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絶頂)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문장』 12호, 1940.1)
♣작품해설
이 시는 육사의 지사혼(志士魂)을 대표하는 상징적 저항시로, 암담한 식민지 치
하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그것을 초극하려는 의지를 노래하고 있다. 민족이 겪는
극한 상황속에서 대일(對日) 저항의 시 정신을 ‘절정’에까지 몰고 간 육사의 절명시
(絶命詩) 성격의 이 시는 기·승·전·결의 한시(漢詩) 형식의 구조에 탄탄한 주제 의식
을 담고 있어 “현실 의식이 고도로 절제된 시적 긴장으로써 향상화된 명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형태상의 이러한 고전적 특성은 자기 감정을 고도로 통어하고
있는 절제 의식이 빚어낸 것으로, 작품 전체에 강렬한 긴장미를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긴장미는 화자를 둘러싸고 있는 외부 현실과 팽팽히 맞서 있는 화자의
현실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1연과 2연의 각 앞 행은 화자에게 부여된 비극적 상황이고, 각 뒤 행은 화자가 존
재할 필연적 공간이다. 3연에서는 상황과 공간에 대한 자신의 갈등을 비장한 독백
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처절하리만큼 냉혹한 상황에 대한 저항 의지가 담겨
있다.
‘매운 게절의 채찍’에 못 이겨 ‘북방’으로 ‘고원’으로 쫓기게 된 화자는 결국 ‘서릿
발 칼날 진 그 위’라는 극한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이렇게 1·2연은 화자가 처해
있는 외적 상황르 점층적으로 날카로운 것으로 압축시킴으로써 극한 상황을 구체화
시키고 있다. 즉 ‘북방’→‘고원’→‘서릿발 칼날 진 그위’의 과정에 따라 시상을 전개
하고 있따. 3·4연에서는 절대 절명의 외적 상황이 내적 상황으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3연에서는 비켜설 수도, 물러날 수도 없은 절망적 상황에 처한 화자가 그것을 극
복할 수 있는 방법이 오직 자시의 강인한 의지밖에는 없음을 깨닫는다. ‘어데다 무릎
을 꿇어야 하나’라는 구절은 굴복의 행위가 아니라, 무릎을 꿇을 데가 없어서 무릎
꿇지 않겠다는, 즉 결코 무릎을 꿇지 않겠다는 강인한 저항 의지를 보여 주는 것으로,
화자는 그 극복 방법을 어떤 절대자나 초월적인 힘에 호소하는 데서 찾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극한 상황이므로 화자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라고 생각하고 4연에 그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4연에서 그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4연에서 화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다시
금 돌아보며 눈을 감는다. 막다른 벼랑 같은 극한의 절정에서 화자는 절망하여 몸부림
쳤지만, 눈을 감는 순간 시상의 극적 전환이 일어나며 초연한 풍모와 굳은 의지로 현실
을 직시하는 자세로 변모한다. ‘눈감아 생각해 볼 밖에’는 이러한 극한상황 속에서 얻은
자아의 갈등을 승화시킴으로써 초월성에로 이입시키는 연결구가 되며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라는 결구(結句)를 통해 모든 극한상황을 극복하고 초월적 자세를 취하는
고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구속’·‘지상적(地上的) 절망’·‘죽음’의 표상인 ‘강철’과 ‘초월’
·‘천상적(天上的) 희망’·‘비상(飛翔)’의 표상인 ‘무지개’가 연결됨으로써 ‘겨울’은 절망과
초월의 모순, 곧 ‘비극적 초월’의 대상이 된다. 이렇듯 가혹한 역사의 횡포에 쫓기는 외적
인 삶이 생존의 극한에 몰려 축소될 때, 오히려 내적인 정신적 삶은 현실을 초월, 확대되
어 간다는 역설이 바로 이 시의 궁극적 의미가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이육사(李陸史)
본명 : 이원록(李元祿), 원삼(源三), 활(活)
1904년 : 경북 안동 출생
1915년 예안 보문의숙에서 수학
1925년 형 원기(源祺),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에 가입
1926년 북경 행
1927년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파사건에 연루, 대구 형무소에 3년간 투옥됨
이 때의 수인(囚人) 번호(264)를 자신의 아호로 삼음
1932년 북경의 조선군관학교 간부 훈련반에 입교
1933년 조선군관학교 졸업 후 귀국, 이 때부터 일경의 감시하에 체포와 구금생활 반복
1935년 『신조선』에 시 「황혼」을 발표하여 등단
1943년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
1944년 1월 16일 북경 감옥에서 사망
시집 : 『육사시집』(유고시집,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