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부관 출신으로 별명이 '원숭이'였습니다.
그러나 생김새와는 달리 100년 동안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일본을 통일한 것을 보면 그의 지략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는 최하급 부시 출신으로 젊어서는 한 때
바늘 장사로 생계을 유지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오다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유지했다가
오다에게 신겨줘 오다가 감격을 하게 만든 일화는
든든한 배경을 갖지 못한 그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출세를 할 수 있는지
본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오다가 자결을 하자 도요토미는 즉각 병력을 이끌고 출동,
오다를 배신한 아케치를 죽이고 경쟁세력을 차례로 굴복시켜
드디어 일본을 통일하게 됩니다.
오다가 죽지 않았다면 도요토미는 역사상 이름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운이 좋다고 말 할 수도 있지만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할용해
자기 것으로 만들만큼, 평소에 치밀한 준비를 해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도요토미는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사람이고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재주는 오다가 넘고 돈은 도요토미가 챙긴
사례라고 하지만 그가 평소에 천하를 제패할 야망을 꿈꾸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평생 하늘에서 내려주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명을 내려주었을 때
이를 판단하거나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평상시에 꾸준히 갈고 닦지 않았다면
그 기회는 가차 없이 다른 사람을 향해 떠나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주는 명을 제 때에 받지 못한다면
자기 목숨을 내 놓아야 할만큼 잔인한 명이 하늘의 명인 것입니다.
역사를 봐도 평소에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가 한번 찾아온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은 사람은 성공을 했고, 기회가 왔는데도 머뭇거리거나
준비 부족 또는 오판으로 인해 실패한 사람들의 사례는 비일비재합니다.
100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전국시대의 일본을 제패한 도요토미는
권력의 안전을 강화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시행하기 위해
지금까지 행하여져 오던 각종 정치 사회제도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첫번째 취한 조치가 대대적인 농지면적 조사와 정확한 수확량 산출이었습니다.
당시 국가 운영은 수확된 농산물을 세금으로 거둬 국가를 운영했기 때문에
세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농토의 면적과 수확량 산출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군역을 시행하고,
농민에게도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여 일정 부분 세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이는 중앙에서 거두어야 할 세금을
지방의 다이묘들이 빼돌려 반란을 일으키는 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후 농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무력으로 억누르며 수년여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도
위 내용처럼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때 조선은 정확한 측량에 의해 농토구역이 나누어 있지 않았고
등기에 의한 확실한 소유 방식보다는 마을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사람들 간의 신용에 의해 자기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니
자기 땅이란 근거가 서류로 남아 있지 않는 농민들과
나라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역토와 둔토 등의 땅을 경작하고 있던 농민들은
하루 아침에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강력하게 저항을 하면
소작마저도 부쳐 먹을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활한 일제는 지역 토호이던 양반들을 한 편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의 땅은 손도 대지 않았으며 부를 축척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 주었습니다.
그때 자기들 욕심을 챙기기 위해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자들의 후예들이
아직도 대한민국 중심부를 이루며 자기들 잇속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으니
이 놈의 나라꼴이 서민을 등한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공정한 세수 확보가 되지 못하면 나라 운영이 불가능해집니다.
역사상 흥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공정한 세금 부과와 부정부패가 없는 나라였고
망한 나라들은 공정하지 못한 세금 부과와 부정부패로 인해
나라 곳간으로 들어가야 할 돈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무리들이 활개를 쳤기 때문입니다.
현재 부정부패가 만연해 세금을 회피하고 거짓 서류를 꾸며 혜택을 받아가는
도덕적 해이로 인해 나라가 거덜날 상황에 몰린 그리스 사태가 이를 잘 설명해 줍니다.
그리스 사태는 보수층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도한 복지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기강이 흐트러지고 도덕이 땅에 떨어진 나라가
망하지 않고 버틴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이를 놓고 보면 우리나라 5년 단임제가 얼마나 훌륭한(?) 제도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5년을 더 간다고 상상을 해 보면? 끔찍한 일입니다.
부자 감세, 4대강 사업 등으로 나라 곳간을 축낸 것도 그렇고
대통령 일가와 가진자들의 부정부패, 그로 인한 국민들의 도적적 해이 등...
윗물이 맑지 못하니 어찌 아랫물이 맑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글이 계속 옆으로 새내요...^^
두번째는 사(무사)농공상의 계급제도를 완성한 것입니다.
지배계급(무사)과 생산수단(농민)을 분리한 것입니다.
당시의 농민은 노동력을 제공, 생산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으며
다이묘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밑바탕이었습니다.
다이묘의 지위는 확보하고 있는 땅의 면적과 쌀의 수확량이 결정했습니다.
칼 또는 무기 소유는 무사들만 하도록 했으며
농민이 무기를 소지하면 사형에 처하는 병농분리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농민은 농사만 짓도록 해 불만을 가진 무사계급의 세력이 농민을 선동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하층계급 출신이 부시가 되고, 다이묘가 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은 것입니다.
이는 도요토미 자신이 겪어온 과정을 불가능하도록 한 것으로
경험에 의한 권력강화 방안이었던 것입니다.
부시와 농민을 분리했듯이 농민과 상인을 분리해
요즘과 달리 생산수단이 약한 상인을 가장 천한 계급으로 묶어뒀습니다.
세번째로는 해자를 두겹으로 판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을 축성한 것입니다.
이는 도요토미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면서
오다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방어하기 유리하도록 성을 쌓은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강력한 경쟁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담판을 벌여
'전쟁이냐, 강화냐'를 강요, 도쿠가와를 후미진 에도로 몰아내고
관백에 올라 명실상부한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도요토미보다 세가 약했던 도쿠가와가 손해 볼 일을 할리 만무했습니다.
명예고 뭐고 따지지 않고 실익을 위해 쥐 죽은듯이 고분고분 물러선 것입니다.
이렇게 내치를 강화한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을 일으킵니다.
임진왜란 명칭은 조선시대 조정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요즘 회자되는 조일전쟁도 아니며
조선, 명, 왜 동북아 3국이 국운을 걸고 맞붙은 동북아 최대의 국제전쟁이었습니다.
도요토미가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첫째 내부적으로는 전공을 세운 하부 조직에 대해 분배할 땅이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 섬나라이기 때문에 전란이 종식된 후, 막강하게 분출되는 군사적 에너지와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외부로 발산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일본 내부에 힘이 넘쳐날 때 그 분출되는 에너지의 칼끝은 항상 우리나라를 향했습니다.
이들이 언제 정한론을 펼쳐 또 다시 침략해 올지 모릅니다.)
셋째 과대망상이라 일컷는 도요토미의 군사적 자신감에 기초한 야망이었습니다.
조선을 물론 중국을 통째로 삼키고 인도까지 넘보는 야망을 가졌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발이 부르트도록 진격한 일본군은 18일만에 한양을 점령했으니
그 기간은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어가기도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이처럼 전격 진군을 한 까닭은 조선의 방비가 허술했던 면도 있지만
그들의 특이한 전쟁 양상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일본 내에서 벌어진 전쟁은 한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다이묘들끼리의 전투였습니다.
일본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전쟁에 패해 도망을 가면
결국에는 바다에 도착해 더 이상 도망 갈 곳이 없어지고 맙니다.
따라서 자기 영지 내에서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었으며
자기 영지인 수도가 함락되면 오다처럼 자결을 하거나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통적으로 무사 정신이 강한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패하면
깨끗하게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 명예로운 행위였으므로
조선의 왕이나 장수들처럼 패한다고 도망을 간다는 것은 최대의 수치로 여겼습니다.
또한 상대방의 다이묘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를 하게 되면
패한 다이묘의 영토와 농민들은 자기 재산이 되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기들
재산이 될지도 모르는 농민들을 죽이거나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치열한 전투가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데도
농부들은 전투 구경을 하면서 농사를 짓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전투에 패한 다이묘가 죽으면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2차대전 때 최후의 일인까지 죽창을 들고 성전을 벌이자고 했던 일본인들이
덴노가 항복을 선언하자 온순한 양처럼 돌변한 것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그러나 저 먼 고조선 시대부터 외침에 시달려 온 조선 백성들은 달랐습니다.
고구려 때만 하더라도 중국이 침략을 해 오면 맞장을 떠 죽기 살기로 항전을 했지만
워낙 강력하고 거대한 몽고족의 원나라가 침략해 오자
더 이상 싸웠다가는 씨도 못추리겠다는 판단 아래
살아남기 위한 사대외교가 정략적으로 움트기 시작했습니다.
조공을 바치고 섬기는 대신 자치를 허용받아 권력을 유지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고려 중기 이후부터 전쟁이 나면 왕과 조정은 백성이야 죽던 말던 강화도로,
지방으로 도망다니기 바쁜 것이 전통이 되었습니다.
평화시에는 온갖 고혈로 백성을 괴롭히던 위정자들이
전시에는 백성들의 삶을 팽개치고 자기 목숨 살리려 도망치기 바빴으니
가엾은 백성들은 조정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명은 스스로가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의 전략적 요충지인 전라도를 먼저 치지 않고
다급하게 북상을 한 것은 자기들 식의 전투 방식,
즉 조선의 수도를 점령하고 대장인 왕만 잡으면 전쟁이 종료되고
조선은 일본 땅이 된다는 판단하의 작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일본과 달랐습니다.
정작 싸워야 할 장수와 왕은 똥구멍에 불이 나도록 도망만 갔습니다.
왕이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왕이 도망을 가면 그들 식으로
점령군에게 절대 복종을 해야 하는 농민과 승려, 선비들이 들고 일어나
식량 보급 수송로를 기습하거나 지역을 장악, 항전을 해대니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없는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임진란 때 학습효과를 톡톡히 치른 도요토미는 정유재란 때는
조선 수군을 먼저 없앤 다음, 조선의 근거지가 된 전라도부터 공격하도록 했고
의병 활동을 막기 위해 사람이란 사람은 보는 족족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귀를 베어가고 코를 베어간 것도 이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습니다.
순망치한의 전략으로 참전한 명나라 군사의 만행도 일본군 못지 않았으니
명군은 참빚이고 일본군은 얼레빚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명군의 만행이 어떻했는가를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 명군의 참전으로 보급이 원할해지지 못하자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고 명측 심유경과 일본측 고니시가
명과 도요토미를 거짓으로 속이고 강화 협상을 맺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도요토미가 내 건 조건 중 하나가
조선의 남쪽지역 4도를 일본에게 분할해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때 이미 38선이 생겨날 뻔했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될 뻔했습니다.
지정학적 요인으로 대한민국은 항상 강대국의 이익을 위한
소용돌이에 휩쓸릴 요인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생존을 위한 대 외교정책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명박 식 외교와 대북정책이 불안한 것은 남북문제를 주도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주변 강대국에게 개입할 명분을 주기 때문이며
전쟁을 수행할 능력도 없는 자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앉아
집권 내내 대북 강공책을 써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핵폭탄을
국민들 머리 위에 놓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이 또 다른데로 새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자신의 욕망을 위해 몇백만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도요토미도
수명을 다해 죽게 되었는데 후계자로는 다섯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후계자의 나이가 어린 탓에 언제 다른 강자들이
자기가 이룩해 놓은 것들을 한 순간에 무너트리고 자기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할지 몰라 도요토미는 맘놓고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죽기 전에 5명의 다이로들을 불러 놓고 눈물로 자식을 돌봐달라고 호소를 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문서로 받았으니
천하를 호령하던 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식 걱정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비참한 인생의 끝장입니까.
자신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병사들을 자기 자식 생각하듯이 했다면
전쟁을 일으킬 상상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마음 편안하게 죽어야 제대로 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 삶에 대한 미련이 남거나, 자기가 살아온 생에 대해 후회를 하고 죽는다면
그만큼 세상을 헛 것으로 산 것이 되어 마지막 순간이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도쿠가와는 자기 병력을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아
수하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년 수확량이 250만석에 달해
명실공히 도요토미 다음의 제2인자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도쿠가와는 도요토미 후계자가 어리겠다 '이제는 내 세상이다'하고는
도요토미가 요구하는 휴지조각에 불과한 각서에 쾌재를 부르며 서명을 했습니다.
첫댓글 좋은 글 정말 잘 보았습니다 ^^
고맙습니다. 상식에 근거한 글이라 재미는 없지요?^^
덕분에 좋은 역사공부 하는군요. 난세의 처세전략까지...
아이고, 비양도님 무슨 말씀을... 이미 다 알고 계신 내용 아닙니까?^^
꼭데기까지님! 감사합니다.
20대때 도구가와 이에야스 전집을 통째로
읽어 내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난삽한
정치지형!의 헤게모니를 간략하게 설명 해 주셨네요. DK님께 감사 해야 할 대목이죠.
팬 카페를 통해 이렇게 알토란 같은 선인들을
만날 수 있다는 행복한 사실!
감사 또 감사합니다!
저의 무지를 일깨워 주셔서^^
오래토록 배우고 싶습니다!
20대 때 읽으셨다니...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다고 생각했었는데... 난세를 극복할 처세술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무지라니요, 부끄럽습니다. 전문 글쟁이가 아니다 보니 글이 매끄럽지를 못합니다.
다음편을 기다리는 설레임으로^^ 대단하십니다 정말~! 글 복사하여 워드파일에 옮기는 작업중입니다..ㅎㅎ 콜롬보선생님 칼럼은.. 벌써 작업완료!! 했구요..ㅎㅎ
하하하... 역사적 과정을 나열하다보니 지루할 것입니다. 이미 많이들 알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정치에 관심이 많으시니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김두관을 지지하려면 김두관도 잘 알아야 하지만 상대방을 더 잘 알아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읽은 일본 책은, 1.나는 고양이로소이다(60년대말), 2. 미야모도 무사시(60년대말), 3. 불모지대(70년대말),
4. 노르웨이 숲(90년대초), 5. 로마이야기 시리즈 외 나나미 작 거의 다.
그런데 위 세사람에 관한 책은 거의 읽지 못했습니다.
배울 점도 많겠지만, 왠지 싫었습니다. 안 읽은 걸 후회하면서 꼭님의 글로 총론만 접하겠습니다.
아이고,,, 저는 선생님께서 읽으신 위 책들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본하고의 역사적 관계 때문에 저도 일본하면 싫어만했지 그들이 어떻게 성장해 우리를 식민지 삼았는가에 대한 것을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면서 미국하고도 맞짱을 뜬 그들의 정신셰계가 어떻게 구축되었나 궁금해졌습니다. 다음에 또 당하면 안 되니까요. 이 글은 그런 과정에서 모아본 편린의 조각들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