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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길리성
아관파천 (俄館播遷) 과 대한제국 ( 大韓帝國)
그리고 황제(皇帝) 즉위
갑신정변 과 3일 천하
1884년 1월 17일 ( 양력: 12월 4일 ) " 급진 개화파 " < 김옥균 >< 박영효>는
일본공사 <다께소에 신이치로 : 竹添進一>와 1달전 밀약 된 대로 < 고종>과
<민비>를 창덕궁 (昌德宮)에서 경운궁 ( 慶雲宮)으로 청국군 (淸國軍)몰래 옮기고
일본군 200 명과 조선군 50 명으로 < 경운궁>을 지키며 정권을 장악 하였다 .
<급진개화파>는 급조된 <14개정강>을 발표했는데 <고종>과 <민비>는
이들의 행위를 용서할수 없어 , <경운궁>에서 다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길때 <민비>는 은밀히 ,<청국>의 " 위안스키
< 원세개 : 袁世凱>에게 <원병>을 요청 , <원세개>는 서울에 남아 있던
1 .500 명의 <청국군>을 이끌고 1884년 10월 19일 , 오후 3시경, <정변>을 일으킨
< 급진개화파>를 공격 하였다 . 이때 전세가 불리함을 깨달은 <일본공사>는
<급진개화파>와 의 굳은약속을 던져버리고 뺑소니 치듯 <일본군>을
철수 시켰다 . 결국 <급진개화파>는 사살되고 <김옥균>
<박영효 , 서광범 , 서재필 >등 9명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갑신정변>은 3일만에 끝이나 " 3일천하" 라 한다 .
<김옥균>은 10년후 <중국 샹하이> 북하남도 의 <뚱허양행> 2층방 에서
<홍종우>의 권총 3발에 사망 하였고 <시체>는 <조선>으로 옮겨져 ,
서울 한강변 <양화진> 에서 사지를 찢고 목을베어 효수 하였다 .
( 1894 년 4월 14일 )
※ 김옥균은 “김좌진 장군”의 아버지 이며 “김두한”의 할아버지다.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김을동”이 김두한“의 딸이다, 아니다 .
논란 이 있지만 사실이라면, “증조부”가 되겠다.
밑에 사진은右부터 , 서광범 (徐光範 ) 박영효 ( 朴泳孝 ) 홍영식 ( 洪英植)
텐진조약 ( 天津條約)
이때 , <일본공사관>에 불을지르고 공사관 직원 , 거류하던 일본인 이 죽었다 하여
<조선>에서 <배상금> 10만원을 받아내고 <일본공사관 > 수축비 부담등 을
내용으로 하는 " 한성조약(漢城條約) 을 체결 했다 .
(1885년 1월 9일 , 36일만의 일이다 )
약 3개월후 ,< 1885년 4월 18일 > < 청국>과 <일본>은 화해조 로 조약을 맺었는데 ,
양국군 ( 청국 과 일본 )은 모두 철수 하기 로 하고 , 장래 <조선>에 변란 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 <청국>이나 <일본>, 한쪽이 파병될 경우 ,
그 사실을 통보 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짜로 하는 조약이
< 텐진조약>이다 . 그러나 이 <조약>으로 인하여
동학농민운동 (東學農民運動) 때 < 일본 >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 원하던 원치않던, 우린
저들끼리 맺은 조약을 이행하고 받아 들여야만 했다 .
갑오개혁 ( 甲午改革 , 甲午更張 , 乙未改革)
1894 년 ,7월부터 <대원군>의 섭정이 다시 시작되고
< 제 1 차 > 김홍집 (金弘集) 내각에 김윤식 (金允植) 김가진(金嘉鎭) 등
17명 이 군국기무처 (軍國機務處) 라는 임시 합의기관( 合意機關)을 설치하고 ,
개국기원(開國紀元)을 청국(淸國)과 대등하게 나타냈으며 , <중앙관제>를
<의정부>와 <궁내부>로 구별하고 , 육조(六曹)를 8 아문 (八衙門) ,
이를 <의정부> 직속으로 하였다 . 또 , 국왕(國王)의 권한중
< 인사권> <재정권> <군사권> 등을 박탈하거나 축소하여 중앙집권체제
(中央執權體制) 를 수립 하고자 했다 . 이 개혁(改革)은 < 3차>까지 단행됐는데 ,
<음력>을 폐기하고 <태양력>인 <양력>을 사용 하므로써 <백성>들에게 큰 혼돈
과 불편을 야기 시켰으며 , < 1896년 1월 1 일 >부터 건양 (建陽)이라는
<연호>를 사용케 했다 . 그러나 , <군제개혁 > <단발령>은
유생(儒生)들의 반개화 운동(反開化 運動)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 하지만 , <갑오개혁정신
>은 독립협회 (獨立協會)운동 이나 계몽운동( 啓蒙運動) 으로 이어 졌다 .
청일전쟁 ( 淸日戰爭)
<텐진조약>후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 시켰으나 <청국>은
원세개 (袁世凱: 위안스카이)를 <조선>에 상주 시키고 <조선>내 정치 ,
외교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며 , <청국>의 진출을 향상 시키는등 , <조선>의
<패권>을 계속 유지하려 했다 . 그러나 <일본>도 경공업 (經工業) 부분으로
크게 진출하여 , <조선>은 말 그대로 <청국>과 <일본> 의 경제이익 의 대립 (對立)
의 장이 되었다 . 이때 1894년 2월 15일 , 불행 하게도 < 외세배척 운동> 으로
<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 <조선>은 <청국>에 지원요청 을 했는데 ,
<일본>도 < 텐진조약>에 의거 , 동시에 군대를 파병 ,
<동학농민운동>을 1894년 12월 28일 , 전봉준( 全奉準)을 피체 ,
쉽게 진압한 후 , <텐진조약>을 지키지 않고 군대의 철수를 거부하며
오히려 침략야욕 을 드러내 < 조선>내 <갑오개혁>을 강요 하고 , 조청무역장정
(朝淸貿易章程)을 1895년 6월 21일 군대를 동원하여 <왕궁>과 < 4대문>을
장악 , 압력으로 < 폐기> 시키고 < 발표>를 하게 한다 .
( 사진은 피체 (被逮) 된 전봉준 (全奉準 1854 년 - 1895 년 )
1894년 12월 28일 < 전라도 순창>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다음해
1895 년 4월 23일 처형 , 효수 되었다 .
밑에 <좌측 사진>은
東學 2代 敎主 최시형 (崔時亨 1827 년 - 1898년 강원도
원주 에서 체포되어 처형 되었다 . ) ( 효수 된 < 전 봉 준 > 의 머리 )
(1894년 6월 12일 , 10수척의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38척의 선단을 이용,
오오시마 (大島義昌) 소장이 인솔하는 보병 3 .000 명 과 기마병 300 명이
<인천>에 불법 상륙 하였다 . 이걸 <혼성 여단> 이라 한다 . )
<일본>은 <조선>과 <청국>의 국교를 단절시키고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은것 처럼 , <아산만>에 주둔중인 <청국군> <고승호>를 공격하여
1 .200 명중 생존한 87명을 제외하고 모두 <익사> 시켰다 .
( 1894년 7월 25일 ,<아산만>에서 <일본군함>에 침몰되는 <청국>
<고승호> 이배는 <영국>에서 건조한 <수송선>이다 .)
1894년 6월27일 (양력: 7월 29일)새벽, 성환(成歡)전투에서 <일본군>은 80명 ,
<청국군>은 1 .000 명이 전사 했다 . 이에 양국은 선전포고 (宣戰布告)를
하고 청일전쟁(淸日戰爭)에 돌입 했다 .( 1894년 양력 8월 1 일 )
결과는 <일본>의 승리로 <1895년 4월 >< 시모노세키 조약 (下關條約)>을 체결 ,
< 요동반도>와 <대만 :펑후섬>을 <일본>은 할양받고 , <승전대가>로
<청국> 1년 예산의 2 . 5 배를 <배상금>으로 받는다 . 그러나
<러시아><프랑스><독일>은 만주로 의 진출이 막힐것을
염려해 <일본>을 압박 , 힘의 열세인 <일본>은
< 요동반도>를 반환 했는데 , <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불만이 심화되어 또다른 전쟁을 잉태하게 했다 .
(일본공사 :하나부사 花房義質 (일본공사:다께소에 신이치로 ) (일본공사 : 미우라 三浦梧樓 )
하나부사 는 <임오군란>때 간신히 목숨을 건져 <인천>에서 일본 <나까사끼> 로
도주했었다 . 다께소에 신이치로 는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얄미운 <일본공사>다 . 미우라 는 생긴대로 잔인한 인간이다 .
<명성황후>의 시해를 주도 했던 인물이다 .
아관파천 ( 俄館播遷 )
<아관파천>은 <을미사변: 1895년 8월 12일 )에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
<고종>은 심한 위협과 <일본>의 수족이 된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횡포를 모면 하기 위해 <1896년 :건양 1 년> 2월 11일 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피신한 사건 이다 .
( <러시아 공관>은 1884년 <조선>과 <러시아>의 수교에 따라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 정동>에 대규모 공사를 하여 완공 시킨 건물이다 . 그의 작품으론
<인천 만국공원 ><탑골공원>이 있는데 , <탑골공원>의 <시공책임자>는
유명한 <궁내부대신 > < 남궁억 > 선생님 이시다 .
사진은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
<갑오개혁 > <청일전쟁> <을미사변> 줄을 잇듯 쏟아지는 <악재>속에
<친일내각 > <김홍집>의 <왕권축소>와 <박탈>로 인한 <고종>의
무력감 은 자신과 <왕세자>의 신변을 보장할수 없다는 불안과
위협에 떨게 했다 , 궁궐의 공포 분위기는 <고종> 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 으며 , <김홍집>내각의 <군제개혁>과
<단발령>은 < 명성황후> 시해사건 과 맞물려 , 그 배후세력인
<일본> 에 대한 백성의 <악감정>을 극단적 으로 자극하여 전국
각지에서 다발적 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났다 .
이범진 (李範晉) 이완용(李完用) 등 < 친러파> 세력은 궁궐내 친위대(親衛隊)가
<의병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궁궐>을 비우자 자신들의 세력만회 와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불안에 떠는 <고종>의 희망에 따라 ,< 러시아 공사 >
<베베르 :Waeber>와 협의하여 <인천>에 와 있던 <러시아 수병>
150 명과 포 (包) 1문을 서울로 이동하고
<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왕세자 : 순종> 을
극비리에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관>으로 이동 (파천) 하였다 .
한 나라의 <왕>과 <왕세자>가 자국의 왕궁을 버리고 타국의 공관으로
피신 한것은 국가적인 망신이며 , 지울수 없는 치욕이 었을 것이다 .
( 러시아 공관 에서 <일본인>들에게 <환궁>할 의사가
없다고 말하는 고종 , 가운데 흰옷 )
< 러시아 공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친일내각>의 총리대신 <김홍집>
농상공부대신 <정병하 鄭秉夏> 조희연 (趙羲淵) 장박 (張博 ) 유길준 (兪吉濬) ,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도록 명(命)하고
방(榜)을 붙이니 , 그속에 <고급관료>들을 거명하여 <참수>하라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한다 . 순검(巡檢)과 분노에 찬 군중들은
대궐로 향해 퇴청 하던 <김홍집> <정병하>를 붙잡아
돌로치고 마구 짖이겨 그자리에서 <작살>하였다 .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다음날 붙잡혀 살해 됐고 ,
<유길준 ><조희연><권영진><우범선> 등은 <일본인>의 보호하에
일본으로 망명 하였다 . 잠적했던 외무대신 < 김윤식>은 결국 체포되어
<제주도>로 종신 <유배> 당하였다 .
( <일본인> 들이 <러시아 공관> 앞에서 <독립국가>의 체면을
생각해 조속히 <환궁>하라고 위협과 요청을 반복한다 )
이로써 <친일내각>은 사라지고 또다른 <친러 ><친미파> 세력으로 내각을
구성 했는데 , 박정양(朴定陽) <이완용> 조병직( 趙秉稷) 이윤용(李允用)
윤용구 (尹用求) 이재정(李在正)등 이다 . 새내각은 <의병항쟁>을
불문에 붙이고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 내각제도 를 구제(舊制)인
<의정부>로 환원 하였다 . <친일정권>하 의 일본식 개혁은
완전히 사라짐 으로 <일본>의 지지기반 도 사라지고 말았다 .
그러나 <일본>은 <독립국가>의 체면을 생각해서 조속한 <환궁>을
간곡히 요청 했지만 <고종>은 " 불안과 공포가 도사린 궁전 보다는 "
러국( 露國) 공관의 일실(一室)이 안전하니 환궁 할수 없다 " 고 거절했다 .
( <고종>이 기거하던 <러시아 공관> 의 침실 . <고종>은
이침실을 1년 가까히 사용 하였다 .)
나약한 <조선정부>의 <보호국>이 된 <러시아>는 본격적인
수탈정책 을 폈는데 , <압록강 연안> 과 <울릉도 >< 삼림채벌권 >,
경원(慶源) 종성 (鐘城)의 <광산 채굴권 > 경원전신선 (慶源電信線)을
<시베리아 전선에 연결하는 권리 > 인천 월미도
<저탄소설치권> 등 경제적 이권을 차지 했다 . 이에 구미열강
(歐美列强)들도 동등한 권리를 요구해 경인(京仁)
경의선(京義線)철도 부설권 등 중요 이권을 값싼조건 으로
외국에 넘겨 줘야만 했다 . 준비없이 <늑대> 피하다
<호랑이> 를 만난 격 이 되고 말았다 .
< 아관파천> 1년간은 <러시아>의 강한 영향력에 놓여 , 모든게 <러시아>식으로
개편 됐으며 , <국가재정>도 <러시아> 재정고문에 의해 농단되고 ,
알렉세예프 (K. Alexeev)탁지부 고문은 <탁지부 대신>처럼 행세를 했다 .
1897년 2월 25일 , <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력 에서 벗어 나라는
내외의 압력같은 권유에 따라 < 경복궁>이 아닌 ,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 으로
환궁하고 <국호> 를 " 대한제국( 大韓帝國)으로 <연호>를 건양에서
<광무 (光武)>로 고치니 <친일내각>의 잔재를 털어 내려는듯 , 또한
<러시아 >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의지로 <황제즉위식 >까지
거행하여 <독립제국>임을 만 천하에 선포 하였다 .
(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 환구단 >
1897년 10월 12일 . <환구단>은 <조선조> 태종 이래 왕족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
유서 깊은곳 으로 <고종>원년 1864년 에 <환구단>이 건립 되었다 .
그러나 <일본>은 무지막지 하게 헐어 버리고 1914년 이곳에
< 조선호텔>을 짓고 < 환구단>의 상징을 말살 시켰다 .
( 황제 에 즉위한 < 고종 황제 > )
(고종황제 의 행차 , 호위하는 병사들이 이채롭다)
1897년 <고종>과 대신들 왼쪽부터, 이정노 (李正魯 ) 심상한 (沈相漢)
김윤식 (金允植)김성근 (金聲根) 이용원(李容元) 김병익 (金炳翊)
민종묵 (閔種默) 서정순 (徐正淳)이주영 (李胄榮) 김영전 (金永典)
( 신식군대 와 교관 ,< 아관파천 > 이전엔 <일본교관>이 었으나
<아관파천> 후 <러시아 교관>으로 바뀌었다 . 군대뿐 아니라 ,
<정부>가 <러시아>식으로 바뀌었다 .
( 이사진은 < 대한제국>을 선포 한후<고종황제> 를 환호하는 <대안문>앞 군중들,
<대안문은 지금의 (대한문)> 1897년 2월 20일 , <고종>이 명예궁
(明禮宮 : 지금의 덕수궁 ) 으로 이어 (移御 )하여 옛 이름인
<경운궁 >으로 부르게 하고 <대안문>도
<대한문 >으로 개칭 했다 .
( <청일전쟁> 때 <일본>은 <청국군> 포로들을 < 조선군대> 를 차출하여
감시 관리 하도록 부려 먹었다 . )
무엇때문에 <일본>의 승리에 주인인 <조선군대> 가 부역을 해야 하는가 ?
이때의 정부 <고위대신>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 결핍과 확고한
사상확립이 부족 했던것 같다 . 어쩜 , 지금도 이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것 같아 마음속 한구석이 씁쓸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