는데 강주는 바로 이곳에 속해 있던 지명이며, 현재의 지도에는 광녕廣寧이라 표기되어 있다. 또한 회화懷化는 호북성에 있었던 지명으로, 지금도 회화懷化시로 남아 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중국에서 인사발령을 냈던 사안까지 [삼국사기]에 기록될 이유가 없고, 실제로 그러한 기록의 예도 없다. 그런데도 천주절도사 강봉규가 후당에 입조한 사실과 후에 강주와 회화로 이어지는 인사이동의 내용까지 모두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것은 결국 그곳에 신라의 영토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그렇지 않다면 기록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지 김부식을 비롯한 당시의 학자들이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대륙역사를 간과 혹은 무시하고 모호하게 기록했을 뿐이다.
한편 방향을 돌려 복건성 북쪽으로 올라가면 양자강 하류의 남쪽에 해당하는 절강성에 닿는데, 이 일대도 신라의 강역이었음이 역사상 존재했거나 현존하는 여러 지명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 우선 중국의 고지도에는 절강성 임해현臨海縣 북쪽에 신라산新羅山이라고 뚜렷하게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대륙의 남단인 이곳 절강성 일대가 신라의 영토였음을 말해주는 물증이며, 청나라 때 편찬된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도 “임해현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의 임해臨海는 신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자주 등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신라 21대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때의 기사이다.
「15년 가을 7월에 임해臨海와 장령長嶺 두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왜적倭賊을 방비하게 하였다.」
그리고 신라 30대 문무왕文武王 15년에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臨海君公이라는 봉작을 받았다는 기사도 있다.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임해가 경주 월성군 동쪽이라며 반도사관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경주 월성군 동쪽 어디에 임해라는 지명이 있었으며,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작은 고을의 지명을 따서 신라왕에게 임해군공이라는 작위를 내린다는 것인가? 당시 중국에서 고구려· 신라· 백제의 왕들에게 내린 봉작은 대부분 그 나라를 대표하는 지명들로 되어 있다는 상식도 모른단 말인가?
다시 39대 소성왕昭聖王 2년의 기사를 보자.
「여름 4월에 폭풍으로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아갔으며 (...) 임해臨海와 인화仁化¹⁾의 두 문이 무너졌다.」
1)현재 광동성 북쪽에 인화仁化라는 곳이 있다.
또 46대 문성왕文聖王 때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9년 봄 2월, 평의平議와 임해臨海의 두 전殿을 중수하였다.」
또 47대 헌안왕憲安王 때의 기사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臨海殿에서 신하들과 회동했다.」
48대 경문왕景文王 때에도 임해전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49대 헌강왕憲康王 때의 기사에는 임해전에서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상 임해와 관련된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더라도 신라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특히 중국의 고지도에서 임해현에 신라산을 표기하고 있는 것은 대륙신라설을 확증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이렇게 보면 앞서 고구려가 신라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겼다고 하는 내용도 당시 대륙의 절강성 일대에 있던 신라의 백성을 그 남쪽인 복건성 천주로 옮겼다고 설명하면 극히 자연스럽다.
한편 신라산이 표기된 임해는 절강성에 포함되어 있는데, 이곳이 신라의 강역이었다는 사실 역시 [삼국사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 8년 때의 기록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려 절강 동쪽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
신라에 흉년이 들자 절강성 서쪽에 있는 복건성과 강서성 일대의 주민 170여 명이 동쪽에 있는 절강성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는 정확한 기록이다. 혹 한반도에 있는 신라 백성이 뱃길을 이용해 수백리 이상 떨어진 절강성까지 왔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소설같은 얘기로, 굳이 대륙으로 간다면 가까운 요녕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등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멀리 양자강 이남의 절강성까지 간단 말인가. 앞서 절강성 서남에 있는 복건성의 천주泉州에 대해 설명했는데, 대륙에 신라가 있었다면 천주에만 있었겠는가.
한편 [명사明史] 지리지에는 절강성 임해臨海 앞바다에 고려두산高麗頭山이라는 섬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과 동시대인 청나라 때 편찬된 사서에 고구려 혹은 고려와 관련된 지명이 임해 앞바다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것은 이곳이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현재의 중국 지도에는 임해 앞바다에 고도高島와 두문산頭門山이라는 두 섬이 나란히 표기 되어 있는데, 모두 [명사]에서 말한 고려두산에서 비롯된 지명들이다. 현재 그 북쪽에는 우두산牛頭山과 단두산檀頭山이라는 지명도 절강성 내에 표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절강성 남쪽에는 평양平陽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이는 대륙신라의 평양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는 신라 18대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12년 8월의 기록에서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를 새로 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륙에 있던 신라의 평양에 다리를 새로 놓았다는 말이며, 만일 이를 한반도에 있는 평양에 다리를 놓은 것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면 만인의 웃음을 살 일이다. 이 무렵은 고구려가 건재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편 고구려가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로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면 당시 신라와 백제의 남쪽까지도 진출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양서梁書]와 [남사南史]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나라(신라)는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있다. 그 땅은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았고 남과 북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 접해 있다.」
백제의 동남쪽 5천여리에 신라가 있다는 기록이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으로는 결코 성립될 수 없음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실제로 절강성 동쪽에는 동지나해라는 큰 바다가 있으며,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도 “바다 남쪽에 동이가 있다.”고 기록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위의 기록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의 북쪽과 남쪽에도 있다고 했는데, 이는 당시 절강성 서남쪽의 복건성 천주를 고구려가 차지한 뒤 신라의 백성을 옮겼다는 기록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삼국의 영토가 ‘개의 이빨(犬牙)’처럼 얽혀 있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그 때문인지 복건성 서쪽 광동성에는 조양潮陽과 한강韓江이라는 지명도 있다.
한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는 부여(북부여) 제실帝室 출신의 파소婆蘇라는 여인인데, 이 파소는 훗날 선도산仙桃山의 신선이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삼국유사]는 “선도산의 신모神母”라 하였고, [태백일사]는 ‘선도산의 성모聖母“라 하였으며, [삼국사기]는 ”선도산의 지선地仙“이라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선도산仙桃山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선도仙桃는 대륙의 여러 곳에서 사용된 지명으로, 현재에는 양자강 북쪽의 호북성에 선도仙桃시라는 지명으로도 쓰이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중국의 고대 지도에는 선도산仙桃山과 음이 같은 선도산仙都山이라는 산이 양자강 남쪽에 표기되어 있다. 그 위치는 신라의 임해전과 신라산이 있는 절강성 남쪽과 복건성, 강서성의 경계 지점이다. 이곳에 표기된 고대의 선도산仙都山을 현재의 중국지도는 무이武夷산맥이라 표기하고 있다. 무이산武夷山이란 곧 동이東夷의 산이라는 뜻으로, 이 역시 우리 역사의 잔영으로 볼 수 있다.
[출처] 백제와신라의대륙영토3|작성자 푸른두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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