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미(야마구치 토모코)는 결혼식날 약혼자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고, 새로 생긴 애인과 함께 돈을 전부 들고 도주하는 바람에 거리에 나앉게 되죠. 그녀는 약혼자가 살던 집의 빈 방에 밀고 들어가 그의 룸메이트인 세나(기무라 타쿠야)에게 빌붙어 살게 됩니다.
그녀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직장도 잃게 되죠. 게다가 본의는 아니지만 눈치 없게 아무 말이나 막 하다가 세나가 시작하던 참이었던 연애도 망쳐버리고 그와 대판 싸우는 일도 생깁니다. 오갈 데 없는 처지인지라 눈치가 보이지만 다시 세나의 집에 빌붙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저녁, 신세 한탄을 하며 앉아있는 미나미에게 세나가 조언을 하죠.
미나미: 내 차례는 언제쯤 오려나? 난 뭐 하고 있는 걸까? 하루 종일 파친코나 하고......
세나: 저기, 그냥 '길고 긴 휴가(Long vacation)'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미나미: 긴 휴가?
세나: 난 항상 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저기, 뭘 해도 안 풀릴 때, 뭘 해도 안 될 때가 있잖아. 맞지? 그럴 때는 뭐랄까...... 좀 이상하지만 '하느님이 내린 휴가'라고 생각하는 거야. 억지로 달리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거지.
미나미: 그러면......?
세나: 다 잘 풀릴 거야.
미나미: 정말로?
세나: 아마도.
미나미: 아마도?(핏 하고 웃는다).
미나미: (잠시 생각하다가 수긍한 듯 잔을 내밀며) 자, 건배.
세나: 왜?
미나미: 그냥.
'Long vacation'은 버블 붕괴로 일본 경제가 10년째 장기 불황에 빠져있던 1996년에 방영된 연작 드라마입니다. 한창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남녀 배우가 주연으로 출연한 드라마였기에 첫회부터 화제가 되었고 역대급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이 드라마는 경기 침체로 직장을 얻기 어렵고 장래가 불투명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위로를 전하던 드라마였죠. 실제로 세나가 살던 건물 옥상의 광고 간판에 씐 문구인 "Don't Worry."를 이 드라마는 끝없이 클로즈업합니다.
살다 보면 뭘 해도 안 풀리고, 뭘 해도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조급해하거나 뭔가 해결책을 마련해 보려고 동분서주하고 진을 빼다 보면 점점 더 수렁으로 빠지는 듯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는 '그냥 잘 안 되는 계절인가 보다. 조금 기다려야겠다' 하고 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고전 중의 고전 성경에서도 Long Vacation의 사례가 많이 나옵니다. 이집트의 왕실에서 왕자처럼 자란 모세는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도망칩니다. 미디안 광야로 가서 부족장 이드로의 사위가 되어 양치는 목자로 숨어 살게 됩니다. 그 생활은 무려 40년간 이어졌으니, 길어도 너무 긴 휴가였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80살이 된 모세를 불러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끌어내는데 쓰게 됩니다.
Long Vacation의 예는 또 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배다른 열 명의 형들에게 밉보여서 이들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가까스로 이집트로 가는 행상들에게 노예로 팔려서 목숨을 구하죠. 이집트에서 왕의 친위대장 집에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주인집 마님의 유혹을 거절했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의 Long Vacation인 종살이와 감옥살이는 도합 무려 십삼 년이나 계속되었죠. 결국은 이집트의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옛 중국의 태공망(太公望) 강상도 나이 칠십이 될 때까지 기나긴 빈한한 백수 생활을 했죠. 가난을 못 이긴 아내는 그를 욕하고 떠나버립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때를 만나자 주나라 문왕을 도와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를 건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현명한 지휘관은 전투에서 확실히 패퇴했을 때 전세를 뒤집으려고 바등거리지 않습니다. 후퇴하며 전력 손실을 최소화하여 후일을 도모합니다. 참새는 잡히게 되면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날아가려고 발버둥 치다가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금방 죽어버립니다. 하지만 산비둘기는 잡히더라도 좁은 새장에서 차분하게 먹이와 물을 먹고 마시며 때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전열을 가다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날아오를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최선의 방책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보존한 상태에서 일단 쉬어가는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잠시 몸을 맡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생은 충분히 깁니다. 묵묵히 준비하며 기다린다면, 기회는 반드시 다시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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