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코나스넷에서 퍼온글 입니다.
박지원이 뉴욕서 포주였다는 증거와 그의 만행
언론계에 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이 문건은 1994년 ''자유민주 총연합''기관지 ''자유전선''에 우송된 현 민주당 원내총무 박지원의 신상에 관한 자료입니다.
''자유전선''에서는 박지원의 부친 박종식의 제적등본까지 떼어 왔습니다만, 연좌죄를 적용해 젊은 사람을 매장할 수 없다하여 중단 했습니다.
그러나, 박지원은 자신의 가족 배경을 버리지 못하고, 1999년 11월 설봉호를 타고 금강산에 다녀와 2000년 3월 싱가폴에서 북과 거래하여 김대중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뿐아니라, 근래 천안함 폭침을 두고 처음부터 북한과는 관계없다고 당론을 유도했고, 80여개국이 북한 규탄 결의를 했는데, 우리 국회는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 규탄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NGO의 본분을 망각하고 ''참여연대''가 안보리에 괴담을 집대성해 의견서를 보내 애국국민이 분노하며 일어서자 "매카시수법 운운한'''' 망발 등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국민은 알아야할 권리가 있습니다. 언론계는 공인으로 박지원의 형태에 국민이 더 이상 농락되지 않고 을바른 판단을 하게 하기위하여 심층취재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2010.06.15
자유언론수호국민포럼 대표 이 경 식 올림 [019-385-0324〕
박지원의 가족사
1945 해방후 박종식은 남로당 진도지역책이 되었고 숙부 박종극은 고군면 인민위원
박종식, 박종극은 1948. 10. 23 경찰에 수배되어 도피중 진도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1950. 9. 28 수복후 박지원의 삼촌, 고모등이 인민군 처영때 공산의용군으로
1981.1 전두환의 미국방문때 환영위원장으로 대대적인 행사를 하여
동년 K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전두환 대통령과 간은 강렬한 지도자가 필요하고 입에 침이마르도록 칭송했다.
〈 박지원의 여성편력 〉
1971년 결혼한 현 부인 이선자씨【1943. 10. 29생)가 40세인 1983년에 첫 딸을 광주제일병원에서 출산하였다 하고 이어서 43세때 둘째 딸을 역시 광주제일병원에서 출산하였다고 호적에 등재되어 있으나 이는 여성편력으로 낳은 사생아를 입적한 것으로서 현재 부인과 두 자녀는 미국국적을 갖고 있는 상태라고 함
미국 이민중 탤런트 ''최정민'' 과 동거하다가 헤어질 것을 요구하였으나 최정민이 블응하자 박지원은 깡패를 동원하여 의식불명이 되도록 폭행을 한 사실이 교포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음
탤런트 최정민은 박지원이 국회의원이 되어 여론에 민감한 것을 감지하고 1995년 입국 하여 동거사실과 폭행사건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여 3억을 받고 타협,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함
뉴욕의 교포 야채도매상인인 모여인과 동거하면서 많은 금품을 가로채 전국구 공천 헌금으로 유용하여 현재 분쟁의 대상이 되고 있음
< 사기행각 >
미국에서 근무하던 가발무역회사에서 한국으로 송금해야 할 대금을 착복하여 기반을 잡았음.
전경환의 도움을 받아 한국계 은행 미국지점에 압력을 넣어 현재 70만 달러 상당한 은행 빚을 갚지 않고 있음
1994년 10월 "국방부 포탄구입 사기사건" 으로 미국에 도피한 "주광용" 으로부터 한 국정부에 청탁해 무마시켜준다는 명목으로 미화 12만 달러를 받아 가로채고 사건해결이 되지 않자 주광용(현재 홍콩에 도피 중)으로 부터 심한 추궁을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착수금 8만 달러를 송금 받고 1개월 뒤에 추가로 4만 달러를 친지인 Joseph Kim (현재 New York의 Asia Pacific Trading Co.를 경영)을 통해 전달 받았음
1995. 9, 뉴욕에서 이성열(미국명 Kevin P. Lee 뉴욕에서 야채도매업)에게 13대 전국구 공천을 미끼로 착수금 60만 달러를 받았으나 특별한 진전이 없자 이성열은 서울을 왕래하며 DJ와 면담을 재촉하고 있음
김영광(LA 부동산업자)에게 한국계은행 LA지점을 통해 2천만 달러의 대출을 약속하고 그 대가로 3억을 받았으나 아직 대출이 성사되지 않아 고소를 당할 처지에 있음
5 18광주민주의거 동지회 재미한인교포연합회
박지원에 대한 재미한인교포의 증언
1. 96.3.6 뉴욕현지 TV토론에서 박지원의 도덕성 거론 가. 96.3.6 6사 New York 현지에서 “재미교포 한국현실 정이 참여 바람직한가?”라는 제목의 토론회 개최, 1시간 동안 생방송 나. 내용 - 박지원 같은 도덕적, 법률적으로 하자가 있는자가 어떻게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가? -이기택(신민당소속(총재이민우))이 87년 방미시 박지원으로부터 1만 달러를 받음 - 박지원은 전두환 방미 환영위원장을 했을 뿐만 아니라 5공 실세들인 정호용 박희도 등이 방미 햇을 때에도 환영위원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다녔던 자임
2. 박지원은 DJ에 대한 전두환, 전경환의 비자금 루트
가. 60년대 도미하였으나 부친의 좌익 경력의 연좌제 때문에 영주권을 받지 못하다가 전두환 정부에서 연좌제를 폐지하고 난 직후인 1981년 영주권 받음
나. 박지원은 미국에서도 민주화 운동가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치는데 앞장섬 다. 5공때 국가안전기획부 미국내 앞잡이 노릇을 함 -81.2.6 전두환 미국 방문 직후 환영위원장을 맡은데 대한 보답 차원에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고 한국으로 건너와 정보 활동 교육을 받음’
라. 전두환과 DJ의 비자금 루트 - 호남 회유책으로 전경환이 박지원을 통해 DJ에게 전달 박지원을 거쳐 김옥두, 한화갑, 남궁진에게도 흘러들어감 - 뉴욕 교포의 70%가 호남 출신 호남 적극 포섭 전략으로 박지원 선택됨 - 박지원은 전경환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150만불(12억 상당)짜리 주택과 빌딩을 삼. 현재 빌딩은 외환은행에 저당잡혀 있음 -DJ는 이런돈으로 85년 동교동 집을 확장함 박정진은 박지원의 사촌형으로 한국에서 동서양행을 설립래 장옹호보다 먼저 여공들의 노임을 떼먹은 자임
마. 박지원 4총사 5.17쿠데타지지 성명 냄. 이후 영사관에서 접근함 이영우(무기수입상, 율곡사건 관련자) 조광남(아리조나대 조여완 교수의 친동생, 광주일고 출신 86년 사망)
바. 81년 7~8월 증, KBS와 인터뷰에서 "광주진압은 정당방위” 사.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모습을 바꾼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뉴욕지부를 창설해 초대 위원장을 맡음 이후 LA와 시카고에도 생김
아. 이와 같은 공로로 82년 10윌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음 - 롯데호텔 독실을 얻어 훈장을 걸어놓고 진도 유지들 불러들여 자랑함 자 82~83년 박지원은 ''세번이나 해군- 쾌속정으로 전경환을 모시고 대등하고 진도행 - 군수, 서장 등 영접받음.
차. 정호웅, 박회도 등이 방미시 뉴욕 공항 영접, 안내 전달. 카. 87년 7월경 6.29선언 이후에도 미국을 방문한 전경환 부부가 참석하는 만찬회에 갔다가 이를 알고 달려은 민주인사들에게 계란과 캐찹 세례를 받고 구두까지 벗겨진채 도망감. 참석자는 강익조(전 한인회장, 평동회장, 제주도에서 무소속으르 출마, 88년까지 전경환의 돈을 받아 친정부 신문인 ‘한민일브’를 발행함), 최재성(전 평통위원), 박연회(박지원이 융자 알선, 태권도 9단), 박등근(평통위원) 같은 해 ''호남향우회 망년회’에서는 태권도 도장을 하는 김광성 9단에게 의자로 머리를 맞아 20바늘을 꿰매기도 함..
타. 박지원율 DJ와 연결시킨 것은 김경재(필명 박사월. 전남 순천에서 국민회의 후보로 출마)로서 본래는 박지원이 반한인사인 김을 84년부터 먹여살리면서 변절시키고자 했던 것임. 그러나 박지원은 6.29이후 대세가 기울자 DJ쪽에 작극적으로 밀착하게 됨 김경계(필라멜피아에서 발션되는 "득립신문"발행인 겸 편집인)는 80년 해의 41북최고수뇌 한민통 의장 배동호〔조총련 의장겸직)가 주최한 ''세계조선인민공산당대희''라는 집회에 미국대표로 이성호(DJ의 처 이회호의 막내동생, 한국 소재 평화관광(주) 사장)와 함께 참여함. "배동호 의장을 기리며"라는 제하의 1면 톱기사를 1면에 걸쳐 "독립신문"에 실음,
3, 여성편력
가. 최정민과는 78년 동거 시작해 88년까지 동거함. 전남여고 동문회에서 이선자가 자살까자 하려한다는 ''말을 자주 함,
나. 79년 최정민에게 뉴욕 증심 59번가 1st Avenue 꽃집( 상호 ‘최정민 꽃집’)을 내줌 이 꽃집은 현채 박지원의 친형 박상원이 상호만 ‘박상원꽃집’으르 바꾸고 운영하고 있음 (미주한국일보 발행 95판 ''한인업소록’에 ‘박상원꽃집’으르 수록 858 Lexington Avenue NY 10021, 212-879299)박상원은 현재 Daily Fashion도 운영함
다. 1983~84년 뉴욕56번가에 .브로드웨이 극장 ‘Fidler on the Roof’의 이름을 딴 ‘fidler coeffshop’을 12만불을 주고 사줌. 이동운 전경환의 도움을 받아 외환은행에서 특혜 융자를 받은 것임
4. 매춘업의 포주가 장수 야당 대변인
가. 가발사업 망한 뒤 어려움 겪고 있을 때에 5-17쿠데타가 일어나 전경환의 지원으로 살아남 - 특혜융자 많이 받음. 외환은행 뉴욕지점에서 120만불 (10억)등 나, 79년 뉴욕28번가 브로드웨이에 최정민을 마담으로 매춘업을 함
- 박지원이 어려웠을 때임. 박지원 이전 뉴욕한인회장인 장용호 (YH무역무역사장, 현재 뉴욕거주)가 뉴욕 중심 32번가 한인타운 25번지 2충에서 매춘업으로 돈을 잘 번다는 맡을 듣고 시작함. "한국에서 멕시코를 통해 여자를 밀입국시켜서 너도 한번 해봐라"고 장용호가 권유했다고 함
다. 염진호(뉴욕 한인''교포가정문제연구소장; 여성권익기관) 여사가 "세상에 죽일 놈들아! 한인회장 출마한 놈이 천하에 할 일이 없어서 매춘을 하느냐!"고 시위함으르써 매춘에서 손 땜. 경찰의 단속 강화로 80년 중반까지 대부분 폐업
5。 박지원 아버지(박종식)의 좌익 활동
가. 지방 유격대장으로 우리 경찰을 무수히 죽임 나. 지리산 피아골 함락 이후 목포, 신안으로 피신 -마지막까지 "인공만세!"를 부름 다. 박종식은 DJ와 목포상고 동문 라. 1993.8.15. 박증식은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음(포장증 제1552호, 당시 총무처장관 최창윤) - 한국논단 96.3월호에서 "사살된 공비에게도 건국 포장을 수여하느냐"라며 문민정부를 비판함
6, 야당 대변인에게는 미국영주권이 꼭 필요한가? 가. 박지원은 아직까지 미국영주권 (A21-762-961을 소지하고 있음)
나. 부인 이선자 (43년 10월 29일생)와 딸 박혜연(83년 2월 24일), 박혜준 (85년 2월 25일)은 현재도 미국시민권을 가지고
한국에는 주민등록도 두고있지 않음
국민희의 대변인 박지원의 정체
친일파에서 남로당으로 변신한 가문
박지원의 부친 박종식(1910년생)은 1940~45년 일제시절 고향(진도군 군내면, 고군면)에서 목화수매 책임자로 친일파 두묵이었음 1945년 해방후 박종식은 남로당 진도지역책이 되었고 숙부 박종극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음 박종식, 박종극은 1948. 10.23 경찰에 수배되어 도피중 진도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현사등에 의해 총격전 끝에 사살됨 (1976,2,25 진도군지의 기록 및 곽우불 진도번영회장증언) 1950. 9, 28 수북후 박지원의 삼촌、 고모등이 인민군 치하때 공산의웅군으로 면민을 가흑하게 징용한 사실에 분개한 군민들에 의해 맞아. 죽음 (전도군 무공수훈자 회장 최기남 증언) 이런 모든 사항을 숨기기 위해 호적등 관계서류튠 파기, 변조하고 1992년 2월 20일 처음으로 대한민국 주민등록믈 취득한 것으로 되어 있음
정치행각
1981. 1 전두환의 미국방문때 환영위원장으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하여 이를 계기로 전경환과 각별한 관계를 맺음. 박지원은 이를 이용해서 전국구국회의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자신의 집안이 좌익이어서 공천에서 탈락하자 전경환과의 관계를 과시하기 위해 함께 군함을 타고 진도에 착륙하여 마을사람들에게 위세를 부림
동년 KBS방송과외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전두환 대퉁령과 같은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며 12.12와 5,18은 영응적인 결단이었다" 라고 말해 광주의 민주영령들을 팔아먹음
1982. 10. 5 전경환의 후원과 친독재행각에 힘입어 전두환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등백장을 수여받음 1984년 전경환의 미국방문때 환영만찬을 주최하여 만찬식상에서 한인들로부터 계란 케찹 세례를 받고 배신자로 낙인찍혔으며 ‘호남향우희’ 망년회에서는 의자로 머리를 찍혀 20바늘을 꿰매기도 함 DJ가 미국에 망명해서 고생을 하는 초기에는 외면하다가 민주영웅으로 대접받으면서 귀국하기 직전에 친DJ인사로 재빨리 변신함 DJ에게 거액을 헌납하고 권노갑의원의 딸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비용일체를 지원하는 등 돈으로 감투를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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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2012/06/25 에 실린 올인코리아 기사 입니다.
親美에서 從北으로 돌변한 박지원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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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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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재 조갑제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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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1일자 <경향신문> 보도 |
[1] 국내 언론이 ‘영원한 김대중의 비서’, ‘절대적 DJ맨’으로 평가해온 朴智元(박지원, 지역구: 전남 목포시) 민통당 원내대표는 원래 美國 영주권자였다. 전남 진도 태생의 朴씨는 목포 문태고와 광주교대를 거쳐 1969년 단국대 상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대 초 渡美(도미) ‘동서양행’ 뉴욕지사장을 거쳐 1975년 가발 및 잡화를 수입-도매하는 ‘데일리패션’을 설립해 대표이사가 됐다.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朴씨는 이후 ‘뉴욕한인회’(1980년) 회장 겸 ‘미국지역한인회총연합회’(1981년) 회장까지 지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형적인 親美인사였다.
朴씨는 ‘뉴욕한인회’ 회장 활동 시기인 1980년 8월27일 전두환 前 대통령이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자 “전 대통령의 당선을 55만 재미동포를 대표하여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국을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해외교포로서 긍지를 갖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모든 국민이 새로운 지도자 밑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승공통일의 기반을 닦을 수 있도록 정부를 신뢰하고 협조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1980년 8월28일자 <경향신문>)
이듬해인 1981년 1월 전두환 前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자 미국 교포를 대표해 朴씨를 중심으로 여러 교포단체들이 참여하는 환영준비위를 구성하기도 했다. 당시 이들은 케네디 공항과 대통령의 숙소인 월돌프 아스토리아 호텔 부근에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면서 환영행사를 치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1980년 1월27일자 <동아일보> 보도인용)
그는 1983년 6월1일자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미주지역 해외평통자문위원들의 활동상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었다.
“북한의 분열책동을 봉쇄하고 그들이 내세우는 ‘고려연방제’의 허구성을 폭로, 우리의 평화통일의지를 교포사회와 미국인들에게 정확하게 심어주는 데 1차적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중략) 한때 미국교포사회에서는 우리의 통일노력에 관해 회의를 느낀 인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제5공화국 출범이후 획기적인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이 제시돼 통일에 관한 확고한 신념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중략) 아직도 일부 교포 가운데는 주한미군 철수 등 적화 야욕이 숨겨진 전제조건이 붙은 ‘고려연방제’를 아무런 조건이 없는 연방제안으로 착각하고 있는 인사가 없지 않다.”
당시 朴씨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평통자문회의에 참석차 일시 귀국하여 지난 이틀 동안 통일문제연수에 참석했던 박 회장은 1일 새벽 “연수과정을 통해 모국의 밝은 경제 사정과 통일정책, 정부의 시책 방향 등을 듣고 한결 가슴이 뿌듯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그리고 “모국을 방문하는 다른 재외 국민들에게도 같은 연수를 실시한다면 조국애를 더욱 북돋워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남 진도 출신으로 단국대를 졸업한 후 71년 미국에 건너가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박 회장은 현재 뉴욕근교 뉴저지에서 부인 李善子(이선자)여사(40)와 단둘이 살고 있다.》
朴씨는 또 1985년 전두환 前 대통령이 같은 해 4월 미국을 방문한다는 보도가 <뉴욕타임즈> 등 미국 언론에 보도되자 다음과 같이 대통령의 訪美를 환영하는 멘트를 남겼다.
《박지원 뉴욕평통자문위원회 회장 등 재미교포들은 전 대통령의 방미를 크게 환영하고 한미양국의 전통적인 우호관계가 더욱 강화되고 특히 무역분야의 장벽이 잘 해소되어 서로 공동의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1985년 2월4일자 <매일경제>》
金大中과의 만남 이후 인생 180도 반전
[2] 朴씨가 김대중과 인연을 맺은 시기는 DJ의 미국 망명 시기인 1983년 가을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후 김대중이 설립한 인권문제연구소 등의 후견인 역할을 했다. <한국일보> 등 복수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1987년 김대중이 赦免復權(사면복권)되어 정계에 복귀하자 미국 영주권을 정리한 뒤 귀국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그는 해외로 이민을 갔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은 ‘逆(역)이민자’인 것이다. <오마이뉴스>의 경우 2004년 4월28일자 ‘피고인 박지원의 의안과 눈물’에서 “역이민자 가운데는 고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더러 있어 재미동포 사회에서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라며 김경재·박원홍·유재권 前 의원 등과 함께 朴씨를 꼽기도 했었다.
그는 1987년 평민당 진도군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1989년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이사장, 1991년 민주당 국제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14·18·19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됐다. 朴씨는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청와대 대변인, 공보수석비서관, 문화부 장관, 비서실장 등을 지냈다.
권력형 非理 사건들
그가 관련된 비리 사건들은 많다.
▲朴씨는 2002년 對北송금 의혹이 제기됐을 때 “단돈 1달러도 보낸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가 不法송금이 사실로 드러나 법원으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천안함 爆沈(폭침)사건에 대해서는 “북한의 공격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본다. 과거에도 불바다를 만들겠다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불바다 만든 적 없지 않느냐”고 했었다.
▲연평도 砲擊(포격)사건에 대해서는 “이명박 정부가 3년간 햇볕정책을 반대하고 강경정책을 써서 이 꼴이 난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3대 권력세습 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에서는 그게 상식이다. 그것(후계)은 자기들 상식대로 하는 것이다. 영국 엘리자베스家에서도 아들로 태어나면 王子되는 것 아니냐”라고 했다.
▲2010년 10월19일 당시 민주당 원내대책회의에서는 中國의 習近平(습근평) 부주석이 김대중을 만난 자리에서 “왜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평화의 훼방꾼 노릇을 하는가”라며 한국 정부의 對北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中國의 공식부인과 대화기록 등을 통해 거짓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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