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속의 그리운 집
박래여
수영장 다녀오니 현관 앞에 시집 한 권이 놓여 있다. 『혼자 뭐하노』언니의 시집이다. 칠십이 넘어 경남문예진흥금을 받아 낸 언니의 두 번째 시집이다. 제목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시집을 폈다. 하필이면 〈혼자 잘 살게요.〉하는 시다. 형부 생각하며 쓴 시란 것을 대번에 알았다. 시집을 선걸음에 읽어 내렸다. 형부 떠나보내고 쓴 시편이 많다. 아직 소녀 적 감상을 지닌 언니의 시편들, 고향 집에 거주하며 친정 부모님 생각도 자주 주웠다는 것을 알았다.
언니는 여고시절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오랫동안 공직에 있었다. 서기관으로 정년퇴직 후 고향집에 들어가 산다. 우리는 자매인데도 성격이 다르다. 나는 바깥활동을 싫어하는 칩거 형이고 언니는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활동 형이다. 언니의 열정이 부럽다. 내가 닮을 수 없는 면이다. 혼자 살아도 언니는 외로울 틈이 없을 것 같은데 언니도 외로움을 타는 것 같다. 가끔 우리 부부의 삶이 부럽단다.
언니의 시집을 읽고 있는 내가 우울해 보였던가. ‘지난번에 처형이 헌 파렛트 필요하다고 하던데 전화해 봐라. 갖다 주게.’ 냉큼 전화를 했다. 가지고 오란다. 파렛트를 한국말로 번역하면 뭘까. 위키백과에서 찾았다. 파렛트는 우리말로 포장 판이란다. 영어로는 팰럿이다. 일본식 발음인 파렛트가 쓰임말이 굳어져 있다. 일제 강점기의 잔재는 우리 생활공간 어디에서나 무의식적으로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트럭에 헌 포장 판을 싣고 집을 나섰다. 남강 지류인 덕천 강을 따라 달린다. 지리산 마고할멈의 막내아들이라는 아홉 산이 보인다. 고향 길은 낯설지 않은데 고향은 낯설다. 눈길 가는 곳마다 추억이 깃들었지만 옛 모습은 사라지고 내 기억에만 존재한다. 도시화된 고향, 관광지로서 활발해진 고향 땅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묘와 살던 집과 덕천 서원이 있는 곳, 선비대학이 들어서 있는 곳, 선비문화 잔치가 열린다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고향마을, 친구들 친정이 있고 본가가 있는 곳, 외지로 떠난 친구도 있고, 도시 살이 접고 고향에 돌아와 사는 친구도 있고, 처음부터 고향에 붙박이로 사는 친구도 있는 곳, 고향이었다.
골목을 따라 고향마을로 들어섰다. 입구부터 달라졌다. 곶감 동네라 새로 지은 저장고며 양옥집, 곶감집들이 늘어섰다. 다랑이는 사라지고 고종시 과수원이 즐번하다. 동네 샘터에서 흘러내려오던 도랑은 복개되어 넓은 길이 되었다. 언니들과 어울려 코스모스랑 과꽃을 심던 길섶도 탱자나무 울타리도 돌담도 사라졌다. 골목 옆에 있던 친구의 친정집이 보였다. 아담한 기와집은 간데없다. 돌담도 사라지고 블록담은 때가 묻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만 해도 정겹게 보이던 모습이 사라졌다. 고향집 오르는 길은 낯설었다.
고향집, 엄마의 손때가 묻었던 집, 대나무 숲이 아늑했던 집, 오두막을 헐고 양옥집을 지었을 때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감개무량해 하시던 부모님을 생각했다. ‘이삼 년 사이에 확 바뀌었네. 저기 엄마 텃밭도 팔아버린 거야? 화단도 조성되어 있고 건물도 들어섰네.’ 동생이 땅을 팔았다는 것을 알았다. 엄마의 텃밭도 감나무도 돌담도 사라지고 거기에 전원주택과 커다란 창고가 서 있는 것이 낯설었다. 아래위 양쪽 집들의 규모가 큰 탓에 고향집은 이웃집 가운데 들어 좁고 초라해 보였다. 꽃밭인지 풀밭인지 정리정돈이 안 된 집은 언니의 힘으로 건사하기에는 무리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상했다.
고향은 낯설었다. 고향집도 낯설었다.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고향과 고향집의 이미지는 풍요롭고 따사로웠다. 사락사락 댓잎 흔들리는 소리, 지붕위로 오르던 연기, 가을이면 콩 타작, 벼 타작을 하던 너른 마당, 할머니의 절구질 소리, 엄마의 키질 소리, 시렁에 걸린 박 꼬지, 호박꼬지, 아래채 헛간 앞에서 하품을 하며 되새김질을 하던 황소, 동생들과 공기놀이를 하고, 깨금발 놀이를 하고, 자치기를 하고, 딱지 따 먹기를 하던 마당, 그 마당이 사라진 고향 집은 그리움만 가득 쏟아냈다.
그래도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컨테이너 앞에 보랏빛 쑥부쟁이 한 아름 피어 있었다. 언니도 꽃을 좋아하던 엄마 생각에 야생화 씨를 여기저기 뿌렸나보다. 언니는 속상해하는 나를 보며 지금은 풀밭이지만 산국이 피면 참 예쁘단다. 평생 도시 살이 하며 아파트를 전전했던 언니에겐 시골집 간수하기가 힘에 부친 일이다. 전원의 꿈을 꾸며 고향집에 들어왔지만 전원주택 가꾸기보다 밖으로 나가는 일이 더 많으니 집을 다듬을 틈이나 있었겠나. 눈 깜짝할 쌔 돌아보면 우후죽순 자란 것은 나무와 풀인데. 감당이 안 됐던 모양이다.
“언니, 괜찮아. 나도 저 사람 없으면 산속에 못 살아. 우리 집은 일 년도 안 돼 숲이 될 걸. 저 사람이 워낙 부지런하니 잘 가꾸고 사는 거지. 나는 꿈도 못 꾼다.”
언니를 위로했다. 남의 손 빌리기도 어려운 산촌생활이다. 모두 제 집 일도 바빠서 남의 집 허드렛일 해 주려는 사람도 귀한 마당이다. 산촌에서는 쓰레기 버리는 것도 신경을 쓰야 한다. 친정 부모님 돌아가신 지도 오래 되었다. 집도 낡아갈 수밖에 없다. 아래윗집에 맞추어 싹 뭉개고 흙과 돌을 채워 바닥을 돋운 후 새로 지으면 모를까. 고향집은 잡종 반려견과 고양이가 지키는 집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부모님 돌아가시고 한동안 남에게 빌려줬던 집이었다. 그때부터 집은 낡고 볼품없어져 갔다. 언니가 들어오면서 새로 꾸미고 청소를 했을 때는 그나마 번듯한 모양새였지만 그 새 세월의 때가 묻어버렸다.
언니랑 면소재지에 나갔다. 들깨해물탕, 오랜만에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언니랑 헤어져 집으로 오는 길에 속상해 하는 나를 농부는 ‘당신이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러려니 해라.’ 일침을 놓았다. ‘그래, 그러려니 해야지. 언니도 할머닌데 노동이라고는 해 본 적도 없는 언니가 어찌 집을 가꾸겠어. 저렇게라도 해 놓고 사는 게 용치.’ 새삼스럽게 부지런한 농부가 고마웠다. 우리 집 역시 내가 가꿀 수 없는 너른 집이다.
202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