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고향 어르신들의 한글교실 수료한 사진 한 장의 의미
되로 배워 말로 풀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이들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섬사람들이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하고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육지 사람들이나 도시 사람들과 100배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만 아니라 배움 부분에서도 여러 면에서 열악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고향 소리도에서도 야학으로 한글을 배우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재건학교, 새마을학교 있었던 때, 우리 마을은 고등공민학교를 통해 영어, 수학, 역사 등을 배웠던 때가 있었다. 외지에 나가 공부하던 장석민 당시 학생(부산해양고, 작고, 연도고등공민학교 교장)과 조기태 당시 학생(장흥농고 현재 서울 동원목재 대표)이 마을의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 이른바 야간학교를 열었다.
여수상업고등학교를 재학하던 배성찬 당시 학생(현 역포 이장)은 여름 주산 학교를 열었던 때가 있었다. 필자는 선지 동산에서 수학하던 시절 처가 동네 교회인 역포교회(당시 배진수 목사)에서 성경학교를 열어 하나님 말씀을 가르쳤던 때가 있었다. 학교를 다니던 중에 서울, 부산, 여수 등지로 전학, 중, 고등학교를 다닌 경우는 나은 편이었다. 거기에다 교육열이 있는 가정에서는 대학을 보냈고, 공무원도 있고, 경찰, 군인, 교장이 있고, 교수가 있고, 박사도 있고 각 분야에서 영향력을 펼치는 이들도 많다. 베트남 등 해외까지 나아가 사업하는 수천억대의 재산을 보유한 사업가도 많다.
학문의 꽃이라고 말하는 신학대학원을 졸업, 목회자로 선교사로 활동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대부분 학교를 졸업하기가 무섭게 선박 생활을 시작했거나 도회지로 나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거기서도 잘하면 직장에서 실시하는 야간반 고등학교 과정을 수료할 때가 있었다. 검정고시를 패스한 경우도 있었다. 타고난 머리도 있지만 자습하는 노력 형도 많다. 배움을 준 것도 있지만 스스로 알아서 공부한 독학 개념의 경우도 많다.
사진 상은 모교인 연도초중통합학교가 마을 노인들을 대상으로 펼치는 한글 교실 과정을 마치고 수료 및 시상식을 가졌다. 부상으로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목도리를 증정하였다. 한 달 못한 기간에 걸쳐 본교 도서관에서 학교장과 교사들이 지도를 맡아 왔으며, 웃어른 공경과 지역주민의 일평생 동안 학습의 장으로서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까지 약 40여명의 어르신들이 수료했다. 아래 사진은 이미 세상을 떠나긴 하셨지만 모친 고 김천심 권사의 모습과 가족사진이다.
사진에 없지만 장모인 손기쁨(손상심) 권사도 야학을 경험한 분들이다. 두 분 모두 성경을 읽으셨고, 찬송가 가사도 읽으셨다.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펼쳐왔던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야학운동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홍형래 대표(삼일렌터카) 모친 등 당시 모교에서 실시한 야간학교, 이른바 야학을 한 경험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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