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 막히고, 생태학습원 식물들 사라지고
‘습지공원’이라는 이름 무색한 메마른 풍경
지속적 습지생태 유지·관리 매뉴얼 세워야
10월 22일 안곡습지 모습. 지난 6월부터 시작된 맨발걷기 황톳길 확장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가운데 안곡습지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고양신문] 고봉산 자락의 생태보고인 안곡습지공원이 과도한 맨발걷기길 확장 공사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최근 맨발걷기 열풍을 타고 곳곳에서 맨발걷기 황톳길이 조성되는 추세이지만, 일반공원과 달리 고유한 특성과 가치를 지닌 도심 습지공원까지 맨발걷기길을 확장하는 것은 심각한 생태적 문제를 가져올 것이라는 게 안곡습지를 사랑하는 시민들과 생태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앞서 고양시는 고봉산과 연결된 안곡습지공원과 소개울공원 일대를 맨발걷기 둘레길 랜드마크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지난해 5월 ‘안곡공원 주변 공원화사업’ 1단계 공사를 진행해 안곡습지 바로 위 소개울공원 일대에 맨발걷기 황톳길 코스를 조성했다. 이때만 해도 황톳길과 안곡습지 사이에 어느 정도의 완충구간이 있었다.
하지만 올해 6월부터 10월 말까지 진행되고 있는 2차 맨발걷기길 조성공사는 습지 바로 옆 생태학습원과 야생초화원까지 맨발걷기 코스로 포함시켜버려 습지생태계에 직접적 영향을 초래했다. 또한 안곡습지공원과 이번 황톳길 확장 구간과의 거리는 불과 3m밖에 떨어지지 않아 이번 장마로 인해 습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안곡습지로 이어지는 중앙배수로가 막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려되는 지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훼손된 안곡습지공원에 가장 시급한 것은 습지의 물 공급이다. 안곡습지에서 유아숲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임나무 생태해설가는 “올 여름 장마 때 공사로 파헤쳐진 토사가 쏟아져내려 안곡습지로 연결되는 수로를 막아 습지로 공급되는 물길이 흙으로 채워져 버렸다”고 말했다. 이어 “이전에 아이들이 다양한 수서생물을 관찰하고 체험하던 습지원은 이제 흙바닥이 드러나 ‘습지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라며 “공사 이후 습지의 물이 말라 습지가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안곡습지 인근 주민은 “안곡습지가 지금 상태로 방치되면 내년부터 습지가 사라질 것 같다”라며 “학생들이 습지에서 다양한 생물을 관찰하고 체험하며 자연의 소중함을 배웠는데, 물이 없어지자 다양한 생물들이 서식지를 잃게 돼 이제는 생태 체험을 하기 어려워졌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어른들의 황톳길, 아이들 놀이터 훼손
다양한 식물종들을 관찰할 수 있었던 '생태학습원'과 '야생초화원'의 훼손도 심각했다.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이 찾아와 다양한 식물들을 관찰하고, 야생화 세밀화를 그리곤 했던 곳이 풀 한포기 없는 붉은 흙길이 됐다. 황톳길 조성사업 후 다시 초화를 식재할 계획이라지만, 주민들은 미로처럼 얽힌 숲길 전체가 황톳길이 된 상태에서 이전과 같은 생물다양성이 회복될 수 있을지 의문을 표하고 있다.
안곡습지공원은 보이ㆍ걸스카우트 행사를 비롯해 각종 고양시 초등학교 행사를 위해 주말마다 대형버스들이 줄을 선다. 특히 안곡초, 중산초, 모당초를 포함한 인근 초등학교 학생들은 주로 모여 놀던 곳이 바로 생태학습원과 야생 초화원이다. 공원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어른들을 위한 황톳길 확장으로 아이들의 자연 놀이터가 사라진 셈”이라고 꼬집었다.
상황이 이렇자 안곡습지에서 생태수업을 받고 있는 인근 안곡초 학생들이 위기에 처한 안곡습지를 지켜달라는 내용의 포스터를 제작해 공원 곳곳에 내걸기도 했다. 포스터에는 ‘여기는 일반공원이 아니라 습지공원입니다’ , ‘황톳길을 만들면 신발 신은 저희는 어디로 다니나요?’ , '안곡습지가 이상해요. 습지에 물이 없어졌어요.', ‘이곳은 멸종위기종 맹꽁이의 서식지예요’와 같은 호소를 담았다.
"황톳길 흙이 쓸려 내려가면 안곡습지는?"이라는 생각을 표현한 한 초등학생의 환경포스터가 안곡습지공원 나무에 걸려있다.
또한 안곡습지공원은 고양시 어린이집·유치원에서 연간 약 5500명 이상의 유아들이 유아숲체험 프로그램을 이용한다. 주말 이용을 포함한 유아들까지 1만명이 훌쩍 넘는 고양시 유아들의 자연 체험놀이터다. 한 어린이집 전 교사는 “안곡습지와 어린이집의 거리는 제법 멀지만 아이들이 이곳을 너무 좋아해서 자주 방문했다”라며 “이곳 프로그램 내용은 돈 주고 살 수 없을 만큼 유익하다”라고 전했다.
유아를 대상으로 한 유아숲체험 프로그램은 매달 곤충과 식물을 활용한 체험활동을 진행한다. 8월은 ‘개구리 구출작전’, ‘흙이 되는 과정’, 9월은 ‘가을 곤충 채집과 관찰’, ‘버섯 포자 날리기’, ‘버섯 밥상 차리기’ 등이다. 이번 달은 ‘거미줄 통과하기’, ‘씨앗의 번식 전략’ 등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프로그램 진행 교사에 의하면 “공사 이후 습지에 거미가 보이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다른 숲에서 거미들을 잡아왔다. 또한 올해 개구리들이 알을 낳지 못했고 매년 한동안 머물렀던 철새들이 안곡습지에 물이 없어지자 올해에는 이곳에 머무르지 않고 다 날아갔다”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유아숲체험 교사에 따르면 현재 안곡습지 곤충이 얼마 남지 않아 다른 숲에서 곤충들을 잡아와 겨우 수업을 이어가는 상황이다. 한 교사는 "작년까지 많았던 다양한 곤충, 개구리, 고라니, 뱀, 너구리, 매, 백로, 철새 등이 이제 보이지 않는다"라며 "물이 없어 먹이사슬이 무너진 것"이라고 말했다.
안곡습지 바로 위에 만들어진 세족장에 대한 우려도 크다.
세족장에서 배출되는 물이 안곡습지로 유입될 수밖에 없는 구조인데, 일부 이용자들이 비누와 세제를 이용한다면 습지 생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곡습지와 습지 옆 놀이터를 이용하는 유아, 어린이들의 안전을 위해 미끄러운 진흙 위 ‘야자매트’ 등이 필요하다. 공사 전 설치된 야자매트가 이번 공사로 인해 현재 모두 철거됐다.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자 정비사업을 담당하는 공원관리과 측은 서둘러 대책을 모색하고 있다. 우선 수로를 막고 있는 토사와 습지를 과밀하게 점하고 있는 갈대 등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세제ㆍ비누 이용 금지를 알리는 현수막 게시, 생태학습 유아 이용자들을 위한 야자매트 보완 등을 약속했다.
이번 황톳길 확장 공사로 안곡습지 인근 세족장이 추가됐다. 황톳길 이용객들의 비누사용이 계속되지만 이를 금지하는 표시가 현재는 없다.
하지만 이런 대책들이 습지 보전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게 생태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주변이 개발된 채 고립된 안곡습지를 ‘습지’라는 이름에 걸맞은 생태공간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기적인 모니터링 △구간별 식생 관리 △안정적 수량 공급 대책 △주변 환경의 생태적 연결성 유지 등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안곡습지의 생물다양성을 유지·관리하기 위한 행정의 매뉴얼은 아예 찾아볼 수 없다. 안곡습지를 관리하는 부서가 환경정책과가 아니라 공원관리과인데, 부서의 특성상 주민들의 이용과 편의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관리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2단계 공원화사업이 완료되면 맨발걷기를 즐기는 이용자들의 편의성 확대 민원이 더욱 거세지고, 습지 고유의 모습을 지키려는 목소리는 점점 위축될 우려가 크다. 오랫동안 안곡습지의 생태적 변화를 지켜본 한 시민활동가는 “20여 년 전 고양의 시민사회가 과도한 도시개발에 맞서 힘겹게 지켜낸 도심 생태보고가 이름만 ‘습지공원’으로 남게 되지 않도록, 더 늦기 전에 시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맨발걷기길 조성공사가 진행 중인 안곡습지 생태학습원. 여러 식물들이 식재되어 있던 식물종들이 모두 뽑혀나갔다. [사진 = 유경종 기자]
지난 5월 안곡습지에서 생태관찰을 하는 아이들 모습. 안곡습지에 오는 도중 황톳길을 만나면 규칙에 따라 신발을 벗고 황톳길을 지나와야 한다.
지난 5월 안곡습지의 건강한 숲 사진.
10월 22일 물이 없는 같은 장소의 안곡습지 모습.
10월 24일 제초작업이 완료된 안곡습지. 무성한 갈대를 쳐냈는데도 바닥에 물이 보이지 않는다. [사진 =유경종 기자]
안곡습지공원에 내걸린 환경포스터. 안곡초 한 어린이는 그림을 통해 안곡습지공원이 멸종위기종인 맹꽁이 서식지임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