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잃고 소요산에서 한때
60년대의 가난을 탈피하여 한양으로 올라왔다.
가난도 싫고 농촌에서 지긋지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싫었다.
서울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보면 길이 보일걸로 생각을 하였다.
가난한 농촌의 경제력으로 어떻게 대학을 다닐 형편도 못 되어 ,돈을 벌어
인천교대에 가서 초등학교 교사자격증을 확보하여 저 서해안의 섬마을의
선생이 꿈이었다. 초등학교선생은 할 것 같았다.
시험공부를 하는데, 어머니는 아프시고 마포꼭대기에서 추운 찬바람은
안방의 물이 얼 정도이다. 허름한 벽돌집의 찬공기는 한강바람이 몰라
부치면 ,정말 죽기 아니면 살기식으로 공부를 하였다. 어머니의 병수발도
해가면서 ,총2 백명모짐에 13:1로 총 2천6백명의 경쟁률에 나주의 촌놈이
어렵사리 합격을 하였다.
거의가 서울에 사는 사람들 ,학교도 서울세서 다녔던 사람들 속에 내가 당당히
합격을 하였다. 아이구 이에 시골에서 올라오신 부모님들하고 경기도의 어느
섬이나 농촌에 초등학교 선생이 되겠구나 하며 희망을 가졌다. 내가 섬마을의
선생이 되었으면 문학공부를 하여 알려지는 시인이 되었을것이다.
인천교대 교육중이 어머니는 저 세상으로 떠나시고 발령은 나지 않고 하여
섬마을의 처녀를 사귀어 알뜰한 가정을 꾸리고 부모님 모시고 살아 볼 려고 하는
꿈이 물거품이 되었다.그렇지 읺으면 여자 선생하고 결혼이나 하고 돈도 벌면
땅도사고 내 뜻대로 되었다면 경기도의 갑부가 되었을 것이다.
섬마을의 처녀가 아닌 지금의 착한 아내가 들어와 나의 공직시험공부를 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하여 주었다. 너무나 시험공부에 세월을 보내고 마지막에 서울시 공무원
으로 출발하여 정년을 맞아 나의 중요한 삶을 마쳤다. 내가 서울시에 근문하면서 고관
대작이 될 것도 아니고 그렇게 높은 자리를 바라는 성격도 못된다. 안분자족하는 삶
나는 서울시 공직보다 섬마을의 총각선생이 더 하고 싶은 꿈이었다,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들과 바닷가의 조개를 주으면서 순순하게 사는게 나의 꿈이었으며 착한 섬마을
아가씨가 더 정감이 간다,
첫댓글 섬마을 총각선생님 노래부른 이미자가 생각 나는군요
젊은 시절의 꿈이 아름답습니다.이제 노인이 되었으니
병원이 가까운 도심이 노인들한테는 살기 편하다고 생각듭니다만..
그때 그시절이 그립습니다 이제는 다 지나간 빛바렌 추억의 산물입니다
지금 여기 화순은 큰병원도 있고 그런델로 살만합니다 감사합니다
섬마을의 삶을 그리던 시절 이야기 참 잘 읽고 가요.! 이젠 노년기로
모든것을 잊고 건강하게 삽시다! 늘 즐겁게보내세요.
그때의 순수했던 추억이 그립습니다
이제는 하나의 추억으로 삼고 노후를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부는 타고 나신 것 같습니다..
언제나 열심히 공부하셨고 학교선생님으로
공무원으로 열심히 사회봉사를 하셨으니 얼마나 잘 사신 삶입니까.
섬마을 선생님은 실지의 생활보다 낭만적으로 느끼시기에 지금껏 고운 꿈으로 남으신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러한 낭만적인 생각을 하였나 봅니다
지금까지 남을 피해를 주면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열심히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큰 꿈도 아닌데
이루어 지지 안으셨군요
삶이라 자기가 바라는 대로
안대나 봅니다
그때 여건이 아니데니까 어렵지요
모든게 인간사는 마음데로 않되는거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