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와서 지금까지 그놈의 영어 때문에 웃을 일, 웃지 못할 일들이 참 많았다. 지금도 여
전히 실수도 많이 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잘은 못해도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고 웬만
큼 대꾸도 하니 크게 문제되진 않는다. 하지만 처음 왔을 때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어
서 무척 애 먹었다.
특히 난처했던 때는 아이들이 아파서 병원 갔을 때와 학교 선생님과의 면담시간. 내가 질문
할 말들은 미리 메모해 두고 준비도 하지만 그들의 질문이나 설명은 금방 알아듣지 못해서
쩔쩔맸다. 웬 발음에 그리도 버터가 잔뜩 묻어 있는지 원. 하긴 그들도 내 질문을 못 알아들
을 때가 많았다. 된장과 버터가 섞인 발음이니 알아듣기가 좀 어렵겠는가? 그렇다고 적어
줄 수도, 적어 달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지금 들어보면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말들인데 그
때는 그토록 어려웠으니.....
영어 때문에 겪은 몇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 하나
아이들이 학교에 적응하던 시기는 아이들도 영어를 배우는 때라 잘 몰랐는데, 이 녀석들이
어느 덧 적응이 되고 영어로 말하며 지내는 학교 생활을 즐길 즈음되니 걸핏하면 엄마,
아빠의 발음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다. (내 참 아니꼬워서.....)
"프라이 데이"
"아니∼! 후라∼이 데이"
"프라∼이 데이"
"에이, 틀렸어. 다시. 후! 롸이! 데이!"
"푸! 라이 데이!"
"어휴∼ 아빤 왜 그렇게 발음을 못해∼후롸이 데이야∼!"
지난 크리스마스 선물로 사준 새로 나온 바비 비디오테이프. 이번 건 '라푼젤(Rapunzel)'
이야기다.
(엄마)"<라푼젤> 머리 굉장히 길다∼그치?"
(서이)"엄마∼<라푼젤>이 아니고 <러펀저∼얼> 이예요."
(재이)"<라>가 아니고 <러>야 <러>! 엄만 발음을 잘 못해."
살짝 눈을 흘긴 후,
(엄마)"영어로는 <러펀절>인지 몰라도 원래는 <라푼젤>이 맞아. 엄마 어릴 때 <라푼젤>책
읽었거든. 분명 <라푼젤>로 적혀 있었어."
(재이)"그럼 그게 틀린 거예요. 저기 봐요. 분명 스테화∼ㄴ(스테판)왕자가 <러펀절>이라고
부르잖아요."
(엄마)"알았어. <라푼젤>!^^"
(서이)(재이)"<러펀저∼얼>!"
★★ 둘
서이가 어렵다며 가져 온 숙제를 보니 구구단을 표로 만든 거였다. 어떻게 하는 건지 방법
은 알겠는데 숫자가 커질수록 너무 어렵다고 한다.
"엄마∼타임 테이블 너무 어려워. 우리 반 애들도 잘 못해요."
"타임 테이블? 시간표?"
"아니. 이거∼이 타임 테이블∼"
"아∼구구단!"
"구구단이 뭐예요?"
"이거∼이 타임 테이블을 한국말로 구구단이라고 해."
"투타임은 쉬운데 쓰리 타임부터는 어려워."
"그래? 이건 그 방법만 알면 그 다음부터는 외워야 해. 그러면 쉬워져."
그리고는 먼저 반복해서 여러 번 읽으라고 했다.
"2단은 쉽다고 했지? 그럼 천천히 외워 볼까?"
"투 원 투, 투 투 훠......."
"그게 뭐야∼한국말로 해."
"어떻게 하는 건데요?"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 육....이렇게. 자 다시"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이 삼은...육, 이 사는.....팔, 이 오는......십, 이 육은......음....이 육은
뭐지 엄마?"
"잘 생각 해봐. 이 오가 십이니까 거기에 이를 더하면 되잖아."
"그건 알아요. 이 육은 트웰브잖아. 근데 트웰브를 한국말로 뭐라고 하죠?"
"뭐야?! 얘가 지금? 잘 생각해 봐!"
"......음.....뭐더라....."
"기가 막혀서, 1부터 시작해 봐. 1, 2, 3.....해 봐."
"일, 이, 삼, 사.....구, 십, 십 일, 십 이......아∼! 십 이"
"자 다시!"
"엄마, 영어로 외우면 안 되요? 학교에서도 영어로 외우는 거 시키는데......그게 더 쉽단
말예요."
세상에∼! 이게 웬일이야?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도 아니고, 영국에서 5년을 산 것도 10년을
산 것도 아닌데 한글 숫자가 어렵다니? 영국 온 지 얼마나 됐다고? 기가 막혔다. 하지만 한
편으론 이해가 되기도 했다. 한참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나이의 서이. 한국에서 한글을 떼고
숫자도 100까지는 말하고 쓸 수 있었다. 덧셈, 뺄셈도 곧잘 했고. 하지만 그게 다였다. 계속
공부가 이어져야 하는데 한글 공부는 거기서 끝. 2년 동안 하루종일 학교에서 모든 걸 영어
로 말하고, 영어로 공부하고, 영국 친구들과 놀고, 영어가 나오는 TV를 보고 있으니 영어
숫자가 더 쉬울 수도 있겠지.
고민되네? 아이들의 영어 공부도 우리가 영국에 온 이유중의 하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어차피 오래 살 것도 아닌데 그냥 놔둬? 그래도 그렇지.....어쩐담?
"서이야. 어려워도 한국말로 외우자. 구구단은 중요해. 한국 가서도 오래오래 사용할 공식
이니까 한국말로 외워. 영국 학교에서는 잠깐 있는 거니까 크게 걱정하지마. 넌 똑똑하니까
한국말로 구구단 외워두면 금방 영어로도 할 수 있어. 알았지?"
"에이∼어려운데...."
"어렵지 않아. 엄마랑 날마다 연습하자. 응?"
"알았어요..."
그래서 날마다 구구단을 공부했다. 아울러 동화책 큰 소리로 읽기와 받아쓰기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어는 금방 잊고 한국말을 잘 쓰겠지만, 서이 또래의 친구들이 국어의 기초를 배
우는 이 시기에 서이도 최소한의 맞춤법이나 띄어쓰기 등의 공부는 해야 될 것 같았다. 국어
공부까지 하면서 서이가 하는 말.
"엄마, 영어가 훨씬 쉬워, 그쵸? 한국말은 그냥 닭은 맞는데 <암닭>이 아니라 <암탉>이 맞잖아.
진짜 어려워....."
★★★ 셋
얼마 전 원정이랑 카부츠(Car Boots) 세일에 갔었다. 값도 무지막지하게(?) 싸고 재미있고
신기한 물건들도 많은 카부츠 세일을 원정이와 나는 무척 좋아한다. 지갑에 동전을 가득채
운 우리는 아이들 장난감, 책, 예쁜 그릇들을 사고 옷들이 펼쳐져 있는 자동차 쪽으로 갔다.
"와∼이 바지 괜찮다∼"
"그 체크 무늬 너한테 잘 어울린다∼. 사∼."
"예뻐요?"
"그래, 예뻐."
"사야지. How much is this?"
"50p(약 1,000원 정도)"
"원정아, 내가 사줄게. 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니∼?^^"
"우와∼이 거금을, 언니가!"
그리고 지갑에서 50p를 꺼내 건네면서 옷 파는 아줌마와 내가 나눈 대화.
"<여기있어요.>"
"<Thank you.>"
원정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아 깔깔대고 웃
었다. '여기 있어요' 라니∼푸하하하.....근데 Thank you 래.....낄낄낄. 나도 덩달아 큰 소리로
웃고 말았다. 세상에나∼너무 다른 두 언어의 절묘한 커뮤니케이션이었다. 낄낄낄.....
★★★★ 넷
내가 요즘 다니는 C학교에는 유럽의 젊은 학생들이 참 많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프랑스,
터키, 스페인, 폴란드 등등. 그리고 영어식 이름이 아닌 이 친구들의 이름들도 내게는 무척
이나 생소하다. 아그네시카, 루도리코, 로잘렌.....그리고 너무나 특이한 이름의 터키 여학생
이름은 바로 <Sibel>이다. 부를 때는 S에 강세를 넣어[sibel∼]하고 부르는데, 선생님이 나
보다 늦게 온 <Sibel>의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너무나 놀란 표정으로 같은 한국 여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 한국 여학생, 작은 소리로 내게 속삭이며 하는 말.
"언니, 이름이 너무 특이하죠?"
"어머나.....너무 아름다운(?) 이름이다.....차마 부를 수가 없을 정도야.....큭큭큭."
그 날 수업시간. 수업의 대부분이 선생님의 질문과 학생들의 대답으로 진행되는데 예쁜
<Sibel>의 특이한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을 훔쳐보며 키득거리느라 내게 하는
질문을 듣지 못했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데...다행히 짧게 대답하란다. 가만있자, 분명
Do you∼로 시작했지? 나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Yes! I do!"
그런데 표정이 이상하다. 선생의 놀란 표정, 다른 친구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뭐가 잘못됐나?'
선생님이 '정말 그러냐'고 묻는데, 대답을 번복하기 뭣해서 그냥 '가끔.....그렇다'며 말꼬리를
흐렸다. 책상을 치며 웃어대는 남학생들.....
슬쩍 책을 펴서 질문을 확인해 보았다. 앗! 질문은 이랬다.
'당신은 사고가 난 걸 목격했을 때 비웃습니까?'
이상한 코리안 아줌마라고 얼마나 비웃었을까? 나야말로 제대로 비웃음 당했군! 쩝!
하지만 <Sibel>의 이름은 정말 너무 특이해.....
첫댓글 사진 일등하신거 축하드려요~ 우와...다른 애 들도 다 이쁘네요~ 나중에 기회되면 인터뷰 가겠습니다.ㅋㅋ
감사합니다.땡큐,땡큐~~~~ 언제든 놀러오세요.김치랑 된장찌개 많이많이 해드릴께요.^^
아이들이 좀 걱정됩니다. 한국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염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저희 아이들은 아주 토속적(?)으로 뜨거운 한국인으로 크고 있어요.^^그리고 조금 있으면 한국으로 돌아 갈거구요.^^*
한국에 와서 그동안 익힌 영어 까먹지 않게 하는게 더 어려울 겁니다.
일등 축하축하 드립니다~~^^ 늘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