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1코린 3,18-23; 루카 5,1-11 /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2024.9.5.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밤새 헛탕을 친 어부들에게 그들이 직업과 가정을 떠나서 제자로 따라 나설 만한 동기를 부여하셨습니다. 순교자 성월을 막 시작한 우리로서는 우리의 독특하고도 자랑스러운 순교 전통을 계승해야 하는 선교적이고 역사적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코드입니다. “깊은 데로 가는 것”.
전통적으로 ‘순교’란 신앙을 지키고자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했습니다만 현대에 들어서는 순교의 의미가 깊어지고 확장되어서, 본질적으로 신앙의 열매인 정의와 애덕을 실현하기 위하여 목숨이나 일생을 바치는 행위도 순교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현대 가톨릭교회를 복음적으로 쇄신시킨 요한 23세나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2세 등 현대의 역대 교황들이 치명하지 않고서도 성인품에 오르신 이유입니다. 정의를 외치다가 엘살바도르의 군부 독재 세력에 의해 총탄을 맞고 치명한 로메로 대주교도 이 확장된 범주의 순교자입니다.
전통적인 의미로나 현대적인 의미로나 순교는 예수님을 본받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로 가르쳐 주시고 삶으로 보여주신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영원할 것”(1코린 13,13)인데, 애덕은 으뜸이지만 신덕은 기본이며 의로움에 대한 희망 또한 필수입니다.
이 땅에서 세계 교회 역사상 유례가 없이 자생적인 교회가 세워지게 된 데에는 실로 오묘한 섭리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섭리의 첫째는 멀리 서양에서부터 중국에 파견되어 유학을 배운 선교사들이 보유론(補儒論)에 입각하여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유학과 접목시켜 한문으로 번역해 놓은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의 도움입니다. 또한 당시 조선 사회에서 신분 차별을 비롯하여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악 현상이 극심했었던 시대적 배경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 억압과 착취로 인한 고통이 하도 커서 세상 현실이 지옥과 같은 현실이 되어 버리자 백성 사이에서는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천주교를 믿고 죽어서 천당에 가자” 하는 염원이 일어나기도 했고, 선비들 또한 성리학이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동되던 당시 조선 사회에서 주자의 교조적인 해석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독창적인 해석을 하기만 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서 본인은 패가망신하고 가족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해야 했던 사화(士禍)가 빈번했기 때문에 국운이 다한 나라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희구하는 실학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선교 역사가 훨씬 더 앞섰던 이웃 민족들과 우리 민족이 결정적으로 달랐던 점은 따로 있습니다. 천주교 교리를 통해 진리를 알아보고, 사회악 현상을 통해 하느님을 갈망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은 한민족 역사의 초기부터 하느님께서 선하신 자비와 평화의 진리를 드러내 보여 주셨기 때문에 배운 선비든 못 배운 민중이든 가릴 것 없이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지어내신 초월적인 신이 존재하고, 이 존재가 영적으로 사람의 만사를 주관하신다는 생각이 우리 민족 안에서는 연면히 이어져 내려왔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탁월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종교적 심성입니다.
이 종교적 심성 덕분에 하느님에 대해서는 조상 대대로 알고 있었으므로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다만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던 신 관념은 막연했었는데 천주교 교리에서 가르치는 삼위일체 하느님은 명확했습니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 천주교 교리가 옳은 진리임을 깨달았고, 조선 사회가 저지르던 억압과 착취가 사회악인 줄도 깨달았습니다. 무신론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믿음의 순교 역사는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고 무려 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앙은 그 자체로 불의에 대한 저항이었고, 그래서 조선 왕조는 천주교 신자들을 반역의 무리로 몰았습니다. 하지만 박해가 지속될수록 천민 출신들의 백성들이 천주교에 입교하는 숫자가 늘어난 것은 의로움을 애타게 갈망한 결과였습니다. 103위 순교성인과 124위 순교복자 중 대부분이 평신도였으며, 그 가운데 천민 출신도 상당수에 이르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피지배 계층이 지배 계층의 가치관에 저항하여 평화적으로 승리한 역사는 한민족 반만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기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천주교인으로서 신앙을 지키는 것 자체가 의덕의 실천이었던 데다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서로를 ‘믿음의 벗’이라는 뜻으로 교우(敎友)라고 부르면서 애덕까지도 실천했습니다. 먼저 치명한 이들의 남은 자녀를 입양하듯 대부모가 거두어 키우는 것은 기본이요, 이 참에 고아들까지 데려다가 교우촌에서 함께 키웠습니다. 전답을 다 빼앗겨 자신들도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교우촌에 가면 먹을 것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굶주린 백성들이 줄지어 교우촌에 찾아들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교우들은 공동으로 경작하고 공동으로 나누었으며, 자연스럽게 공동으로 기도하며 공소예절을 바치면서 애덕의 소중함을 되새겼습니다. 이를 본 이웃들이 너도 나도 입교하는 행렬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믿다가 발각되면 죽을 줄 알면서도 박해 중에도 입교자들이 늘어났던 것도 복음을 자생적으로 수용한 것과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설립한 것에 못지않은 오묘한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고자 부르시는 예수님의 산 역사였고,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듯이” 이 세상의 어리석은 공리공론을 버리고 아름답고 귀한 진리를 증거한 힘찬 역사였던 것입니다.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오늘날에도 정의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고 사랑이 메말라가기 때문에 우리가 순교 정신을 계승하는 일은 여전히 절실히 필요한 덕목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의로움과 사랑함의 증거자가 되려면,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