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남녀를 엄마와 아빠가 되게 만드는 첫애가 소중한 건 누구나 다 마찬가지일 겁니다.
물론, 둘째, 셋째...도 똑같이 소중한 자식이지만요.
저는 그저 첫애를 낳아야 엄마 아빠 소리를 처음으로 듣는다는 뜻에서 그런 거지요.
저와 아녜스는 1982년 가을에 처음 알게되어 펜팔을 시작하였는 데,
그때 저는 대학 졸업반이었기에 직접 만날 일은 별로 없었어도 그저 바쁘기만 했었죠.
사실, 저는 군대를 대학 졸업하고 가기로 했기 때문에 남들처럼 취직준비를 하기도 어려웠고
그저 학점을 무사히 따서 졸업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남자들은 우리나라가 의무병제 국가인 까닭에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는 데,
사회에 진출하여 자기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는 대학 1학년이나 2학년을 마치고
휴학하고 군대를 다녀오는게 좋겠다는 제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학창생활과 취직을 연계 안할 수 없으니까요.
여학생들이야 별 문제 없겠지만...
저는 제 아들 요한이에게는 대학 2학년 마치고 군에 갔다오게 하려해요.
그럼, 국방의 의무를 마치고, 홀가분하게 3, 4학년을 공부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거든요. 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제가 ’83년 2월에 대학을 마치고, 남들이 꽃피는 춘삼월이라며 즐거워하는
3월 12일에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군생활을 시작했었죠.
그동안 제 글을 잘 보신 분들은 입대한 그날이 저와 아녜스가 본적지에다 혼인신고한
날이었다는 걸 아실텐데...
아참, 요즘 논산훈련소가 인분을 강제로 장정들에게 먹게 했다며 시끄럽던데...
어찌 대명천지 밝은 세상에 군대에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는 지... (쩝!)
군대보낸 우리나라의 많은 부모님과 가족들이 걱정할 일이죠.
중대장 한사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겟지만, 그래도 파장이 너무 크다죠.
저 군대시절에도 “구타금지”를 귀 따갑게 말했었어도 잘 안 지켜졌었는 데...
민주국가의 군대에서 있을 일이 아니고, 생각도 못 할 일이 일어난 거여요.
그 중대장 나이가 28세라던데, 한참 젊은 사람이 그리도 인식이 없으니...
구속되었으니 재판 받으면 어떤 법적 조치가 있겠죠.
군대 생활 어려운 기간을 잘 이겨내고 제대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아녜스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가
’86년 1월에 청주로 저희만 이사갔어요.
부모님과 독립하여 저희만의 살림살이를 시작한 거였어요.
그러다가 3월 22일 사직동 본당에서 혼인성사를 하였죠.
그때야 비로소 교회에서 인정해 주는 부부가 된 거였어요.
물론, 법적으로야 ‘83년 3월 12일, 저 군대갔던 날이 혼인일 이지만요...
그때는 제가 요즘 말하는 “백수” 였었죠.
직장 없이 35,000원짜리 복대동 공단 월세방에 쭈그려 앉아 기약없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였거든요.
그렇지만, 첫애를 임신한 아녜스의 배는 불러오고 결혼비용을 아낀 “쩐”은 다 써가니
한숨만 나오더군요.
그래서 생각한 게, 청주공단의 공장 취업.
팔자에 없는 공돌이 생활을 한 거였죠.
지금도 그때의 어려웠던 기억을 하면 저나 아녜스나 슬퍼지고 눈물이 나요.
힘든 주야근무는 물론, 철야작업을 밥 먹듯하니 책 한페이지 볼 시간도 없었고 힘이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집안에 있는 아녜스와 뱃속에 있는 아기를 생각하며 참아냈죠.
그러던 중, 86년 4월 15일 있었던 충북 지방직 공무원(9급) 시험에 도전하였어요.
(저보고 오래전 일을 정확하게 날짜 기억한는 걸 보면, 대단하다는 분들이 있더군요.
ㅎㅎㅎ)
지금보다는 경쟁률이 안 높았다해도, 그때도 합격을 자신 할 수 없었어요.
그래도 경쟁이 심했거든요.
말단 시험이라해도 몇 개월은 학원등록하고 혼자 독학을 하더래도 엄청 준비들 한다는 데...
저는 그저 약 한달 혼자 공부한 것 뿐이었으니...
시험장에 가서도 보니, 엄청난 응시생들이 저를 주눅들게 하였죠.
그래도 지금껏 준비한 대로 편안히 본다는 기분으로 응시하였고,
시험발표 하던 날 제가 22명 합격자 중 “8등”으로 합격했다는 걸 알았죠. (ㅎㅎㅎ)
면접시험을 거치고 최종합격하고도 발령을 기다리면서 계속 공장을 다녔어요.
어쨌거나, 벌이가 있어야 우리 부부가 먹고 살고, 뱃속의 아기가 배 안 고플테니...
임신한 아녜스가 여름철에 먹고 싶은 것도 많았을텐데, 제대로 해 줄 수 없었지만,
그래도 토마토는 엄청 좋아하고 맛있게 먹었어요.
그래서 제 딸이 뱃속에서부터 맛을 알아 그랬는 지, 지금도 토마토를 좋아하고 잘 먹어요.
공장에 다니다가 ’86년 7월 28일(음력 6월22일) 새벽 6시 42분에 태어난 아기.
그애가 저의 딸 “김 세실리아”입니다.
그해 8월 20일자로 보은군으로 수습발령이 나고 시작하게 된 공무원 생활이었죠.
딸이 태어나고 채 한달이 안 되어 발령 났으니, 울 딸이 복덩이였죠? (헤헤헤)
그 딸이 세상에 태어나 청주에서 보은으로 대전으로, 무려 14번의 이사 끝에
열심히 사는 저희 부부에게 힘을 주고 행복을 더해 주었어요.
물론, 보은(관기)에 살 때 남 동생인 요한이도 생겼구요.
청춘남녀 평범한 서민이 새로운 가정을 이루어 생활을 시작하다보면, 숱한 어려움을 겪고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잇습니다.
요즘도 가끔 그런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신앙을 갖고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최선을 다하면 잘 될 수 있어요.
신앙을 아직 안 가진 분들은 어떤 종교든 좋으니까 열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해 보세요.
저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제 처가의 종교인 불교는 물론, 다른 종교도 존중해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저희에게 “갑천의 기적”을 이룬 자수성가의 표본이라고 하지요.
“갑천”은 저희 아파트 주위를 흐르는 대전시내 하천이름입니다. (ㅎㅎㅎ)
지금도 부자는 아니지만, 열심히 살아가며 좋은 삶을 만드려 노력해요.
어쩌다 보니 딸 얘기한다는 게, 제 지난 세월에 대한 넋두리가 되었네요. (죄송!)
제 딸이 수능시험을 본 후로 기분이 안 좋았어요.
저희는 물론 딸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고 싶어 했지만, 여러 생각과 의견을 나눈 결과
대전에 있는 대학을 진학하기로 했거든요.
당사자 본인인 세실리아가 아무래도 지방대학을 가야한다는 게 꺼려졌겠죠.
사실, 실력으로야 서울이나 수도권대학에 가도 충분히 되겠지만...
제가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나왔는 데, 가정형편상 지방국립대 갈 수밖에 없어서
대전까지 왔었기에, 제 자식은 등록금 걱정 없이 원하는 서울로 진학하길 원했거든요.
남들은 서울은 물론, 외국으로 유학도 보내는 세상인데... (쩝!)
첫댓글 항상 글을 읽으면 놀랍니다. 하루 하루 이렇게 글을 쓸수있다는것 참 행복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울 님들도 힘내시고, 모두 행복하시길 바래요. 감사함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