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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스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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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2일 부활절 후 두 번째
성경 ; 행3:12-21, 요일3:1-8, 눅24:36-48
제목 ; 그에게 복종하면 죄 짓는 일이 없다
모든 일에는 양면성(兩面性)이 있습니다. 이쪽 편에서 보면 좋은
일이라도, 저쪽 편에서 보면 좋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번 선
거결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당에서는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었기
때문에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띠며 좋아하고 있지만, 야당은 기대치
이하로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심히 실망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나 휴일에 비가 내리면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아
주 근심하면서 걱정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여름에 무더운 날
씨가 계속될 경우, 큰 유익을 보는 사람도 있거니와, 그 무더운 날씨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겪는 사람도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흔히들, 욕심은 나쁘다
고 말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나친 욕심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
에게 욕심이 없으면 아무 쓸모없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욕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의욕(意
慾)입니다. 의미가 있는 욕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지나친 욕심을 과욕(過慾)이라 하고, 쓸데없는 없는 욕심
을 허욕(虛慾)이라고 하면서 경계(警戒)하지만, 그러나 의욕은 반드
시 갖고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에게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아남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없었다면, 과연 이 자리에 나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의심은 나쁜 것입니다. 하지만, 우
리 인간에게 의심이 없었다면, 인류문명은 거의 발전하지 못했을 것
입니다. 말하자면,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인류의 문명이 발전할
수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만유인력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인
슈타인의 ‘상대성원리’도 결국은 시공간(時空間)에 대한 의심에서 비
롯된 발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의심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의심도, 우리가 바
르게 잘 사용하면, 우리에게 아주 큰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물론, 의심이 습관적인 생활로 굳어지게 된다면, 본인 자신에게도 아
주 큰 불행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런고
로, 의심이 습관화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제주도로 단체여행을 가면, 흑돼지고기를 전문적으로 취급
하는 식당에 가서 그 고기를 시식하는 기회를 한 번쯤은 꼭 갖게 됩
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에 한 번, 그리고 김포지방에서 한 번,
이렇게 두 차례 여행을 가서 흑돼지고기를 먹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방송을 보니, 우리가 그때 먹은 흑돼지고기는 거
의 99% 이상 가짜일 가능성이 많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냐하면, 방송국에서 제주도의 여러 흑돼지 전문 음식점을 취재한 결
과, 단 한 곳도 진짜 흑돼지고기를 취급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도 ‘제주도 흑돼지’를 취급하는 전문음식점이 많은데, 순수
하게 제주도 흑돼지를 취급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고 하는 것이, 그
날 방송진행자의 말이었습니다. 물론, 진짜 제주도 흑돼지고기를 취
급하는 곳이 틀림없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방송국에서 취재한 결과, 순수하게 제주도 흑돼지고기만을 취급
하는 음식점은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더욱 가관이 아닌 것은, 보통 돼지고기보다 흑돼지 고기값이 더
비싸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흑돼지고기를 취급하는 전문점
에서는, 일반돼지고기를 흑돼지고기인 것처럼 속여서 팔뿐만 아니라,
돈을 더 받고서 고기를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음식
점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일반돼지고기를 흑돼지 고기인 줄로 속는
것뿐만 아니라, 거기에다가 돈을 더 내고 먹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일반돼지와 흑돼지의 고기 맛이 거의
비슷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차이점을 찾을 수
없다고, 진행자는 말했습니다. 그러니, 일반돼지고기를 흑돼지고기인
줄로 알고 먹었다고 해서, 그다지 큰 손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때, 먹고자 하는 음식에 대해서,
그 진위 여부를 한 번쯤 의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아무 의심
도 하지 않고, 무조건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 별 문제는 없을 것입
니다. 하지만, 먹어서 우리 몸에 큰 해가 되는 음식이라면, 무조건
맛있으면 된다는 생각도 그다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심이 무조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의심
이 필요하고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무조건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은 아닙니다. 물
론, 성경의 모든 말씀을 전혀 의심을 하지 않고 완전히 믿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은 믿음의 소유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일단 의심을 갖고 성경을 보는
것이, 결코 불경건한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믿
어지지 않는데도 믿는 척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볼 수 있습니
다. 문제는, 의심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케도냐에 있는 베뢰아에 가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마음이 활짝 열려 있어서, 바울
의 설교를 기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르쳐준 그
말씀이 진실인지 아닌지 알고자, 그들은 날마다 성경을 연구했다고,
사도행전 17장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말씀을 무조건 믿기보다는 의심을 가지고 읽
되, 그 의심이 풀릴 때까지 파고들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우
리에게 있어서 ‘부활에 관한 믿음’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고로, 이
부활의 진리를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과연, 주님의 부활이 사
실인지 아닌지, 우선 적극적으로 의심부터 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예
수를 믿는 우리에게 있어서 부활이 왜 중요한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를 믿기 이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죽은 자의 삶’
을 청산하고, 진실로 확실한 부활의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부활을 모르고 사는 것은, 마치 장사하시는 분이 물건
값을 모르고 장사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지 아니면, 술맛을 모르
고 술을 마시는 사람에다가 비유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장사하시는
분이 물건 값을 모르고 장사하게 되면, 결국에는 망하는 길밖에 달
리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술 마시는 사람이 그 술맛을 모르고 술을
마시는 것은 진정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이 부활을 모르고 산다
는 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진리와 생명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모르는 세상 사
람들처럼,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슬픈 인생을 마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
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예언한 구
약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도 했습니다. 그때, 두 제
자의 눈이 열려서, 자기들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분이 바로, 스승이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두 제자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습니
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사
실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이 한참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때, 그곳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잘 있었
소?”하고, 제자들에게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마치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착
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태도를 보시고 다음과 같
이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무서워하는 거요? 그리고 어째서 그
처럼 의심을 품고 있는 거요? 이제 내 손과 발을 살펴보시오. 그리
고 나를 한 번 만져보시오.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당신들이
보는 것처럼, 이렇게 살과 뼈를 가지고 있지 않소?”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손을 펴서 못 자국을 보여주시고, 발
에 나 있는 상처도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은 그제서야 기
뻐하면서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한편으로는 부활에 대한 의
심을 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곳
에 먹을 것이 좀 있는지요?”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구
운 생선 한 조각을 들어서,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내가 전에, 당신들과 함께 있을 때, 모세
와 예언자들과, 또 시편에 기록된, 나에 관한 모든 것이 반드시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나지 않소?”하고 말씀하신 다음,
그들의 마음을 열어서 성경의 말씀들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소. 그리스도가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었다
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기록된 말씀이오. 또한, 내게로 돌아오는 사람은 모두, 그 지은
죄를 용서받는다는 이 구원의 도리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될 것이오. 당신들은 이런 예언들이 이루어진 것을
목격한 증인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할 때
에, 그 죽음의 세력이란 죄와 어둠의 세력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불
평과 원망, 거짓과 사술, 의심과 불신을 비롯한 모든 죄의 요소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유익과 편리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악한 세력들을 가리켜서 ‘죽음의 세력’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을 허무하게 만드는 죽음의 세력, 그
본질 자체가, 주님께서 물리치셔야 했던 가장 근본적인 악한 세력입
니다. 아무튼, 우리로 하여금 사람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드는 모
든 악한 세력들, 다시 말해서 우리를 허무와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그 모든 악한 세력과 싸워서, 주님은 승리하셨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부활의 삶이란, 앞서 말씀드린 것들과 반대 개념을 가
진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허무와 파멸의 길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생명의 주를 열심히 따라가는 것이 부활의 삶인 것
입니다. 그리고 좌절과 절망과 한숨이 아닌, 소망과 기쁨과 꿈을 갖
고 살아가는 것이 부활입니다.
요즘 ‘개그콘테스트’에서 ‘용감한 녀석들’이라는 코너가 진행되고 있
습니다. 신보라와 박성광과 정태호가 담당하고 있는 코너입니다. 그
런데, 이들이 처음 도입부와 마지막 끝날 때에 반드시 함께 복창하
고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
로’
여기서 ‘한숨과 걱정과 포기’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죽음의 세력
이고, ‘함성과 열정과 죽기 살기로 사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부
활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들이 기독교인들이어서 ‘부활
의 정신’을 노래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부활의 삶이란,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되,
내 욕심에 따라 이기적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
는 뜻에 따라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면, 다시 말해서 내 욕심
을 채우고자 이기적으로 살 경우, 부활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생명의 길이 아닌, 파멸과 죽음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
적 사건이 보도되고, 죽음과 부활의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은 자의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름다운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적인 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척하는, 비겁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이 말씀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자신
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잘 몰라서 예수를 죽이는데 동참했다는 것입
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된 목적을 알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이기적인 욕심을 품
고 있었기 때문에, 주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회개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베드로는 역설하고 있
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 줄은 모르고 자기 이익만 챙길 줄 아는,
그런 부끄러운 인생을 청산하고, 이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
고 헌신하며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부활의 예수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
전 미문(美門)앞에 앉아 구걸하면서 살던 그 앉은뱅이는 ‘예수를 믿
는 믿음으로 온전하게 되었다.’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사실, 앉은
뱅이는 베드로에게 돈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에
게 돈 대신에 구원과 건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앉은뱅이가 예
수를 믿음으로써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
으시오!”라고 외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앉은뱅이는 예수의
이름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건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보다는 돈을 더 의지
하거나 세상 권력을 더 의지할 경우, 앉은뱅이 신앙을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고, 오직 자기중심
으로만 생각하면서 살 경우에도, 앉은뱅이 신앙을 벗어나지 못합니
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살지 못하고 자기중심으로 살
경우에는 불쌍한 거지 신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우선, 우리는 그 무엇
보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예수를 화목제물로 삼으셔
서, 우리를 죄와 죽음 가운데에서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자, 그 아들
예수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
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었는데, 어찌 악한 마귀의 자
녀가 되어 그 심부름꾼 노릇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사도 요한은 ‘우리가 주님과 가까이 살면서 그에게 복종하면, 죄
짓는 일이 없게 된다(요일3:6)’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세상
의 썩어져서 없어질 것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
과 악한 욕망 때문에,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마귀에게 순종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요한은 다시 말하기를 ‘사단은 태초부터 계속
죄를 저질러 왔다. 그래서 이러한 악마의 소행을 파멸시키려고, 하나
님의 아들이 오신 것이다.’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마귀에게 속한 자다(요일3:8)’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두 말할 것도 없이, 부
활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무섭고 두려워서 주
님을 부인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눈앞의 이익과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 하나님 대신에 세상을 택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언제나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인생을 살아가도
록 힘쓰고 노력함으로써, 부활의 삶을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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